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6화 - 제43장. 환도강마대진계(幻道降魔大陣界) (4)
주변을 잠시 둘러본 그의 눈이 점차 확신에 차기 시작했다.
철컹!
그의 손이 더는 망설이지 않고 팔걸이 모서리의 장치를 눌렀다. 귀퉁이가 열리면서 튀어나온 유성반을 즉시 잡아서 야율균은에게 달려드는 서문질의 팔을 노리고 던졌다.
슛, 휘리릭!
서문질의 구음백골조가 야율균은의 정수리에 꽂히려는 순간, 유성반에 달린 흑강사가 그의 손목을 휘감아 바짝 당겨 제동을 걸었다. 또 유성반이 그의 안면을 노리고 날아들었는데 그의 시야에 잡힌 회전하는 유성반의 예기가 보통 날카로운 게 아니었다.
“윽!”
서문질이 급격하게 허리를 젖혀 유성반을 피했다. 유성반은 그대로 그의 팔을 마저 휘감았는데 서문질은 그게 당한솔의 짓임을 알고 팔을 힘껏 당겼다.
팅!
팽팽하게 당겨진 흑강사가 튕기며 당한솔이 륜의와 함께 공중에 날아올라 그대로 서문질을 향해 날아갔다.
“이 다리 병신 애송이가!”
서문질이 좌장을 펼쳐 그대로 날아드는 당한솔을 향해 뻗었다.
독기를 품은 영사장이었다.
당한솔은 공중에서, 그것도 륜의에 엉덩이를 걸친 그런 불안정한 상황에서 망설이지 않고 운기하여 적련장을 쳐냈다.
파앙!
“큿!”
장력을 주고받자 당한솔이 신음을 흘리며 륜의와 함께 다시 뒤로 날아가는 사이, 서문질은 당한솔의 공력에 적잖이 놀라고 있었다.
생각보다 웅혼한 내력에 손바닥이 얼얼할 정도로 남아있는 열감은 당한솔이 보통내기가 아니란 걸 알려주고 있었다.
‘당혁수, 이놈이 제 아들을 이무기로 키우고 있었구나!’
단 일 합을 주고받는 것만으로도 상당한 수준의 내공을 가졌다는 것이 느껴졌다. 만약 다리의 장애가 아니었다면 벌써 사천에서 제일가는 후기지수로 명성을 날렸을 것이었다.
서문질이 멈칫하는 사이, 다시 몸을 바로 세운 야율균은이 재차 공격을 감행해왔다.
야율신이 빙의한 듯 투쟁적으로 절초를 펼치는 야율균은의 모습은 거란족 여전사 특유의 기질을 여실히 드러내고 있었다. 당한솔도 유성반을 조종하면서 동시에 이화침으로 경혈을 노렸다. 바퀴를 밀어 륜의를 움직이면서 원거리에서 지원하는 그의 움직임은 매우 적극적이었다.
‘역시 환영체들이 나타나지 않고 있어……!’
그것이 바로 그가 적극적으로 움직일 수 있었던 이유였다.
운신이 자유롭지 않은 그에게 언제 어디서 나타날지 모르는 환영체의 공격은 충분히 위협적이었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환영체는 나타나지 않고 있었다. 환도종 마교도와 아직 싸움을 버티는 다른 당문인들이나 백기린을 상대하던 당주형까지 위태로웠던 형국에서 어느 정도 빠져나오는 양상이었다.
당장은 서문질을 견제하느라 당한솔도 그 이유에 대해 깊이 생각할 틈이 없어 파악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가 파악하지 못한 정확한 이유란, 환도강마대진계에 의해 성도성 일대에 모여있는 거대한 마기의 흐름이 내원에 난입한 천혈강시에 주입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내원의 전각들 가운데서도 사방 가장자리에 자리한 전각은 중앙의 전각과 함께 유독 그 높이가 높았다.
다른 전각들이 최대 2층 높이로 축조된 것에 반해, 이 사방탑(四方塔)과 중앙관(中央館)은 4층 높이로 축조되어 있었다. 그리고 이들은 중앙 기둥이 철골(鐵骨)로 구성되고 외벽도 철벽으로 보호된 구조물들이었다.
중앙관 4층 위치에서 사방탑으로 두꺼운 강사가 쏘아져 연결되었다. 그리고 그 강사를 타고 다시 강사망이 빠르게 타고 펼쳐져 하늘을 덮었다. 강사망엔 맹독이 발린 철질려(鐵蒺藜)가 엮여있었고 강사도 살가죽은 쉽게 벨 정도로 날카로웠다.
강사들이 촘촘하고 기형적으로 엮여있어서 어떤 충격도 쉽게 상쇄할 수 있어서 절정고수의 강기공에도 쉽게 끊어지는 법이 없었다.
당문은 이것을 천라망의진(天羅妄意陣)이라 불렀다.
벽이 움직였다.
외부인들에겐 다소 답답하게만 보였던 벽들이 분리되고 이동하며 때로는 수직으로 방향을 틀어 다른 벽과 맞닿는다. 각 분벽(分壁)이 연속적으로 변화가 이뤄지니 길을 안내하던 벽들은 어느 순간 전혀 다른 쓰임새가 되었다.
