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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의 귀신-228화 (228/432)

228화 - 제42장. 화불단행(禍不單行), 재앙은 번번이 겹쳐 온다 (2)

그녀가 외칠 때, 소리에 공력을 담았기 때문에 이화림을 조금 벗어난 정도로는 듣지 못했을 리 없었다.

문득 떠오른 불길한 예감에 세 사람이 안색을 고치고는 기감을 확장하면서 급히 이화림 쪽으로 경공을 펼쳤다.

진도건을 찾는 건 오래 걸리지 않았다.

그는 처음 흩어진 곳보다 조금 서쪽으로 떨어진 곳에 있었기에 세 사람은 함께 그곳에 도착하여 진도건을 볼 수 있었다.

“도건?”

“……응?”

한쪽 무릎을 꿇은 채 앉아있다가 그녀의 부름에 한 박자 늦게 반응하면서 그녀를 쳐다보는 진도건의 모습에서 천서은은 묘한 위화감을 느꼈다.

‘눈이…….’

그녀는 알고 있었다.

강자를 상대하면서 힘을 강하게 끌어올릴 때나 혹은 어떤 살의와 같은 감정이 극렬하게 일어났을 때, 또는 마기를 마주했을 때 그의 붉은 눈이 평소보다 영롱하게 빛난다는 사실을.

“괜찮아요?”

그녀가 다시 묻자 진도건은 잠깐 손안에 부서진 나무 조각들을 살펴보더니 이내 손을 털고 일어났다. 천서은도 땅에 버려지는 조각들에 눈길을 잠깐 주고는 다시 진도건을 쳐다보았다.

“괜찮아. 그런데 왜들 그렇게 긴장하고 있어, 뭐라도 찾은 건가?”

“아, 대형. 광혈마종이 나타난 것 같소. 아무래도 당문을 노리고 진격하는 것 같아요.”

“칫, 서두르자. 내려가면서 얘기하지.”

진도건이 돌아왔던 길 쪽으로 몸을 날리며 경공을 펼치자 세 사람도 이내 그 뒤를 따라갔다.

‘분명 도건이 맞지만……, 설마 혈마가 다시 깨어난 건가? 그래서 내 목소리를 듣지 못한 건가?’

진도건의 등 뒤를 쳐다보는 천서은의 눈빛엔 잠깐이나마 불안한 감정이 스치고 지나갔다.

혈마가 등장했을 때면 진도건은 대부분 의식을 잃었고 또 목숨이 경각에 달하는 위기를 맞을 때였다. 그가 그녀의 목소리에 반응하지 못한 게 어쩌면 혈마와 관계된 게 아닐까 하는 우려가 들자 불안한 감정이 쉽게 가라앉지 않았다.

‘……심장의 떨림이 멈추지 않아. 하아……!’

천서은은 자기도 모르게 왼쪽 가슴을 오른손으로 지그시 눌렀다.

두근, 두근, 두근……!

* * * *

당혁수의 표정은 어느 때보다 신중하게 가라앉았다.

당가사수 중 세 사람이 그의 뒤를 바짝 따르고 있었고 차출된 50인의 당문 제자들이 뒷받침해주고 있었으니 사혈주가 아무리 설쳐댄다고 하더라도 능히 무찌를 자신이 있었다.

당문과 사혈주의 대립을 사천과 운남의 호사가들이 치열하게 묘사하곤 하나 두 조직에 속한 자들의 질적인 무공 수준은 명백한 차이가 있었다. 녹주팔비 정도만이 당가사수와 꽤 대등하게 싸울 뿐 하부조직의 질은 비교할 바가 아니었다.

당문은 투침술과 같은 암기술도 유명하지만, 소형의 기관장치를 이용해 대량의 암기를 폭사시킬 능력도 있었다. 그들만큼 다수를 상대로 한 싸움에서 능력을 발휘하는 문파나 조직은 중원 통틀어 어디에도 없다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게다가 용독술 자체도 당문이 사혈주보다 분명 우위였다.

물론 사혈주의 위협이란 건 독이라는 존재 자체가 가져다주는 예측 불가능한 특징만큼이나 경각심을 가져야 한다는 건 주지의 사실이었다. 그렇기에 아미파의 안위를 걱정하는 이상 그들의 움직임을 예의주시해야만 했던 건 당연한 수순이었다.

그래서 항상 도착하던 개방의 전서가 약속된 시간에서 반 시진이 지나도 오지 않았을 때, 당혁수는 주저하지 않고 즉시 아미파로 출발한 것이다.

애초에 아미산의 북쪽 산계 봉우리에서 기다리고 있었기 때문에 아미산까진 한두 시진 안이면 충분히 도착할 수 있었다.

하지만, 사혈주가 아미산까지의 거리에서 그들보다 앞서 있을지도 모른다는 자그마한 가능성이 그들의 발길을 계속 재촉하게 했다.

