소설리스트

칼의 귀신-240화 (240/432)

240화 - 제44장. 자천은 다시 창천이 되었으나 (2)

* * * *

당혁수.

젊었을 한 때는 사천 분지의 광활한 대지가 발아래 있는 것처럼 느낄 때가 있었다. 그러나 동시에 정파 전체의 봉문 상태가 가져오는 부자유(不自由)에 대한 울분이 가득 차 있기도 했다.

그나마 나았던 점은 사천이 중원의 관점에선 변방의 고립무원(孤立無援) 취급의 땅이었기에 아미산에서 연을 맺은 아름다운 반려와 함께 조용히 여행할 여유가 남은 곳이라는 점이었다.

불혹을 넘어서선 가문의 가주가 되고 운남 사혈주라는 오랜 숙적과 소규모 마찰들에 직접 대응하기 시작하면서는 진정 강해져야 한다는 열망을 불태웠다. 또 주백자라는 존재와 마주하면서 겸양할 줄도 알아야 함을 깨달았다.

3년 전, 꾸준히 세를 불렸던 사혈주가 사천 땅을 마음대로 짓밟으면서 북상해서는 사천 군소방파들을 유린하는 걸 물리치기 위해 과감히 수십 년 닫혀있던 당문의 문을 열어버렸다.

64세의 노년기.

그때 그의 마음을 가득 채웠던 건 정파의 일원으로서 가져야 할 의협의 마음이었다.

3년 후인 67세가 된 지금.

이젠 당당히 천수기륭의 명성을 드높이며 사천무림의 안전을 담보할 수 있는, 당혁수라는 이름은 하나의 상징처럼 되었음을 인지하고 있었다.

그 책임감을 무한히 느꼈기에 숙적인 사혈주와 독수흉인 서문질의 움직임을 예의주시하여 기꺼이 당문에서 떠나 최전선이 될 수 있는 아미파의 수호를 신경 썼던 것이다.

하지만, 그는 좀 더 냉정해야 했다고 자책하고 있었다.

사천 무림에 외부로부터 유입되어야 할 정보들은 마교의 포위망에 의해 닫혀있었고 어떤 적들이 어떤 규모로 이 사천 땅에 위험인자로서 그 영향력을 키워가고 있었는지 알지 못했다.

그 무지의 영역에 대해 경계해야 한다는 의식을 하지 못한 대가는 처참했다.

아미산에서부터 성도까지, 그가 낼 수 있는 최대의 속력으로 달려왔다.

아직 성문에 이르기도 전에 그의 앞을 가로막고 있는 자색 빛깔의 환막.

파즈즈즈!

손을 대자 강하게 저항한다.

몸을 들이밀자 밖으로 튕겨낸다.

거대한 공력을 전면에 일으키면서 환막을 헤집고 들어가 성문까지 이르자 저항이 사라졌다. 아니, 잠깐 그렇게 느꼈을 뿐 감각의 혼란을 감지하는 순간 그는 어느새 환막 밖으로 되돌려진 상태였다.

“으아아아!”

삼양귀원신공 구중양환경(九重陽煥勁).

당문의 정교한 기예 속에서 광포하기 그지없이 광역을 아우를만한 기공술을 펼치는 법이 잘 없음에도 젊었을 때 치기로 개발한 기공의 절초.

양강의 기운이 응집된 기운이 공기를 불사르며 환막을 때렸다.

콰아아아아!

타는 듯한 열기로 표출되는 강대한 공력이 그대로 환막에 충돌했다.

고열의 폭주가 일어나며 근처에 있던 수풀은 수분이 증발하여 말라비틀어지고 얼마 전까지 폭우를 맞아 질퍽했던 지면이 가뭄을 맞은 듯 쩍쩍 갈라졌다. 시야를 가리고 온몸을 화끈거리게 할 정도로 엄청난 수증기가 일어날 정도의 공력이었지만, 환막은 격렬한 파문만을 대동한 채 그 문을 열지 않았다.

환도강마대진계, 그것은 안과 밖을 완벽하게 갈라놓는 결계(結界)와도 같은 것.

‘허락되지 않은 자 들어올 수 없다’라는 그 술칙(術則)의 힘을 당혁수에게 여실히 드러내고 있었다.

털썩!

