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4화 - 제39장. 범정산 염황문(梵淨山 炎皇門) (6)
* * * *
촤아악-! 촤아아악-!
구당협을 끼고 방향을 선회하고 나서부터 함선은 격군장(激軍長)의 구호에 따라 전력으로 노를 젓기 시작했다. 그에 따라 함선들이 근래 수십 년 동안 장강에 배를 띄운 이후에 가장 빠른 속도로 전진하기 시작했다.
어찌나 속도가 빨랐는지 돛의 방향을 조절하는 병사들도 어느 때보다 한껏 긴장한 채 밧줄을 허리에 감고 옆구리에 단단히 고정해두고 있었다.
평소 구당협을 통과하는 데 반 시진 가량 걸리던 거리를 차 한 잔 가볍게 마실 시간 정도 만에 벌써 다시 서쪽으로 방향을 트는 구간까지 도달했다. 그리고 북서쪽 산지 위에 세워진 성채와 그 안을 비추는 횃불들, 그 안에 어른거리는 사람 그림자들까지 눈에 들어왔다.
백제성 그리고 광혈마종.
격전지가 눈앞에 드러나자 구룡문도는 피가 뜨겁게 끓는 것을 느낀다.
지난 3년 전 당했던 수모를 갚아줄 것이다. 그런 생각이 머릿속을 단단하게 휘감고 가슴에 피어오른 불꽃에 연신 입김을 불어 넣었다.
북쪽으로 펼쳐진 백제산과 구당협의 산지 지형 속에서 장강에 손이라도 내밀 듯 툭 튀어나온 반도형 지형은 그 자체로도 함선을 반기는 나루처럼 보인다.
반도를 에둘러 함선들이 감싸면서 차례로 돛이 접히고 노는 제동을 걸었다. 닻을 내려 위치를 고정하자 2천여 구룡문의 고수들이 일제히 물가로 몸을 던졌다.
첨벙첨벙!
마침내 뭍으로 나와 눈앞 언덕 위에 보이는 성채를 향해 일제히 달려간다. 백제성 안에선 횃불들이 흔들리며 작은 소란이 이는 듯했지만, 북소리가 들린다거나 화살 등이 날아들지 않았다.
파파파팟!
나무들을 디딤대 삼아 수십 명의 고수가 일제히 고공 중에 몸을 띄운다. 발아래 시야에 횃불에 붉게 빛나는 성벽 안쪽이 눈에 들어왔다.
성벽을 지키고 있는 적들이 없었다.
타타탁!
착지마저 안전하게 했을 때 그리고 차례대로 다른 동료들이 뒤따라 성벽 위를 오를 때에는 조금의 의아함만이 있을 뿐이었다. 저항이 없으니 바로 보이는 것은 드문드문 보이는 내성벽과 그 앞을 가로막은 숲이다. 자연스럽게 그 속으로 파고들게 되었는데 역시나 저항이 없었다.
어느새 2천여 구룡문은 모두 성내로 진입한 상황이 되었고 선두는 내성벽까지 이른 상태였다.
막 외성벽을 넘은 금태하의 표정이 차갑게 굳어져 있었다.
분명 멀리서 함선을 타고 백제성에 가까이 갈 때만 해도 이 성안에선 상당한 기척들이 느껴졌었다. 그런데 막 반도를 둘러싸면서 돛을 접을 때까지만 해도 느껴지던 기척들이 갑자기 씻은 듯 사라졌기 때문이었다.
불안감이 엄습했을 때, 이미 문도들은 외성벽을 향해 몸을 날리고 있었다.
그때라도 내성벽을 넘는 문도들을 제지하려면 할 수 있었을 것이다. 성은 제법 컸지만, 그의 공력을 실은 외침이라면 누구라도 듣지 못할 리 없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 순간 백제성 중심에서 너무나 선명하게 느껴지는 강한 기백이 있었다. 마기 특유의 섬찟한 느낌과 함께 처음 느껴본 흉포한 기운이 불길처럼 활활 타올라 그의 감각을 사로잡고 있었다.
놀라운 것은 그 기백이 단 한 사람의 것이었으니 마치 단신으로 구룡문 전체를 상대하겠다는 패기를 드러내는 모양새였다.
잠깐 멈칫했던 금태하는 경공을 펼쳐 속도를 높였다. 아예 숲 위로 날아올라 내성벽까지 넘어 성내로 진입했다
멀찍이 촉의 소열제 유비가 죽었다던 영안궁(永安宮)의 3층 지붕이 숲 위로 눈에 들어오고 또 군사 요새답게 단순한 양식의 전각들이 주변 풍광을 채우며 스쳐 지나갔다. 그의 감각을 연신 자극하는 존재감을 찾아 중문을 지나 영안궁 앞마당의 거대한 공터를 마주했을 때, 금태하는 마침내 볼 수 있었다.
