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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의 귀신-224화 (224/432)

224화 - 제41장. 먹구름은 아직 걷히지 않았다 (4)

야율균은이 별채에서 나오자 한 여성이 별채 정원에서 그녀를 바라보며 싱긋 미소를 지었다.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전 당이연(唐李衍)이라고 해요. 당환은 제 아버지로 전 그분의 외동딸이에요.”

당이연이 단전에 가지런히 두 손을 모은 채 허리를 수그리며 인사했다. 행동거지 같은 게 아직 무림의 물이 덜 물든 것 같았다.

“아, 네.”

“옷이 잘 맞는 것 같네요?”

당이연의 말에 야율균은이 어색한 표정으로 자신이 입은 옷을 살피면서 괜스레 만지작거렸다.

그녀가 입던 것과 비슷하게 간소한 무복이긴 했으나 푸른 바탕에 제비꽃이 수 놓인, 그녀로선 다소 화사한 분위기가 조금 어색하기도 했다.

그렇다고 마음에 들지 않는 것은 아니었다.

비에 젖은 옷을 다시 입기엔 숙성된 체취가 신경 쓰였기 때문이었다.

“큰 어머님이 직접 골라주셨어요. 아가씨를 은근히 신경 써주시던데요?”

당이연은 색깔이 다른 몇 벌의 무복을 그녀에게 들어 올려 보이며 괜찮을 거 같냐고 물어보던 진윤지의 모습을 떠올리며 말했다.

“큰 어머님?”

“같이 오셨잖아요? 가주님의 처 되시는 당문의 안주인 말이에요.”

“아! ……감사하네요.”

진윤지가 직접 골라줬다고 하니 왠지 더 마음에 드는 기분이었다.

야율균은이 잠시 옷을 살피면서 여기저기 쓰다듬어보는데 그 모습을 당이연이 알 듯 모를 듯한 미소를 지으며 바라보았다.

“갈까요?”

야율균은이 고개를 끄덕였다.

두 사람은 바로 별채를 나와 당향청이 있는 방향으로 걷기 시작했다. 당이연보다는 조금 뒤에 처진 채 옆에서 걷던 야율균은은 주변을 둘러보다가 무심코 입을 열었다.

“담장이 참 많은 것 같아요. 불필요해 보이고 너무 답답한 느낌인데.”

“그렇죠? 제 생각도 그랬어요. 호호호! 너무 답답해서 아버지께 투정을 부리기도 했었죠. 그런데 최근 며칠간 가문의 어른들 대부분이 잠시 자리를 비우니까 새삼 여기만큼 안전한 곳도 없다는 생각이 들어서 저도 이번에야 생각이 조금 달라졌네요.”

“안전한 곳이요?”

“아시겠지만, 우리 당문은 보통의 무림세가가 아니에요. 독, 의술, 암기 같은 것뿐만 아니라 온갖 기문 장치도 연구하기 때문에 외부로는 공개할 수 없는 비전의 자료가 많이 축적되어 있어요. 그 가치는 단순히 황금이나 절세 영약으로도 값을 매길 수가 없죠. 가주님이나 가문의 어른들은 무공이 뛰어나니 그분들이 있을 때는 괜찮지만, 밖에 출장을 가시거나 하면 저희의 보물들을 지킬 수 있는 수단이 필요한데 그게 바로 이런 담장들인 거죠.”

“기문 장치라…… 이 담장에 그런 것들이 숨겨져 있다는 소리로 들리는군요.”

“네. 그 비밀은 어른들만이 알고 계셔서 저도 어떻게 작동할 수 있는지는 몰라요. 한 가지 확실한 건 제아무리 화경의 고수라 한들 본격적으로 작동되기 시작한 내원의 기문기관진(奇門機關陣) 안에선 쉬이 살아나가기 힘들 뿐만 아니라 당문의 비보에 접근조차 할 수 없게 된다는 것이죠.”

“흐음, 당하고 싶진 않으나 구경해보고 싶긴 하네요.”

