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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의 귀신-223화 (223/432)

223화 - 제41장. 먹구름은 아직 걷히지 않았다 (3)

* * * *

장대한 사천 분지를 비롯해 사방 어디까지 먹구름이 이어졌는지 새까맣기만 하던 하늘은 나흘간 비를 쏟아내고 나서야 간신히 그쳤다.

하늘이 완전히 갠 것은 아니었지만, 이젠 하얗고 가벼워 보이는 구름만 남았고 덕분에 하늘도 꽤 높아진 채 그 햇살을 지면 위로 뿌리고 있었다.

그런 맑은 하늘과 달리 땅은 빗물에 흠뻑 젖어 발이 푹푹 빠지기 일쑤였다. 가는 길 곳곳에 물웅덩이가 매우 많았는데 비가 한창 내릴 때는 발이 빠지면 무릎 위까지 물에 잠길 정도이기도 했다.

그래도 그렇게 빗길 속을 뚫고 고생하며 성도에 도착했을 때는 내리쬐는 햇살과 여기까지 오는 데 겪었던 불편함이 싹 해결될 수 있었다.

성도성은 동서남북의 사대문과 관청 등 군관시설과 이어지는 관도는 모두 이처럼 돌로 포장되어 있어서 젖은 흙바닥에 발이 빠질 염려가 없었다.

특히 한여름 우기를 맞은 폭우 때문에 자꾸 바퀴가 파묻혀서 결국 마차에서 내릴 수밖에 없었던 당한솔과 진윤지였으니 여기까지 오는 여정의 곤혹스러움은 보통이 아니었다.

“어쩜 이렇게 성도에 도착하니까 비가 싹 그치나 그래?”

당부순이 투덜거리면서 굽은 허리를 손등으로 두드렸다. 비 때문에 계속 입고 있던 도롱이엔 아직 빗물이 남아있어서 등을 두드릴 때마다 축축한 물기가 튀어댔다.

“후후! 야율 낭자, 고생 많았어요. 덕분에 제가 참 편하게 왔어요.”

진윤지가 웃으며 옆을 돌아보았다. 그녀의 옆에선 야율균은이 당한솔의 륜의를 끌어주고 있었는데 마차에서 내린 이후로 줄곧 당한솔의 륜의는 야율균은의 몫이었다.

사실 진윤지만큼 당한솔의 륜의를 잘 끌 수 있는 사람은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렇지만, 그녀는 일부러 힘든 척하면서 야율균은에게 륜의를 넘겨주었으니 다분히 의도적이었다.

다행스럽게도 그녀를 절로 미소짓게 한 것이 야율균은의 기꺼운 태도였으니 고생스러웠던 빗길의 여정치고는 사실상 기대를 충족할 수 있었던 시간이기도 했다.

오히려 불편한 기색을 내비친 건 당한솔이었지만, 그런 기색도 그리 오래가진 않았다.

“불편하면 얘기하세요.”

야율균은의 그 목소리에 그는 감히 불편함이란 감정을 조금도 꺼낼 수 없게 만들었다.

오히려 제법 능숙하게 륜의를 끌게 된 야율균은의 섬세함에 감동이 한 숟갈, 괜스레 빗길 속에 폐를 끼친다는 미안함이 한 숟갈씩 버무려져 묘해진 감정이 그의 가슴 속에 맴돌고 있었다.

성도는 사천의 중심지답게 중원의 여느 대도시 못지않은 규모를 자랑했다.

성 바깥엔 비옥한 토양을 토대로 논밭을 이룬 경작지가 광활하게 펼쳐져 있었는데 성벽 안으로 들어오니 지역 풍속의 묘한 양식이 섞인 화려한 전각들이 정돈된 길을 따라 펼쳐져 있었다.

특색있는 문화의 향취가 느껴졌고 민중의 삶도 풍족함이 느껴졌다. 전화(戰火)로 인해 중원의 여러 도시, 마을들이 침체해져 있는 것과는 대비된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사천당문은 성도성 남동부 외곽 지역에 있었다.

무림에서 사천당문은 독과 암기, 의술로 주목받는 무가였지만, 이곳의 민중들에게 그들은 당가장(唐家莊) 또는 당가의원(唐家醫院)이라 부르며 명망 있는 의원 가문이기도 했다.

당문의 장원도 여느 다른 곳처럼 외원과 내원으로 나뉘어 있는데 민중에서 당가의원이라고 부르는 곳은 바로 외원에 해당했고 무림에서의 당문은 내원을 일컬었다.

야율균은은 이런 내용을 오는 길에 간략하게 진윤지를 통해 들을 수 있었다. 그러나 당문 외원의 담장을 보면서 자신이 상상했던 것과는 사뭇 다룬 풍경에 내심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여기가 외원이라고요?”

“그래요. 작은 마을 같죠?”

진윤지가 웃으며 되물었다.

그녀의 말마따나 당문의 외원은 성도 안의 작은 마을처럼 보였다.

