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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의 귀신-232화 (232/432)

232화 - 제42장. 화불단행(禍不單行), 재앙은 번번이 겹쳐 온다 (6)

적의 적은 아군이 될 수 있다는 것 정도는 호상도 알고 있었다.

“원군이다! 모두 대오를 갖춰 싸워라!”

흩어진 기강을 바로잡기 위해 호상이 서둘러 군사들을 호령한다. 그 호령에 힘입어 아직 난전에 휘말리지 않은 병사들이 다시 대오를 갖추려 할 때, 전장 한복판에서 일대를 집어삼킬 만한 앙천대소가 울려 퍼진다.

“크하하하하하!”

뜻하지 않게 또 다른 강적을 만나게 된 혁무술이 기쁨의 일성을 토해냈다.

천하오절 다섯 가운데 마지막이라는 평가라고는 하나, 분명히 화경의 절대고수란 건 틀림없었으니 당혁수와 같이 검증되지 않은 자보다 좋은 상대라는 건 틀림없었다.

관군은 누구도 그에게 접근하려 들지 않았다.

본능적인 공포가 접근조차 불허했던 것.

칼과 피, 비명이 난무하는 전장 속에서 팔짱을 낀 채 유유히 배회하며 심드렁했던 혁무술의 사자 같은 얼굴에 웃음꽃이 만발하였다.

즉시 말고삐를 당기며 말머리를 돌렸다.

“이럇!”

혁무술의 거구를 실은 말이 전장을 이탈하여 700명의 낭인 결사대를 마주했다.

선봉에서 검은 갑주와 같은 것을 두른 안효철이 뿜어내는 존재감의 향취를 한껏 들이킨 혁무술이 실소를 흘리며 말에서 내렸다. 그의 두꺼운 두 손이 말의 목과 머리를 쓰다듬었다.

우두둑!

말의 모가지가 비틀리며 끔찍한 소리가 울려 퍼졌다. 혁무술이 자신의 육중한 거구를 싣고 달릴 수 있을 정도로 커다랗고 근육질이었던 기마를 번쩍 들어 올렸다.

그 광경을 목격한 안효철이 낯빛을 굳혔다.

“모두 피해라!”

“흐랴아앗!”

두 절대고수의 외침이 동시에 터졌다.

마치 대포의 주둥이에서 포환이 쏘아진 듯 말의 사체가 안효철의 정면으로 날아갔다.

투웅!

동시에 경공을 펼치면서 말의 거대한 그림자 뒤에 숨어 달리는 혁무술.

즉각 말에서 내려 앞으로 튀어 나가는 안효철.

두 절대고수의 충돌을 피해 좌우로 갈라지는 전장을 향해 돌진하는 중천의 낭인들.

난전 속에서 뜻하지 않게 새로운 적을 추가로 맞닥뜨려야 함에 당황하는 광혈마종과 희망의 불씨를 되살리려는 성도성의 호상과 병사들까지 새로운 혼란은 그렇게 만들어지고 있었다.

* * * *

성 밖에서 도적 떼를 토벌하기 위해 기병대가 출병하자 그걸 본 성내 민심이 혼란에 빠졌다. 운남 방향에서 남만족(南蠻族)이나 사천 서북부 지역에서 강족(羌族) 등의 이민족이 창궐하여 백성들을 괴롭히는 역사가 있었으나 그래도 근 십수 년은 꽤 평안하게 지냈었기 때문이었다.

그런 혼란이 성도 내로 점점 퍼져나갈 무렵, 성내에 퍼져 순찰 등의 업무를 보고 있던 당문의 고수들도 외원으로 복귀하라는 명령을 하달받아 마찬가지로 약간의 혼란이 생긴 상황이었다.

가뜩이나 사혈주 때문에 다들 민감해져 있던 터라 전체 복귀 명령은 긴장하게 만들기엔 충분했다.

“분위기가 좋지 않아.”

“느닷없이 출몰한 이민족 떼로 민심도 동요하는 마당인데 강호 무림도 혼란스럽긴 매한가지니.”

“이곳 사천은 결국 사혈주를 처리해야 아마 평화로워질걸.”

“어쩌면 사혈주가 끝이 아닐지도 몰라. 요즘 내원의 어른들 분위기가 심상치 않다잖아.”