평범한 담장이 그런 기관진 역할을 한다는 게 쉬이 믿어지지 않았으나 그렇다고 당이연이 그녀에게 허풍을 떨 것 같지도 않았다.

당문에 대한 명성과 소문들은 오랫동안 이어져 왔고 그것들에 일부 과장된 부분이 있다 한들 큰 줄기의 진위까지 부정할 수는 없었다. 오히려 당한솔의 두 발이 되어주는 륜의에서도 온갖 암기들이 쏟아져 나왔던 걸 기억했을 때, 당이연의 말을 의심하는 것도 쉬운 일은 아니었다.

“그런데 너무 순순하게 알려주는 것 아니에요? 절 어떻게 믿고…….”

“호호호! 제가 얘기한 것들을 강호에 떠벌리고 다녀도 아무 지장 없을걸요? 이미 대략적인 건 잘 알려진 사실인 데다가 이런 얘기들은 사람에 사람을 거쳐서 살이 더 붙으면 아마 어느 시점엔 이 당문은 어느새 난공불락의 요새처럼 묘사될지도 모르죠. 그럼 저희로서는 손해 보는 장사는 아니지요.”

“그렇겠네요. 똑똑하신데요?”

“소가주님에 비하면 한참 멀었죠. 호호호!”

당이연이 까르르 웃음 지었다.

소녀티를 벗지 못한 특유의 맑고 밝은 분위기가 그녀에게 있었으니 그녀의 이야기를 옆에서 듣는 것만으로도 야율균은은 한결 기분이 좋아졌다.

나이 차이가 조금 있었지만, 같은 여성과 마음 편하게 잡담을 나누는 게 오랜만이다 보니 따뜻하게 목욕한 것만으로는 덜 풀렸던 피로감을 부분 덜어주는 느낌이었다.

당향청은 별채와 거리상으론 그리 멀지 않았지만, 두 사람은 담장과 전각 사이를 구불구불 몇 번이고 넘어서야 도착할 수 있었다.

딱 느끼기에도 이동에 있어서 참 비효율적이긴 했으나 그래도 이런 구조를 유지하는 건 더 중요한 이유가 있다는 걸 이제는 야율균은도 당연시 생각하기 시작했다.

당향청 문 앞에서 당이연이 인사를 건넸다.

“여기예요. 전 아직 회의에 끼여 주지 않아서 이만 돌아가 볼게요.”

그녀의 얼굴에 아쉽다는 감정이 떠올라 있었다.

야율균은이 피식 웃으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안내해줘서 고마워요.”

“네, 또 봐요!”

총총걸음으로 떠나가는 당이연의 뒷모습을 잠시 바라보던 야율균은이 조심스럽게 당향청의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안으로 들어선 야율균은은 청 내의 다소 생소한 풍경에 잠시 멈칫했다.

당향청 안에는 현재 당문에 남아 있는 유력 인사들이 모두 모여있었는데 한눈에 봐도 그 엄숙한 분위기로 아우르는 무언가가 있었다.

먼저 눈에 띄는 것은 들어온 문 맞은편의 벽에 걸린 사천지형도(四川地形圖)였다.

사천 분지부터 그 주변 일대까지 상당히 정교하게 묘사되어 있어 한눈에 들어왔는데 특히 그 바로 옆엔 성도지형도(成道地形圖)까지 같은 형식으로 표현되어 있어서 절로 시선을 뺏길 정도였다.

두 지형도의 바닥은 판형으로 가공된 자철석(磁鐵石)이 있어서 철재를 포함해 가공한 여러 표지석을 지형도에 뗐다 붙였다 하는 게 가능했다. 그런 기능적인 특징을 당환이 긴 막대 집게로 표지목을 집어 지형도에 붙이고 있는 모습으로 충분히 확인할 수 있었다.

다음으로 시선에 잡힌 것은 역시 당문의 인사들이었다.

