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5화 - 제43장. 환도강마대진계(幻道降魔大陣界) (3)
* * * *
당문 사람들이라면 모두 절실히 깨닫고 있었다. 그들을 수호하던 당혁수라는 사람의 존재가 차지하고 있는 자리가 얼마나 컸는지 말이다.
천갈해독단은 사실상 사혈주의 독공에 대비하기 위해 만든 해독단이었다.
어떤 독이든 다루는 건 매우 까다롭게 행해야 한다.
그래서 용독술을 펼 때도 단일 독을 사용하는 게 일반적인 원칙이었다. 자주 발생하는 일은 아니겠지만, 자기 자신이 중독되거나 뜻하지 않은 자가 휘말릴 수도 있기에 되도록 모든 상황이 통제 가능할 필요가 있었다.
그런 면에서 독공을 수련하고 그에 따라 복합적인 독을 사용하는 사혈주의 존재는 당문에게도 몹시 까다로운 적임이 틀림없었다. 그리고 그런 측면에서 독수흉인 서문질의 등장은 당문에게 당혁수가 아니었다면 감당하기 힘들었을 정도의 강적이었다.
“하하핫! 가소로운 것들!”
사혈주와 당문의 싸움에 있어서 주인공은 언제나 당혁수의 몫이었지만, 그가 없는 이상 그 몫은 서문질의 것이었다.
티티팅!
당문 고수가 던진 독침은 가죽도 뚫을 정도로 경력이 실렸음에도 서문질이 옷소매를 펄럭이며 팔을 휘두르자 모두 튕겨 나갔다. 그리고 자신에게 독침을 던진 당문인을 응징하기 위해 쫓았다.
당문 제자들 모두 일신을 지킬만한 무공을 갖추고 있었지만, 서문질의 눈엔 애들 장난처럼 보였다.
적련장의 연환수법이 눈앞을 어지럽게 현혹해왔으나 그가 겪어 본 당혁수의 그것엔 한참 못 미쳤다.
구음독천마공 영사권(泳蛇拳).
장세 속으로 두 손을 집어넣고 팔꿈치를 굽혀 위아래로 당기자 손쉽게 와해된다. 그 속을 헤엄치는 독사처럼 가로지르는 주먹이 그대로 가슴을 강타했다.
퍽!
“컥!”
조위헌(趙衛憲)은 당가사수에게 직접 사사하여 그 실력을 인정받은 외인 출신의 당문 고수였다. 그가 서문질의 앞을 가로막았을 때만 해도 호기가 넘쳤지만, 연신 뒷걸음질 치면서 끝내 무릎을 꿇는 그의 지금 안색은 하얗게 질려 있었다.
조위헌은 다시 일어나려 했지만, 폈던 무릎을 금방 다시 땅에 찧어야 했다.
가슴으로 침투해오는 강력한 독 기운에 정신이 아득해졌기 때문이었다.
“우웩!”
끝내 버티지 못하고 검은 피를 왈칵 게워내자 그 광경을 본 다른 당문인의 낯빛도 어두워졌다.
서문질의 독공이 가진 독성은 언제나 연구대상이었기에 그들이 복용하는 천독해갈단도 지속적으로 개량돼왔었다. 그러나 최근 1년여 시간 동안 그와 충돌이 없었던 그 사이에 그의 독성은 더욱 강력해져 있었다.
진윤지의 눈빛이 파르르 떨렸다.
‘천독해갈단을 복용했음에도 수초도 버티지 못한단 말인가?’
가까이 있는 당문인들을 손쉽게 해치우면서 서서히 다가오는 서문질의 모습은 공포 그 자체였다.
입안으로 비릿한 피 맛이 느껴졌다. 극도의 긴장감에 아랫입술을 씹었기 때문이었다.
현 당문에서 무공이 가장 강한 사람은 그녀와 당주형인데 당주형은 흰 가면의 남자에게 발목 잡혀 있었다.