“당군명(唐君明), 당청산(唐靑山), 당서평(唐瑞評).”

“예, 가주님.”

당가삼수 세 사람이 동시에 대답했다.

당군명은 당혁수보다 열 살이 어렸으나 항렬 상 동항(同行)인 사촌 동생이었기에 사수(四秀) 서열에선 맏이였다. 당청산과 당서평은 각각 당환, 당량의 아들들이었다. 당혁수가 당한솔을 늦게 낳았기도 했지만, 어찌 됐든 당한솔이 멀쩡하게만 태어났다면 아마 당군명은 당한솔에게 사수의 맏이 자리를 물려주었거나 당가오수(唐家五秀)가 되었을지도 몰랐다.

“너희들의 역할을 잘 알겠지만, 제자들의 안전을 위해서라도 녹주팔비 잔당들은 너희가 직접 맡아줘야 한다. 빠르게 놈들을 찾아 붙어라. 그러면 수월히 놈들을 격퇴할 수 있을 것이니.”

“명심하고 있습니다.”

“서문질은 반드시 피해라. 내가 먼저 놈을 찾아내긴 하겠지만, 혹시 다른 방향에서 먼저 보게 된다면 즉시 내게 알리고 몸을 피해야 한다.”

“예, 가주님.”

당청산이 힘주어 대답했다. 그러자 옆에서 달리던 당서평이 그의 어깨를 툭 쳤다.

“제대로 듣고 대답한 거 맞지? 너 객기 부리다 죽지 말라고 당부하시는 거야.”

“에이씨, 내가 애냐?”

“하하하! 오, 그새 철이 좀 들긴 했나 봐?”

당청산의 얼굴이 살짝 붉어지며 당황한 티를 내자 당서평이 웃음을 터뜨렸다.

3년 전 사천무림의 정파가 일어서며 북상하던 사혈주의 뒤를 공격했을 때, 당청산이 호기롭게 사혈신마에게 덤벼들었다가 당혁수의 손에서 구출을 받았었다. 그때 사혈신마의 강력한 독공에 중독되어 거의 보름간 사경을 헤맸던 뼈아픈 경험이 있었다.

동년배라서 당청산과 사이가 매우 가까웠던 당서평이 그 일로 철부지라 놀려댔으니 그의 반응이 도드라질 수밖에 없었다. 물론 당청산이 그 이상 발끈하지 않는 건 그가 혼수상태에 있었을 때, 가족을 빼면 가장 정성스럽게 보살펴 준 사람이 바로 당서평이었기 때문이었다.

“걱정 마라. 내 이번엔 가주님께 짐이 되지 않을 테니.”

“청산이가 그새 성숙해졌구나.”

당혁수도 기분 좋게 미소를 지으며 조카들을 격려했다.

“장난은 그만 치고 슬슬 긴장들 하여라. 곧 아미산이다.”

당혁수가 당근이라면 당가사수를 이끄는 당군명은 채찍이었다. 딱딱한 말투와 걸걸한 목소리로 남쪽 전방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니 하늘 높이 솟은 아미산 금정의 봉우리가 눈에 들어왔다.

누런 바위 표면을 드러낸 봉우리 자체도 그러했지만, 금정에 세워진 160척(尺)에 이르는 거대한 황금 보살상인 사면십방보현좌상(四面十方普賢坐像)에 햇살이 반사되어 사방으로 번지는 광채가 마치 부처의 후광(後光)처럼 산계를 비추고 있어 보기에 가히 압권이었다.

그런 보현보살의 성지 아미산이 독과 죽음으로 더럽혀질 것을 생각하자 당문인들의 표정이 이내 긴장감에 굳어졌다.

특히나 아미파를 통해 진윤지와 부부의 연을 맺은 당혁수는 그 어느 때보다 결연한 표정을 하고 있었다.

‘이번 기회에 끝을 내주겠다, 서문질. 아니, 사혈신마. 너의 대에서 사혈주를 끝장내겠다.’

사혈주가 다시 준동하기 시작했을 때, 3년 전 서문질의 목숨을 끊어놓지 못했던 것이 얼마나 안타까웠는지 몰랐다.

만약 그를 다시 놓친다면 분명 천추의 한이 될 게 분명했다.

능선을 따라 반 시진 가량 달리자 점점 아미산을 향한 가파른 경사로가 가까워지기 시작했다. 아미산까지 가는 길이 여러 갈래가 있긴 했으나 상대적으로 남쪽으로 이어진 능선이 훨씬 완만한 편이었다.

그 말인즉슨, 사혈주의 접근이 더 수월하다는 의미와 같으니 아미산과 가까워질수록 조급한 마음이 올라오기 시작했다.

당혁수가 제자들을 향해 입을 열었다.

