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1화 - 제42장. 화불단행(禍不單行), 재앙은 번번이 겹쳐 온다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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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도강마대진계가 발동하기 한 시진 전.
염황종과 연계하여 백제성에서 구룡문을 패퇴시킨 광혈종은 다음날 오후까지 폐허로 변한 백제성에서 야영했다.
구룡문 잔당들을 놓친 것보다 아쉬웠던 것은 어디서도 금태하의 시체나 흔적을 찾을 수 없었던 것이지만, 천마신교가 두 마종에게 요구했던 두 가지 중 하나는 완수했다는 측면에서 소기의 성과를 거두었다고 자평할 수 있었다.
요구받은 건 크게 두 가지.
사파무림 삼강 중 하나인 구룡문을 멸문시킬 것.
천하오절 가운데서도 가장 강력하다고 평가되는 금태하를 처치할 것.
전자는 사실상 구룡문 아홉 계파 가운데 여섯 개가 지리멸렬하였으니 향후 수십 또는 백 년 이상 과거의 영광을 찾기는 어려울 것이 자명했다.
후자는 일단 실패하긴 했으나 광혈신마와 염황신마의 합공에 패퇴했으니 그가 입은 내상도 극심할 터. 천마신교에 운이 따른다면 어딘가에서 객사하는 게 최선일 것이며, 그렇지 않다고 하더라도 중원의 다른 큰 세력을 먼저 깎아낼 수 있다면 그 이후에도 대처는 가능하리라 보았다.
광혈종도 피해가 적었 건 아니었다. 생존자로 따지자면 삼분지 이가 살아남았으나 당장 전투를 지속할 수 있는 인원은 절반 정도에 불과했다. 물론 구룡문을 상대로 이 정도면 전력을 상당히 보존했다고 평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염황종과 연계시킴으로써 더 큰 결과를 원했던 것이니만큼 지금의 상황이 아쉬워졌다고 평해야 할지는 앞으로 며칠 내에 가름이 날 터였다.
천마신교의 계획대로 염황신마는 염황종을 이끌고던 북쪽 산계를 타고 북상했으며 광혈신마의 광혈종은 빠르게 서진하여 사천으로 진입했다.
백제성에서부터 사흘간의 진격.
성도 동쪽에서 남북으로 장벽을 이루고 있는 산자락의 북쪽 경계를 마침내 돌파하여 성도성의 성곽을 바라보고 있었다.
“뭐야? 아직 환진 발동이 안 된 건가?”
성도성을 바라보며 오규가 인상을 찌푸렸다.
이틀 전 받은 전갈에 따르면 오늘이 바로 기일이었다. 성곽을 둘러쳐야 할 환진이 아직 보이지 않는다는 건 전투가 개시되지 않았다는 뜻이었다.
옆에 있던 태량이 큼지막한 호리병을 입에 물고 술을 벌컥벌컥 들이켰다. 강한 내공 때문에 만취한 적은 없었지만, 언제나 코끝과 볼이 빨개져 있어서 그를 처음 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오해할 정도로 많이 마시고 있었다.
“꺼억! 크흠, 흠! 근데 환진이 아직 발동되지 않았으면 좀 있다가 들어가도 되는 것 아니유? 이거 말을 너무 많이 탔더니 허리도 시큰하고. 가까운 마을 하나 털어서 좀 쉬다 가는 게 어떻습니까? 신마님.”
호리병을 든 손의 새끼손가락을 펴서 콧구멍을 후비고 다른 손은 불편한 고간을 쥐고 잠깐 흔드는데 그 모습을 어쩌다 보고만 채모조가 인상을 세게 찌푸렸다. 그가 왜 그런 표정을 지었는지 본 태량이 피식 웃음을 흘렸다.
“클클! 뭐 이 새끼야?”
“추잡스러운 새끼, 거리 좀 벌려라.”
태량이 새끼손가락 끝에 묻은 코딱지를 튕기자 채모조가 급히 말 등 위에 바짝 엎드렸다.
코딱지 따위에 공력까지 싣지는 않아서 금방 맞바람에 날려 뒤따르던 누군가가 맞았을 테지만, 분명 자신을 향해 손가락 튕기는 걸 본 채모조가 그 뒤로 태량을 향해 신랄하게 욕지거리를 퍼부었다. 그러나 태량은 든든한 술배를 쓰다듬으면서 켈켈 대고 웃을 뿐이었다.
“시끄럽다, 이것들아.”
혁무술이 한 마디 던지자 소란이 잦아들었다.
“밖에서 노는 건 재미도 없지만, 함부로 민관을 건드려서 귀찮게 하지 말라는 지시다. 그리고 싸울 거면 싸울 줄 아는 놈들과 싸워야지. 차라리 그냥 일찍 들어가 당문 놈들을 치는 게 낫지 않겠느냐?”
“당혁수가 천하오절 수준으로 대단하다는데 지금은 아미산에 묶여있지 않겠습니까?”
“그것도 그렇군.”
채모조의 반문에 혁무술이 고개를 끄덕였다.
