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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의 귀신-238화 (238/432)

238화 - 제43장. 환도강마대진계(幻道降魔大陣界) (6)

진윤지는 신음을 흘리는 야율균은을 부축하여 당한솔의 앞에 데려다 놓았다. 그리고 이미 너덜너덜해진 옷가지를 풀어헤쳐 복부의 변색이 일어난 살결을 바깥으로 드러냈다.

당한솔은 급히 침통을 열고 침을 꺼내어 상처 부위에 놓기 시작했다. 그 사이 진윤지는 해독단을 꺼내 손안에서 으깨고는 야율균은의 입안에 털고 물도 한 모금 흘려보냈다.

“아아……! 침으로는 한계가 있어요, 어머니. 내공으로 당장 침투한 독기를 제어해야 하는데 어떻게 합니까?”

당한솔이 절망스러워하며 한탄했다.

그는 다리의 고통마저 잊을 만큼 야율균은의 상태를 살피고 있었지만, 침술만으로 독 기운과 내상, 끊임없이 목숨을 갉아먹는 마공의 특질까지 모두 다스리는 건 불가능한 일이었다.

진윤지는 그래도 큰 내상 없이 멀쩡한 편이었지만, 그렇다고 직접 야율균은의 내기에 간섭해 다스리기엔 그녀의 수양이 충분치 않았다. 자칫 상황을 악화시킬 수 있을뿐더러 운이 따르지 않는다면 주화입마에 빠질 수도 있는 일이었다.

그녀도 당황하여 주변을 둘러보았다.

도움을 구할 사람이 있는지 찾기 위함이었다.

카캉!

날카로운 금속성이 고막을 찌르듯 울려 퍼졌다.

조금 전에 서문질과 천혈강시를 상대로 온몸에 혈광을 두르며 맹렬히 싸우는 진도건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천혈강시가 장내에 나타나고 진윤지가 도착할 무렵에 진도건도 때마침 나타나 서문질과 천혈강시를 상대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의 검술과 무공은 실로 경이로웠다. 사혈신마라는 절대고수와 천혈강시라는 불가해의 존재를 동시에 맞상대할 수 있는 건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런 감탄도 잠깐뿐 주변엔 그의 다른 동료들이 더 나타나지 않고 있고 당혁수의 도움도 기대할 수 없었으니 역시 그의 시선을 자꾸 당기는 건 진도건뿐이었다.

“진 공자! 당신의 동료가 죽어가고 있어요!”

진윤지는 자신도 모르게 그를 향해 목청껏 소리 높여 부르짖었다.

두 절대고수를 맞상대하는 그에게 여유 따위 있을 리 만무함에도 지금, 이 순간 기댈 수 있는 건 오직 진도건뿐이라는 막연한 기대는 절망 속 유일한 빛줄기였다.

슈슈슈슉!

카카캉-!

그 순간이었다.

진윤지는 일순간 눈앞이 핏빛 광휘로 가득 차는 경험을 느꼈다.

집약된 공간에 휘몰아치는 혈검기에 충돌한 서문질과 천혈강시가 일제히 좌우로 나가떨어져 버렸다.

갑작스러운 상황에 어안이 벙벙해질 때.

“클클클! 소마(甦魔)의 기운에 잠식되고 있군. 이 상황에선 내가 아니면 죽음을 피하기 어려웠을 거야.”

가까이서 오싹한 음성이 들려와 진윤지가 깜짝 놀라서 옆을 보았다. 거기에 진도건이 어느새 야율균은의 곁에 와 앉아 있었다.

“시끄럽다, 서둘러.”

“석찬(夕餐)을 먹기도 전에 후식을 먹는 기분이야.”

진윤지는 깜짝 놀랐다.

두 번째 음성은 분명 그가 기억하는 진도건의 것이었는데, 그 앞뒤의 음성은 마치 뇌를 관통하듯 들어오는 묘한 울림을 가진 귀곡성처럼 들렸다.

그것은 바로 혈마가 흘려보내는 혼(魂)의 음성이었다.

마기로 충만한 이 환진 속에서 혈마의 의식이 살아있기에 가능한 현상이었다.

