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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의 귀신-227화 (227/432)

227화 - 제42장. 화불단행(禍不單行), 재앙은 번번이 겹쳐 온다 (1)

망양은 분명하게 알 수 있었다.

세 개의 도등은 술식(術式)과 마령(魔靈)으로 연결된 것들이기에 부서지자마자 상실감이라 표현할 수 있는 별로 달갑지 않은 감각이 머릿속을 후벼 파듯 스치고 지나갔다.

‘……어떻게?’

‘어떻게?’라고 반문하기 전에 먼저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원인이 무엇인지 찾는다.

도등의 위치는 세 곳이 서로 달랐는데 그가 알 수 있었던 건 도등 하나가 부서진 사실뿐이지 그 위치까지 특정할 수는 없었다. 위치를 특정할 수 있는 한 가지 방법은 도등들 각각이 영역을 관장하고 있기에 환술이 풀리는 지점을 찾으면 어떤 도등이 부서진 건지 알 수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망양은 공교롭게도 그 도등이 적발의 사내가 서 있던 곳과 상대적으로 가까운 게 부서졌음을 깨달았다.

“으악!”

비명이 들렸다.

이화림에 있는 그의 부하들은 도등마다 분산배치 되어있었는데 한 개 조의 위치가 바깥으로 드러나 버린 것이다. 그리고 그 비명을 쫓아 시선을 돌리자 시체 위에 선 적발 남자가 보였다.

진도건은 검에 묻은 피를 땅에 흩뿌리고는 고개를 틀어서 부서져 내린 조각상을 바라보았다.

산산조각이 나는 바람에 당장 온전한 형체를 추측하기는 어려웠다. 그러나 기괴한 형태의 머리나 팔다리의 형상 등을 미루어 볼 때, 어떤 인체를 형상화한 것 같다는 추론 정도는 가능했다.

‘내 검에 박살 난 게 이것이었나? 그런데 음……, 분명 기운이 느껴졌었는데.’

지금은 그저 바스러진 나무조각상이었지만, 분명 숲의 환진을 유지하기 위한 어떤 매개물 역할을 했을 거로 생각했다. 염력으로 조종한 검이 적중했을 때, 여기에 느껴졌던 기운이 증발하듯 사라지는 걸 포착했었으니 아마 맞을 것이다.

진도건은 당장 조사해볼 생각은 접어두고 시선을 돌렸다.

아직 남은 두 지점에 존재하는 이 환진의 근원을 파괴하는 일이 먼저였다.

타탓!

지면을 차며 숲 한가운데로 뛴다.

확실히 근처에서 느껴지는 이질적인 감각은 사라졌다.

대신 이화림을 둘러싼 다른 두 곳에서 예의 그 쪽빛의 아지랑이 같은 기운의 장막은 여전히 존재하고 있었다. 그리고 진도건은 상대적으로 조금 더 가까웠던 왼쪽으로 방향을 잡고 있었다.

장막 속 숲 안에 진입하는 순간, 역시나 이질적인 위화감이 온몸을 감쌌다.

그가 들어서자마자 숲이 마치 살아있는 듯 시시각각 변화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진도건의 눈은 흔들림이 없었다.

실체가 무엇인지, 허상이 무엇인지 명확하게 구분된다.

실체는 흔들림이 없는 법.

감각에 대해 혼란이 없으니 강렬하게 느껴져야 할 환상은 희미한 잔상처럼 남아서 적의가 무엇인지 편안하게 깨닫는다.

적들을 향해 일직선으로 달렸다.

근원의 중심에 다가설수록 잔상은 환상에 가깝게 강해지지만, 실체적인 어떤 것도 닿지 않는다.

일순간 눈앞에 쪽빛 꽃잎이 가득 메워지는 환각이 일어났다.

동시에 그의 적안이 더욱 붉게 타오르며 그 뒤에 숨은 자들을 감지해내니 적들의 심장을 노리며 검광이 환각을 꿰뚫었다.

