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2화 - 제41장. 먹구름은 아직 걷히지 않았다 (2)
콰콰콰쾅!
수많은 강기 다발이 마치 밤하늘의 유성처럼 광채를 발하며 광혈종들의 머리 위로 떨어졌다. 낙하하는 속도에 더해 보통의 절정고수들과는 수준이 다른 밀도 높은 강기가 가져오는 중량감은 엄청난 폭발을 일으키고 있었다.
하늘에서부터 한 자루 도를 들고 비에 젖은 백발을 휘날리며 고고하게 내려오는 구치상의 모습은 위용이 넘쳤다.
그의 난데없는 개입에 오규와 광혈종은 전진을 멈추었고 선두에서 도주하는 구룡문의 등을 치던 자들도 추격을 멈추고 물러나야만 했다.
“넌 누구냐?”
오규가 가득 경계하며 목청 높여 물었다.
콰드드드-!
구치상은 대답에 앞서 앞쪽 지면을 향해 도를 크게 휘둘렀다.
장대한 도기가 내리꽂히며 그대로 광혈종과 구치상 사이에 폭우 속에서도 선명하게 보일만한 깊이의 선이 지면에 그어졌다.
“난 창천단주 칠성도존 구치상이다. 지금부터 이 선을 넘는 자, 내 칼에 자비 따위 구하지 말지어다.”
등장만으로도 저마다 설마 하는 심정으로 그 정체를 궁금해했다.
이제 본인의 목소리로 그 정체를 듣게 되었으니 광혈종과 구룡문은 명확하게 희비가 엇갈렸다. 특히 구룡문은 멀지 않은 곳에 창천단이 왔으리란 생각에 생환할 수 있다는 희망의 불씨를 되살릴 수 있었다.
그만큼 천하오절 구치상, 이름만으로도 분위기를 역전시키는 감이 있었다.
구치상은 흘끔 뒤를 돌아보았고 이내 황사열과 눈이 마주쳤다.
황사열은 금방 구치상의 의도를 알아챘다.
“계속 후퇴하라!”
황사열의 명령이 떨어지자 주춤거리면서 잠시 멈추었던 구룡문도들이 다시 북쪽으로 달리기 시작했다.
구치상은 그런 구룡문의 후방을 지켜주면서도 광혈종과 오규에게 시선을 떼지 않은 채 함께 물러나기 시작했다.
오규는 잠시 천하오절의 이름값에 눌려 결단을 내리지 못했다.
그들 앞 지면에 길게 패인 도격의 흔적은 구치상의 명성과 더불어 섣불리 넘을 수 없도록 주눅을 들게 했다. 그리고 그 망설임은 구치상이 마지막으로 숲에 들어가서야 깨질 수 있었다.
“……제길! 쫓아라! 구치상은 내가 막을 터이니 후발대가 올 때까지 버티면 된다!”
오규의 명령이 떨어지자 광혈종은 다시 구룡문의 뒤를 쫓기 시작했다.
숲에 진입하고 얼마 가지 않아 금방 그 뒤를 잡을 수 있었지만, 누구도 섣불리 공격을 감행하지 못했다. 광혈종의 신체 내구력은 구주마종 가운데 으뜸이었음에도 누구 하나 구치상의 일격을 받아낼 자신이 없기 때문이었다.
“이익! 내가 간다!”
한 번 내뱉은 말을 지키려는 듯 오규가 쌍부를 휘두르며 구치상에게 덤벼들었다.
자웅천살부(雌雄擅殺斧) 용풍첩부(龍風疊斧).
첩첩이 쌓이는 도끼의 광풍을 몰고 오규 자신이 직접 폭풍이 되어 돌격한다. 그 예리함, 육중함을 한데 품은 파괴력은 결코 가벼이 넘겨선 안 될 것이다.
자리를 피하면 도망치는 구룡문의 후방을 그대로 노출하는 일이 될 수 있기에 구치상은 두 발을 단단하게 지면에 꽂아 넣는다.
칠성도법 천기성하(天璣星河).
자신의 도와 왼손에 공력을 집중한다. 도신을 쓸어가는 왼손의 이동을 쫓아 기운이 그 위로 덧씌워지는데 마치 별 무리처럼 반짝였다.
섬세하게 조정되어 형성된 새끼손톱만 한 크기의 수백 개의 강환(罡環)이다.
구치상이 찰랑거리는 별의 빛무리를 도신에 싣고 짓쳐 드는 폭풍에 몸을 날렸다.
카카카캉!
가히 무차별적인 난격(亂擊)의 합이 이어졌다.
본능에 맡기면서 휘두르는 쌍부는 무겁고 강력했으나 구치상의 웅혼한 내공은 그것을 뛰어넘고도 남음이 있었다.
강환이 쏟아내는 충격에 오규는 오장육부가 뒤틀리는 것 같은 고통이 이어졌으나 끈질기게 구치상과 맞붙었다. 그리고 그사이 광혈종이 구룡문의 뒤를 덮치기 시작했다.
또다시 격전이 벌어지기 시작했으나 이번엔 오규의 뜻대로 되지 않았다.