“자! 이 앞이 험로이지만, 오르지 못할 정도는 아니다. 어떤 상황이 닥칠지 모르니 모두 만반의 준비를 하도록!”

당혁수의 말을 듣자마자 당군명도 한마디 거들었다.

“때가 되었다. 모두 천독해갈단을 물어라!”

당군명의 지시에 모두가 일제히 천독해갈단을 물었다.

당문인이라면 공통으로 독에 상당한 내성들을 가졌지만, 사혈주의 극독이나 녹주팔비, 서문질의 독공은 반드시 경계할 필요가 있었다.

마침내 오르막으로 이어지던 능선이 끝나자 당혁수 등이 마주한 건 높게 솟아오른 금정 봉우리와 그들 사이에 오목하게 패여 있는 계곡의 지형이었다.

“이런…….”

당혁수가 조금 당황하여 나직이 중얼거렸다.

함께 온 자들 가운데 당혁수만큼 아미산을 자주 올라가 본 사람은 없었다. 그러나 그도 북쪽 산계를 통한 등반은 처음이었기에 예상했던 것보다 거리가 멀어진 셈이 되자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잠깐 이동에 머뭇거림이 발생할 때였다.

퉁!

심상치 않은 소음이 하늘 높은 곳에서 울려 퍼졌다.

불길한 마음에 그 소리를 쫓아 시선이 닿은 곳은 어김없이 아미산 금정이었다.

봉우리 끝자락에서 눈에 들어올 만큼 적잖은 바위 파편들이 튕겨 나가며 산 아래로 떨어져 나가고 있었는데 누가 봐도 일상적인 광경으로 보기 어려웠다.

당혁수의 기감이 순간적으로 확장되기 시작했다. 극도의 집중력과 함께 공력이 개방된 상단전에 모이면서 그의 기감이 금세 금정을 포함한 아미산 근처의 몇몇 봉우리들까지 아우를 정도로 확장되었다.

‘이런! 벌써 싸움이 벌어지는가!’

아미파의 본거지이자 보현보살의 도량은 금정 정상 대부분에 걸쳐 보현좌상을 비롯한 여러 사찰이 세워져 있었다. 사혈주로 보이는 적들과 아미파의 비구니, 승려들이 남쪽과 서쪽 경내 가장자리에서 격전을 벌이고 있는 듯했는데 기세의 치우침을 보아하니 아미파 측이 밀리고 있는 모양새였다.

당혁수는 다시 내공을 돌려놓고 주변 지형을 빠르게 살폈다. 그리고 당군명을 보며 입을 열었다.

“일직선으로 주파하기엔 지형적으로 별로 좋지 못한 것 같다. 저 위 중간지점을 가로지르면 적당히 타협할 수 있겠지.”

당군명이 당혁수가 가리킨 지점을 살피곤 이해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보이는군요. 먼저 가려고 하십니까?”

“이미 싸움이 벌어졌네. 나라도 먼저 가서 제어하지 않으면 겉잡을 수없이 밀릴 게야.”

“알겠습니다. 전력을 다해 쫓아갈 테니 먼저 가십시오.”

“그래, 부탁하네.”

“무운을 빕니다.”

당혁수와 당군명이 대화하는 동안 이미 가까이 모여있던 다른 이들도 어디로 움직여야 하는지 서로 얘기를 주고받으면서 이해를 마쳤다.

당군명이 눈빛을 보내자 당청산, 당서평을 포함한 50인의 당문인들이 일제히 서쪽의 경사로를 비스듬히 타고 올라가기 시작했다. 전력으로 경공을 펼치고 있는지 여기까지 달려왔던 시간 중 어느 때보다 빠른 속도로 움직이고 있었다.

우지끈!

당혁수가 휘두른 당수에 옆의 나무가 부러지며 쓰러지기 시작했다. 미처 절반도 채 기울기 전에 한 손으로 잡아채더니 그대로 금정을 바라보며 팔을 휘두르자 통나무가 나뭇잎을 맞바람에 떨어뜨리며 하늘을 날았다.

파앗!

두 발로 가볍게 지면을 밀어내니 하늘로 날아오른 당혁수의 신형이 어느새 통나무 위에 가볍게 착지했다.

휘이이잉-!

무섭게 허공을 가로지르는 나무가 점점 아래로 기울어지기 시작했다. 얼마 안 가 수직 낙하할 듯했으나 지금까지 만으로도 벌써 계곡의 폭 절반을 지나고 있었다.

당혁수는 금정 위 보현보살의 후광을 똑바로 올려다본 채, 다시 한번 두 발바닥에 공력을 모았다.

터엉!

통나무가 푹 꺼지듯 계곡으로 떨어짐과 동시에 그의 신형이 다시금 하늘 높이 솟구쳐 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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