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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의 귀신-237화 (237/432)

237화 - 제43장. 환도강마대진계(幻道降魔大陣界) (5)

진윤지는 다시 손으로 땅을 짚고 조심스럽게 일어났다. 그리고 심호흡을 하면서 몸의 떨림을 천천히 억누르고는 당성원 문밖으로 나갔다.

눈앞엔 천혈강시에 의해 파괴된 기관들의 흔적이 구불구불, 그러나 비교적 일직선으로 외원까지 나 있었다.

그 망가진 길을 보며 다시 떨리는 마음을 심호흡으로 가라앉힌 그녀는 경공을 펼쳐 파괴된 길을 따라 나아갔다.

마침내 외원까지 이르렀을 때, 진윤지가 제일 먼저 발견한 건 박살 난 륜의 위로 쓰러진 당한솔과 옆에 피투성이가 된 채 입으로 피를 연신 게워내고 있는 야율균은이 서로에게 힘겹게 기어가는 모습이었다.

‘아직 살아있어……!’

일순 다행이라 생각했었으나 그것도 잠시 둘 다 심각한 중상인 것처럼 보이자 그녀의 낯빛도 어두워졌다. 서문질의 독공에 당했으리라 짐작하면서 한 손으론 품속의 해독단을 찾고, 두 발로는 이미 그들에게 달려가는 도중이었다.

키아아아아-!

귀곡성이 오싹하게 울려 퍼졌다.

그 괴성에 반응하여 진윤지가 돌아보았을 때, 그녀의 눈에 누군가에게 달려드는 서문질과 천혈강시의 뒷모습이 제일 먼저 비쳤다.

그 누군가는 진윤지도 어쩌면 알 것 같은, 익숙하면서도 이질적인 모습의 사내였다.

‘……진도건?’

* * * *

육신의 감각이 괴리되어 있는 듯한 익숙한 기분.

하지만, 전체적인 감각은 창천맹에서의 그것보다 몽골 초원에서 또는 화산에서의 감각과 유사하다.

무의식 속 공간의 주체가 자신의 것임을 명확히 인지한다.

“오랜만이다.”

그의 모습을 한 혈마가 눈앞에 나타났다. 혈마의 적안과 적발을 본 진도건이 무심코 자신의 머리카락을 살펴봤다.

검은색이었다.

한동안 눈에 보이는 저 모습으로 지내다 보니 적응이 되었는지 새삼 검은 머리카락이 신기하게 느껴졌다. 반면 붉게 물들여졌을 것 같은 자신의 모습이 그대로 의식 속에 자리 잡은 걸 확인하는 일은 순수한 ‘나’ 자신을 발견한 것과도 같은 느낌이었다.

“어떻게 깨어난 거지? 그 환진 때문인가?”

이화림에서 성도까지 이르면서 진도건은 깊이 고민했다.

갑자기 서로를 ‘같은 하나’로서 수용한 이후로 혈마의 의식이 깨어나려 했던 상황은 여태 한 번도 없었다.

무엇이 그를 자극한 것일까?

생각을 거듭할수록 결부되는 답은 하나, 환술 또는 환진 이 기이한 존재의 것 때문이었다.

“클클! 왜 이리 쌀쌀맞나 그래?”

“네가 여전히 날 노리고 있다는 걸 알고 있는데 반가울 리가 없지.”

“아하하핫!”

혈마가 웃음을 터뜨렸다.

말은 그의 존재를 거부하는 것 같았지만, 이전과 다르게 서로에게 적의를 드러내고 있지는 않았다.

불편한 공존(共存).

딱 그것이었지만, 의식이 깨어날 때마다 한꺼번에 진도건의 기억과 경험을 흡수하는 혈마의 생각도 두 사람 다 알게 모르게 조금씩 달라지고 있었다.

“걱정하지 마라. 왠지는 몰라도 지금은 네 몸에 대한 욕심보다 날 자극한 궁금증을 해소하고픈 욕심이 더 크니까.”

“궁금증?”

“화산에서 나는 네 죽음과 죄의식을 먹고 깨어났다. 바위 무덤에선 생존에 대한 열망과 강해지고픈 욕구를 먹고 깨어났다. 둘 다 원초적인 본능에 반응한 것이겠지. 그러나 세 번째에선 달랐다. 날 강렬하게 자극하는 미증유의 무언가를 발견했다. 나의 무의식 속에서 네가 물리친 그것, 무엇이라고 생각하느냐?”

“……글쎄.”

“크하핫! 글쎄라. 그래, 네가 할 수 있는 딱 적당한 반응이다.”

혈마가 웃으면서 어깨를 으쓱거리자 진도건도 피식 웃었다.

“넌 뭐라고 생각하는데?”

“하하! 네 지식과 경험이 곧 내 것이나 마찬가지니 나도 딱 꼬집어 뭐라고 설명할 수는 없다만, 내가 본능적으로 느끼는 건 그것이 나와 닮았으며 나 같은 존재의 탄생과 밀접한 연관이 있다는 거야.”

“너 같은 존재의 탄생이라니…….”