황사열도 소폭 기운을 차린 데다가 장이풍과 탁민효는 비교적 건재하니 그들을 붙잡을 사람들이 없었다. 게다가 구치상이 등장한 것만으로도 광혈종은 위축이 되어 여기까지 맹렬히 추격해왔던 기세를 잃은 것처럼 보였다.
‘이 한심한 놈들이…….’
구치상을 상대로 버티는 것조차 아슬아슬한 상황에서 부하들이 그가 원하는 만큼의 힘을 못 보여주고 있으니 답답할 지경이었다.
무엇보다 광혈종을 더 위축시킨 자가 있었으니 새로이 등장한 한 사람에 의해서였다.
“끄억!”
“무, 무당파?”
“악!”
비명들 한가운데서 들려온 무당파란 이름.
카앙!
급히 쌍부를 내지르면서 구치상을 밀어내고 거리를 벌린 오규의 고개가 휙 돌아갔다.
광혈종 마교도들 사이에서 검무를 추며 피를 흩뿌리는 한 청년이 있었는데 그가 입고 있는 도복은 폭우가 쏟아지는 밤중에도 한눈에 보일 만큼 그의 인상에 깊이 각인되어 있었다. 그리고 그 청년의 얼굴은 그도 잘 아는 얼굴이기도 했다.
‘소요자의 제자?’
3년 전.
광혈신마와 광혈종이 구룡문을 급습하여 절반에 가까운 목숨을 쓸어 담았을 때, 느닷없이 전장에 난입한 무당파 도사들의 모습은 기억에 선명하게 남아있었다. 그 가운데 돋보이는 것은 소요자라는 화경의 고수였지만, 소요자를 스승이라 부르면서 비상한 실력을 발휘하던 젊은 도사의 얼굴도 언젠가 산 채로 씹어먹어 주리란 다짐과 함께 기억에 정확하게 새긴 터였다.
청명의 움직임은 검은 물이 흘러가듯, 바람이 부는 듯 광혈종들의 사이사이를 지나쳤고 그때마다 하나둘씩 비명과 함께 쓰러졌다.
오규가 더더욱 놀란 것은 잠깐 살핀 것만으로도 청명의 실력이 예년보다 훨씬 상승했음을, 특히 풍기는 기운이 보통 심상치 않은 경지에 이르렀음이 느껴진다는 것이었다.
구룡문에게 광혈종이 악몽으로 남아있었다면, 광혈종에게도 무당파의 소요자가 그러했었다. 그리고 오규는 청명에게서 소요자의 그림자를 선명하게 느끼고 있었다.
카앙!
빈틈을 노리고 구치상이 파고들어 도를 휘둘렀으나 오규도 마냥 긴장을 놓지 않고 있었기에 왼손의 도끼를 휘둘러 막아냈다. 그리고 그 충격을 이용해 뒤로 크게 물러났다.
“퇴각하라!”
마침내 결심한 오규의 명령이 터져나가고 광혈종도 강가로 물러나기 시작했다.
잠깐의 격전이 금방 끝나버리자 황사열은 의아했지만, 그도 어렴풋이 무당파 도사의 등장만으로 광혈종의 살의가 꺾였음을 느끼고는 있었다.
구치상도 그 점을 분명하게 느꼈다.
“청명, 후방을 살피면서 놈들이 오는지 경계해라. 난 앞장서서 구룡문을 창천단이 있는 방향으로 인도하겠다. 만약 놈들이 다시 추격해온다면 신호를 보내거라.”
“걱정 마십시오.”
청명의 대답이 든든하기 그지없다.
구치상이 피식 웃고는 경공을 펼치며 구룡문 잔당들의 머리 위를 단숨에 뛰어넘었다.
“이대로 계속 퇴각하라!”
구치상의 뒤를 쫓아 황사열의 구룡문은 마지막 남아있는 힘을 짜내어 도주했다.
산등성이를 하나, 둘, 셋을 넘어 마침내 창천단과 합류할 때까지 청명으로부터 어떤 신호도 오지 않았다. 이는 즉, 광혈종의 추격에서 유의미한 거리를 벌렸다는 얘기가 되는 상황이었으니 오랜 격전으로 지친 황사열과 장이풍 등은 조금 안심할 수 있었다.
구치상은 구룡문 잔당을 둘러보았다.
남아있는 숫자는 오백 명 남짓.
삼, 사천 명 규모의 거대 문파였던 구룡문이 독자행동을 한 결과는 그야말로 참담했다.
“지원을 와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탁민효가 다가와 포권을 취하며 감사를 표했다.
구치상의 그를 비롯해 다른 사람들을 보고 있으니 몸 성한 사람 하나 없는 데다가 쏟아지는 폭우와 계곡물을 헤엄쳐 건너느라 그 꼴이 보기 안쓰러울 정도였다.
탁민효는 일전에 창천맹으로 찾아와 구룡문과의 접점 역할을 하면서 호의를 유지해왔었으니 구치상도 절로 그에게 다가가 어깨를 토닥이며 꼭 안아주게 되었다.