푸푸푹!

“큭!”

“어떻……!”

쓰러지는 적들의 눈빛에 하나같이 불신의 빛이 떠올랐다.

허락되지 않은 침입자에 대해 환도종의 환술은 예외가 없다는 것이 그들의 상식이었다.

완벽히 예외적인 존재를 상정할 수 없었으니 목도버린 진도건의 침입이 그만큼 매우 충격적이다.

진도건은 공간 전체로 기운을 흩뿌리는 조각상을 눈앞에서 제대로 살펴보았다.

추측한 대로 인체의 그것과 닮아 있었으니 머리는 뒤로 심하게 꺾여 자세가 기괴했는데 그 얼굴의 형상조차 보기에 섬찟한 이인(異人)의 모습이다. 나체에 천을 두르고 있는데 등 쪽엔 기이한 형태가 돌출되어 있어서 사람이 맞는지도 의심스럽다.

“하나 남았나?”

진도건이 조각상을 향해 발을 높이 들면서 중얼거렸다.

콰직!

도등을 부술 때 느껴지는 반발력은 없었다.

박살 나는 순간, 진도건이 서 있던 곳을 중심으로 퍼져있던 환술이 사라졌다.

그는 다시 마지막 남은 기척들을 감지하면서 천천히 몸을 돌렸다. 그렇게 그의 시선이 닿은 곳은 망양과 그 부하들이 환진의 장막 뒤에 숨은 곳이었다.

진도건이 숨어있던 세 사람의 심장을 검으로 찔렀을 때, 망양은 자신의 선택이 잘못되었음을 깨달았다.

‘젠장! 젠장! 환술에 아무런 영향도 받지 않는 자라니? 말도 안 돼! 차라리 도망치는 게 나았을 것을!’

후회막급(後悔莫及)했으나 다시 그 순간으로 돌아가도 백이면 백 같은 선택을 할 수밖에 없으리라.

망양이 두 번째 도등이 부서지는 놀라움을 뒤로 하고 서둘러 자리를 뜨려 할 때였다.

쿠르르르으-!

느닷없이 천둥소리가 고막을 울려 댔다.

파아아아!

공간 전체로 기운이 터져나가면서 남은 환진이 산산이 부서진다. 사방으로 뻗대는 푸른 섬전(閃電)들이 곁을 스치고 지나감과 동시에 마지막 하나 남은 도등이 견디지 못하고 부서져서 그들을 보호하고 있던 환진마저 사라진 것을 감지했다.

“이런……!”

망양이 나직이 탄식을 내뱉었다.

배나무 하얀 꽃잎들을 뚫고 나온 천서은의 모습은 하늘에서 내려온 선녀처럼 아름다웠지만, 그녀의 쌍수에 담긴 벽력의 기운이 토해내는 울음소리는 그 무엇보다 공포스러웠다.

“죽어라, 쓰레기들.”

콰콰쾅!

벽력의 기운이 일대를 휩쓸었다.

그녀의 공력을 견뎌내는 자는 한 사람도 없었다. 환진의 보호를 받지 못한 그들의 무공은 그녀에 비해 보잘것없는 수준이었으니 부하들은 그 자리에서 즉사했고, 망양은 피를 토하며 무릎을 꿇었다.

어느새 진도건과 영은성, 최현걸도 그 자리에 모였다.

망양의 주변을 둘러본 그들의 인상은 찌푸려졌다.

도등 두 개가 연달아 무너지면서 환진의 기운이 약해지자 천서은 등도 실체와 허상을 조금은 구별할 수 있게 되었었는데 그때 천서은은 숲 한가운데 버려져 썩어가고 있던 몇 구의 시체들을 볼 수 있었다.

특히 참혹한 몰골로 옷이 벗겨져 버려진 여인의 시체는 그녀의 진노를 사기에 충분했다.

“쿨럭! 쿨럭!”

