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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의 귀신-230화 (230/432)

230화 - 제42장. 화불단행(禍不單行), 재앙은 번번이 겹쳐 온다 (4)

“킬킬킬킬!”

올돌괴가 연신 웃음을 터뜨리며 후방으로 물러났다.

그가 비로소 선 곳은 녹주팔지 서열 두 번째인 청혈진인(靑血眞人)의 옆이었다.

태극문양의 큼지막하게 새겨진 도포를 입고 있었으나 도포 바깥으로 보이는 그의 피부는 온통 푸르딩딩하여 이 세상 사람이 맞는지 의심스러울 정도의 괴이한 중년의 도사였다.

구음독천마공의 경지가 낮을 땐, 겉으로 나타나는 부작용은 없다고 봐도 무방했다. 공력에 독기가 실리는 것만으로도 실익이 있으니 녹주팔지 중 하위 서열은 그 수준에서 만족하는 법이 잦았다. 그러나 진정한 독인으로서의 힘을 원한 자들은 더 많은 극독을 몸에 적용하고 마공을 연성하면서 그 부작용을 온몸으로 감내해야만 했다.

저마다 부작용은 달리 나타났으며 몰골이 몹시 흉물스럽게 변하니 사실상 평범한 삶이란 건 있을 수 없게 되었다.

청혈진인은 구부정한 자세로 작은 철장 같은 걸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이봐 청혈진인, 보냈어?”

“지금 날린다, 가만 있어 봐.”

푸드득!

청혈진인의 말이 끝나자마자 새의 날갯짓 소리가 들리자 올돌괴는 조금 기다리기로 하며 팔짱을 끼고는 자신이 왔던 곳을 되돌아보았다.

“예상대로 당가주가 먼저 왔으니 다른 당문 놈들이 올 때까지 시간만 잘 끌면 임무는 끝나는군. 당가주도 혈독무는 제대로 겪어본 적이 없으니 애를 좀 먹겠지? 킬킬킬!”

“당혁수는 괴물이야. 쉽게 생각하지 마라.”

새장 안엔 전서구들이 있었는데 미리 준비된 노란 끈들이 발목에 묶여있었다. 내용을 담은 서신보다 ‘신호’의 역할만 해도 충분했기에 청혈진인은 새장 문을 번쩍 열고 위로 치켜들었다.

푸드드득!

“흥! 그걸 내가 모르겠느냐?”

여섯 마리의 전서구가 일제히 북쪽으로 날아갔다. 그 모습을 같이 보던 올돌괴가 콧방귀를 뀌며 중얼거렸다.

“자, 이제 할 일은 마쳤으니 어디 한번 당혁수를 괴롭혀 볼까?”

“킬킬킬킬! 쉽게 생각하지 말라면서 지가 더 의욕적이네. 그러다 원시천존 상판대기 보러 간다?”

“어차피 다른 당문 놈들이 올 때까지 붙잡아 두는 건데, 그때까진 신나게 싸워봐야지. 안 그러냐?”

“좋은 자세야, 킬킬킬!”

올돌괴와 철혈진인이 대화하면서 천천히 걸음을 옮겨 위로 올라갔다.

잿빛 안개 너머로 햇살에 반사된 금빛 후광을 비추는 보현좌상과 그 아래 정화사태로부터 손을 떼고 일어서는 당혁수의 모습이 보였다.

그 성스러운 풍광과 절묘하게 어울리는 당혁수의 모습을 바라본 올돌괴나 청혈진인도 내심 감탄할 수밖에 없었다.

“아주 미륵불(彌勒佛)나셨네.”

올돌괴가 못마땅한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청혈진인도 그의 말에 동의하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허리춤의 칼집에서 곡도를 뽑아 들었다. 초원의 곡도보단 완만한 곡선을 가졌으나 중원의 월도보다는 더 유려하게 굽어있었다.

으득!

청혈진인이 손바닥을 물어뜯었다. 그리고 상처에서 흘러나오는 피를 도신에 직접 발랐다. 붉은 피긴 했으나 햇볕을 받자 은은한 푸른 광택이 뒤섞여 보였다.

“어디 한번 먼저 떠나간 녹주팔지 동지들의 넋을 위로할 수 있는지 시험해보자고.”

“킬킬킬! 좋아 좋아!”

두 사람이 비슷한 찰나에 호흡을 깊이 들이마셨다. 혈독무의 잿빛 분진이 콧속으로 빨려 들어가 폐부에 감돌자 두 사람의 눈에서 붉은 흉광이 번들거리기 시작했다.

* * * *

푸드드드!

아미산에서 출발한 여섯 마리 전서구는 개별적으론 각자 다른 목적지로 귀소본능을 가지고 날아가고 있었다.

보통 전서구를 위치마다 한 마리씩 보내는 건 매에게 노려질 위험이 있었다. 그러나 이 전서구들은 몸통에 하늘의 포식자들이 착란을 일으킬 수 있는 환도종의 술식이 새겨져 있었기에 소실될 위험성이 적었다.