“넌 잘 모르겠지만, 일월신마라 부르는 혼마가 네 몸에 새긴 마흔(魔痕)이 비슷하다는 느낌이 있고 명마 즉, 흑풍신마의 마정과 마성은 나와 비슷한 갈래라는 걸 느꼈다. 그런데 말이야. 그때 내 무의식에서의 일도 그렇지만, 이화림과 여기에 펼쳐진 이 환진에서 느껴지는 건 비슷하면서도 또 이질적이란 말이야. 게다가 이 기분, 이 혼돈과 마기가 가득 찬, 이 공간 속에서 난 느낄 수 있어. 어쩌면 ‘원류(原流)’ 따위의 것이 존재할지도 모른다는 걸 말이야.”

진도건은 미간을 찌푸렸다.

알듯 모를듯한 말들인 데다가 그의 흥미나 목표와는 왠지 동떨어진 기분이었기 때문이었다.

그의 생각을 읽은 혈마가 짜증을 부렸다.

“야 이, 내 숙주놈아. 내 말을 제대로 듣고 있는 거냐?”

“숙주라. 그럼 넌 기생충이로군. 기생충아, 뭘 더 빨아먹고 싶어서 그러느냐?”

“이 새끼……, 네게 더 빨아먹을 건 없다. 다른 날 네 몸이 탐나는 날이 올 때가 있겠지만, 지금은 아니다. 그보다 넌 이 환진 속에서 싸워야 할 테니, 내가 적극적으로 힘을 빌려주마.”

“……훔쳐둔 힘이 있나 보군.”

그 말에 혈마도 찔렸는지 괜스레 시선을 돌리며 툴툴거렸다.

“크흠! 이놈아, 내 모르긴 몰라도 여긴 그 흑풍신마같은 놈이 둘이나 있다. 너 혼자서 될성싶으냐? 내 힘을 네가 이미 쓰고 있긴 하나 그것조차 완전하지 않고 길만 터놨을 뿐. 지금 내 얘길 제대로 들었다면 또 하나의 지평을 내가 지금 열어줄 수 있다는 말이라는 것 정도는 알아들어야지.”

“넌 그 대가로 뭘 얻지?”

“네 의식 속에 나도 깨어있을 것이다.”

“그건 좀 싫은데.”

“걱정 마라. 네 여자랑 잘 때는 양심껏 구석에 처박혀 줄 테니. 색욕은 나랑 거리가 멀어서 말이야.”

“너…… 서슴없이…… 그따위 말을 잘도…….”

얼굴이 새빨개지는 진도건의 모습에 혈마가 기분 좋게 웃음을 터뜨렸다.

“크하하핫!”

* * * *

할퀸 상처들에 피투성이가 되고 독기에 침투당해 상처 주변이 까무잡잡해졌다. 그러나 역설적이게도 같은 마교도로서 마공을, 그것도 상당한 경지까지 끌어올린 야율균은은 마기라는 특성에 배양된 서문질이 지닌 독기에 은근히 내성이 있는 모습이었다.

물론 독기라는 건 명검을 하나 든 것이나 마찬가지였을 뿐이니 근본적인 실력의 간극은 어쩔 수 없는 것이었다.

“으아아아아!”

그들처럼 야율균은도 눈에 은은하게 붉은 광망이 흐르면서 토해내는 공력도 따라 폭주하니 서문질도 그녀를 흥미롭게 볼 수밖에 없었다.

흑풍명천마공 흑체마경.

야율재에 비할 것은 아니었으나 쌍곡도를 휘감은 밀도 높은 칼바람과 전신을 아우르며 휘몰아치는 기류가 보여주는 힘과 기세는 충분히 패기 넘치는 모습이었다.

그런 그녀의 각오에 대응하여 서문질도 공력을 한껏 끌어모았다.

그런 그에게 틈을 주지 않으려는지 야율균은이 달려들어 칼들을 맹렬히 휘둘렀다.

슈웃!

카카카칵!

칼날이 닿기 직전, 서문질로부터 거대한 공력의 장벽이 확산되어 접근을 불허한다. 흑풍이 요동치며 끔찍한 반발력이 쌍곡도를 통해 전해지는데 행여나 놓칠세라 도병을 꽉 붙잡은 두 손아귀엔 어느새 피가 흥건해졌다.

‘크크……, 사랑이란 이토록 처절한 것인가!’

서문질은 당한솔과 야율균은, 두 사람의 합공을 상대하면서 그들 사이에 묘한 감정의 교류가 흐르고 있음을 느꼈다.

얼핏 어울리지 않는 두 사람의 정체성은 오히려 금단의 사랑을 엿보는 것 같은 자극점이 있었다. 그걸 극적으로 한 번 끌어내 보고 싶은 악취미가 발동된 것이다.

서문질은 일부러 두 사람의 합공이 원활해지도록 그들 한가운데 뛰어들었었다. 싸우면서 제법 위협적이라는 감상은 들었지만, 사실 실질적인 위협은 없다고 봐도 무방했다. 그 가운데서 서로를 위기에서 구해주는 모습은 꽤 애틋한 느낌이 있어 보는 재미가 있었다.

그리하여 그는 당한솔의 륜의를 박살 내고 그의 가슴에 영사권을 꽂아 넣었다.

