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칼의 귀신-213화 (213/432)

213화 - 제39장. 범정산 염황문(梵淨山 炎皇門) (5)

* * * *

백제성전투(白帝城戰鬪).

그 전투의 결과는 분명 창천맹이 구상한 전세에 좋지 않은 신호였다.

창천맹으로 대표되는 정사 연합의 중원 무림 대 새외 세력의 연합체이기도 한 천마신교의 대결 구도.

몽골초원에서 흑풍마종 흑풍대를 상대로 벌어졌던 전쟁만큼 두 집단의 치열한 격전들 속에서도 이런 대규모의 전투는 몇 개가 더 있었는데 그중 하나가 바로 백제성 전투였다.

구룡문의 돌발적인 기습 시도와 그에 대한 광혈종의 대응.

두 세력의 정면충돌을 중심으로 벌어지는 추가적인 움직임들과 이후 벌어질 사건들을 종합해본다면 분명히 이 전투는 향후 대결 구도의 향방을 가늠해볼 수 있는 중요한 전투가 틀림없었다. 그리고 그런 측면에서 당시 이 백제성 전투는 결코 창천맹 측에겐 좋지 않았다는 분석을 할 수밖에 없는 결과로 이어져 버렸다.

해가 떨어진 다음 날 저녁, 구룡문을 태운 선단은 마침내 무산협에 이르렀다.

삼협을 감싸는 산지는 깎아지른 벼랑도 많지만, 경사가 가파른 산지도 있어서 물길이 매우 깊고 위로도 마치 숲으로 짠 녹의를 입은 절벽을 보는 거 같기도 했다. 장강 자체가 삼협을 지나는 상류 구간임에도 대형선이 오갈 수 있었던 것은 이런 수심의 깊이와 강폭이 상당히 넓기 때문이었다.

무산협에 이르러 선단이 줄지어 북쪽 산지 가까이 이동시킨 채 속도를 줄여서 운항하기 시작했다.

달빛이 구름에 가려져 어둠이 짙었지만, 혹시 몰라서 오는 길에 일부러 갑판 쪽에 차양(遮陽)을 설치하고 모든 횃불도 끈 상태였다.

그렇게 만들어진 어둠 속에서, 약속된 세 계파가 탄 함선들은 차양 아래 숨긴 밧줄 십여 가닥을 강에 잠기도록 갑판 밖으로 늘어뜨려 놓았다. 그리고 세 계파의 문도들, 도합 700여 명이 일제히 밧줄에 매달린 채 미끄러지듯 내려가 조용히 입수하기 시작했다.

양쪽으로 높게 솟은 산지와 밤하늘에 영역을 넓히고 있는 먹구름에 의해 평소보다 어둠이 짙었다. 아무리 밤눈이 좋더라도 강 연안에서 직접 살피는 게 아니라면 절대 위쪽 시야에서는 이런 움직임을 눈치챌 수 없을 정도였다.

황사열과 장이풍, 탁민효 세 계수의 주도적 지휘로 백호계파와 창월계파, 추응계파 문도들이 빠르게 산을 오르기 시작했다. 무산협과 가까운 산자락은 그나마 경사가 덜 기울어져 있어 구당협에서 오르는 것보다 훨씬 수월했다.

소나무가 우거진 구당협 쪽과는 달리 무산협 쪽 산 정상의 구릉엔 복숭아나무가 군집해 있어서 핵도평(核桃坪)이라 불렀다.

세 계파는 전투 없이 빠르게 핵도평을 장악했다. 아직 제대로 꽃이 피지 못하고 꽃봉오리만 돋아 있으니 감상할 시간도 아깝다는 듯 그들은 빠르게 진형을 남북으로 7, 8부 능선까지 펼치면서 빠르게 이동하여 점거지를 넓혀나갔다.

