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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의 귀신-234화 (234/432)

234화 - 제43장. 환도강마대진계(幻道降魔大陣界) (2)

확실히 정신이 조금 멍한 상태였다.

그렇다고 몸이 힘들어져 무너질 거 같다거나 혹은 잠시 쉬던가, 한숨 자거나 하는 생각까지 들진 않았다. 멍한 정신 속에서도 저 광대한 환진 속으로 들어가 역할을 해야 한다는 목적은 의식 속에 함양되어 있었다.

다만 서로 방향을 달리하여 점점 거리가 멀어지는 천서은 등의 상황이나 그들이 어떤 시선으로 그를 바라보는지에 대한 것까지 신경 쓸 여력이 없는 수준인 것이다.

무엇이 정신을 멍하게 하는지.

또 전방을 바라보는 그의 시야가 환진의 장막을 타고 흐르는 아지랑이들에 좁혀져 있는지.

진도건도 어렴풋이 인지하고 있었다.

투루루!

성도성의 동문에 이르러 그의 말이 투레질 소리를 내며 멈춰 섰다.

아직 거리가 떨어져 있었으나 말도 본능적으로 저 너머가 위험하다는 걸 느낄 수 있는 것이다.

진도건은 말에서 내려와 환진의 장막 앞으로 걸어갔다.

자색 빛깔의 아지랑이가 공기 중에 떠다니면서 지면 위로 그 경계가 구분되어 있었다. 성문까지 거리가 있고 좌우로 비스듬히 점점 기울어져 있으니 환진이 성도성을 둘러싸고 거대한 원을 그리고 있음을 인지했다.

진도건은 천천히 환막으로 손을 옮겨갔다.

파지지직!

그의 손이 닿자 표면에서 강한 저항이 일어나며 극심한 통증을 안겨주었다.

“흐음!”

신음보다는 호흡을 가다듬는 소리.

다시 손을 뻗는 진도건의 손은 붉은 핏빛 기류가 넘실거리고 있었고 그의 눈동자는 그 어느 때보다 핏빛으로 영롱하게 빛나고 있었다.

파즈즈…….

저항이 느껴졌지만, 종전보다 약해졌다.

그의 손에 넘실거리는 혈마진기가 오히려 환막의 표면과 그 안에 흐르는 마기를 탐닉하며 잡아먹고 있었다. 혈마진기는 점점 팔에서 전신으로 번졌고, 그의 몸도 점점 환진 속으로 진입해 들어가기 시작했다.

마침내 환진 속으로 들어가는 순간, 진도건은 아득해지는 정신과 함께 눈앞이 새하얘졌다.

‘아아……!’

* * * *

아미파를 상대로 한 사혈주의 우세.

거기에 비장의 독술인 이광혈독무로 아미산 금정을 덮어버리자 승기를 완전히 굳힌 듯했다.

아미파의 승려들이 정순한 내공으로 독 기운에 버틴다고는 하나 눈앞에 적이 온전한 상황에서 제대로 된 싸움을 할 수 있을 리 만무했다.

최전선에서 격렬하게 싸우던 복호승이나 장로들조차 기세의 위태로움을 느끼며 복호사 경내까지 후퇴하고는 있었지만, 이는 즉 막다른 길에 몰리게 되었다는 말과 다를 바 없는 것이었다.

사혈주의 그런 기세등등함이 잠시 하늘을 찌를 듯했으나 결코 오래가지 못했다.

아미파에서도 내공이 고강하여 독 기운에 그나마 버틸 수 있는 장로들과 복호승들이 항마복룡진으로 방진을 재구축하는 동안, 당혁수가 홀로 떨어져 나와 고고하게 사혈주 앞에 섰다.

돌출된 돌부리는 정에 맞는 법.

올돌괴와 청혈진인은 이런 상황을 예상하여 그를 위한 맞춤 계획을 준비한 것이 있었다.

그 계획이란 두 사람이 당혁수를 합공하여 잠시 발을 묶는 사이, 아미산 금정과 그 주변 일대를 죽음의 독 지대로 만들어 버리면서 오히려 철수하는 것이었다. 독 지대의 출입은 올돌괴와 청혈진인을 포함한 독공이 일정 수준 이상에 오른 소수만이 가능했다.