당혁수가 무릎을 꿇었다.

처음 눈앞의 환막을 발견했을 때만 해도 대수롭지 않게 여겼는데, 난생처음 느끼는 무력감에 자괴감이 들 지경이었다.

‘내가…… 이 내가…… 정녕 아무것도 할 수 없단 말인가?’

새하얗게 센 머리카락과 수염이 바람에 흩날리는 모습은 보기에 몹시 처량하다. 그러나 환막 너머, 성벽 너머로 보이는 바닥에 즐비한 시체들, 어렴풋이 들려오는 비명과 칼부림 소리들을 느끼며 떨리는 눈빛만큼 처연하지는 않았다.

당혁수가 고개를 푹 떨구었다.

두 손도 땅을 짚어 그에 의해 말라비틀어진 흙더미만 움켜쥔다.

두 눈으로 보았던 참혹한 풍경이 지면으로 떨어진 멍한 눈빛 속에 그가 사랑하는 당문의 모습과 겹쳐져 아른거리기 시작했다.

“가야 하는데…… 막아야 하는데…… 내 아내, 내 아들, 내 식솔들…….”

힘없는 넋두리가 공기 중에 떠돌았다.

충만한 자신감으로 예순 평생을 살아올 수 있었던 당혁수라는 한 사람의 존재가치가 단 하루 만에 아무것도 아니게 되어버렸다는 현실을 이대로 수용하고 마느냐 혹은 전력을 다해 부정하느냐?.

악다문 입에 턱 근육이 불거지고 다시금 고개를 드는 그의 몸은 일어날 듯 말듯 움찔거리며 반응했다.

뭐라도 해야 한다는 의지와 소용없다는 현실적인 자각이 끊임없이 그를 시험하고 있었다.

‘……아미타불! 이 당모에게 단 한 번 기적이 내릴 기회를 주신다면 지금, 이 환막의 결계를 치워주십시오!’

* * * *

청성산에 펼쳐진 환도강마진계는 3년 전 천무방을 상대로 펼쳐진 그것과 같았다.

환도종 마교도인 술자들을 근원으로 삼아 환술의 결계를 펼쳤고 운 나쁘게 그 안에 들어가게 되어버린 청성파의 도사, 속가제자들은 모두 싸늘한 주검이 되어버렸다.

환막의 색채가 성도처럼 짙게 나타나진 않았어도 멀리서 그 위치를 바라보면 그 영역은 꽤 또렷하게 눈에 들어왔다.

당연히 청성산의 장문인 하송진인과 청성칠자도 이를 발견하고 상황을 파악하기 위해 제자들을 파견했었다.

보이지 않는 벽은 알 수 없는 반발력으로 지나갈 수 없었다. 괜히 달려들다가 이따금 갑자기 안에 빨려 들어가더니 그대로 눈앞에서 피를 뿜으며 쓰러지는데 적들은 대체 보이지도 않았다. 수색하는 중에 어쩌다 무리에서 떨어지게 되면 어김없이 비슷한 꼴을 눈앞에서 당하게 돼버리니 이젠 섣부르게 가까이 다가가지도 못하게 되었다.

청성파는 즉각 제자들을 본산으로 불러들였다.

환진이 깔렸던 그곳은 사천 분지와 성도 쪽을 바라보는 전산(前山)의 산문이 있기도 한 지점이었다. 산림 위로 자색 빛깔의 아지랑이가 남북으로 길게 이어져 결계의 벽을 이루고 있는 듯이 보였다.

올라온 보고들을 받은 하송진인이 단박에 적을 특정했고 누구도 이견이 없었다.

“분명 마교도의 짓, 감히 청성파의 출행을 차단하려 들다니. 무엄한 자들인지고!”

하송진인은 크게 분개했다.

조금 전 성도에 정체를 알 수 없는 반구형 환진이 형성되었다는 보고를 듣고 막 제자들을 규합하여 하산하려는 참이었는데 길이 막혀버린 것이다.

최근 세속에서 일어난 내부 문제로 인해 지난 며칠간 대부분 제자를 훈계하느라 청성산에 불러모은 상황에서 이런 갑작스러운 일이 불안감을 일으키고 있었다.

하송진인이 청성파 최심부 정상에 있는 노군각(老君閣)에 청성칠자를 모아 의논하기 시작했다.