지형도 바로 양옆으로는 당환과 당한솔이 있었고, 당한솔 옆에는 진윤지가 그녀를 알아보고 손짓하고 있었다.

이외에도 면주에 동행했던 당부순을 제외하면 셋은 처음 본 이들이었다.

진윤지가 아예 그녀에게 다가와 가까운 자리로 데려갔다. 그리고 그 두 사람을 그녀에게 소개했다.

“어서 와요. 이쪽은 처음 보죠? 제 남편이 삼형제인데 당환 시숙이 둘째, 여기 당량(唐諒) 도련님이 막내 시숙이세요. 그리고 여긴 당주형(唐柱形), 당가사수(唐家四秀) 중 한 사람이시죠. 인사하세요.”

“반갑습니다. 형수님께 얘기 많이 들었습니다.”

당문에 들어 온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무슨 얘기를 나눴는지 의아했지만, 야율균은은 당량을 향해 정중히 포권지례를 보였다.

“야율균은입니다.”

“당주형입니다. 먼 길 오느라 고생하시었소, 낭자.”

당혁수 삼형제는 모두 한 살 터울이었고 당량과 당환의 용모가 닮은 부분이 많아 형제라는 걸 인지하긴 쉬웠다.

당주형은 본래 당가의 방계로 아미파 장문인 정화사태(淨火師太) 아래에서 속가제자가 되어 아미산에서 수행 중이었다. 보통의 당문 사람들이 갖는 총명하고 섬세한 성향과 달리 우직하고 차분한 성격을 가졌던 그를 진윤지가 일찍 알아보고 무공의 성질이 더 잘 어울리는 아미파로 갈 수 있도록 도왔던 것이다.

그가 돌아온 건 정파의 봉문이 풀린 이후였는데 이젠 그 무재를 인정받아 당가사수로 대표하게 되면서 진윤지와 함께 당문과 아미파의 결속을 이어가는 상징적인 인물이 되기도 했다.

진윤지가 이번엔 깔끔한 옷차림에 특이한 용모를 가진 노인을 바라보았다.

“여긴 개방 성도분타주이신 철두개(鐵頭丐) 번공(樊攻) 대협이에요.”

“야율균은입니다.”

번공이 야율균은을 위아래로 훑어봤다.

이미 진윤지로부터 그녀가 마교 흑풍마종 출신의 거란족 여인임을 들은 뒤여서 훑어보는 시선에 호의란 별로 찾아볼 수 없었다. 그래도 좋게 설명해준 탓에 적대적인 시선으로 보진 않았으나 미심쩍다는 기분 정도는 눈빛에 그대로 드러내고 있었다.

그런 시선이야 대수로울 게 없었던 야율균은이었기에 별로 기분이 나쁘진 않았다. 오히려 백발이 머리의 옆과 뒤에만 간신히 남은 채 상부가 탈모로 반들반들해진 두피가 시선을 사로잡았다. 특히 이마가 앞으로 툭 불거져 있어서 왠지 두드려보고 싶게 생겼다.

그 전체적으로 우스꽝스러운 용모 때문에 하마터면 실소를 흘릴 뻔했다.

번공은 애써 그녀를 무시하듯 시선을 지형도 쪽에 돌리며 입을 열었다.

“회의나 계속 진행하시지요, 부인.”

“네, 계속 말씀해주십시오.”

진윤지가 번공이 계속 발언할 수 있도록 허락하면서 야율균은의 손을 잡고 한쪽으로 끌고 갔다. 그리고 멈춰 섰을 때, 야율균은은 공교롭게 당한솔의 옆에 서게 되었다.

“……일단 확실히 수상한 움직임이나 소문들이 백성들 사이에서도 나도는 것들이 있었습니다. 누군가 실종되었다거나, 또는 죽었다거나 하는 식인데 소문들의 진원지를 추적하여 수색해도 소득이랄 건 없었습니다. 저희도 특정 짓지 못해 답답할 따름입니다.”

“사혈주 쪽은 어떻습니까? 급보를 가져오셨다면서요?”