“창천맹에서 고수들을 파견했다며? 진 부인께서 그들과 만나고 돌아오셨는데 다 딴 길로 새버리고 같이 온 사람은 여자 하나라던데?”

“마교의 환도마종이 엮여있다는 소문이 있더군요. 최근 사천에서 벌어진 여러 사건이 그들 짓이라고…….”

“대단한 놈들이야, 그 개방이 냄새도 맡지 못할 정도라니. 추적해서 잡아내는 게 있어야 우리도 대비할 텐데 말이야.”

성도 전체로 갈래갈래 퍼져있던 당문 고수들이 점차 당문 쪽으로 모이면서, 중간중간 동선이 겹친 사람들이 삼삼오오 모여 복귀하고 있었다. 돌아오는 길에서 이런저런 현황에 대한 얘기를 주고받는 그들의 모습이나 불안감에 헛소리를 떠들어대는 백성들의 모습이나 다를 것이 없었다.

개중에는 청성파 도사들도 있었고 중소방파 무인들도 있었는데 현 성도 내의 분위기와 당문인들의 이동을 긴장 어린 시선들로 보고 있었다.

그런 총체적인 혼란과 그 무거운 공기가 성도성 내 도시 전체를 짓누르고 있을 때였다.

“어?”

내공이 깊은 고수들이 먼저 반응했다.

찰나 정신이 아찔해지는 경험과 어딘가 달라지기 시작한 공기 그리고 시야에 잡히기 시작하는 자색 빛깔의 아지랑이들까지.

불길한 느낌이 강하게 엄습해올 때, 또 하나의 깜짝 놀랄 만한 상황이 지척에서 벌어진다.

풀썩!

풀썩!

우당탕!

길가에 백성들이 하나둘씩 연속적으로 혼절하여 쓰러지기 시작했다. 누군가는 쓰러지면서 집기들을 무너지기도 했다. 고요와 소란이 동반된 갑작스러운 상황이 무림인들을 더욱 당황스럽게 만들었다.

“뭐, 뭐야? 무슨 일이야, 도대체?”

“이거……, 설마!”

“하, 하늘을 봐라!”

일렁이는 아지랑이들을 쫓아서 하나둘 고개를 든다. 비 갠 뒤의 화창한 하늘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지금 발 딛고 선 세상이 과연 현세(現世)가 맞는지 착각 속에 빠져들었다.

창천(蒼天)이 자천(紫天)이 되었다.

한층 더 무겁고 찐득해진 공기가 숨통을 옥죄었다.

내공을 갖춘 자만이 중압감을 견디어 혼절하지 않을 수 있었지만, 무림인들은 비단 그것으로 끝나지 않으리란 걸 직감한다.

히아아아아-!

괴이한 이명(耳鳴), 반복적으로 눈앞이 아찔해지는 상황 속에서 자색의 장막 뒤에 숨어있다가 대놓고 모습을 드러내는 정체불명의 복면인들이 있었다.

환도의 이름을 가슴에 품은 자들.

교리를 숭상하는 마교도로서, 원천적인 마기가 단전에 뿌리내린 마인으로서 사천 무림을 향한 살계를 펼치기 시작했다.

외원을 정리하던 진윤지와 당한솔도 ‘자천’을 보았다. 그리고 그들이 숨 쉬고 있는 공간 안으로 이질적인 무언가가 한가득 채워진 것 또한 느낄 수 있었다.

그것은 딱 무엇으로 형용할 수는 없었으나 정신을 똑바로 차리지 않는다면 금방 오감에 의한 판단능력마저 상실할지도 모른다는 예감에 본능적으로 맞서 싸우고 있었다.

당주형은 가장 높은 전각의 지붕 위로 올라가 주변을 살피고 있었다. 그리고 굳은 표정으로 진윤지에게 다가와 보고하니 그 내용이 보통 심각한 것이 아니다.

“아무래도 환도종의 환진이 성도 성 전체에 걸쳐 펼쳐진 것 같습니다. 저런 자색 하늘은 경계 없이 이어져 있고 성내 도시엔 알 수 없는 기류들이 넘실댑니다. 곳곳에서 싸움도 벌어지고 있습니다. 이곳도 위험에서 예외는 아닐 것입니다.”