사람 키만 한 높이의 담장이 끝도 없이 이어질 때는 대체 어디로 이어지나 싶었다. 그러나 그녀의 생각보다 담장 중간중간엔 의외로 허술하게 시비(柴扉:싸리문)가 있어서 누구든 자유롭게 왕래할 수 있게 되어 있었다.

그 안에 펼쳐져 있는 것은 정말 많은 의원과 약방들이었으니 담장을 넘어선 것만으로도 약재 달이는 냄새가 공기 중에 흘러 다니고 있었다.

“원래는 이곳도 담장을 높이 세워놓고 당문이 만든 여러 장치를 시험할 수 있는 건물들이 가득했어요. 그러나 오래전 정파의 위상이 꺾이며 모두 봉문에 들어갔을 때, 당문이 베풀던 의료행위들이 끊길까 우려했던 당시 익주자사(益州刺史)가 방편을 마련하라는 공문이 왔었다고 해요. 그래서 외원의 시설들을 모두 허물고 의촌(醫村)처럼 꾸미게 된 게 지금의 모습이 된 것이죠.”

“그렇군요. 그럼 여긴 말이 당문의 외원이지 사실상 민중에 개방한 것이군요?”

“그런 셈이긴 한데, 한편으로는 당문으로선 봉문한 상황에서도 연구를 지속하기 위해 여러 물자를 조달하기 위한 통로로 삼을 수 있었으니 마냥 손해만 보았다고 할 수는 없었죠.”

진윤지의 자세한 설명은 외원을 가로지르는 동안 몇 번 더 이어졌고, 야율균은은 연신 고개를 끄덕이고 때로는 질문도 하면서 귀담아들었다.

두 여인의 이런 대화를 륜의에 앉은 채 야율균은이 밀어주는 힘에 몸을 맡기고 있던 당한솔은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이건 마치…….’

덜컹!

그때 돌부리에 걸리는 바람에 륜의가 들썩였다.

잠깐 생각에 잠겨 있던 당한솔도 대비하지 못해 몸이 왼쪽으로 크게 기울어져서 급히 팔걸이를 붙잡고 바로 세웠다.

야율균은은 당황하여 륜의를 멈추고 당한솔의 옆에 가 그의 신상을 살폈다.

“괜찮나요?”

그녀와 눈이 마주친 순간, 당한솔은 잠깐 머릿속 의식의 흐름이 멈추는 것을 경험했다.

면주에서 만났을 때의 그녀는 어딘가 다소 쌀쌀맞거나 딱딱한 태도를 보여주었다. 그러나 지금은 폭우 속 고된 여정을 함께 한 동행자로서 그의 안위를 살피는 데 필요한 배려가 몸에 배어있었다.

괜찮냐고 묻는 그 짧은 한마디에 담긴 부드러운 어투를 듣는 순간, 그는 빗길 속 진흙에 륜의의 바퀴가 빠져 난감한 상황이 되었을 때도 이런 비슷한 어투로 안위를 물어왔던 것이 떠올랐다. 그리고 이젠 그런 배려나 부드러운 어투가 어색하게 들리지 않는다는 걸 새삼 깨닫는다.

“……괜찮습니다.”

미소를 짓고 대답했다가 왠지 모를 쑥스러움에 고개가 절로 숙여졌다.

그런 그의 반응을 보았기 때문이었을까, 야율균은도 시선을 피하고 다시 륜의를 붙잡는데 옆에서 지켜보던 진윤지는 두 사람의 모습들을 보며 속으로 쾌재를 질렀다.

‘잘하면 드디어 며느리를 맞이할지도 모르겠구나. 호호호! ……그이도 기뻐해 주겠지?’

남녀 간의 묘한 기류를 가까이서 지켜보던 진윤지도 남편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다.

부부 사이와는 또 다르지만, 한 번 지나왔던 길인만큼 다시 떠올려도 그 떨림은 여전히 남아있다.

“괜찮으면 계속 갈까요?”

진윤지가 야율균은을 보고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

조금은 무심하게 그녀와 대화를 나누었던 야율균은이 어색하게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네,”

진윤지, 당한솔 일행은 다시 발걸음을 이동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 내원 앞에 당도했다. 그 앞에는 연통을 받은 당환과 다른 당문 사람들이 진윤지와 당한솔을 마중 나와 기다리고 있었다.

“어서 오십시오. 고생들 많으셨습니다.”

당환이 진윤지와 당한솔을 맞이하는 사이, 안에선 하인들이 나와 출장자들이 벗는 도롱이를 챙겨 수거해갔다.

“남편은요?”

“소식을 전하긴 했는데, 그간 돌아간 상황을 들어보니 아무래도 당장 돌아오시긴 힘들어 보입니다.”

“역시 사혈주 때문인가요?”

“그래.”

당한솔의 물음에 당환이 고개를 끄덕였다.

당한솔은 오는 길에 면주에서 습격을 받았던 일을 곱씹어보았는데, 어쩐지 사혈신마에게서 수상한 움직임이 있을 것 같다는 추측이 들어서 물은 것이었다.