“이 일을 어찌 해석해야 하느냐?”

청성칠자의 맏이인 건현자(乾現子)가 조심스럽게 입을 뗐다.

“전대미문의 현상입니다. 성도성은 자색의 알 수 없는 기운에 뒤덮여 그 내부가 여기 노소정(老霄頂)에서도 보이지 않을 지경입니다. 그런 상황에서 이곳 청성산에까지 마치 벽을 치듯……. 말씀대로 분명 마교놈들의 짓이 틀림없습니다.”

“아마 환도마종이라 불리는 놈들의 짓이겠지요. 이런 일을 벌일 만한 가능성은 그놈들밖에 없습니다.”

둘째 곤중자(坤重子)가 계속해서 생각을 보탰다.

“사천 최대의 도시와 성을 저렇게 통째로 덮을 정도면 이곳 청성파 자체는 그보다 규모가 작아서 똑같이 덮을 수 있었을 텐데. 하필 저렇게 벽을 세운 형태로 형성된 건 무슨 이유일까요?”

“우리가 지원 나가는 걸 막기 위해서?”

“환도마종이 관과 백성들까지 건드릴 줄은 몰랐지만, 어쨌든 주목표는 당문이 틀림없을 것이다.”

넷째 상명자(想明子)와 일곱째 광심자(廣心子)가 의견을 주고받았다.

“본파의 건곤신공(乾坤神功)은 현문정종의 내공심법인만큼 환각이 쉽게 통하지 않을 테니 일부러 저희가 아니라 당문을 노린 게 아닐까요?”

“마냥 그렇게 생각하기엔 당문은 당혁수가 있으므로 더 어려운 상대일 수도 있다. 어쩌면…… 우리가 미처 모르는 엄청난 일이 저 아래에서 벌어지고 있을 수도 있어…….”

뒤이어 의견을 보태는 두 사람은 여섯째 장선자(長善子), 다섯째 장녕자(長寧子)였다.

칠자 중 여섯 사람이 이런저런 얘기들을 몇 마디씩 더 보태는 동안 심각한 얼굴을 한 채 가만히 듣고 있던 정평자가 의아했는지 하송진인이 직접 그를 집어 불렀다.

“셋째는 어찌 생각하느냐?”

정평자는 폭우가 시작되기 전날 면주에서 겪었던 일을 떠올리고 있었다.

당문 소가주를 노린 사혈주의 기습도 쉽게 넘어갈 평범한 사안이 아니었지만, 창천맹에 의해 보내졌다고 하는 진도건 일행들과 주고받았던 이야기들이 하필 이 시점에서 다시금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이미 그때의 대화 내용을 청성산에 돌아오자마자 모두에게 전파하였으나 어쩌면 여전히 경각심을 갖지 못하고 있을지 모른다는 우려가 그 떠오른 기억의 저변에 깔려있었다.

“청성산의 입구를 틀어막고 환진 속에 숨어 무엇을 노리느냐…….”

정평자가 중얼거리자 하송진인이 다시 한번 그를 불렀다.

“셋째야, 혼자 생각하지 말고 크게 얘기해보아라.”

“이건…….”

정평자는 한참을 뜸을 들이다 더더욱 심각해진 얼굴로 고개를 들었다.

“틀림없습니다, 사부님. 창천맹의 군사가 예견했던 사천 무림의 전쟁이 이미 벌어지고 있는 게 틀림없습니다. 청성산문을 막은 저 환진은…… 어쩌면 직접 우리를 노리는 것일지도 모릅니다.”

하송진인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여기 청성파를? 아니, 당문과 아미파가 하루아침에 무너진 게 아니고서야. 그들 뒤에 가려진 이곳을 공격한단 말이냐? 사혈주는 아미파가, 환도종이나 광혈종은 당문이…… 아니, 어쨌든 그만한 규모의 인원이 이동한다면 개방이 진즉에 정보를 줬을 텐데. 우리도 충분히 감시할 수 있었고 말이야.”

“제자들을 죽인 저 산 아래 환진엔 적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하지 않았습니까? 만약 놈들의 몸을 숨기는 환술을 전혀 눈치채지 못하고 있었다면…… 동시다발적으로 기습하는 일도 불가능한 일이 아니지 않겠습니까?”