“그쪽 상황이 심각해졌습니다. 며칠 전까지만 해도 북도현(僰道縣:지금의 의빈宜宾)에서 그 행적이 포착되다가 서쪽 산지로 숨어들었던 게 마지막이었습니다만, 조금 전 급보에 의하면 대도하(大渡河) 북쪽 마을에서 그 자취를 포착했다고 합니다.”

“거기가 어디입니까?”

당환의 물음에 번공이 다가와 탁자 위 표지석 하나를 들어 사천지형도 왼쪽 아래쪽에 붙였다.

성도에서 남서쪽으로 가다 보면 큰 강이 하나 나오는데 민강(岷江)이라고 했다. 민강은 성도 서쪽에서부터 사천분지를 둘러서 남쪽으로 흐르는 강이었는데 대도하는 민강에서 아미산 아래쪽으로 빠지는 지류를 가리켰다.

번공이 표지목을 놓은 곳은 바로 그 대도하와 아미산 중간지점이었는데 그것이 의미하는 바는 명확했다.

“사혈주가 아미파를 치려는가?”

당주형이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아버님께서 돌아오지 않고 있는 게 저걸 감지했기 때문일까요?”

당한솔이 번공을 보며 물었다.

“저희 제자들이 당가주와도 소통을 하고 있으니 아마 전해 들은 게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당한솔이 시선을 한쪽 아래로 떨어뜨린 채 눈썹을 만지작거렸다. 뭔가 깊이 고민하는 눈치였는데, 그러길 잠깐 이내 입을 열었다.

“급보라고는 하나 시차가 있을 테니 어쩌면 오늘내일 중에 아미파에서 급변이 있을지도 모르겠군요.”

“사혈주의 독공이 까다로워 아미파로선 버거운 상대지만, 가주께서 근처에 계시니 쉬이 막을 수 있지 않겠느냐?”

“단순하게 생각하면 그렇긴 하지만, 석연찮은 지점이 있습니다. 아버님이 나선다면 아미파를 공격하려는 사혈주의 공세가 무너질 게 뻔한데도 움직이는 데는 숨은 이유가 있지 않겠습니까?”

“남쪽의 대적은 사혈주가 유일한데, 글쎄…….”

생각이 잘 풀리지 않자 당한솔이 고개를 조심스럽게 저었다. 그러다 시야가 좌우로 움직이는 도중 야율균은의 옆모습이 문득 눈에 잡혔다. 그러자 이내 떠오른 생각이 있었다.

“번 분타주님, 혹시 성도 동쪽 산자락과 타강이 만나는 부근에 있다는 이화림에 대한 소문을 들은 적이 있으십니까? 실종자가 많이 발생했다거나…….”

“……그런 소문을 들었던 게 있긴 하네만, 본방의 제자들로는 그 자취를 찾을 수는 없었다네. 그런데 우리 제자들이 그렇게 다녀가면 보통 근방의 소문은 잦아들기 마련이었는데, 거긴 이후로도 또 다른 관련 사건이 발생해서 조만간 고수들을 파견할 참…….”

“조금 전에 성도 근처에서도 그런 실종사건들이 있다 하셨지요?”

“그렇네만?”

“역시 마교 세력이 하나 더 들어와 있다고 봐야 할 것 같습니다.”

“아마 환도마종을 얘기하는 것이겠지.”

옆에 있던 야율균은이 조용히 중얼거렸다. 그 목소리를 들은 당한솔이 그녀를 흘끔 올려다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사혈주가 아미파를 향해 적극적으로 움직이기 시작한 이유엔 환도종이 당문을 견제할 거란 계산이 있었을지도 모릅니다. 만약 이 가정이 사실이라면…….”

당한솔이 말하던 중에 입을 꾹 다물었다. 그가 시선을 돌려 성도지형도를 바라보는데 륜의 팔걸이를 잡고 있던 두 손에 핏줄이 불거질 정도로 꽉 힘이 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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