그녀의 시선이 야율균은에게 닿았다.
당문의 전력이 상당 부분 아미산으로 빠져나간 상황에서 믿을 수 있는 건 그녀뿐이었다.
“야율 낭자.”
그녀의 부름에 야율균은이 시선을 보냈다.
진윤지는 야율균은에게 함께 서문질을 상대로 싸우자고 청할 참이었다. 그리고 야율균은은 이미 당한솔보다 앞에 서서 쌍곡도를 치켜들고 있었다. 그녀의 주변엔 서문질의 독공 못지않은 섬뜩한 검은 바람이 연신 휘몰아치고 있었다.
“진 부인께선 소가주를 데리고 내원으로 피신하세요.”
“같이 싸워요!”
“진 부인의 무공이 강하지만, 이 환진 속에서는 제 실력을 모두 보여주지 못하세요.”
야율균은의 지적은 틀리지 않았다.
끊임없이 짓누르는 공기의 무게감이나 정신적 피로감이 그 어느 때보다 높았고 운기를 하면서도 불안정한 느낌이 동반되었다. 그녀뿐만 아니라 모두가 호소하는 부분이기도 했다.
야율균은이 진윤지를 돌아보며 씩 웃었다.
“그런데 전 마교 출신이라서 그런지 오히려 힘이 넘쳐나요. 흑풍신마 야율재만큼은 할 수 없어도 죽은 저의 신 오라버니만큼은 할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요.”
다른 당문인들과는 달리 공격해오는 마교도들처럼 그녀도 힘이 넘쳐나는 기분을 톡톡히 느낄 수 있었다. 마치 야율신의 영혼이 그녀를 지켜주는 듯한 기분마저 들고 있었다.
‘야율신이 야율재를 상대로 이기진 못해도 시간을 벌 수는 있지 않았을까?’
그녀는 그런 생각을 하면서 서문질을 바라보며 접근했다. 그렇게 그녀와 서문질의 눈이 마주쳤다.
“후후후! 뭐냐? 재밌는 계집이로군. 흑풍신마의 마공처럼 보이는데 당문에 붙어먹고 있는 이 희한한 그림을 대체 어떻게 설명해야 하지?”
“알 바냐? 덤비기나 해라.”
“아하하하! 당돌한 계집이구나! 그래, 어차피 저길 들어가기 위해선 시간이 조금 필요하니까 말이야?”
서문질이 잠시 고개를 좌로 꺾으며 야율균은의 어깨너머를 바라보았다. 그의 그런 시선은 진윤지와 당한솔이 반응할 수밖에 없었다.
“역시 노리는 건 결국……!”
진윤지의 반응에 서문질이 여유롭게 웃었다.
“아름다운 진 부인이시여, 그리 여유롭게 있어도 되겠소? 내가 그대들의 비보를 차지하는 걸 막아야 할 책무가 있을 텐데?”
“어머니.”
당한솔이 진윤지를 불렀다.
“들어가서 내원 기관 발동을 지휘하셔야 합니다.”
“같이…….”
“전 남아 야율 낭자를 지원하겠습니다. 소자 그리 약하지 않습니다, 어머니.”
진윤지는 쉽사리 결단을 내리지 못했다.
그 모습을 서문질은 계속해서 비웃고 있었다.
“크큭! 여전히 정신 못 차리시는군.”
바로 그때.
슈우우욱!
멀리서부터 장포를 두른 자가 빠른 속도로 날아왔다.
겉으로 보기에 건장한 체격의 남자였는데 순식간에 당문 외원에 모인 사람들의 머리 위로 날아올랐다. 그리고 그 신형이 전장 한가운데 위로 날아오르는데 펄럭이는 장포 아래로 온몸을 너덜거리는 붕대로 두른 괴이한 모습이 드러났다.
그 등장을 예상한 서문질이 두 팔을 활짝 펼치며 입을 열었다.