1만의 병력을 담아낼 수 있는 거대한 공터 한가운데 9척의 거인이 서 있었다. 거대한 근육질의 체격과 갈기 같은 갈색 머리카락 및 밤송이 같은 수염을 휘날리는 모습이 사자와 같은데 바위 같은 근육을 고스란히 드러낸 상체엔 크고 작은 흉터가 가득하니 그 야성을 자랑하는 듯하다.
내성을 넘어 앞마당까지 도달한 구룡문 고수들은 감히 덤비지 못한 채 강한 적대감과 동시에 큰 두려움을 품은 채 최고조에 이른 긴장감에 휩싸인 눈빛으로 쳐다보고만 있었다.
금태하는 문도들 뒤에 숨지 않고 앞으로 나왔다. 그리고 그 거인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인간 같지 않은 야성을 담은 실물과 종전부터 가감 없이 뿜어내는 존재감이 한데 어우러져 마치 그에게 시위라도 하는 듯하니 금태하는 이 거인이 누군지 직감했다. 그리고 마당의 좌우로 모습을 드러낸 다른 계수들 사이에서 흘러나온 목소리가 그의 직감을 확인시켜주고 있었다.
“광혈신마……!”
그 이름이 고요 속에 퍼져 다른 구룡문도의 귀에 들렸을 때, 뇌리엔 과거 최악으로 남았던 참사가 눈앞을 스치게 했다.
“쿠아아아앙-!”
그 기억을 일깨우려는 듯 광혈신마 혁무술이 포효했다.
그 공력을 담은 포효는 마치 사자의 울음소리와도 같아서 듣는 것만으로도 공포를 불러일으켰다.
힘껏 포효한 혁무술이 손을 들어 앞의 누군가를 가리켰다. 그리고 구룡문도 모두가 그 손끝이 정확히 금태하를 가리키고 있음을 알았다.
“흑사왕 금태하. 천하오절의 위명이 어떤 것인지 어디 실력을 보여봐라! 이 광혈신마를 앞에 두고 설마 도망치진 않겠지?”
천둥이 굴러가는 듯한 목소리가 장내에 쩌렁쩌렁 울려 퍼졌다.
그 자신감 넘치는 도발에 남조양이나 유종화 모두 절로 콧방귀가 나왔다.
반금파로서 이곳에서 금태하의 무덤이 되든 혹은 최소 실패하여 명분을 잃어버리든 하길 바라지만, 천하오절이라는 이름이 주는 무게감은 중원 무림에선 가히 절대적이었다. 구룡문에게 구사일생이었던 일이긴 해도 무당파 소요자에게 쫓기듯 도망간 광혈신마가 저렇게 으름장을 놓을 만한 상대가 아니었다.
그 생각은 금태하도 매한가지였다.
그에게 광혈신마는 아무것도 아니었다. 단지 지금 이곳에 광혈마종의 마인들은 온데간데없고 광혈신마 홀로 서서 구룡문 전체를 맞이하는 상황이 바로 이해가 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물끄러미 혁무술을 바라보던 금태하가 피식 웃음을 흘렸다. 그는 눈을 감고 호흡을 가다듬었다. 그리곤 정신이 번쩍 들 정도로 단말마의 함성을 터뜨렸다.
“하아!”
파앙!
그러자 금태하를 중심으로 거대한 기파가 순간적으로 터져나갔다. 그 기파는 외성벽까지 부르르 떨릴 정도였으나 사람들에겐 큰 영향이 가지 않았다.
오히려 의도한 것은 다른 것에 있었으니 혁무술이 노골적으로 뿜어내어 사위를 가득 덮었던 투기와 마기를 삽시간에 걷어내 버린 것이었다.
“눈속임이 대단하군. 네놈들의 것이 아닌 듯한데 환도마종도 여기에 있느냐?”
“크크크크! 과연 대단하군. 환도종의 환막음극진은 나 정도 되는 마인이 아니면 보통의 무림인들은 아무리 대단한 고수라도 그 존재를 느끼기 어려운데 말이야.”
혁무술이 웃음을 터뜨렸다. 노골적으로 흘려보내던 기운을 모두 갈무리했다. 자연스럽게 구룡문도도 무의식적으로 느끼던 공포감이 자연스럽게 줄어들었다.
그건 혁무술에게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더 중요한 것은 자신의 부하들을 계속 환진 뒤에 숨겨둘 이유가 없어졌다는 것이었다.
“이 자식들아! 전쟁이다!”
그 외침이 신호였다.
금태하도 갑자기 사방에서 새로운 기척들이 나타나기 시작했음을 느꼈다.
하나같이 흉흉한 마기를 뿜어내면서 마치 보이지 않은 문을 열고 나타나듯 그렇게 구룡문도의 뒤에서, 발밑에서, 머리 위에서 나타났다.
“으악!”