무엇보다 이 전서구들의 목적지가 각각이 모두 달랐지만, 어떤 목적성 자체는 공유하고 있었기에 단 한 마리만 성공적으로 전달되어도 계획은 정상적으로 실행될 수 있었다.

물론 술식 자체는 환도종의 오방환마 중 한 사람인 맹호의 솜씨였으니 성능은 확실하다 할 수 있었다.

계속 북상하며 날아가던 전서구들 시야에 성도의 성곽이 들어왔다. 그렇게 얼마간 더 날아갔을 때, 한 마리만이 중간에 가길 멈추고 주변을 선회했고 나머지 다섯 마리는 성도 쪽에서 각기 다른 곳으로 날아가 모습을 감추었다.

중간에 더 나아가길 멈췄던 전서구가 하늘에서 빙글빙글 몇 번 선회하더니 아래로 하강하기 시작했다.

푸드덕!

멀찍이 북쪽으로 성도성이 보이는 남쪽 평원 한가운데에 세워진 작은 오두막으로 전서구가 날갯짓하며 내려왔다.

사방이 논밭으로 가득한 오두막엔 반백발과 수염을 가진 노인이 온몸에 붕대를 두른 남자와 식사를 하고 있었다. 노인은 구릿빛 피부에 강렬한 인상을 가졌으며 짙은 녹의에 표피로 만든 하갑이 하의 위를 덧대고 있었다.

그의 이름은 서문질, 천마신교 아래에서 사혈신마라 불리는 강자였다.

서문질과 마주 앉아 차를 마시는 사람은 바로 환도종 맹호였다. 환도종에서도 손꼽히는 고수였지만, 당혁수의 손에 사경을 헤매게 된 이후엔 사혈신마를 보좌하면서 요양 아닌 요양을 하는 중이었다.

맹호가 횃대에 앉아있던 전서구를 흘끔 보고는 붕대가 반쯤 풀어진 팔을 들었다. 붕대로 가려지지 않은 팔 부분엔 점처럼 보이는 흔적이 여러 군데 있었는데 그런 손을 슬며시 펼쳤다가 순간 꽉 쥐었다.

꽥!

퍽!

단말마의 비명과 함께 전서구가 그 자리에서 터져버렸다. 작은 고깃덩이에 불과한 생명체였지만, 깃털이 흩날리고 핏덩이가 튀는 게 영 보기 좋지만은 않았다.

탁!

서문질이 국수 면을 들다 말고 젓가락을 탁자 위에 내려쳤다.

“이 새끼가 이 어르신께서 식사하는데 입맛 떨어지게…….”

“죄, 죄송합니다.”

서문질은 자신의 눈치를 보면서 머리를 탁자에 가까이 조아리는 맹호의 정수리를 못마땅하다는 눈으로 쳐다보았다.

쩝!

서문질은 입에 조금 남았던 국수 면발을 다시 씹으면서 젓가락을 들었다. 그리고 크게 한 젓갈을 집어 다시 입에 후루룩 빨아들였다. 두 젓가락 정도 더 면발을 먹고 그릇까지 들어 국물을 모두 마셔버렸다.

든든하게 찬 배를 손으로 어루만지면서 의자의 등받이에 기대었다. 나무젓가락을 뚝 부러뜨리고는 뾰족해진 부분으로 이를 쑤시던 중, 왼손으로 탁자를 두드려 맹호를 불렀다.

“언제 준비될 것 같으냐?”

“전서구들이 당도했으니 술자들이 바로 환도강마대진계(幻道降魔大陣界)를 준비할 것입니다.”

“시간은?”

“아마 일각 내에 시행될 것입니다. 기운이 약한 평민들은 그 자리에서 혼절할 것이고, 내공을 가진 무림인들은 강력한 실체적 환상에 저항하다 죽음을 맞겠지요. 사혈신마께서 당문으로 가는 길 정도는 평탄하게 정리될 것입니다.”

“천혈강시(天血僵尸)는?”

“이미 성도에 있는 한 장의원(葬儀院)에다 관에 실어 숨겨두었다고 합니다. 환진이 발동되면 환도신마께도 신호가 갈 테니 적절히 호응해주실 것입니다.”

“그래, 당문의 기관을 뚫으려면 그게 있어야지. 그게 아니었다면 그따위 장난감의 신체 조성을 바꾸는 데 내 힘을 빌려주지도 않았을 거야.”

강시.

시체를 이용한 생체병기에 관한 탐구는 여러 갈래로 존재해왔지만, 천마신교를 지탱하는 구주마종의 신마들은 자신들의 힘을 믿기에 강시를 탐구하는 부류를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유일하게 환도신마만이 관심을 조금 두고 있다가 이번 사천 무림에 대한 계획의 일환으로 약 2년에 걸쳐 준비한 게 바로 청해악왕 강모도의 시신을 이용한 천혈강시였다.