심각한 것은 당주형의 보고만이 아니었다.

키에에에-!

으악!

괴이한 귀곡성이 고막을 찌르고 그 끝엔 항상 비명이 꼬리를 문다.

그 강렬한 청각의 자극들이 점차 당문과 가까워지고 있었다. 그리고 보랏빛 안개 속에서 마치 원래부터 그 자리에 있었던 것처럼 모습을 드러내는 자들.

“환도마종……!”

누군가는 복면을 쓰고 있고, 또 누군가는 얼굴을 드러내고 있었다. 소매 아래 드러난 팔이나 목, 간헐적으로 얼굴까지 비추는 그들의 피부엔 기형적인 문신이 있어서 그 위로 푸른 광택이 흘러내렸다.

슈슈슈!

귀신이 이동하는 듯한 움직임.

환진 속에서 그들은 전에 없는 자유를 느낀다.

카캉! 챙! 챙!

반면 맞서는 당문 고수들은 전에 없던 구속을 당하는 기분이 들었다. 백여 명이나 되는 당문 소속의 제자, 무사들이 모두 모여 외원을 방어하고 있었지만, 환도종의 숫자도 그에 못지않다.

아니, 그들의 수는 조금씩 계속 늘어나고 있었다.

그뿐만이 아니다.

키에에에엑!

공기중으로 자색 아지랑이가 타고 돌았는데 때때로 그것이 뭉쳐지는 순간, 그 속에서 갑자기 소름 끼치는 귀곡성과 함께 괴이한 손이 튀어나왔다. 손 자체도 다소간 기형적인 데다가 크기도 컸고 손톱도 소름이 끼칠 정도로 컸는데 순간 나타나 기습을 하고는 허공에 흩어지듯 사라지는 게 몹시도 기이했다.

나타나고 사라지는 건 환각에 가까운데 그런 공격에 쓰러지는 자들이 속출하기 시작하는 것을 보면 실체로서 존재하는 것이 분명하다.

비단 그런 괴수(怪手)뿐이랴.

어디선가는 짐승처럼 생긴, 늑대인지 사자인지 모를 야수의 형상이 나타나 팔이나 어깨를 물어뜯고 지나가기도 했다.

어디선가는 칼날이나 창살과 같은 형상으로 나타나 공격하기도 했다.

그것들이 모두 환도종의 마인들에겐 어떤 악영향도 끼치지 않은 채 당문 사람들만 노리며 나타나니 그야말로 귀신이 곡할 노릇이었다.

환도강마대진계.

그 환막의 경계 안에서 환도종을 비롯한 모든 마인들은 ‘환도(幻道)’로 연결된다.

단전에 품은 마기가 그 매개체가 되니 마인들의 의지에 호응하여 환진을 이루는 기운들이 능동적으로 반응한다. 그것은 결국 ‘강마(降魔)’로써 나타나 마인들에겐 협력의 실체로, 적들에겐 두려움을 동반한 치명적인 위협으로 발현된다.

허락받지 않은 자 들어올 수 없고, 한 번 안에 속한 자 함부로 나갈 수 없다.

범인은 정신 자체를 유지할 수 없고, 내력이 얕은 자는 환각에 고통을 받을 것이며, 내력이 강한 자도 본래의 힘을 발휘할 수 없을 것이다.

환도강마진계에 다섯 개의 대도등(大圖騰)을 더해 만든 ‘대진계’는 분명 환도종 최고의 환진임에 틀림없다.

‘형세가 위태롭구나……!’

싸움이 시작된 지 오래 지나지 않았고 아직 당문 전력은 살아있었지만, 당한솔은 상황이 결코 낙관적이지 않다는 걸 느끼고 있었다.

그도 독이 묻은 이화침을 날리고 유성반을 조종하면서 후방 지원을 충실히 하고는 있었다. 하지만, 느닷없이 나타나는 환영들의 공격은 어떤 견제수단도 소용이 없었으므로 기동이 불편 한계를 여실히 절감하고 있는 터였다.

슈아악!

카앙!

갑자기 등 뒤에서 발톱이 나타나 당한솔의 등을 할퀴려 들었었다. 다행히 적절하게 그 사이를 끼어든 야율균은의 쌍곡도에 막히자 이내 안개처럼 흩어져 사라졌다.

