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7화 - 제40장. 백제성포위전(白帝城包圍戰) (3)
꿀꺽!
마른침을 억지로 삼키는 유종화의 눈빛이 떨리고 있었다.
작전의 시작부터 예상대로 돌아가는 것이 하나도 없었다.
광혈신마에게 우세를 점할 거로 생각한 금태하가 오히려 거기에 그치지 않고 압도하는 모습을 보이자 심장이 덜컥 내려앉는 기분이 들었다. 염황신마가 난입해 억제하지 않았다면 시작부터 계획이 어그러지는 당혹스러운 상황을 맞이할 뻔한 것이다. 그러나 뒤이어 느껴지는 전장의 치열함을 돌아보았을 때, 그는 심장이 내려앉을 뻔한 그 불안감이 기우가 아니었음을 깨달았다.
구룡문에서 출발하기 전, 유종화는 마교의 간자와 은밀히 교신하였다.
그 결과 받아낸 것은 금태하가 광혈신마와 격전에 돌입하면 광혈종은 금태하를 노리는 포위망을 구축하는 한편으로 그들을 돕기로 한 구룡문의 반금파 다섯 계파에게 함선으로 돌아갈 수 있는 길을 열어줄 거라는 약속이었다.
하지만, 눈앞의 현실은 길을 열어줄 거라는 헛된 믿음이 배신당하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염황종의 개입에 의한 이중포위진에 휘말린 최악의 상황이었다.
‘……이건 아니야.’
그는 급히 전장을 살피면서 반금파 동지들의 위치를 확인했다.
남조양, 옥진철, 노독문, 지부강 등은 모두 각 계파 계수 지위를 차지할 정도로 매우 뛰어난 무공을 갖춘 자들이었으나 저마다 그들과 버금가는 고수들을 만나 치열하게 싸우고 있었다.
동지들의 표정은 하나같이 당혹감에 물들어 있었다. 그리고 덩달아 그도 깊은 혼란에 빠지고 있었다.
“끄아아……!”
그때 날카로운 비명이 그의 정신을 번쩍 일깨웠다.
비명이 들린 쪽으로 고개를 돌리자 양염계파 무사 하나가 쓰러지고 있었는데 몸에 붙은 불꽃을 이겨내지 못하고 비명과 함께 발버둥 치고 있었다.
유종화는 일단 타개책을 서둘러 마련해야 한다는 생각을 하면서도 방금 부하를 쓰러뜨린 자를 노리고 몸을 날렸다.
달빛 하나 없는 밤 그러나 사방에서 일렁이는 불꽃 때문에 주변의 어둠이 꽤 물러난 가운데 일렁이는 불꽃과 살가죽을 태우면서 피어오르는 그을음을 뛰어넘자 바로 흉수와 눈이 마주쳤다.
“흡!”
생각보다 가까운 거리에 유종화가 반사적으로 쌍장을 뿌렸다.
화무신공에 의한 불길이 그의 양손에 넘실거렸음은 물론이었다.
흉수는 칼처럼 보이는 날붙이를 들고 있었지만, 유종화의 접근이 예상보다 빨랐는지 늘어뜨린 칼을 바로 휘두를 생각은 못 하고 반사적으로 좌장을 뻗었다. 그리고 유종화도 흉수의 손에서 넘실거리는 화염을 발견했다.
파앙!
북 터지는 소리와 함께 불꽃이 사방으로 튀고 두 사람의 신형이 뒤로 다섯 보씩 밀려났다.
일합만을 주고받았음에도 유종화는 본능적으로 상대가 상당히 강한 고수, 그것도 염황문을 대표할만한 자라는 걸 깨달았다.
먼저 반응한 것은 상대였다.
“오호? 이것 놀랍군. 구룡문의 양염계파라는 것들의 화공이란 게 하나같이 불장난스러워서 볼썽사나웠는데 말이야. 영감의 공력이 상당하군. 이름이 뭐지?”
“……내가 양염계파의 계수 화릉무도 유종화다.”
일단 대응을 위한 대답을 하면서도 유종화의 머릿속은 복잡하게 돌아갔다.
“아, 기억이 나는군. 구룡문은 문주 금태하 외에는 관심을 둘 가치가 없다고 생각했지만, 당신의 이름 정도는 외울 가치가 있어 보여서 말이야. 당신의 무공은 저런 놈들의 불장난 수준은 아니겠지?”
화무신공은 극양공에 대한 깊은 고찰과 집념으로 창안된 무공.
유종화에겐 그의 자부심과 동의어나 다를 바 없었으나 일단 참기로 했다. 상대의 태도로 보아 분명 마교나 염황종 내에서 나름의 위치에 있는 자라 판단했기 때문이다.
“네놈이야말로 감히 나를 알고도 마주 보고 말을 걸 정도라면 스스로 염황종의 불쏘시개 수준이 아님을 밝히는 게 도리가 아닌가?”