고개를 끄덕이던 혁무술이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왼쪽 어깨부터 승모근, 목까지 이어지는 근육이 경직되어 통증이 발생했기 때문이었다. 비단 그뿐만이 아니라 이따금 온몸 여기저기서 통증이 밀려오기도 했다. 바깥으로 표정을 드러내진 않았을 뿐, 금태하와 치렀던 혈투의 여파를 속으로 삭이는 중이었다.
‘쳇, 이 몸으로 천하오절과 같은 화경급 고수를 다시 상대하는 건 버겁겠지?’
그렇다고 잔챙이들을 상대로 힘을 쓰기엔 흥미가 돋지 않았다. 그만큼 금태하와의 싸움은 그에게 매우 강렬하게 다가온 것이다.
문득 수염 없이 반들반들한 턱을 쓰다듬으며 비릿한 미소로 그를 내려다보던 일월신마의 얼굴이 떠올랐다.
‘쳇, 하필 그 늙은이가 떠오르다니.’
힘에 취해 나대지 말라는 지적질에 반항했다가 흠씬 두들겨 맞았던 아픈 기억이었다. 별 차이 없을 거로 생각했던 게 산산이 부서졌던, 강함이라는 기준을 다시 생각하게 했었으니 지금 금태하에게 받은 인상과 유사한 느낌이었다.
일월신마에게 호되게 당했던 이후로는 자신보다 어린 교주에게 도전할 생각은 아예 접어두기도 했었다.
“성내로 무리하게 진입하려 들면 뒤탈이 생길 수도 있으니 멀찍이 맴돌다가 환진이 발동되면 들어가는 게 어떻겠습니까?”
“그래라.”
혁무술이 심드렁하게 대답했다.
그에게 있어선 성도 진입과 더불어 당문을 공격하는 일은 다 사혈신마 서문질을 위한 계획의 일환이었으니 애초에 금태하를 상대하는 것과 달리 이 임무엔 큰 흥미가 없었다.
물론 그와는 달리 다른 자들은 당장이라도 싸움을 벌이고 싶어 하는 모양이었다.
“아오! 야, 채모도. 정말 그게 최선이냐? 이 오규님의 비싼 도끼를 그냥 시간 보내는 데 썩히라는 거냐?”
“클클클! 싸우기도 전에 이 술에 내가 취하면 채 형이 책임지슈.”
“근데 성도엔 돈 많은 새끼들 많잖아? 이번 기회에 한탕 해야 하는데 말이야?”
서로 다른 목소리와 말들이 난삽하게 섞이자 채모도는 머리가 지끈거리는 걸 느꼈다.
사수인은 하나같이 악명 높은 범죄자들이어서 그런지 하나같이 성질이 극성맞았다. 채모도 자신도 한 성질 했음에도 다른 세 사람의 기세가 저마다 너무 세서 오히려 그도 모르게 상대적으로 침착해지는 부작용을 남모르게 호소하고 있을 정도였다.
‘에휴, ……돼지새끼들.’
다른 사수인들을 한심한 눈으로 쳐다본 채모도는 속으로 한숨을 쉬며 고개를 흔들었다.
“어, 저거 관군 아니오?”
그때 누군가 외친 말에 그가 반응하여 고개를 들었다.
과연 성도성 쪽에서 일단의 기병들이 나오고 있었는데 그 숫자가 족히 수천은 되어 보였다.
“크카카카! 저것들 뭐야? 설마 우릴 뭐 도적 떼처럼 보고 토벌하겠답시고 나온 거야?”
오규가 가소롭다는 듯이 웃음을 터뜨렸다.
그의 짐작이 맞았다.
2천에 가까운 일단의 무리가 말을 타고 나타나자 성도에서 도적 떼나 이민족으로 오인하고 기병 부대를 출병시킨 것이었다. 빠르게 정리하고 오라며 그 숫자도 5천 명에 이르는 규모였으니 수적 우위로 인해서인지 달려오는데 꽤 기세등등했다.
“클클! 딱 화풀이하기 적당한 상대인 거 같은데요, 해도 됩니까?”
태량이 혁무술을 보며 물었다.
채모도는 고개를 저었다.
“관군입니다. 그저 잠깐 퇴각해서 회군할 명분을 주고 돌려보내는 게 낫습니다. 이번 계획에 관을 적대하는 경우는 없다는 게 지시사항이었습니다.”
“야 이 새끼야! 우리 광혈마종이 등을 보인다는 게 어디 말이나 되느냐?”
“저, 저 겁쟁이 새끼.”
“클클클! 저것들 찜 쪄먹어 봐야 뭔 일 있겠냐? 군을 일으키거나 한다면 아예 주자사를 처리하고 우리 사람으로 갈아치우면 될 거 아니냐?”
“군관을 상대하는 건 더 신중하고 치밀해야 하는 법이다, 이 술돼지 새끼야.”
“클클클! 돌연변이 괴물 자식이 얻다 대고…….”
사수인 간에 살기까지 들끓자 여기저기서 오히려 웃음이 터져 나왔다. 원래도 자주 시비가 붙으며 싸우기도 했던 관계니, 일상적인 광경이었다.