창월계파는 북쪽 경사, 추응계파는 남쪽 경사를 훑으며 이동했다. 그리고 백호계파는 직접 능선 위를 따라 이동하면서 가장 먼저 석미대(石眉臺)라는 봉우리까지 아무런 싸움도 없이 점거하는 데 성공했다.

석미대 정상에 올라선 황사열은 구당협 아래 흐르는 장강 쪽을 바라보았다.

“기문천하웅이라던데 물살과 바람이 부딪치는 소리만 들리는 어둠에 잠긴 구당협의 풍경은 보기에 섬뜩하구나.”

구당협은 기문천하웅(夔門天下雄)이라고 불리는 그 웅대한 풍경이 일품인 곳이어서 두보(杜甫)와 이백(李白) 등과 같은 걸출한 시인들이 그 운치를 시로 읊기도 했다. 그들이 시를 읊을 정도로 구당협의 풍광을 만끽할 수 있는 곳이 바로 백제성이었으니 과연 승전의 축시를 읊을 수 있을지 흥미로운 일이었다.

석미대에서 북쪽으로 시선을 던지면 산등성이가 보이고 그 너머로 장강이 협곡 사이로 침범하듯 갈라지는 물길도 눈에 들어왔다. 그 너머로 보이는 산이 바로 백제산인데, 장강에 둘러싸인 채 반도(半島)처럼 튀어나온 지형 위에 백제성의 성채가 어른거리는 횃불들로 어둠 속에서 위치를 드러내고 있었다.

황사열이 석미대에 도착하고 반 시진 정도 지났을 때 장이풍과 탁민효가 장강 쪽의 깎아지른 경사로에서 경공술로 솟아오르며 나타났다.

장이풍이 한숨을 내쉬면서 옷소매로 이마에 흐른 땀을 닦았다.

“휴우, 이거 경사가 워낙 가팔라서 나무들이 우거지지 않았다면 나는 감히 이 경사를 오르지 못했을 것이오.”

개인적인 무공은 장이풍이 한 수 위였지만, 경공 만큼은 다른 계수들보다 자신 있던 탁민효였기에 여유 있게 웃음을 흘리며 황사열을 보았다.

“후후후, ……황 계수, 혹시 몰라 장강 연안까지 훑고 내려갔다가 올라왔으나 적들은 없었네. 정찰조라도 포착할 줄 알았는데, 완전히 비워놨을 줄은 생각도 못 했어.”

황사열은 고개를 끄덕이면서 북쪽 한 지점을 가리켰다.

“보여 주셨던 지형도와 비슷합니다. 물길이 북동쪽으로 계곡을 침범해 강처럼 흐르고 있으니 과연 장강으로 삼면을 감싸고 있는 요새로군요. 하지만, 저 끄트머리는 강폭이 얇은 만큼 수심도 얕을 테니 건너가는 데 문제가 없을 것 같습니다. 스승님의 계획대로 진행할 수 있겠군요.”

“오오, 과연 그렇군.”

그들은 이곳에 처음 와보았기 때문에 지형도만으론 반신반의했었다. 그러나 금태하는 그림만으로도 눈으로 보는 것처럼 훤히 실제 지형을 유추하였으니 그의 세심함이 놀랄 따름이었다.

“우리가 빠져나오면서 문주께선 반대파들에게 둘러싸여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인데 남 계수나 유 계수 등이 허튼수작은 부리지 않겠지?”

장이풍은 조금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황사열을 보며 물었다.

황사열은 콧방귀를 꼈다.

“흥! 그들 모두가 덤벼도 스승님의 상대가 되지 않습니다. 만약 반동의 기미를 보인다면 스승님은 광혈종에 대한 복수고 뭐고 수틀려서 그들을 장강에 수장시키는 일부터 할지도 모릅니다.”

“오히려 최종 포위를 위한 수를 우리에게 맡긴 만큼 그들도 싸움에 적극적으로 임할 수밖에 없을 것이오. 그래도 황 계수는 전투에 진입하면 유종화를 특히 주의 깊게 보시오.”