“늦어서 미안하네. 고생들 많았어.”
“하아…….”
탁민효가 한숨을 푹 쉬었다.
어쩌면 이런 꼴로 재회하지 않았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 있었다.
끝내 금태하를 설득해내지 못했다는 생각이 아쉬움으로 잠깐, 이내 미련으로 남고 억울함이 되어 가슴 속으로 밀고 들어왔다.
그의 한숨이 의미하는 바를 구치상도 모르지 않았다.
구치상의 시선은 다시 황사열에게 닿을 수밖에 없었다.
사패련에서 보았던 호기 넘치는 그 건장한 장정이 지금은 패장(敗將)이 된 채 그의 앞에서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허나 이 싸움의 책임이 어찌 이 젊은 수장에게 있으랴.
“네 스승은?”
“……모르겠습니다.”
무거운 질문에 황사열이 무겁게 고개를 저었다.
염황신마와 광혈신마의 손에 죽음을 맞았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단 한 번도 들지 않았던 것은 아니지만, 어찌 제자 된 자의 입으로 스승의 죽음을 함부로 이야기할 수 있을까?
구치상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고개를 돌려 창천단 쪽을 보았다.
“도인범(道寅凡).”
“예, 스승님.”
칠성파의 북두칠걸(北斗七傑) 중 한 사람이자 구치상의 제자인 도인범은 창천맹에도 따라와 부단주 중 한자리를 담당하고 있었다.
“일단 오후까지 머물렀던 신농봉까지 후퇴하자. 거기라면 마교 놈들이 쫓아오는지 확인하기에도 좋고, 일단 이들이 비를 피해 쉴 곳도 필요하니 거기 동굴들이 좋을 것 같다.”
“알겠습니다. 그런데 청명도사는 어디 있습니까?”
“응? 그러고 보니…….”
도인범의 질문에 구치상이 지나온 길을 돌아보았다.
뒤를 경계하며 오기로 되어있던 청명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구치상은 잠시 눈을 감고 기감을 확장했다. 그리고 두 산등성이 너머에 있는 청명의 기척을 포착할 수 있었다.
‘뭐하기에 저기 망부석처럼……. 흐음, 위험하진 않은 것 같고…….’
구치상은 잠깐 고개를 갸웃거리곤 다시 도인범에게로 몸을 돌렸다.
“일단 가자. 녀석의 무공과 경공이 모두 뛰어나니 문제는 없겠지. 충분히 우리 뒤를 쫓아올 수 있을 것이다.”
“예.”
청명은 구치상과 구룡문이 후퇴하는 상황에서 강가에 있는 오규와 광혈종 등을 잠시 지켜보았다. 그리고 구룡문과 일정 거리를 두면서 그도 천천히 물러나기 시작했다.
구룡문이 지나간 첫 번째 산등성이 정상에 올랐을 때, 청명은 잠시 멈춰서서 차분히 운기를 하며 기감을 확장했다.
지형지물을 넘어서 일대를 관찰하는 청명의 기감은 천하오절이자 무림 대선배인 구치상과 비슷한 수준이었다. 그것은 그가 무당파의 정순한 내공심법을 깊이 수련한 결과로써 사파의 그것과 비교할 것이 아니었다.
오히려 구치상의 경지가 매우 높았기 때문에 이 정도로 비견되는 것이지 이렇게 폭우가 쏟아지는 등 자연의 기운이 요동치는 상황 속에서 이제 막 화경의 첫발을 뗀 청명의 기감은 창천단 내에서도 독보적인 지점이 있었다.
그가 아니었다면 경공이 가장 뛰어난 구치상과 청명이 서둘러 황사열의 구룡문을 지원하러 올 결정을 시의적절하게 내리긴 어려웠을 것이다.
청명은 그곳에 서서 차분하게 기감을 넓히면서 적의 움직임을 관찰하고 있었다.
오규가 있는 쪽으로 일단의 마교도 후발대 무리가 합류하는 것을 관측했을 때는 내심 긴장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다행히도 광혈신마 같은 절대고수로 추정할 만한 기척은 느껴지지 않았다. 또 그들이 얼마간 그 자리에 머물렀다가 다시 강을 건너 백제성 쪽으로 돌아가기도 했다.
청명은 돌아가는 그들의 기척을 좇아 반대편 산등성이를 넘어갈 때까지 살폈다.
그 시점에 비로소 그도 안심하고 창천단이 있는 곳으로 돌아갈 생각을 하면서 뒤로 돌아섰다.
‘……응?’
그런 그때 청명이 다시 돌아서서 백제성 방향으로 시선을 던졌다.
정확히는 그보다 좀 더 북쪽의 어딘가를 보고 있었는데, 그의 시각으로는 어둠에 잠긴 채 폭우와 강풍에 흔들리는 숲의 그림자밖에 보이지는 않고 있었다.
아직 닫히지 않은 기감.
청명은 본 것이 아니라 느낀 것이다.
꺼질 듯이 몹시 희미한, 그러나 신경 쓰이게 할 정도의 충분한 암흑 속 작은 기척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