등골이 오싹할 정도의 위협이었기에 당한솔도 깜짝 놀라 호흡을 헐떡였다.

“헉…헉……! 고, 고맙습니다.”

야율균은도 마음껏 싸울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그녀나 진윤지 둘 중 한 사람은 당한솔을 지켜야 할 필요가 있었기에 상황에 따라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며 싸우고는 있었지만, 결코 효율적으로 움직이고 있는 게 아니란 걸 알고 있었다.

으드득!

“끄어억!”

“사천당문의 위명에 비하면 수준이 형편없군.”

격전 속에서 한 사내가 싸늘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흰 옷자락을 머리부터 시작해 다리 부근까지 걸치듯 치렁치렁하게 두르고 있었고 밖으로 내놓은 두 팔과 몸엔 상당히 많은 문신이 그려져 있었다. 얼굴은 눈만 뚫린 무면(無面)의 백가면(白假面)을 쓴 자였는데 두 눈구멍 밖으로 흘러나오는 푸른 안광이 섬뜩하기 그지없었다.

이 백가면의 사내가 바로 환도마종 중도환마(中道幻魔) 백기린이었다.

그는 나타나자마자 순식간에 다섯 명을 해치웠다. 공격을 펼칠 때마다 움직임을 따라 나타나는 환영체는 마치 강기와 같은 위력을 지녀 누구도 공세를 버티지 못하고 있었다.

“사술에 의존하는 자격 없는 자들이 수준을 논하다니.”

백기린의 목소리가 싸늘하기 그지없었다면 이 중후한 목소리는 격전지에 어울리지 않는 온화함을 품고 있었다.

휘익!

접근하는 기척에 놀란 백기린이 몸을 돌리며 쌍장을 쳐냈다. 그의 동작 속에서 두 팔을 둘러 비늘 덮인 이무기의 환영이 나타나 장력에 힘을 더했다.

퍼펑!

무거운 충돌이었다.

백기린과 기습한 사내의 신형이 비슷한 거리만큼 뒤로 밀려났다.

“너, 누구냐?”

“당주형. 당문을 지키는 당가사수 중 한 사람이다.”

적지 않은 삶의 후반기엔 당문의 삼양귀원신공보다 아미의 무상대정신공을 더 가까이하여 수련하면서 그의 부동심은 아미산의 금정처럼 흔들림이 없었다.

다른 당문인들에 비해 환진의 영향을 상대적으로 덜 받고 있었기에 그는 자신의 무공을 전력에 가까운 수준으로 발휘할 수 있었다.

“훗, 네놈은 아미산에 있는 줄 알았건만. 좋다, 그분께서 오실 때까지 넌 내가 맡아야겠다.”

환도종이 아미파에 대해 당문과 같이 환진을 설계하지 않은 것은 도문이나 불문의 문파들에겐 그 효과가 반감되기 때문이었다.

백기린이 덤벼들자 당주형이 맞상대하면서도 그가 남겼던 말엔 궁금증을 갖지 않을 수 없었다.

“그분?”

“그래, 당씨의 멸족만이 소원이라는 바로 그분 말이다.”

백기린과 당주형 사이로 십여 합을 빠르게 겨룰 때, 두 사람의 대화를 멀지 않은 곳에 있던 당한솔과 진윤지도 똑똑히 듣고 있었다.

“그분……, 설마?”

진윤지의 낯빛이 어두워지며 불신의 의문을 드러내는 그때, 멀리 자색 안개 사이로 반백발을 휘날리며 걸어오는 녹의노인을 발견했다. 당한솔은 녹의노인을 처음 보았지만, 진윤지는 당문의 숙적의 모습을 절대 잊지 않았다. 그래서 그녀느 녹의노인의 이름을 자기도 모르게 중얼거리고 있었다.

“서문질……!”

그 이름을 들은 당한솔을 비롯한 싸움 중인 당문인들 모두 속이 덜컹 내려앉는 기분을 공유했다.

사혈신마, 아미산에 있을 것으로 예상했던 그가 어떻게 이곳에 나타났단 말인가?

그가 거기에 나타난 것은 순전히 즉흥적인 결단이었다.

이화림의 환진이 깨질 경우를 가정했을 때 고민하던 걸 즉각 실행이 옮긴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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