당혁수를 포함해 뒤늦게 도착할 당문인들도 아미파를 지키기 위해 제독(除毒) 작업에 매달리지 않는다면 사천 불문의 성지라는 아미산을 지키지 못했다는 오명을 고스란히 뒤집어쓸 테니 꼼짝없이 발을 묶어놓을 수 있는 것이었다.

그 사이에 그들은 유유히 후퇴하면서 성도에서 큰일을 해내고 돌아올 사혈신마와 다시 합류할 고민만 하면 되었다.

당혁수가 홀로 아미파 승려들 사이에서 나올 때만 해도 그 생각은 적중할 것처럼 보였다.

“멍청한 것들.”

당혁수의 싸늘한 중얼거림이 들렸을 때도 그들은 뭐가 잘못되었는지도 몰랐다.

올돌괴와 청혈진인이 좌우로 갈라져 당혁수를 사이에 두고 공격할 준비를 하려 할 때였다.

당혁수가 오른발을 무릎 높이까지 들었다가 그대로 땅을 찍었다.

쿠웅!

진각이 강력하게 울려퍼지며 그 여파가 지각을 타고 퍼졌다. 좌우에 섰던 올돌괴나 청혈진인도 일시 자세가 휘청거렸으니 사혈주도 다를 바 없었고, 아미파 승려들도 마찬가지였다. 아주 잠깐 금정이 무너지는 것 아니냐는 착각까지 할 정도였다.

중요한 것은 그다음이었다.

진각의 파장이 퍼져 나간 순간, 지면의 돌들이 공중 위로 떠 올라 그대로 멈추었다.

그걸 본 청혈진인의 시퍼런 낯빛이 더 퍼렇게 질렸다.

“모두 엎드려!”

그가 급히 부하들 쪽으로 고개를 돌려 소리쳤지만, 소용없는 일이었다.

당혁수가 허공을 휘저은 손짓 한 번에 그렇게 떠올랐던 수십 개의 돌부리가 일순간 전방으로 폭사 되었다.

퍼퍼퍼퍽!

부채꼴로 날아간 돌부리들은 걸리는 모든 것을 꿰뚫고 또 부숴버렸다.

나뒹구는 몇몇 시체들과 혈흔들, 신음과 함께 고통에 찬 충격이 채 가시기도 전에 당혁수의 신형이 사혈주 독인들의 하늘 한가운데로 떠올랐다.

“으아악!”

“도망쳐!”

모두 경악하며 그 즉시 도망치기 시작했지만, 지옥은 아직 제대로 열리지 않았다.

쿠웅!

당혁수의 두 발이 지면에 강하게 내리꽂혔다.

전보다 더 큰 굉음이 울리면서 또다시 수십 개의 돌부리가 공중에 떠올랐다. 당혁수의 신형이 한 바퀴 돌아가며 그 몸짓을 따라 손동작도 바람을 묘사하듯 유려하게 움직이니 공중에 떠올랐던 돌부리가 그를 중심으로 일제히 회오리쳤다.

풍우극뢰(風雨克雷).

허공섭물로 발휘할 수 있는 조화의 극치.

그가 일으킨 기류에 올라타 휘몰아치는 돌부리들은 사상 최악의 살상병기들이나 마찬가지였다.

끄아아아-!

사방에서 터져 나오는 비명들에 올돌괴와 청혈진인은 어안이 벙벙해질 수밖에 없었다.

3년 전, 사혈신마와 적수공권으로 무공을 겨루고 이화침 등의 각종 암기로 그들을 괴롭혔던 당혁수에 대한 기억이 이런 것이 아니었다. 이따금 소규모 교전을 벌였을 때 보여주었던 무용도 이런 것이 아니었다.

청혈진인은 올돌괴보다 머리 회전이 빠른 위인이었다.