피를 토하며 나가떨어지고 힘없는 두 다리는 내동댕이치는 상황 속에서 뼈가 부러져버렸다. 고통에 신음하는 그 모습은 야율균은의 안에 자리한 마성을 자극하여 분노를 불러일으켰다.

‘하지만…….’

역시 시시하다.

그녀가 이렇게 힘을 폭주시켜 뒤도 없이 달려드는 모습이야 가상하기도 하지만, 비단, 이 환진 속에서 무공이 높아진 건 그도 마찬가지였다.

필사적인 눈을 하고 덤비는 야율균은을 무료한 눈으로 막아 세우고 있을 때였다.

‘응?’

그의 감각에 기척 하나가 잡히고 이내 그 기척의 주인이 모습을 드러내자 서문질이 치아를 보이며 씩 웃었다.

“크큭! 나와 놀아주느라 수고했다, 요 애달픈 년아.”

차갑게 내뱉는 그 목소리에 야율균은이 흠칫 어깨를 떨었다.

가뜩이나 흑체마경의 엄청난 공력 소진에 허덕일 때, 서문질의 손이 적극적인 공세로 어지러이 변화를 일으키기 시작했다.

구음독천마공 지주망나수(蜘蛛網拿手).

빠르게 변화하는 손길이 칼이 지나는 길을 막아 세운다.

흑풍을 앞세운 도강이 한치도 파고들지 못하는 단단하게 응집된 양손의 강기가 일순간 성질이 변하면서 살아있는 듯 장황하게 요동쳤다. 충만하게 차오른 전방의 기운에 공간의 밀도가 높아지고 움직임을 강제하는 서문질의 손에 떠밀리듯 쌍곡도가 서로 모여 기운이 충돌했다.

파카카칵!

두 자루에 실린 흑풍은 유형화된 바람의 강기. 잠깐 스치고 지나가는 것도 아니고 강제로 두 자루가 한데 묶여버리니 그 반발력을 시전자 본인이 견딜 수가 없다.

“꺄악!”

날카로운 비명과 함께 야율균은이 두 손에서 쌍곡도를 놓치고 말았다.

채 흩어지지 못한 흑풍의 세기에 곡도가 허공에서 도신을 축으로 거칠게 맴돌며 허공으로 떠올랐다. 그리고 그 아래를 파고든 서문질이 왼손을 뻗어 다섯 손가락을 야율균은의 복부에 얹었다.

구음독천마공 최심장(摧心掌).

손가락을 얹은 만큼 복부와 손바닥 사이에 생기는 틈 한가운데 독기공이 일순간 집약되었다.

푸웅!

묵직한 타격과 함께 야율균은이 입으로 검은 피를 토해내며 나가떨어졌다. 힘없이 땅바닥을 구르는 그녀의 신형은 어느새 당한솔의 근처까지 도달해있었다.

“낭자!”

간신히 상체를 두 손으로 지탱하고 있던 당한솔이 깜짝 놀라 소리쳤다.

그는 급히 두 손으로 땅을 밀어 야율균은을 향해 기기 시작했다.

부러진 다리가 땅에 쓸려 제멋대로 꺾이면서 고통이 가중됐다.

그는 단 한 번도 손을 쉬지 않았지만, 야율균은과의 거리는 쉽게 좁혀지지 않았다.

그렇게 먼 거리가 아닌데도 깊은 내상으로 기력을 소진한 그의 두 팔은 남은 체중을 이동시킬 정도도 못 되는 나약함만이 남아있었을 뿐이었다.

“우욱!”

야율균은이 다시 한번 피를 토해냈다.

본디 내장을 파열시키는 무공에 독기까지 얹어졌으니 사실상 생명이 경각에 달린 상황이었다.

타타타탓!

“한솔아!”

어느새 외원에 이른 진윤지가 당한솔에게 황급히 뛰어왔다.

당한솔이 자신에게 다가온 진윤지의 팔을 붙들고 야율균은을 가리켰다.

“어머니, 낭자를 제게로 데려와 주십시오. 서둘러 치료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진윤지는 당한솔의 뒤틀린 두 다리를 보고 잠깐 멈칫했다. 그러나 이미 장애로 제 기능을 하지 못하는 다리뼈를 당장 맞춘다 한들 무슨 득이 있겠는가? 그 아픔을 잠시 참고 아들의 바람대로 야율균은에게 다가간 진윤지는 그녀의 상태를 보고 더 깜짝 놀랐다.

‘내 아들을 지키기 위해 이렇게까지 싸워준단 말인가요?’

야율균은을 부축하는 진윤지의 눈엔 어느새 눈물이 그렁그렁 차올랐다.

관계를 다질 시간도, 그리하여 신의를 주고받을 시간도 그들 사이엔 없었다. 무엇을 위해 야율균은이 이렇게까지 싸웠는지는 그녀도 알 수 없었다. 다만 확실한 건 야율균은의 의지가 순수하다는 것, 그리고 이 빚을 충분히 갚지 못하고 이대로 죽음 너머로 떠나보낸다면 그녀로서도 떳떳하지 못하리란 생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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