망양이 몸을 부르르 떨며 피를 토해냈다. 감전의 여파도 있었지만, 이미 죽음의 문턱이 코앞까지 와 강제적으로 넘어가기 직전이라 떨림이 잦아들지 않았다.

망양의 머리가 덜덜거리면서도 힘겹게 고개를 쳐드는데 핏발이 모두 터져나가 붉게 충혈된 눈이 바라보고 있는 자는 그를 죽음에 이르게 한 천서은이 아닌 진도건이었다.

“으어…… 어어…….”

진도건과 눈이 마주치자 망양이 입을 뻐끔거리며 뭐라 말하는 듯했다.

‘……넌 대체 누구냐?’

그 생각은 입밖에 제대로 꺼내어지지 않았다.

몇 번 입을 뻐끔거리던 망양이 이내 눈동자에서 빛을 잃어버리더니 고개를 푹 떨어뜨린 것이다.

적들의 죽음을 바라보는 네 사람의 시선엔 어떤 동정의 감정도 없었다.

새하얀 꽃밭을 이룬 이화림의 하늘 풍경은 무척 아름다웠으나 배나무들이 뿌리 내린 이 땅엔 불운한 자들의 허망한 죽음을 품고 있었다. 그저 서 있는 것만으로도 슬픔에 잠겨버리게 하는 곳이었다.

“어쨌든 지운천이 전해준 정보는 진짜였네요.”

영은성이 먼저 입을 뗐다.

확실히 그 서신에 담긴 내용에 거짓은 담겨있지 않았다. 다만 지금의 결과를 놓고 보았을 때, 과연 그가 의도한 것이 무엇이었는지가 궁금해졌다.

“그가 무슨 의도로 우리를 여기로 보냈을까요?”

“역시 가둬두려는 거 아닐까? 확실히 환진이 강력하긴 했어. 만약 진 대형이 밖에서 해주지 않았으면 한참 동안 곤혹스러울 뻔했어.”

당문 사람들에게서 떨어져나온 이후로 여기까지 오는 동안 네 사람은 지운천의 정체에 대해 저마다의 관점을 주고받으며 토의했다. 그들이 직접 본 지운천은 마교와의 관련성이 적다고 여겨졌으나 야율균은이 불안에 떨었던 경험이나 진도건이 설명하는 그의 독특한 기척은 재차 의심하지 않을 수 없게끔 했다.

“일단 이곳을 잠시 살펴보자. 다른 건 몰라도 여기에 이런 환진을 설치하고 한동안 머물렀다는 건 그럴 만한 이유가 있다는 거지.”

“그래요. 이 숲에 뭐가 있는지 흩어져서 찾아봐요.”

진도건의 의견에 천서은이 동조하자 다른 두 사람도 고개를 끄덕였다.

천서은과 영은성, 최현걸은 이내 서로 다른 방향으로 흩어지며 참고할 만한 단서가 있는지 탐색에 나섰다. 그리고 진도건도 계속 신경을 써둔 방향으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이쯤이었던 것 같은데?’

그가 찾고 있는 것은 천서은이 공력을 폭발시켜 세 번째 환진을 깨뜨렸을 때, 그와 함께 부서진 도등이 있던 자리였다. 그는 곧 그 자리에 도달하여 부서진 도등의 파편을 내려다보게 되었다.

그가 이것을 찾은 이유는 다른 게 아니었다.

그가 처음과 두 번째 조각상을 부순 건 단순한 물리력이었다면, 이 세 번째 부서진 조각상은 천서은의 파천신공 기운 때문이었다. 그리고 그는 기감을 통해 조각상에 잔류한 마기를 미약하게나마 느끼고 있었다.

이 조각상도 역시나 두 번째 조각상과 같은 이질적인 형상을 하고 있었다. 허리쯤부터 반 토막 난 상태였고 토막 난 부분엔 미세한 균열들이 번져있어서 조금만 세게 힘을 주면 바스러질 것처럼 아슬아슬해 보였다.