“큭큭! 그 나이 먹고도 농담으로 사람 심기를 건들 줄 아는군. 난 염황신마 예하 염황문 최고위 삼화룡(三火龍) 중 한 사람인 선염도룡(旋焰刀龍) 창윤(昌崙)이다.”
창윤의 얘길 듣자 유종화는 잠깐 생각했다.
‘염황종과 광혈종이 공조하는 게 계획된 거라면 이자도 내가 광혈종과 내통하던 관계라는 걸 알고 있을지 모른다. 어차피 내가 계획한 함선으로의 퇴로는 사실상 염황종이 막고 있는 상황이나 마찬가지니까 차라리 이 자를 구슬려서 돌파구를 마련하는 것이 낫겠다.’
이 전장을 오로지 금태하와 그를 따르는 친금파만의 전장으로 만드는 것이 그의 계획이었다. 금태하란 별을 이 백제성에서 떨어뜨리고 반금파는 최대한 전력을 보존한 채 돌아갈 수 있어야 구룡문을 접수한다는 계획 실현도 가능한 일이었다.
생각이 빠르게 정리되자 유종화가 경계하는 태도를 살짝 풀었다.
“염황신마의 수족이라. 그렇다면 얘기가 통하겠군.”
“하하하! 이 전장 속에서 대화라. 어디 들어볼까?”
“너희의 등장이 광혈종과 연계한 거라면 분명 내 제안을 들었을 텐데. 그렇지 않나?”
“무슨 제안?”
“모르는 척하지 마라. 자그마치 중원 무림의 천하오절 중 한 사람인 금태하를 사냥하기 위한 덫을 놓는 계획이었다.”
“글쎄, 내 기억엔 없는걸?”
창윤이 고개를 까닥거리며 모른다는 듯 얘기했지만, 유종화는 거짓말이라는 걸 바로 깨달았다.
창윤의 입꼬리가 살짝 올라가 있고 눈웃음도 짓고 있는 표정에서 일부러 그를 약 올리려는 생각이 티가 났기 때문이었다.
“알면서 모르는체하다니, 더구나 네놈들의 손실을 줄일 수 있는 최고의 제안이었을 텐데 이해할 수 없군.”
유종화가 확실하다는 듯이 얘기하자 창윤이 애써 감추던 비웃음을 만개했다.
“하하하하! 확실히…… 그런 식의 제안에다가 이렇게 눈치도 빠른 걸 보니 당신은 능구렁이라는 내 사형의 짐작이 맞는 것 같아. 맞아, 확실히 최고의 제안임은 틀림없었지. 푸하하하!”
유종화의 표정에 불쾌한 빛이 떠올랐다.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싸움을 이렇게 끌고 와? 본문을 너무 우습게 보는군. 장난처럼 구는 그 태도의 말로는 동귀어진 수준의 참사를 감당해야 할 것이야.”
“글쎄, 금태하가 없는 구룡문은 단합도 안 되는 오합지졸이란 게 이미 3년 전에 드러난 거 아닌가? 무당파의 조력으로 구사일생한 주제에 스스로 너무 고평가하는군.”
유종화의 턱 힘줄이 불거졌다.
어금니가 부서지도록 힘이 들어가니 까득! 하는 소리가 뇌리에 울린다.
이미 분노가 머리끝까지 치밀어 올랐지만, 유종화는 한 번 더 참고 협상하기로 했다.
“어차피 내 명령 하나로 우리가 누굴 위해 싸울지는 정해질 수밖에 없다. 내가 아무리 금 문주에 대한 감정이 좋지 않기로서니 구룡문을 위해 목숨을 바친다 생각하면 이 전장에서 끝을 보기 위한 결단은 어렵지 않다. 이 유종화를 우습게 보지 마라.”
창윤의 웃는 표정은 유종화의 으름장에도 쉬이 사라지지 않았다. 그의 태도에 변화가 없는 것으로 보이자 유종화는 이제 결단을 내려야 할 시점이 왔음을 깨닫고 있었다.
‘진정 방도가 없는가? 아니면…….’
백제성에 뼈를 묻을 각오로 사투를 벌일지 혹은 다른 선택을 다시 고려해야 할지 잠시 갈등하는 사이, 창윤이 입을 열었다.
“하긴 배수진을 치고 죽으려 드는 놈들이 무서우니……. 근데 말이야, 이제라도 당신들에게 보조를 맞춰서 길을 열어주기엔 지금은 많이 늦어버렸어.”
“……그게 무슨 말이지?”
“우리가 어디서 나타났는지 인지했다면 당신의 그 계획이란 거 이미 무너졌다는 걸 깨달았어야 한다는 말이다.”
“어디서?”
유종화의 머릿속이 조금 전의 기억을 빠르게 되짚었다.
그의 기억에서 염황종이 어디서 나타났는지는 명확하지 않았다. 그러나 지금의 전황을 살펴보면 북쪽을 제외한 나머지 백제성 전역에서 화공에 의한 불길이 여기저기 치솟고 있었다.
