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6화 - 제41장. 먹구름은 아직 걷히지 않았다 (6)
어째서 이런 얘기를 아무렇지도 않게 쏟아낼 수 있었는지는 당한솔도 자신도 잘 몰랐다.
어쩌면 당문이 절체절명의 위기를 코앞에 두고 있을지도 모른다고 인지하는 순간, 소가주로서 강한 책임의식이 솟구쳐 올랐는지도 몰랐다. 혹은 어쩌면 두 다리의 장애로 스스로 능력과 영향력을 제한적으로밖에 발휘할 수 없는 불가피한 여건에 억눌려있던 무언가가 폭발했는지도 몰랐다.
“어찌 자꾸 고집을……!”
진윤지는 강제로라도 당한솔을 내원에 묶어두고 싶었다. 그러나 조금 전 모두가 공황에 빠졌던 순간이 무색할 만큼 더는 흔들리지 않게 결의로 무장된 눈빛을 마주하곤 그만 말문을 멈추고 말았다.
아들을 바라보는 진윤지의 눈빛이 가늘게 떨렸으나 이내 그녀도 결심했다.
“좋다, 그렇다면 나도 외원에서 함께 싸우겠다.”
“어머니!”
“어차피 기관의 발동 준비 정도는 여기 작은 아버님께서도 혼자 충분히 가능하시다. 외원 상황이 어떻게 급변할지 모르는 상황에서 널 데리고 내원으로 돌아갈 수 있는 사람이 한 사람이라도 많은 게 좋겠지. 네 고집을 들어주는 셈이니 더는 딴소리 말아라.”
“……어머니 말씀을 따르겠습니다.”
진윤지가 단호하게 선을 긋자 당한솔도 고개를 끄덕였다.
두 사람의 대화를 옆에서 가만히 듣고 있던 야율균은이 조심스럽게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후우……. 맞아, 애초에 우리의 목적지가 여기 당문이었던 건 결국 여기 사천에서 벌어지는 모든 싸움의 중심이 여길 중심으로 벌어질 거라는 예측 때문이었지. 어쨌든 제갈무문의 그런 예상은 맞아떨어진 셈인데, 문제는 우리가 모르는 마교의 계획이나 전력이 어디까지 영향을 미칠지가 아닌가? ……진도건은 감각이 매우 빠른 자이니 거기서 시간을 오래 끌지 않을 거야. 하지만, 만약 그렇지 못한다면…….’
야율균은은 생각을 거기서 멈추고는 마음속으로 고민을 접어 넣었다.
더 이어가는 건 불안감만 가속할 뿐이기 때문이었다.
당향청을 나서는 당한솔과 진윤지 및 당문의 인사들을 뒤따라가면서 야율균은의 다소 긴장 섞인 시선은 당한솔의 뒷모습에서 쉬이 떨어지지 않았다.
야율균은은 당향청에서 나오자마자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좌우의 담장 너머로 한층 높게 솟은 전각의 지붕들과 그 사이로 보이는 좁은 하늘. 비 온 뒤의 하늘은 무척 화창했으나 내원의 그늘 때문인지 며칠간 함께 했던 먹구름이 아직 제대로 걷히지 않은 듯한 느낌이었다.
* * * *
산 중턱에 이르자 영은성은 잠시 뒤를 돌아보았다.
뒤쪽엔 남쪽으로 뻗는 산줄기가 보였고 그가 서 있는 곳과의 사이 아래쪽엔 타강이 흐르고 있었다. 한동안 이어졌던 폭우는 많이 잦아들었지만, 그로 인해 불어난 강물과 그 물살은 산 중턱에 오른 상황임에도 흐르는 소리가 귓가를 간지럽히고 있었다.
다시 돌아서서 다른 일행들처럼 숲을 바라본 영은성이 입을 열었다.
“이화림. 평범한데요?”
“응, 평범해. 어때요?”
최현걸도 고개를 끄덕이곤 천서은에게 시선을 돌렸다.
“나도 그렇게 보여.”
천서은도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그리고 최현걸이 그녀를 보았듯 그녀도 옆에 있는 진도건을 향해 고개를 돌려 그의 눈을 살폈다.
선혈 한 방울이 물든 것처럼 진도건의 적안(赤眼)이 평소보다 더 진한 색채를 띠며 번들거리고 있었다. 그 눈빛이 움직여 잠깐 천서은을 쳐다본다.
“네게도 느껴지는 게 없는 거야?”
진도건이 되묻는 건 다른 사람들과는 달리 느껴지는 게 있다는 뜻.
“적들은요?”
“열 명 정도 기척이 느껴져.”
“어떻게 할까요? 그냥 들어가도 문제는 안 될 것 같은데 괜히 귀찮아져서 시간만 잡아먹지는 않았으면 좋겠어요.”