무언가 불타면 잿가루나 그을음이 남듯 부서진 조각상의 울퉁불퉁한 단면엔 파천신공에 의한 겁화멸마의 흔적이 남아 있었다.

‘……마치 파괴될 때 모두 증발하지 못하고 일부가 단면에 남은 벽력기를 피하다 조각상 안에 갇힌 꼴인 것 같구나.’

그의 적안엔 조각상 안에서 아주 극미량의 마기가 아른거리는 게 보이고 있었다.

그는 조심스럽게 단면을 만지작거렸다.

파천신공에 의한 벽력의 상흔이 문지르는 그의 손가락을 타고 체내로 흡수되었다. 그와 함께 마침내 길이 열렸다고 판단했는지 조각상 안에 잔류해있던 기운도 바깥으로 탈출하려는 순간, 진도건의 손끝에서 그의 체내로 흡수되었다.

그 순간 진도건의 눈앞이 번쩍였다.

‘……어?’

천서은은 이화림 북쪽 끝자락에서 동쪽 절벽 바깥으로 불쑥 튀어나온 바위 위에 선 채 숲을 바라보았다.

“모두 여기로 와봐요!”

그녀는 숲 안에 있는 사람들에게 충분히 들릴 정도로 공력을 담아 소리쳤다. 그리고 잠시 후, 영은성과 최현걸이 차례로 나타나 그녀가 있는 곳으로 다가왔다.

“무슨 일이에요?”

“저기 봐요.”

천서은이 굳은 표정으로 북동쪽을 가리켰다.

이화림은 산 중턱에서 정상까지 폭넓게 펼쳐져 있었는데 그들이 선 바위는 정상 부근에 있는 것이었다. 그래서 북동에서 남서로 뻗은 산줄기와 그 좌우 풍경들이 제법 폭넓게 눈에 들어오고 있었는데 북쪽의 산세가 상대적으로 낮아서 시각적으로 보이는 정보량이 많은 편이었다.

천서은이 손가락으로 가리킨 곳은 북쪽의 낮은 산세보다 조금 왼쪽이었는데 거길 보자마자 영은성과 최현걸도 놀랄 수밖에 없었다.

잠깐 고개를 돌렸다가 다시 바라본 천서은도 놀라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일단의 무리가 북쪽 산림을 빠져나오고 있었는데 처음 천서은이 봤을 때는 그 수가 일이백여 명 수준에 불과했었다. 하지만, 이화림 쪽으로 소리치고 돌아서 다시 보았을 땐 그 수가 천여 명 규모로 불어나 있었다.

“저것들 뭐야?”

“……방향을 틀었어. 남서쪽……, 성도……, 설마 당문?”

세 사람이 바짝 긴장하기 시작했다.

숫자만 보면 관군처럼 보였지만, 이미 흑풍대와의 결전으로 군에 대한 경험이 조금 있었던 터라 그 특유의 군세는 느껴지지 않았다. 다만 상당한 숫자의 무리가 성도를 향한다는 건 분명 심상치 않은 일이었다.

“가만…… 분명 관군은 아니야. 저만한 조직을 갖춘 건…… 작금의 시기에 연결된 건 광혈종이나 구룡문, 녹림뿐인데?”

최현걸의 중얼거림을 들은 천서은의 머릿속이 빠르게 셈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내 그녀의 안색이 차갑게 굳어졌다.

녹림은 제갈무문의 계획에 따르면 운남을 향하고 있어야 정상이었고, 독자적으로 움직이는 구룡문은 백제성을 넘어 사천 내 깊은 곳까지 들어올 가능성이 적었다.

그렇다면 남은 건 하나.

“광혈마종!”

“젠장!”

“서둘러 당문으로 가야 합니다.”

“어서 가요.”

천서은도 영은성의 말에 동의했다. 그렇게 돌출된 바위 위에서 이화림 쪽으로 돌아서는데, 문득 그들은 한 사람이 오지 않았다는 걸 깨달았다.

“도건은?”

당황한 천서은이 두리번거리며 진도건을 찾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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