‘난전으로 계속하는 게 오히려 더 유리했다. 아미파 비구들이 후퇴하는 걸 포위하면서 양측의 전력이 뚜렷하게 분리된 게 오히려 저 괴물이 움직일 공간을 열어주게 된 거야. 3년 전이나 그 이후 저자에 대한 기억도 결국 맥락은 똑같았어. 혈혈단신(孑孑單身)일 때, 더 강해지는 괴물……. 씨발, 이러다 다 죽어……!’

청혈진인은 계획이 완전히 틀어졌다는 걸 인정했다. 당혁수의 공격에 사망자가 많이 나온 건 아니었으나 대부분 제대로 된 운신이 힘들 정도로 심각한 부상을 당하고 말았다. 시간을 끌면 끌수록 학살의 시간만이 그들을 기다리고 있을 게 분명했다.

“놈을 막아!”

“이 괴물 같은 자식!”

청혈진인이 외치면서 당혁수를 향해 달려들 듯 몇 걸음 나아가자 혼란스러워하던 올돌괴도 분노를 표출하며 당혁수를 덮쳤다.

그 순간, 청혈진인은 급히 방향을 틀어 측면으로 돌아나갔다.

꾸르륵!

혈독무를 들이마신 올돌괴의 몸이 정화사태를 상대했을 때보다 더 크게 부풀어 오른 것처럼 보였다. 모공을 통해 뿜어져 나온 갈색의 독 기운이 그의 전신을 타고 휘감기며 두 손에 모였다.

그의 기세에 반응한 당혁수가 돌아서는 순간, 합마공을 펼친 올돌괴의 쌍장이 어느새 지척에 이르렀다.

쩌엉!

두 고수의 장력이 부딪치면서 굉음이 터졌다.

그 어떤 당문 고수가 펼치는 적련장과 맞대결에서 합마공으로는 한 번도 패한 적이 없던 올돌괴도 당혁수의 적련장은 마치 벽을 두들기는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무공에 담긴 독기 또한 치명적이었는데 당혁수의 체내로 침투조차 하지 못했다.

‘뒤를 공격해라, 청혈진인!’

합마공이 막히자마자 청혈진인의 합공을 기대한 올돌괴가 속으로 외쳤으나 귀에 들려오는 것은 엉뚱한 소리였다.

“모두 후퇴해라!”

“뭐, 뭣?”

올돌괴는 잠깐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합공을 위해 당혁수의 측면으로 돌아나갔다고 생각했던 청혈진인의 뒷모습은 오히려 멀어지고 있었다.

올돌괴는 자신이 미끼로 쓰였음을 깨닫고 이를 빠득 갈았다.

“이 개자식이!”

그는 그 이상으로 더 욕할 여유를 갖지 못했다. 녹주팔지 중 으뜸이라는 올돌괴를 잡을 기회가 왔는데 당혁수가 알아서 놔줄 리 만무했기 때문이었다.

청혈진인은 이미 숲속으로 모습을 감추었고 사혈주 독인들도 허겁지겁 도망치기 시작했다. 거의 대다수가 크고 작은 부상을 입은 터라 신속하게 도망칠 수는 없었지만, 하나같이 올돌괴가 미끼가 된 상황을 보며 다행이라 생각했지 그를 걱정하는 자는 없었다.

“껍데기가 튼튼하군.”

당혁수가 적잖이 감탄하여 중얼거렸다.

그의 주먹과 발이 가차 없이 꽂혔지만, 올돌괴의 외피 자체는 큰 상처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겉보기와 달리 올돌괴는 이미 몸 내부가 만신창이였다.

당혁수의 빠른 손에 반응하기 어려웠으니 그가 할 수 있는 건 고작 버티는 일뿐이었다. 이미 입술 사이나 코로 검은 피가 흘러나오고 있었으니 내상이 상당했었다. 절망밖에 남지 않은 상황 속에서 그에게 남은 건 악다구니뿐이었다.

“크흐… 큭큭! 당가야, 그만큼 네 주먹이 형편없다는 소리다!”

당혁수가 가소롭다는 듯 피식 웃었다.

그가 오른손으로 올돌괴의 어깨를 우악스럽게 잡았다.