“드디어 왔구나, 천혈강시가!”
강시란 말에 진윤지와 당한솔이 어깨를 움찔 떨었다.
그 천혈강시는 다른 사람들이 미처 막을 틈도 주지 않고 매우 빠르게 내원 담장을 넘었다. 그리고 바로 앞을 막고 있던 전각에 그대로 육신을 들이박았다.
꽈앙!
전각이 부서져 내리자 진윤지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
“어머니, 가셔야 합니다!”
그녀의 옷자락을 붙잡고 흔들며 당한솔이 소리쳤다. 그가 그녀의 손에 당성기곡관의 열쇠 금장건을 다시 억지로 쥐여 주었다.
구구구궁!
폭음 사이로 기관들이 움직이는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내원에 있던 당부순이 사태를 파악하고 기관을 발동하기 시작한 것이다. 이젠 주저할 여유조차 없었다.
진윤지가 당한솔의 어깨를 꽉 붙잡으며 눈을 마주쳤다.
“무조건 살아라!”
대답은 들을 여유 없이 호소에 가까운 당부만을 남긴 채 진윤지가 바로 내원 정문을 지키는 제자들을 지나쳐 문을 열고 안으로 황급히 들어갔다.
꽈꽈꽝!
전각을 부수는 굉음은 계속해서 울려 퍼지고 있었다. 그 소리를 들은 당한솔이 긴장한 표정으로 서문질을 쳐다보았다. 그리고 오래전 당혁수와 나눴던 이야기를 잠시 떠올렸다.
“물론 놈들은 우리의 멸문을 바라지만, 그보다 더 강렬하게 염원하는 건 바로 당성기곡관에 보관된 독혈경(毒血經)이라는 연구집이다.”
“그게 무엇입니까?”
“당씨독해경(唐氏毒解經)은 우리가 독을 다루는 데 필요한 모든 걸 총망라한 총요집(總要集)이지만, 독혈경은 그보다 훨씬 더 오래전부터 독에 관한 연구를 다룬 총요집이었다. 그러나 독혈경은 지금의 당씨독해경처럼 독종(毒種)과 용독, 해독 세 가지만 다루지 않았다. 바로 사람의 피를 독화(毒化)시켜 살아있는 독인을 만드는 연구도 포함되어 있었다.”
“그거…… 지금 사혈주가 하는 짓이 아닙니까?”
“그래. 결과적으로 독인을 만든다는 발상은 불가능한 미친 짓이었기에 이 아비의 고조부 대에 이르러 연구도 당연히 중단되었다. 대신 이 아비 대까지 새롭게 내용을 편집하여 편찬한 것이 당씨독해경이다. 독인의 연구는 허황된 것이었지만, 그 연구 기록들은 당문의 해독 기술의 발전에 밑거름이 되었지.”
“소자는 독혈경을 한 번도 보지 못했습니다.”
“당연하다. 그건…….”
잠시 떠오른 기억 속에서 그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인자한 미소를 짓던 부친 당혁수의 모습이 눈앞에 그려졌으나 이내 검은 바람과 함께 서문질을 공격하는 야율균은 때문에 상념에서 깨어나야 했다.
휘류류-, 콰콰콱!
과연 야율균은의 움직임은 일전에 면주 공명의원에서 보았던 것보다 훨씬 기민했고 펼치는 무공도 더 위력적이었다.
“으하하! 이게 그 흑풍신마의 흑풍명천마공이냐? 과연 듣던 대로 위력적이다!”
서문질이 웃음을 터뜨리며 두 손에 강기를 둘렀다. 그의 강기는 맹독을 품어 움직일 때마다 공기 중에 독무를 뿌려댔다.
구음독천마공 영사연권(泳蛇連拳).
퍼퍼펑!
서문질의 주먹이 빗겨나갔지만, 허공이 터져나간 듯 파공성이 고막을 날카롭게 찔러댔다.