서문질은 녹주팔지가 구음천독마공을 수련하면서 복용한 독들이 무엇인지 총망라된 자료를 보유하고 있었는데 그것을 토대로 강모도 시체의 신체 조성을 변화시키는 작업에 일조했었다. 거기에 환도신마의 술식이 여러 겹 덧입혀지면서 지금에 와서는 서문질도 그것이 어떻게 작동하는지 알 길이 없는 병기가 되어있었다.

이번에 성도에서 당문을 목표로 한 작전에 이 천혈강시를 사용하기로 확답을 받아냈으니 서문질로서도 나름대로 기대를 하고 있었다.

“넌 어디로 갈 것이냐? 운신도 불편하진 않은 거 같은데, 작전에 일조는 해야지?”

“……여기서 사혈신마님과 헤어지도록 하겠습니다.”

“호오, 왜? 당문에 복수하고 싶지 않나?”

서문질의 물음에 맹호는 바로 대답하지 않고 있다가 조금은 떨리는 손으로 얼굴을 덮은 붕대를 붙잡고 내려 당겼다. 이윽고 붕대가 풀어지면서 그의 얼굴이 드러났다.

과거엔 꽤 미남자였을 얼굴이었지만, 지금은 꽤 굵은 홍점(紅點) 형태의 흉터가 얼굴과 목에 고스란히 드러나 있었다.

“거울로 제 얼굴을 볼 때마다 그때의 공포가 아직도 잊을 수가 없습니다. 성도에서 일을 벌이시면 분명 당문의 가주가 뒤늦게라도 나타날지 모르는데, ……그러면 소인은 꼼짝도 못 하고 아마 그 자리에서 오줌을 지려버릴 겁니다.”

“클클클클!”

맹호의 두려움에 찬 말에 서문질이 웃긴다는 듯 실소를 터뜨렸다.

서문질은 맹호가 어떤 자인지 대충 알고 있었다.

그 잘생긴 얼굴을 이용해서 여자를 유혹하고는 몇 번 밤일을 치른 뒤엔 가차 없이 버려버리는 호색한이었다. 때때로 그를 잊지 못하고 달라붙는 여인들이 있으면 은밀히 환각을 걸어버리고는 노예로 팔아버리는 짓도 서슴지 않는 변태 같은 자였다.

그의 온몸에 구멍을 뚫어버린 당혁수의 손속도 악독하기 그지없지만, 어쨌든 용케 살아남은 결과치고는 몰골이 이 지경이 되었으니 이래저래 정체성을 찾기 어려움이 많을 터였다.

‘게다가 사익에 골몰하는 나머지 어떤 책임에서도 회피하면서 살아남는 게 최우선인 별 볼 일 없는 놈이기도 하지.’

한동안 그와 같이 지내면서 그 인간성의 밑바닥까지 훔쳐본 서문질이었다.

“클클! 그래서 어디 가려고?”

“환도신마께선 청성산에 계실 테니 거기로 가봐야지요. 마침 교주께…….”

맹호가 대수롭지 않게 가볍게 떠들다가 급히 입을 틀어막았다.

살기마저 그 바닥에 깔린 서문질의 차가운 시선이 그의 눈을 꿰뚫어버릴 듯 쳐다보고 있었다.

“어떤 은밀한 장소라 해도 입을 조심할 일 정도는 구분하는 게 좋을 것이야.”

“용서하십시오, 사혈신마님.”

탁자 위에 머리를 깊이 조아리는 맹호의 정수리를 또다시 보게 되자 서문질이 인상을 팍 일그러뜨렸다.

드르륵!

그가 자리에서 일어나자 맹호의 얼굴이 사색이 되었다. 서문질이 발걸음을 떼자 그를 해치려는 줄 알고 부들부들 떨었다. 그러나 그의 발걸음이 그를 지나치자 조심스럽게 허리를 펴기 시작했다.

“가라. 난 염원하던 비전을 손에 넣으러 가야겠다.”

서문질의 말뜻을 알아들은 맹호가 조용히 한숨을 쉬면서 허리를 폈다. 그리고 몸을 돌려 서문질의 뒷모습을 쫓으니 반백 녹의인의 뒷모습 어깨너머로 성도성의 거대한 성곽을 뒤덮은 자색 빛깔의 환진이 그의 눈에 영롱하게 비쳤다.

‘꼬박 1년을 준비했던 환도강마대진계가 드디어……!’

맹호는 두 팔을 활짝 펼친 채 환도종이 여태껏 펼쳐온 그 어떤 것도 따라올 수 없는 최대 규모의 환진을 두 눈 똑바로 뜨고 감상했다. 성곽을 덮고도 모자라 반구형의 장막은 하늘마저 가릴 정도로 볼록 솟아 있었다.

그 환진에 갇힌 성도를 바라보며 경공을 펼치는 사혈신마 서문질의 입가엔 희열 섞인 미소가 걸려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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