혁무술은 심드렁한 표정을 한 채 소지로 귓구멍을 후벼댔다. 그러면서 전방을 물끄러미 바라보더니 무심하게 입을 열었다.
“너희들 떠드느라 이미 많이 가까워졌다. ……몸들 풀어라.”
“클클클! 옳으신 결정이십니다. 겁쟁인 빠져라, 채가(蔡家)야. 클클클!”
“뒤치다꺼리할 일이 생기면 널 제물로 삼아줄 거다, 돼지 새끼.”
채모조라고 결사반대할 생각은 없었다.
그저 관군과의 싸움을 피하는 게 향후의 수고로움을 덜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 때문이었기에 태량을 보고 짧게 으르렁거리고는 그도 기형적으로 긴 팔의 소매를 걷어 올렸다.
까앙!
오규가 쌍부를 머리 위에 대고 세차게 부딪쳤다. 그가 살기등등한 기세로 소리친다.
“자, 한 놈도 남기지 말고 싹 쓸어버려라!”
5천의 기병대는 처음엔 오랜만의 도적 토벌에 호기롭게 출병했었다. 그러나 광혈종 무리가 점점 가까워지면서 선두에서 말을 달리던 장수 호상(豪爽)은 뭔가 불길한 느낌을 받았다.
광혈종 무리 가운데서도 두 인물의 덩치가 상당했는데 쌍부를 든 도적도 제법 컸지만, 팔짱을 낀 채 말에 타고 있던 남자는 보통 사람들보다 두 배는 더 큰 것 같은 착각이 일었다. 게다가 온갖 괴성과 웃음소리를 지르면서 돌격해오는데 절로 소름이 돋았다.
‘이, 이자들 보통 도적이 아니다! ……설마 무림인인가?’
명백하게 수적인 우위에 있었지만, 호상은 진지하게 전투를 치를지 갈등했다. 그리고 그가 머뭇거리는 사이 바로 옆 부장들이 창을 높이 들며 호기롭게 외친다.
“자! 도적 떼들에게 쓴맛을 보여줘라!”
“돌격하라!”
그들에게 있어선 정말 간만의 국지전.
일방적인 학살을 할 수 있을 거란 기대감은 승전에 대한 기대감과 맞물려 병사들을 구렁텅이 속으로 밀어 넣는다.
우와아아아!
분위기에 휩쓸려 덩달아 말에 박차를 가해버린 호상도 이미 돌이킬 수 없음을 깨달았다.
“도, 돌격하라!”
우두두두!
기마의 속도를 더한다.
군마의 뜨거운 콧바람을 뚫고 아래에서 피어오르는 먼지구름을 짓밟으며 창대를 장전한다.
찌르기 돌격으로 적들을 꼬챙이 신세를 만들어주겠다는 각오 속에서 거리가 좁혀지고 적들의 면면이 병사들의 눈동자에 들어오는 순간, 호기로웠던 늑대의 자신감은 어느새 양 떼의 두려움에 찬 눈망울이 되어버리고 만다.
“끼얏호우-!”
“죽여라!”
퍼퍼퍼퍽!
꽤 단단하게 세워놓았던 창대를 가볍게 비껴버리며 칼날이, 도끼가, 기형적인 꼬챙이들이 투구를 뚫고 두개골들을 박살 냈다.
피가 튀고, 뇌수가 튀고, 두려움도 가슴 속에서 바깥으로 튀어나온다.
호상의 눈이 당혹감에 가득 물들었다.
그보다 먼저 돌격을 외쳤던 부장들은 모두 죽어 나갔고 전장은 금방 아비규환으로 바뀌었기 때문이었다.
“나, 나를 따르라!”
전열을 다시 바로 세우고 기동전을 위해 명령을 내렸지만, 제대로 통제되지 않았다.
광혈종은 적은 숫자를 이용하여 5천 기병 속으로 깊숙이 침투하였다. 그들이 벌이는 난전은 마치 갈고리 달린 그물처럼 병사들 하나하나를 옭아매며 부들부들한 살가죽 속으로 칼날을 무자비하게 쑤셔 박아댔다.
불과 2천 남짓한 기마만이 호상의 뒤를 쫓아 난전에서 빠져나왔지만, 저렇게 얽혀 있어서야 다시 돌파를 시도해도 효과가 떨어질 수밖에 없었다.
전쟁 경험도 없는 장수와 훈련 상태가 떨어지는 부대의 대응이 가져온 처참한 참극에 좌절할 때,
“자, 장군! 저길 보십시오!”
병사 하나가 전장 너머 반대편을 손가락으로 가리킨다.
언제 나타났는지 일단의 기마 무리가 전장을 향해 똑바로 돌진하고 있는데 그 위세가 심상치 않다. 난전을 벌이는 적들도 새로운 무리의 등장에 당황했는지 열의가 한풀 꺾이는 게 보였다.
무엇보다 그 기마 무리의 선봉에서 달려오고 있는 검은 갑주의 사내의 외침이 인상적이다.
“나, 천하오절 철갑권왕 안효철이다! 마교의 광혈신마와 광혈종은 중천의 단죄를 받아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