흑풍명천마공 쌍격흑소풍.
서문질의 주먹의 궤적 아래로 야율균은이 유려하게 몸을 누이며 발로 지면을 밀었다. 비스듬히 물러나면서도 검은 바람을 실은 두 쌍곡도는 그보다 먼저 서문질의 허리를 노리고 휘둘러졌다.
패애앵-!
그 후폭풍이 일 장 뒤까지 휘몰아칠 정도로 흑풍이 예리하게 공간을 갈랐다.
야율균은보다 더 높이 뛰어오른 서문질의 몸도 그녀처럼 누인 상태. 그러나 그녀가 물러나는 방향으로 뛰었던 것과 달리 오히려 그녀를 덮치듯 쫓는다. 번쩍 치켜든 그의 왼손은 영사권의 주먹을 풀고 손톱을 세우고 있었다.
구음독천마공 구음백골조(九陰白骨爪).
악귀의 발톱 형상이 서문질의 손에 머물렀는데 그것이 결코 환영 따위가 아님을 아율균은도 본능적으로 알고 있었다.
콰드득!
“악!”
구음백골조로 일으킨 강기의 발톱에 충돌한 야율균은이 비명과 함께 튕겨 나갔다. 충돌한 지점에선 집중되었던 검은 바람이 흩어지고 있었다.
야율균은이 서둘러 몸을 일으켰다. 제비꽃 수 놓인 청의무복의 소매 부분이 터져버렸지만, 다행히 큰 상처는 없었다.
“쿨럭.”
목구멍이 찌르는 듯한 느낌에 야율균은이 가볍게 기침하는데 비말 속에 검은 핏방울이 섞여 튀어나왔다.
서문질이 영사권을 펼쳤을 때, 발생한 독무를 조금 흡입한 결과였다.
미량이긴 해도 맹독이었으니 그 광경을 본 당한솔의 얼굴에 걱정하는 표정이 떠오르는 건 당연한 수순이었다. 그리고 그런 걱정도 무의미한 것인지 서문질이 쉴 틈도 주지 않고 다시 야율균은을 몰아붙였다.
카카캉!
꽈꽝! 꽈르릉!
두 사람의 기운과 칼날 등이 충돌하는 소리보다 더 큰 굉음이 내원에서부터 들려왔다.
땅을 울리는 진동이 비단 기관이 움직이는 소리만 의미하는 건 아니었다.
내원은 당문의 식솔들이 생활하는 공간이기도 했지만, 안에 진입한 그 누구라도 죽음을 피하기 어려웠다.
당문이 다루는 맹독이 발라진 각종 암기도 위력적이었지만, 그보다 더 위협적인 건 화약(火藥)이었다. 아무리 내공이 강하고 강력한 호신강기를 발휘할 수 있는 절대 고수라 하더라도 집약된 화약의 폭발을 견딜 수는 없었다.
내원에 설치된 기관 속 숨겨진 비밀무기는 바로 이런 화약으로 발동되는 장치들 또는 화약 그 자체였으니 허락 없이 들어온 자, 사실상 지옥의 문을 연 것과 다를 바 없었다.
하지만, 강시라는 이름이 튀어나왔을 때는 당한솔이나 내원으로 돌아간 진윤지나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이미 생(生)과 단절된 존재.
게다가 천혈강시라는 이름도 낯선 것이 아니다.
먼 과거 서역 무림에서 수천 명의 목숨을 앗아가는 악명 속에서 포달랍궁의 기인이 봉인했다는 역사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것을 재등장시킨 것이 하필 천마신교에 또 하필 환진 안이었으니 대체 무슨 일이 벌어질지 예측하기 어려웠다.
내원을 돌아보는 당한솔의 걱정은 야율균은을 지켜보는 걱정만큼이나 큰 것이었다.
그때 문득 당한솔은 뭔가가 바뀌었다는 걸 느꼈다.
‘……어? 잠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