당환은 문득 출장자들 쪽으로 시선을 옮기다가 야율균은과 눈을 마주쳤다. 그리고 있어야 할 사람들이 보이지 않는다는 걸 깨달았다.

“일행이 보이지 않는군. 진 공자나 천 소저는 어디 가시었소?”

당환은 진도건 일행이 가주 당혁수를 만나고 싶어 한 걸 알았기 때문에 그들이 이 자리에 없는 것이 의아했다.

“수상한 마교도 은신처가 있다고 해서 거길 살피기 위해 잠시 헤어졌어요. 이화림……이었나? 그렇게 불렀던 것 같아요.”

“이화림?”

“성도 북동쪽에 타강과 만나는 산지 속 숲 이름이에요.”

진윤지가 이화림에 대해 대신 답해주었다.

그 말을 들은 당환이 인상을 살짝 찌푸렸다.

“하필 성도와 가까운 곳에 마교도 은신처라. 왠지 께름칙하군요.”

진윤지는 이대로면 선 채로 얘기가 더 길어질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녀는 당한솔에게 다가가 어깨를 어루만졌다.

“일단 여정이 고됐으니 좀 씻고 식사도 하고 그러자꾸나.”

“알겠습니다, 어머니.”

당한솔이 순순히 대답했다. 그러나 그는 언제나 소가주로서의 책임을 잊어본 적이 없었다.

당한솔이 당환을 보며 입을 열었다.

“현황 좀 정리해주세요, 숙부님. 사혈주의 동향도 물론이고 중원 쪽의 소식도 들어온 게 있다면 같이 정리 부탁드립니다.”

“안 그래도 네가 오기 조금 전에 왠지 필요할 거 같아서 개방의 성도 분타에 연통을 넣어놓았다. 아마 주변에서 우리 모르게 일어나는 일들에 대해서 어쩌면 아는 게 있을지도 모르겠네.”

“시숙, 야율 낭자에게 별채로 안내해주세요. 모두 여독을 잠시 풀고 한 시진 뒤에 다시 모이기로 하죠.”

“알겠습니다.”

진윤지는 야율균은에게 륜의를 넘겨받고 내원 안으로 들어섰다. 야율균은도 오랜만에 허전해진 손을 쥐었다 폈다 하면서 진윤지의 뒤를 따라갔다.

안으로 들어서자 밖에선 미처 느끼지 못했던 분위기의 풍광이 그녀를 맞이했다.

담장 안에 담장이 또 있었으며 그 사이사이로 다양한 형태의 전각들이 내원을 채우고 있었다. 게다가 묘하게 내원 공기가 서늘하였는데 안내를 하던 당환이 전해준 당부를 듣고 그 이유를 어림짐작할 수 있었다.

“내원의 규모가 크진 않지만, 담장과 전각의 위치가 불규칙하여 외부인이 함부로 돌아다니다간 길을 잃기 쉬운 곳이라오. 게다가 내원 방어를 위한 기문장치가 여러 곳에 은닉되어 있소. 지금이야 작동하지 않겠지만, 실수로 건들고는 낭패를 겪을 수도 있으니 되도록 우리의 안내를 받으면서 다니는 게 좋겠소.”

야율균은은 조금 전 도롱이를 챙겨간 하인들을 떠올렸다.

“하인들은 길을 모두 아나 보죠?”

“하인을 많이 두지도 않지만, 구획을 나누어 배치하였기에 그들도 당씨 식솔들의 인솔 없이는 바깥으로 나갈 수도 없다오. 그런 불편 때문에 그런 하인들은 대부분 내원에서도 가장자리 구역에 배치하는 편이고 안쪽의 일은 가족들이 일들을 직접 챙기는 편이오.”

“그렇군요.”

두 사람은 다른 일행과 일찍이 떨어져 이동했다.

당환은 내원의 규모가 크지 않다고 했지만, 야율균은은 다소 답답할 수 있는 주변 구조들이 반복적으로 이어지는 것 때문에 전혀 작다고 느껴지지 않았다. 그래도 당환이 안내한 별채는 입구(口)자로 닫힌 구조이긴 했으나 안쪽의 정원이 넓고 하늘도 충분히 뚫려있어서 내원의 답답한 느낌은 덜했다.

“저 방을 쓰면 되오.”

“고맙습니다.”

“안사람을 시켜 진 공자 일행들도 목욕할 수 있게 뜨거운 물을 준비했는데 헛수고가 되었군.”

당환이 쓴웃음을 지으며 수염을 쓰다듬었다.

야율균은은 그에게 재차 포권과 함께 고개를 숙이며 감사를 표했다.

“한 시진 뒤에 내 아이를 보내겠소. 당향청(唐香廳)의 회의에 함께 해주시오.”

“알겠습니다.”

당환은 야율균은의 차분한 대답을 듣고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리고 이내 별채를 빠져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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