분벽들의 재질은 기본적으로 석벽이었지만, 내부를 손가락 굵기의 철골을 그물 모양으로 짜 보완한 것이었다. 석벽이 충격에 박살이 나더라도 내부에 숨겨진 철골은 그 벽의 기능을 유지해주거나 때로는 적들의 움직임을 옭아매기도 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때로는 전각에서, 때로는 분벽에서 독 발린 쇠뇌나 칼날이 기척도 없이 쏘아졌다. 벽이 돌출되어 때리기도 하고 전각에 진입하면 천장이 무너져 덮치기도 했다. 가장 치명적인 것은 지척에서 폭발하는 화약이었다. 1, 2장 반경을 아우르는 폭발이 지척에서 터지면 호신강기로도 버틸 수가 없었다.
당문은 이것을 적멸팔진도(寂滅八陣圖)라 불렀다.
이 모든 건 내원 가장 깊숙한 곳에 자리한 가주전과 그 뒤편의 지하고(地下庫)로 연결되는 당성기곡관을 지키기 위함이었다.
쿠쿵!
“하아…….”
점점 가까워지는 굉음에 깊은 한숨을 내쉬는 진윤지의 입술이 파르르 떨렸다.
바깥에서 싸우는 사람들에 대한 걱정, 그리고 궁지에 몰린 내원 식솔들에 대한 걱정.
무엇보다 현실로 점점 다가오고 있는 죽음에 대한 두려움까지.
탁자 위에 놓인 물건들을 한 번씩 만져보는 동안에도 손 떨림은 멈추지 않았다.
천뢰구(天雷球), 창염산(瘡焰酸), 멸폭노(滅爆弩)…….
살상력이 대단하고 그 여파도 무시할 수 없는 비전의 암기, 독물 등이었지만, 과연 이것들이 천혈강시에게 통할지 의문이었다.
“폭발도 통하지 않는다면 차라리 창염산으로 녹여버리는 건 어떻겠소? 신체 한 부위만 잘 겨냥한다면…….”
당부순이 걱정 가득한 목소리로 의견을 내면서도 스스로 확신이 서지 않아 말꼬리를 흐렸다. 진윤지가 떨리는 손으로 잠시 창염산이 담긴 조그마한 항아리 세 개를 만지작거렸지만, 이내 손을 떼고 돌아섰다.
그녀는 품에서 금장건을 꺼내 당부순에게 내밀었다.
“진 부인!”
“고모부께선 식솔들을 데리고 기곡관 안에 계십시오. 제가 천혈강시를 막아보겠습니다.”
“그 무슨 뚱딴지같은 소리인가?”
“이 몸이 지금은 당문의 안주인이지만, 그 이전엔 아미파의 제자였습니다. 무상대정신공은 파사멸마할 수 있는 최고의 무공 중 하나. 지아비가 도착할 때까지 버티기에 부족함이 없을 것입니다.”
애써 미소 짓는 진윤지의 모습에 당부순이 아랫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의학에 심취하여 무공을 멀리한 게 인생의 한이 될 줄이야…….”
“제 책임을 다하는 것일 뿐입니다.”
진윤지가 당부순의 손에 금장건을 넘겨주었다.
당부순의 늙은 얼굴에 침통한 표정이 쉬이 사라지질 않았다. 돌아서는 늙은이의 눈가엔 눈물이 조금 맺혀있었다.
“가자, 얘들아.”
내원에 남아있는 대부분은 무공을 모르거나 그 수준이 미약한 아이들뿐이었기에 후대를 위해서라도 보호가 필요했다. 어차피 같이 남았어도 싸움에 방해만 될 게 분명했고 이 참혹한 전투가 끝내 마교의 승리가 된다면 어차피 죽음을 피할 수 없는 일이니 차라리 기곡관 내에서 옥사(獄死)를 자처하는 게 덜 고통스러운 일일 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가주의 방 뒤뜰을 통해 빠져나가는 동안 아이들이 흐느끼는 소리는 진윤지의 마음을 무척 아프게 했다.
당문 내원의 최심부에 위치한 가주의 정원 당성원(唐成園)은 꽤 넓은 폭으로 흐르는 강을 등지고 있었다. 가주의 방에 있는 책장을 열면 나오는 비밀 계단을 따라 한참을 내려가면 바로 그 강 아래 있는 석회동굴과 연결되었다. 그 내부를 바위와 강판으로 보강하였으니 당문이 쌓아 올린 갖가지 성과물들이 모두 거기에 보관되어 있었다.
당부순은 금장건을 이용하여 기곡관의 문을 열고 식솔들을 안으로 들여보냈다. 당부순도 금장건을 회수하자마자 서둘러 안에 들어가니 기곡관의 문이 마침내 닫히게 되었다.
“모두 미륵불께 기도하자. 보현보살께 기도하자. 부디 가주께서 일찍 돌아와 이 재앙을 걷어내고 이 문을 두드려주기를!”
안에 들어간 사람들만 삼십여 명.