진도건이 야율균은의 복부에 손을 대자 붉은 기운이 넘실대기 시작했다. 그리고 정말 빠른 속도로 야율균은의 몸속에 침투한 서문질의 마기와 독기를 모두 빨아들였다. 피부 위를 덮은 검은 사색(死色)도 먹구름 걷히듯 빠르게 대부분 사라졌다.

진도건은 잠깐 인상을 찡그리며 관자놀이를 만졌다.

서문질의 지독한 독기 때문이었는데 다시 혈마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엄살 그만 피우고 어서 석찬 먹으러 가자. 저 딱딱한 몸뚱어리를 가진 산 것 같지도 않은 놈이 아주 독특한 맛이야.”

“좀 조용히 할 수 없나?”

진도건이 중얼거리면서 일어났다.

당한솔은 이상한 귀신의 소리가 정상적인 진도건의 목소리와 함께 진도건에게서 들려오고 있으니 혼란스럽기는 그지없었다. 그러나 지금 상황에서 전혀 기대할 수 없었던 도움으로 야율균은의 가빴던 호흡이 차분해지자 이내 기쁨에 찬 표정이 되었다.

“고맙습니다, 진 대협!”

진도건이 가벼운 목례로 신뢰의 눈빛을 당한솔에게 보냈다. 그리고 그들에게서 떨어져 걸으면서 장내를 훑어보았다.

무너진 건물과 외벽 등에서 돌무더기를 치우며 일어나는 서문질과 천혈강시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그 둘과 진도건의 충돌이 많은 사람의 이목을 끌게 하면서 환도종과 당문의 싸움에 정체가 생긴 것도 확인했다.

한눈에 봐도 당문이 입은 피해는 상당했다. 여기저기 그들의 시체가 나뒹굴었고 부상자들이 신음하고 있었다. 그런데도 아직 싸울 수 있는 자들이 삼삼오오 모여서 수적 열세에도 불구하고 저항을 멈추지 않고 있으니 그 결연이 대단했다.

사혈신마 서문질과 그에 대등한 무력을 보여주고 있는 천혈강시.

“기억난다.”

서문질이 진도건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몸에 묻은 먼지를 툭툭 털어내면서 잠시 천혈강시 쪽을 흘끔 보고 다시 진도건에게 시선을 돌렸다.

느닷없이 나타나 엄청난 검공을 쏟아냈기에 거기에 대응하느라 그렇기도 했고 또 중원인의 얼굴을 하고서 적발적안을 가진 이질적인 모습이 관심이 쏟아지기도 했다. 그러나 근본적으로 서문질은 진도건이 누군지 또렷하게 기억해냈다.

“3년 전쯤 종남산 기슭에서 일월신마가 상대했던 놈.”

후일담은 뜨문뜨문 들어 알고 있었지만, 서문질은 잠깐뿐임에도 직접 본 그때의 인상이 소문으로 과장된 인상보다 기억에 더 선명하게 남아있었다.

진도건도 그를 대략적이나마 기억하고 있었다.

옷을 입는 품은 그때나 지금이나 비슷했기 때문이었다.

“정말 기가 찰만한 변화로군. 천무방의 일개 검객이 끝끝내 혈마가 되어 돌아오다니.”

서문질이 적잖이 감탄하는 사이, 천혈강시도 그 생기라고는 일점 찾아볼 수 없는 검은 눈으로 물끄러미 진도건을 바라보고 있었다.

‘이 자가 신교의 도움도 없이 스스로 혈마로 각성한 진도건인가……. 놀랍군. 이 공간에 흐르는 환도의 마기가 저자에게만 닿으면 마치 삼켜지듯 소멸하는구나. 그렇다고 같은 마공을 익힌 마인으로서 상승효과를 받지도 않고 있다. 혈마로 각성했다는 구마진도 저런 모습일지 궁금하군. ……음!?’

천혈강시가 일순 몸을 부르르 떨었다. 무심코 그를 돌아봤던 서문질도 갑작스러운 천혈강시의 반응에 멈칫했다.