“컥!”
“그, 급습!”
“악!”
사방에서 터져 나오기 시작하는 비명.
백제성을 포위하여 밀고 올라왔다고 생각했으나 오히려 포위당한 것은 구룡문이었다. 그 숫자조차도 호각세에 이르니 사방에서 칼부림과 비명이 섞여나오면서 장내가 혼돈에 빠졌다.
‘흠, 어떻게 이 많은 숫자가 백제성에 집결해있었지? 분명 사천을 포위하는 형태로 북부 산지에 흩어져 있었을 텐데? ……이것이었나?’
문득 지난날 구룡문에서 탁민효가 그를 찾아와 유종화가 마교와 접선했음을 알려 왔던 게 떠올랐다. 그때 흉계가 시작되었다고 하더라도 이런 대처는 준비가 잘 된 모양새였다. 더군다나 환진의 성능도 기가 막혔다. 광혈신마가 마기를 뿜어내며 그의 시야를 가리긴 했으나 설마하니 여기까지 들어오는 동안 전혀 그 존재들을 느끼지 못할 줄은 몰랐다.
“큭큭큭! 그래, 이게 끝이냐?”
금태하가 실소를 머금으며 물었다.
“허세를 부리는군.”
“네놈들은 대체 구룡문을 어찌 보는 것이냐? 이 금태하가 이끄는 구룡문은 엄연히 다른 존재거늘. 끌끌끌!”
“뭐?”
혁무술은 금태하의 말에 반문하자마자 그 말뜻이 무엇인지 깨달을 수 있었다. 환도종의 힘을 빌려 환진 뒤에 숨었다가 기습하는 작전은 유효했지만, 이미 전력 9할을 여기까지 끌고 온 구룡문은 최악의 상황까지 상정하면서 각오를 다지고 온 무사들이었다.
게다가 그들을 직접 공포로 몰아넣었던 광혈신마를 금태하가 쓰러뜨려 줄 것이라는 절대적 믿음은 강력한 용기를 불어넣어 주고 있었다.
하지만, 혁무술도 여유가 있었다.
“미안하게도 이게 나의 광혈마종의 전력은 아니라서 말이야. 이미 오래전부터 부하들을 여기로 끌어모은 뒤거든. 저 백제산에 이미 내 부하들이 가득 내려오고 있단 말이지.”
그렇게 으름장을 놓아도 눈 하나 깜짝할 금태하가 아니었다.
“끌끌끌! 3년 전엔 본문을 상대로 잘도 설쳐댔지. 그 알량한 경험으로도 이 나를 앞에 두고 있으니 말이 저절로 많아지는 것 같구나.”
“크크크크! 노망난 노인네가 여유를 부리는구나. 네놈들은 독 안에 든 쥐야.”
금태하의 고개가 삐딱하게 돌아갔다. 얼굴에 역력히 드러난 지루한 표정에 여유를 부리던 혁무술의 표정이 굳어졌다.
“말싸움도 이만하면 많이 했다. 무림의 어른으로서 선수를 양보할 테니 사양하지 말고 들어오도록 해라.”
“그래, 어디 잘난 실력 좀 보자.”
투웅!
지면이 울릴 정도의 진각.
구척의 거구가 순식간에 거리를 좁혀왔다. 위에서 아래로 허공을 내려치는 손길을 따라 하늘에서 나타난 황금빛 강기의 손아귀가 그대로 금태하의 머리 위를 덮쳤다.
콰앙!
직격한 강기는 지면의 돌판을 박살 내고 헤집어놓을 정도로 강력했지만, 거기에 금태하는 없었다.
오히려 금태하는 상대적으로 작은 체격으로 바닥 깊이 더 몸을 낮춘 채 과감하게 파고들었다.
둘의 간격은 팔꿈치만 들어도 닿는 거리.
‘감히 내 간격 안으로 들어오다니!’
혁무술의 왼손이 반응하여 짓쳐들어왔으나 금태하의 쌍장은 이미 혁무술의 복부에 닿은 상태였다.
쩌엉!
“크억……!”
혁무술의 거구가 입으로 피를 뿜으며 공중에 붕 떠올랐다. 왼손은 당연히 헛손질에 그쳤다.
그의 거구와 근육질의 신체만으로 외공이 상당할 것이라 본 금태하의 선택은 내가중수법(內家重手法)이었다. 신체 외부를 때리지만, 그 힘은 내부에서 터져나가니 내공이 약하면 극심한 내상을 피할 길이 없었다. 하물며 금태하의 두 손에서 발휘된 장력이니 혁무술 같은 자도 완벽한 방어는 불가능했다.
쿵!
“크으……!”
거구가 땅바닥에 떨어지며 요란한 소리를 내었다. 황급히 일어나 자세를 고치는 혁무술을 보면서 금태하는 다시 쌍장에 기운을 모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