천서은의 말은 진도건도 동의하는 부분이었다.
“흐음…….”
진도건은 잠깐 신음하더니 앞으로 걸어갔다.
함께 가자는 의사 표시는 아닌 것 같아 세 사람은 잠시 그의 행동을 지켜보았다.
얼마간 걸어가던 진도건이 자리에 멈춰서서는 이리저리 두리번거렸다.
다른 이들은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지만, 그에겐 시각적으로도 명확하게 보이었다.
이화림 전체를 아우르는 거대한 장막을.
‘전에 만났던 환도종의 환진과는 비교도 되지 않은 수준이다.’
다른 세 사람과는 다른 시각적인 경험을 맞닥뜨리고 있었기 때문에 뭐라 쉽게 설명할 수는 없었다. 다만 쪽빛의 희뿌연 아지랑이들이 드문드문 공기 중에 흐르면서 일정한 경계를 이루고 있었고 가까이 있는 것만으로도 심장 박동수가 오르며 꺼림칙한 기분에 피부가 간질거릴 정도니 결코 평범한 상황이라 볼 수 없었다.
‘이건…….’
모호한 기분 속에서 상황을 지켜보는 그의 모습을 지켜보던 최현걸이 답답하다는 듯 한숨을 푹 쉬며 터벅터벅 걸어왔다.
“일단 들어가시죠. 어차피 바깥에서 파훼하는 법을 모른다면 그냥 안으로 들어가 대응하는 게 순서 아니겠습니까?”
최현걸은 그렇게 말하고는 진도건을 지나쳐 이화림으로 걸어갔다.
처벅처벅.
조금은 비에 젖은 지면을 밟을 때마다 요란한 소리가 흘러나왔다. 그래도 소나기에 떨어진 하얀 배나무 꽃잎들이 층을 이루듯 고르게 퍼져있어서 걸음만 가볍게 유지하면 진흙을 밟을 때의 그 껄끄럽고 불편한 느낌을 많이 줄일 수 있었다.
최현걸이 그렇게 들어가자 천서은과 영은성도 잠시 눈빛을 교환하더니 이내 뒤따라 걸음을 옮겼다.
“일단 들어가요.”
진도건에게 말하면서 지나친 천서은도 이화림 안으로 들어갔다.
처벅처벅…….
천서은은 배꽃의 향취를 맡으면서 기감은 충분히 열어두고 있었다. 젖은 지면은 좋은 기분이 아니었으나 아직 만발한 하얀 꽃들은 이곳이 적들의 은신처라는 사실을 알고 있음에도 기분을 띄워주는 건 피할 수 없었다.
그렇게 무의식적으로 어느새 스무 걸음 정도 걸어갔을까?
그녀는 진도건의 기척이 아직도 처음 서 있던 그 자리에 머무른 채 따라붙고 있지 않다는 걸 깨달았다. 그리고 그를 부르기 위해 돌아서려는 순간,
진도건의 기척이 그녀의 감각에서 사라졌다.
“진…….”
미처 그 이름을 입에 모두 떼기도 전.
일직선으로 걸어왔을 뿐이지만, 뒤를 돌아보았을 때는 시야를 가득 채우고 있는 건 오직 꽃피운 배나무들뿐이었다.
“응? 뭐, 뭐야?”
“환진……!”
최현걸과 영은성도 이상을 느낀 건 마찬가지.
다행인지 세 사람의 거리가 가까워 그들 사이는 갈라지지 않았으나 역시 천서은처럼 뒤돌아보았을 때, 진도건의 모습은 그들도 찾을 수 없었다.
“진 대형!”
최현걸이 크게 소리쳤으나 돌아오는 것은 메아리뿐이었다.
세 사람은 즉시 왔던 길을 돌아갔으나 고작 진도건과 스무여 걸음 차이의 거리 속에서 그는 어디에도 없었다. 오히려 이리 뛰고 저리 뛰어다녀 보던 그들은 이내 자신들의 방향감각이 엉망이 되어버리고 있음을 차례로 깨닫기만 할 뿐이었다.
“공격할까요?”
부하의 물음에 망양(芒羊)은 인상을 찌푸리며 잠시 고민하더니 이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냥 시간을 끌다가 다른 길로 보내버리는 게 좋겠다.”
“왜 그러십니까?”
“저 연놈들……, 상당한 고수야. 특히 저년은 위험해.”
망양 자신이나 뒤따르고 있는 십여 명의 부하들은 모두 무공 실력이 그다지 특출나진 않았지만, 그들이 다루는 모든 환진 내에서 역량이 상승하는 효과를 받기에 이런 상황에선 보통 적들을 두려워하는 편이 아니었다.
하지만, 무공이 상승하는 만큼 위험을 감지하는 능력도 올라가는 법이다.