다행인지 떨림은 멈추었다.

잠깐의 정적.

“뭐야?”

서문질이 입을 열자마자.

퉁!

천혈강시가 진도건을 향해 화살처럼 쏘아져 나갔다.

* * * *

강호 무림에서 낭인이라는 자들은 독특한 위치에 있다고 볼 수 있었다.

척박한 환경 위에서 자신만의 기량을 갈고닦는 자들이며 진정 강호를 주유하며 자신만의 길을 개척하고픈 낭만주의자들이었다. 내공의 중후함에 부족함은 있을지언정 기량의 날카로움이나 실전적 감각은 정사(正邪)나 문파(門派)의 전통적 깊이와는 또 다른 무의 가치를 품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중천 안에도 그런 가치 위에서 강호에 명성이 높을 정도로 무공이 뛰어난 낭인들이 있었다.

특히 파군도(破軍刀) 서충(徐忠)은 중천 안에서도 그 장(長)인 안효철을 제외하면 가장 돋보이는 사람 중 하나로 홀로 오규의 광풍같은 쌍부를 틀어막을 수 있는 무공을 보유하고 있었다.

이런 실력 있는 낭인들의 개입은 상대적 소수임에도 전세에 변화를 일으키기에 충분했는데 역시 그 변화의 화룡점정은 영은성과 최현걸의 가세였다.

두 사람은 이미 몽골 초원에서 부장격으로 군사들을 통솔해본 경험이 있었다. 그렇기에 전장의 판세를 읽고 어떻게 대처하는 게 좋을지 판단할 수 있었다.

두 사람은 먼저 각자 매화검법과 타구봉법을 펼치면서 전장의 막힌 부분을 뚫어 혼란에 빠져 죽어 나가는 기병들을 사지에서 탈출시켰다.

“나를 따라오시오!”

영은성의 외침.

사기가 급격히 저하된 상태였지만, 그 뛰어난 무공을 보았기에 기병대들도 따르지 않을 수 없었다. 영은성은 그대로 호상의 병력과 합류하여 그에게 통솔의 방향을 안내한다.

“귀하가 이 군의 장수요?”

“그, 그렇다!”

“나는 화산파의 영은성. 몽골 초원에서 군 지휘를 경험해본 적이 있소. 내 조언을 따라주겠소?”

“무얼 하면 되오?”

“적들은 강력한 무공을 가진 마교도들. 아무리 기병대의 돌파력이 강하다 한들 중앙을 뚫어보려 하는 짓은 무리수요. 놈들의 가장자리에 있는 약한 적들을 도려낼 생각이오.”

“가능하겠소?”

“내가 선봉에 서겠소.”

“좋소.”

주고받는 의견이 결단으로 이어질 때까지 속전속결이었다.

성도성을 둘러싼 환도강마대진계는 워낙 강력한 환진이어서 그 환막 표면의 색채가 은연중에 드러나고 있었다. 호상은 무공을 몰랐지만, 그의 눈에도 그 변화가 감지되어 불안한 상황 속에서 무림인들이 대거 출몰하자 혼란스러운 상황이었다.

그런 가운데 훌륭한 검술과 무공을 보여준 영은성의 조력은 심적으로 든든한 버팀목이 될 수 있었다.

“이럇! 나를 따르라!”

3천 남짓 남은 기병대가 영은성의 외침에 따라 그 뒤를 쫓아 달리기 시작했다.

막 출발했을 때, 호상의 눈길이 성도 쪽에 잠시 머물렀음을 보았던 영은성이 그에게 한 마디 던졌다.

“당장 돌아가서 할 수 있는 건 없을 것이오. 지금은 이 마교도를 내쫓는 것에 힘을 실어주셔야 할 때요.”

“화산파가 정파라는 건 나도 알고 있소. 도사 영은성을 믿겠소.”

두두두두!

영은성과 호상의 기병대가 선회기동을 하기 시작했다. 병력에 가속도를 붙이기 위함이었다.

그 사이 최현걸은 전장을 휘젓고 있었다.