문득 광혈신마와 금태하의 싸움을 지켜보고 있었을 때가 떠올랐다.
‘머리 위에서 나타났던 염황신마……, 남쪽……. 설마?’
유종화가 놀란 눈으로 고개를 치켜들어 창윤의 어깨너머 멀리 시선을 던졌다.
성내에 발생한 화재 때문이 아니라 그보다 더 큰 집중된 화염으로 인해 남쪽 밤하늘이 붉게 타는 듯 빛나고 있었다. 그리고 일렁거리는 화광 속에서 어마어마한 양의 검은 연기가 하늘로 솟구치고 있었다.
“안 돼!”
유종화가 화들짝 놀라며 급히 경공을 펼치며 날아올랐다. 그렇게 성벽 감시탑 위에 올라서자 마침내 보고 싶지 않았던 광경이 그의 눈에 온전히 들어왔다.
엄청난 불길에 휩싸인 채 서서히 침몰해가고 있는 함선들.
믿을 수 없는 사태의 원인이 염황종에게 있다는 걸 짐작하는 건 어렵지 않았다.
터벅.
거리가 있는 옆에서 느껴지는 인기척.
어느새 감시탑 위로 올라온 창윤이 자신의 칼을 들고 불타는 함선을 향해 까닥거린다.
“핫핫핫! 장관이지 않나? 불교에서 불(火)은 탐욕과 분노를 뜻한다고 하지만, 번뇌를 태움으로써 원시로 회귀하는 걸 뜻하기도 한다더군. 날 구슬려 보려 했던 유종화는 과연 저 불길을 보면서 무슨 생각을 할까?”
유종화의 고개가 돌아가 그 살기 가득한 눈으로 창윤을 바라본다.
창윤이 그 시선을 넉살 좋은 표정으로 마주 보며 자신의 칼을 두 손으로 쥔 채 천천히 들었다. 그리고 그의 고개가 까딱거렸다.
“살기는 마음에 드는데, 여전히 번민하는 눈이로군. 이렇게 배수진 치기 좋은 여건을 만들어줬음에도 내가 기대하는 바엔 여전히 부족해.”
투기가 피어올랐다.
살기 띤 눈으로 유종화가 마지막 으름장을 놓는다.
“벌주를 자처했어. 우리의 전력이 여기에 있는 것이 전부가 아니거늘.”
“큭큭! 알아. 몇백 명 정도가 산을 타고 넘어오고 있다는 것 정도는. 너희야말로 옛 기억에 취해 광혈종을 우습게 보고 창천맹의 지원도 기다리지 않은 채 서둘러 달려왔지. 적극적으로 달려온 금태하도 그렇지만, 시간을 더 끌어서 전력을 확보하지 않고 배신으로 함정을 파 볼 생각만 해댄 너희의 패착이기도 하다.”
창윤의 지적은 실로 일리가 있었다. 그리고 그의 말을 들으면서 유종화도 생각을 다시 하게 되었다.
‘애초에 협상이라는 건 의미가 없는 거였어. 마교는 금 문주의 목숨만큼이나 구룡문의 확실한 멸문을 바란 것이다. 나의, 우리의 반동(反動)이 놈들의 반간계(反間計)로 이용당한 것이다. ……이대로 패배를 인정할 수 없다. 죽을 때까지 끝난 게 아니다.’
짧은 순간, 깊은 생각.
일단 이 사태를 타개하는데 집중하자는 결단이 앞섰다.
“흐읍-! 구룡천하(九龍天下)! 말살마도(抹殺魔道)!”
유종화의 공력을 실은 외침이 쩌렁쩌렁 백제성 전체로 울려 퍼졌다.
유종화에게 동조하면서 반란의 지름길을 기대했던 남조양, 옥진철 등의 반금파 계수들은 예상치 못한 치열한 전투로 갈피를 못 잡고 있던 터였다. 그런 상황에서 유종화의 이 외침이 뜻하는 바가 무엇인지 여전히 파악하기 어려웠으나 어찌 됐든 지금은 싸워야 할 때라는 것 정도는 이해할 수 있었다.
그렇게 수세에 몰리면서 혼란을 겪던 자들이 이를 악물고 흔들리는 의지를 부여잡는다.
백제성 전체를 둘러싼 투기가 한층 더 활활 타올랐다.
창윤은 저릿하게 피부를 타고 올라오는 전율을 느끼면서 드디어 기대하던 치열한 사투로 끌고 갔다는 생각을 했다. 그러나 그의 얼굴은 그런 기대감과는 별도로 탐탁지 않다는 표정이 떠올라 있었다.
“너희의 마공이 형편없는 것임을 내 화무신공으로 깨닫게 해주마!”
허공을 휘젓는 손짓과 함께 화염의 기운을 일으키는 유종화를 보면서 창윤이 나직이 중얼거렸다.
“예상보다 더 한심한 작자로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