환도종에 속해 있는 자들이 공통적으로 저지르는 실수는 자신의 힘이 강해지는 느낌에 취해 위험을 감지하는 데 안이해지는 것인데, 망양은 언제나 위험요인을 살피는 것을 최우선순위로 고려하는 남자였다.
그런 그의 생존본능은 이화림에 펼쳐진 환진 속에서 길을 헤매고 있는 여인이 얼마나 위험한지 계속해서 신호를 보내주고 있었다.
“쩝, 정말 저 엄청난 미녀를 그냥 두고 봐야 합니까? 무림인들은 자포자기가 오래 걸리는데 말이지요.”
이 환진 내에서 그들이 저지른 범죄는 한둘이 아니었다. 살인, 약탈은 물론이고 여인들을 상대로 강간까지 서슴지 않았다. 덕분에 망양도 위기가 올지도 모른다는 불안감과 남방환마 비작으로부터 자중하라는 전갈이 겹치면서 최근 여러모로 조심하긴 했었다. 그러나 부하들은 그 참을성이 굶주림으로 변했는지 당장이라도 사단을 벌이지 못해 더 안절부절못하는 모양새였다.
“숨어서 환진을 관리하는 것도 며칠 안 남았다. 네가 정녕 비작께 죽고 싶은 게냐? 입 닥치거라.”
“쳇, 알겠습니다요.”
부하가 투덜거리면서 공격하지 않는다는 수신호를 다른 쪽 감시자들에게 보냈다.
망양은 부하의 투덜거림을 무시하면서 이화림 속 세 사람을 바라보았다.
그들과의 거리가 좁혀지자 망양은 손을 허공에 뻗은 다음 가로로 천천히 밀듯 움직였다. 그러자 그들이 자리하고 있던 공간이 미끄러지듯 움직이더니 어느새 세 사람의 측면 쪽에 위치하게 되었다. 그사이에 존재하던 배나무들은 너무나 자연스럽게 길을 비켜주듯 거리를 벌렸다가 다시 제자리로 돌아오니 가히 귀신의 술수와도 같았다.
‘오늘부터 하루 이틀 사이로 계획이 진행된다고 했었는데 하필 저 정도 고수가 오다니. 너무 오래 가둬놓으면 오히려 환술에 적응하면서 우리 위치를 포착할지도 모른다. 그냥 두면 위험해. 차라리 천천히 길을 열어서 산 반대쪽으로 내보내 버리는 게 나을 수도 있겠다. 그래야 혹여 다시 들어오더라도 빨리 적응해버리는 일은 없을 테니.’
망양이 다른 쪽으로 잠시 시선을 던졌다.
한 가지 걸리는 게 있다면 아직도 이화림 안으로 들어오지 않고 있는 한 사내였다.
붉은 머리카락에 붉은 눈빛.
다른 건 차치하고서라도 그 특이한 이목구비가 한번 눈에 담기자 여간 껄끄러운 게 아니었다.
‘아직도 안 들어오는 거 보면 보통 신중한 자가 아니로군. 환진 밖에 있으니 감지하긴 어렵지만, 저런 신중함이라면…… 어쩌면 상당한 고수일지도.’
신경이 쓰이긴 했으나 이화림에 펼쳐진 환진은 도등(圖騰:totem)을 이용한 환막음극진이라 기존의 술자 중심 환진보다 훨씬 강력했다. 그래서 적발적안의 남자, 진도건이 어떤 무공 수준을 갖추고 있는지도 솔직히 그의 관심 밖이었다.
망양은 환진 밖의 남자에게서 다시 시선을 거두고는 안쪽의 세 사람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문신이 그려진 두 손을 펼치면서 조용히 집중하기 시작했다. 이어 손등의 문신도 은은한 광택이 흐르기 시작했다.
‘길을 내어라!’
의지를 발(發)하자 환술의 유동이 일어난다.
쪽빛의 아지랑이가 그의 두 손을 두르면서 일렁이는데 흡사 호수에 돌을 떨어뜨린 것처럼 그의 손을 중심으로 파문처럼 아지랑이가 퍼져나가기 시작했다.
그때였다.
오싹한 느낌이 등골을 타고 올라 뇌리까지 관통했다.
망양은 피부를 타고 뚜렷하게 느껴지는 불길함을 쫓아서 두 손은 그대로 유지한 채 고개가 홱 돌렸다.
‘헉!’
그의 시선이 닿은 곳에 있어야 할 적발의 사내가 보이지 않았다.
그 대신 그의 눈길을 사로잡은 것은 이화림의 하늘로 번지듯 흐르는 핏빛 아지랑이들이었다. 그리고……….
파삭!
이화림에 세워놓은 세 개의 도등 중 하나가 부서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