정평자의 말에 좌중에 침묵이 내려앉았다.

듣기에 따라 너무 허황된 말이었는데 대다수는 지금 정평자가 마교의 역량을 지나치게 과대평가하는 게 아니냐는 의문을 품기도 했다.

“하하! 사형, 아무리 마교의 세가 크다고 하더라도 그만큼 고수들이 썩어날 정도로 많겠습니까? 놈들도 창천맹을 비롯한 중원의 세력을 상대하느라 전력을 함부로 쓸 수 없을 텐데요? 지난번 말씀처럼 사혈신마는 당가주가, 환도신마는 그 진도건이란 자의 일행이 맡지 않겠습니까? 백제성에서 구룡문이 깨졌다는 소식은 들었으니 염황신마와 광혈신마가 모두 넘어온다 가정해도 검림의 천하제일검 강정학과 천하오절 한 사람인 안효철도 쫓아와 놈들을 붙잡을 텐데. 이들 외에 더 넘어온 마종이 없다면 무슨 수로 청성파를 각개격파하려 든단 말입니까? 어디 저희가 호락호락한 군소방파는 아니지 않습니까?”

기억력이 좋고 생각도 밝아서 상명자란 도호를 받은 만큼 그의 말도 충분히 논리적이었다. 그는 착실하게 정평자가 전했던 말을 기억하고 셈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덕분에 다시 생각을 되짚어볼 수 있었음에도 정평자는 여전히 표정에서 불안을 숨길 수 없었다.

“아니……, 아니야……. 이건 심상치 않아. 저런 환술과 환진은…… 우리가 가진 상식의 궤를 넘어도 한참 넘었어.”

정평자가 계속 불안해하는 원인의 핵심은 바로 거기에 있었다.

상식에 반하는 현상.

장대한 대지를 아우르는 환진을 바라본 순간, 아주 강력하게 경각심을 틔워냈어야만 했다는 생각이 지금 그의 머릿속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하송진인과 청성칠자가 정평자의 불안을 모두 수용하지 못하고 서로의 눈치를 볼 때였다.

“저, 적! 마교가 나타났습니다!”

밖에서 들려온 외침에 하송진인과 청성칠자가 부리나케 노군각 밖으로 뛰쳐나갔다.

급히 나와서 살펴보니 이백여 명의 제자들이 경내 곳곳에 모여 잔뜩 긴장한 모습으로 있었는데 어디서도 전투가 벌어지는 소리는 들려오지 않고 있었다. 잠깐 멈칫했지만, 그들은 곧 그 이유를 알 수 있었다.

“아하하핫!”

기분 나쁜 웃음소리가 노소정에 올려 퍼졌다.

청성파는 노소정 봉우리 정상에 세워진 노군각을 기준으로 하여 북동쪽의 능선을 따라 도관이 세워져 있었다. 그 경내의 입구 부근에 세워진 자운각(慈雲閣) 옆에서 한 미남자가 미소 띤 얼굴로 계단을 올라오고 있었는데 그의 손엔 청성파 도인 하나가 뒷덜미를 붙들린 채 끌려 올라오고 있었다.

문제는 붙들린 도인의 몸이 축 늘어졌고 바닥에 질질 끌리는 다리를 따라 혈흔이 뒤로 이어지는 것, 그리고 미남자가 든 검에 선혈이 묻은 거로 봐서 죽은 게 틀림없어 보였다.

“어디 보자! 이보게 도사 양반, 이제 청성파가 모두 한자리에 모였다고 봐도 무방한가?”

“웬 놈이냐?”

광심자가 소리치자 미남자가 죽은 도인을 손에서 내려놓고 검을 탁탁 털었다.

그 순간 그를 중심으로 엄청난 투기가 뿜어져 나오며 200여 명의 청성파 전체에 무형의 압력을 선사하기 시작했다.

“자! 어디 발버둥 쳐봐라. 청성파가 멸문하는 바로 오늘, 특별히 가장 마지막에 죽는 놈에게 나의 이름 석 자를 그 귀에 똑똑히 새겨 저주하며 죽을 수 있도록 해주겠다.”

홀로 나타나 청성파의 멸문을 입에 담는 자, 그는 바로 지운천이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