순간 어깨에 느껴지는 압력에 올돌괴의 눈빛이 파르르 떨렸다.

“끄아악!”

투두둑!

올돌괴가 끔찍한 고통에 비명을 질렀다.

번쩍 들린 당혁수의 손엔 통째로 뜯겨나간 살가죽이 쥐어져 피를 뚝뚝 떨어뜨렸다. 딱딱하게 굳은 피부가 듬성듬성 제멋대로 분리되어 있으니 그 사이로 손가락을 꽂아 넣고는 쥐어 뜯어버린 것이다.

당혁수의 왼손이 올돌괴의 목줄을 움켜쥐었다.

“서문질은 어디 숨었지?”

올돌괴가 자신의 피로 흠뻑 젖은 왼손을 들어 자신의 목줄을 틀어쥔 당혁수의 팔을 움켜쥐었다. 독공 수련으로 독에 점철된 그의 피는 피부에 닿는 것만으로도 중독을 일으킬 수 있기 때문이었다.

치이이이……!

전혀 침투하지 못하는 것인지 올돌괴가 움켜쥔 팔에서 뿌연 연기와 함께 메케한 냄새가 풍겼다.

숨통이 조여와 붉어진 올돌괴의 표정엔 절망감이 한층 더 짙어졌다.

“다시 한번 묻는다. 서문질은 어디 있지?”

당혁수의 물음에 올돌괴가 잠깐 머뭇거리는 사이, 한쪽 능선길에서 일단의 사람들이 나타나 복호사 경내로 진입했다.

바로 당혁수와 함께 달려왔었던 당군명 등 당문인들이었다.

이미 싸움은 종결된 상황이었지만, 중독 증세로 죽어가는 승려들과 여기저기 독기에 오염된 지대들을 본 당군명이 빠르게 판단을 내렸다.

“서평이는 스무 명을 데리고 아미파 스님들의 해독을 도와라. 청산이는 나머지를 데리고 일대 제독 작업을 서둘러라.”

“예!”

“가자!”

당서평과 당청산이 동시에 대답하면서 제자들을 데리고 각자 목적에 맞게 흩어졌다.

예상했던 당문인들까지 모두 올라온 걸 확인하자 올돌괴의 얼굴에도 체념의 빛이 떠올랐다. 그는 마지막 회한을 담은 눈빛을 한 채 입가에 조소를 머금었다.

“클클클……! 주령께서 어디 있냐고? 글쎄, 지금 서둘러 성도로 돌아가면 폐허가 된 당문과 네 일가족의 시체 더미 위에서 볼 수 있을지도……. 크크크크!”

가까이 다가오던 당군명의 발걸음이 뚝 멈췄다. 심장이 덜컥 내려앉는 기분으로 당혁수의 얼굴을 바라보는데 부릅뜬 눈과 하늘을 바라보며 치솟은 수염과 머리카락들이 그 분노를 고스란히 드러내고 있었다.

삼양지공(三陽指功).

푹!

털썩!

당혁수의 검지가 정화사태의 선장으로도 뚫지 못했던 올돌괴의 관자놀이 부위를 꿰뚫고 빠져나왔다. 비명조차 지르지 못하고 눈조차 감지 못하는 허무한 죽음이었다.

“가주!”

당군명이 걱정에 찬 목소리로 당혁수를 불렀다.

“군명아, 여길 잘 수습해다오. 사안이 사안인 만큼 홀로 가는 것이 더 빠를 것 같다.”

“여긴 걱정 마십시오. 꼭 가족들을 지키고 서문질 그놈을 죽여 주십시오.”

당혁수가 고개를 끄덕이며 당군명의 어깨를 두드려주었다. 그는 정화사태에게 작별인사를 건넬 시간도 아까웠는지 금정에 올라왔던 절벽에 가까운 경사로 쪽으로 경공을 펼치며 순식간에 모습을 감추었다.

그가 지나간 자리에 거친 돌풍이 미처 뒤를 쫓지 못하고 허무하게 휘몰아쳤다.

당군명으로서도 생전 처음 본 당혁수의 질풍 같은 경공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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