타구봉법의 절묘한 초식들은 맞붙은 개개인들에 간섭하여 자리를 이동시켰고 웅맹한 항룡십팔장의 장력은 가차 없이 적들에게 쏟아부으며 중천의 낭인들에게도 이동을 주문한다.

그렇게 한바탕 난리를 피운 결과.

혼재된 난전이 어느 정도 진형의 대결 구도를 형성하게 되었다. 그리고 때마침 나타난 영은성과 호상의 병력이 명확하게 나눠진 광혈종의 가장자리를 깎아 치듯 파고들었다.

광혈종은 집단 난전에 꽤 능숙했고 청해 초원의 마적들이나 서하국과 교전한 경험도 있는 역전의 전사들이었다. 하지만, 구룡문과의 혈투를 치른 후 곧장 이곳까지 이어진 장거리 여정은 그들의 상태가 결코 정상이라 얘기할 수 없는 수준이었다.

게다가 사수인들이 중천 낭인들에게 붙잡혀 어쩌지 못하고 있는 사이, 돌격해오는 기병대 선두에선 영은성이 자하신공의 자색 검기를 흩뿌리고 있었으니 실로 막을 도리가 없었다.

퍼퍼퍼퍽!

“끄억!”

“악!”

선봉장의 무력은 확실하여 막힘이 없고, 진형의 가장자리만 깎아내듯 뚫어내니 포위 형국이 발생하지도 않아 피해가 적다.

속도가 붙은 군마의 돌격은 제아무리 무림인이라 하더라도 스치면 중상일 정도로 파괴적이다. 광혈종의 지친 광기도 그 기마 돌격 앞에서 맥없이 짓밟히고 휩쓸렸다.

“선회하라!”

3천여 기병이 꼬리를 물면서 원을 그리듯 기동했다.

그 기동을 멈출 여유의 무력은 광혈종에게 없었다. 그 유동(遊動)의 진형이 마치 차륜전(車輪戰)처럼 광혈종이라는 강적을 상대로 작동하기 시작하니 효과가 대단했다. 부대 운용의 신기원을 영은성의 곁에서 접하는 호상은 어느새 사기충천하여 병사들을 독려하고 있었다.

전장의 변화가 시작되는 때에 혁무술과 안효철 사이의 팽팽한 구도에도 변화가 일어나고 있었다.

“네가 그 천가의 계집년이로구나!”

혁무술이 소리치면서 천서은을 향해 주먹을 휘둘렀다.

쐐액!

그 거대한 주먹이 파공성마저 일으키며 다가오는 것은 실로 위협적이고 기겁할만한 일.

게다가 거구에게 맞지 않는 엄청난 속도를 보고 피한다는 건 무리였다.

천서은이 얼굴을 막기 위해 올린 두 팔은 혁무술의 거대한 주먹에 비하면 너무나 가냘팠지만, 그 폭압적 구도가 마음에 들지 않았는지 안효철이 어느새 그사이를 파고들고 있었다.

무쌍류 탄화벽(綻蕾壁).

품으로의 접근을 잔뜩 웅크린 상태로 달려든다. 천자철갑의 비늘같은 편갑들은 웅크린 모습 위로 더해져서 마치 천산갑(穿山甲)이란 짐승을 떠올리게 한다.

그 단단하게 웅크린 꽃봉오리가 한순간 펼치듯 몸통을 펼치니 강력한 반탄력으로 천서은에게 닿기 직전 혁무술의 주먹을 튕겨냈다.

파앙!

오른손이 튕겨나가는 찰나 왼손이 재차 파고들었다. 이번엔 안효철을 노리니 둘의 손바닥이 맞부딪쳤다.

쩡!

장력의 충돌이 공기가 쪼개질 듯 울린다. 두 사람의 신형이 그 반발에 떠밀려 조금 떨어지는 틈에 천서은이 한껏 공력을 끌어모은 채 안효철의 머리 위로 날아올랐다. 그리고 혁무술을 향해 떨어져 내릴 때, 그녀의 주위로 벽력의 파도가 한꺼번에 쏟아져 내렸다.

쿠르르르……, 꽈르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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