당부순의 말에 삼삼오오 모여 서로의 손을 맞잡고 간절한 마음으로 기도하기 시작했다.
한편, 진윤지는 당성원의 한가운데로 나와서 정원의 반쯤 열린 문을 잔뜩 긴장한 모습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콰쾅!
가까운 곳에서의 폭발이었다. 진윤지는 그게 마지막임을 깨달았다.
‘단 한 구의 천혈강시가 외원에서 이곳까지 일직선의 길을 뚫었구나. 이제 끝인가…….’
그녀는 두 손으로 들고 있는 멸폭노를 꽉 쥐었다.
화약의 힘으로 발사되는 소형의 강철 쇠뇌였는데 쇠뇌의 촉 안에도 화약이 숨겨져 있어서 충돌이 일어나는 순간 폭발하게 되어 있었다.
후욱! 쿵!
그림자 하나가 솟구쳐 오르며 당성원의 문 지붕 위에 요란하게 내려앉았다.
“드디어 도착인가……!”
그 음성을 듣는 순간, 진윤지는 몸이 얼어붙는 느낌이 들었다.
마치 저승으로 인도하려는 사자(使者)의 목소리가 아닐까 싶을 정도로 갈라지고 탁한 목소리가 그녀의 영혼에 공진하듯 머릿속으로 파고드는 그런 음성이었다.
진윤지는 천혈강시의 음성만으로도 전의를 상실했다. 무엇보다 천혈강시의 모습이 더 그런 심경을 부추기고 있었다.
처음 봤을 때 입고 있던 장포는 이미 온데간데없이 사라졌다. 온몸을 감고 있었던 붕대들은 대부분 사라지거나 폭발 때문에 피부에 눌어붙기도 했었다. 놀라운 건 아무리 강시의 신체가 강력하다고 하더라도 화약의 폭발은 견디지 못할 것임에도 천혈강시는 그저 작은 상처들만 입은 모습이었다. 그 정도로 멀쩡한 천혈강시는 사체 특유의 검게 변색된 피부와 말라붙은 듯한 근육들, 전신 피부에 촘촘하게 새겨진 이상한 술식들까지 총체적으로 무척 괴이하고 징그러운 모습이었다.
가장 끔찍한 건 눈이었다.
세상의 어둠을 모두 담아낸 것만 같은 검기만 한 두 눈은 눈동자가 구분이 안 되어 어딜 보고 있는지도 알지 못했으나 잠깐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정기가 빨려 나가는 듯한 기분이 들 정도였다.
멸폭노를 붙잡고 있는 진윤지의 손이 연신 달달 떨렸다.
방아쇠에 걸치고 있는 손가락에 도저히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아서라. 너희의 죽음은 사혈신마가 결정할 것. 목표는 그 뒤에 있는 것일 테니 이것으로 이 몸은 쓰임을 다했다.”
“어, 어떻게 강시가 말을 하지? ……어떻게 그리 멀쩡할 수가 있지?”
“환도강마대진계의 보호를 받는 이 천혈강시는 무적이다.”
두 번째 질문에 대한 대답이었지만, 진윤지는 그것으로 첫 번째 질문에 대한 대답의 단서를 얻었다.
“넌…… 누구냐?”
떨리는 목소리로 질문을 던지던 진윤지는 문득 천혈강시의 입꼬리가 살짝 올라갔다고 착각했다.
“크크크……. 나는……!”
그때 천혈강시가 갑자기 말을 멈추고 고개를 하늘로 치켜들었다.
갑작스러운 움직임에 진윤지는 하마터면 멸폭노를 발사할 뻔했다. 천혈강시의 반응이 의아했던 그녀도 따라서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하늘을 물들인 자천은 여전했고 자색 아지랑이는 여전히 공기 중에 뿌옇게 흐르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이 꺼림칙한 기운들이 천혈강시에게로…….’
환진의 보호를 받는 동안 무적이라는 말이 이 때문인가 싶을 정도로 천혈강시를 중심으로 기운이 흐르는 느낌이 드는 것이다.
한편 하늘을 물끄러미 올려다보던 천혈강시는 아예 몸을 돌렸다. 그리고는 갑자기 왔던 길로 되돌아 몸을 날려 이내 진윤지의 시야에서 사라졌다.
그녀는 자신을 옭아매던 긴장감이 한꺼번에 풀리는 걸 느꼈다.
터텅!
힘이 풀린 나머지 멸폭노를 손에서 놓치는 바람에 땅에 요란하게 떨어지는 소리는 털썩 주저앉아 난 소음을 묻어버렸다.
진윤지는 여전히 덜덜 떨리는 두 다리를 마찬가지로 떠는 두 손으로 힘껏 주물렀다.
코앞에 다가온 줄 알았던 죽음이 피해갔다는 생각에 제일 처음 드는 것은 안도감이었다. 그다음 드는 생각은 당연히 천혈강시가 갑자기 돌아간 이유였다.
‘애초에 서문질에게 알리기 위해 돌아가긴 했을 터인데……. 그 반응은 묘해. 뭔가 일이 벌어진 것이 틀림없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