“왜 그러십니까?”

“내 따로 보고드리긴 했지만, 문주께선 대수롭지 않아 하셨소. 그러나 여기까지 왔으니 역시 주의할 필요가 있다는 생각이 들어서 내 두 분께 얘기하겠소. 사실 응성에서 출발하기 전에 유종화가 마교의 끄나풀과 접촉했소이다.”

“그게 사실이오?”

“이 쳐죽일 작자가…….”

장이풍이 놀라 되묻고 황사열은 표정을 분노로 일그러뜨렸다. 탁민효는 황사열의 팔을 두드려주며 화를 달랬다.

“문주께서 광혈신마와 싸울 때, 그자가 문주님의 등을 노릴 수도 있으니 황 계수는 다른 어떤 상대보다 유종화를 신경 써야 할지도 모르오. 문주님을 제외하면 유종화를 직접 막을 수 있는 사람은 우리 계수들 가운데는 황 계수밖에 없지 않소?”

“걱정하지 마십시오. 이 전투를 승리로 이끈 후, 배신자들이 있다면 반드시 대가를 치르게 할 것입니다.”

이제껏 그 일에 대해 침묵을 지켜왔던 탁민효는 이제야 속이 후련해졌다. 답답함이 사라지자 문득 떠오른 생각 하나에 다시 입을 열었다.

“아! 만약 전황이 혼란해져 퇴각할 상황이 발생할 때, 우리가 타고 온 함선에 접근하기 어렵다면 북동쪽으로 가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오.”

“북동쪽은 왜 그렇소?”

“때맞춰 나타나긴 어렵겠지만, 만약을 대비하여 창천맹의 창천단도 백제성을 향하여 산을 넘어오고 있소이다. 산세가 험하고 겹겹이 길을 막고 있는 데다가 금 문주께선 기다리는 일 없이 백제성을 칠 것이므로 우리의 싸움에 도움을 주진 못할 것이오. 그저 이런 상황이라는 정도로만 기억해두시오.”

“탁 계수께서 정말 구룡문을 위해 고생이 많으셨습니다.”

“별말씀을.”

황사열이 탁민효를 향해 포권을 취했다. 그도 스승인 금태하의 유아독존적 지위를 뒤따르고 싶어 하면서도 구룡문을 위한 길에는 탁민효의 고민에 좀 더 손을 들어주고 싶은 생각이었다.

“그럼 장 계수님, 우리는 저 아래쪽 산까지 점거하고 함선이 올 때까지 기다리도록 합시다.”

“그렇게 합시다.”

탁민효는 핵도평 쪽을 손으로 가리켰다.

“전 가서 문주께 신호를 보내고 오겠습니다.”

각자 상황이 정리되자 황사열은 백호계파 문도들을 이끌고 북쪽으로 산에서 내려가기 시작했다. 장이풍도 그들보다 앞서 발 빠르게 이동하면서 경사로에 대기하고 있던 창월계파 문도들에게 앞산을 점거하도록 지시를 내렸다.

탁민효는 일단 장강 쪽 산자락을 더 꼼꼼하게 훑으면서 능선 위로 올라오도록 지시를 내리고 그 자신은 핵도평 쪽으로 경공을 펼치며 달려나갔다. 핵도평과 석미대 중간지점의 능선쯤에 이르자 장강 쪽에 구룡문의 선단이 이동해있는 걸 확인할 수 있었다.

탁민효는 허리춤에 매달린 가죽 주머니를 손에 가져왔다. 주둥이를 동여맨 매듭을 풀자 안에서 퀴퀴한 기름 냄새가 스멀스멀 올라왔다. 그 내용물은 바로 기름을 듬뿍 먹인 천이었다.

탁민효는 그걸 발밑의 주먹만 한 돌멩이 하나를 집어 천안에 감싸 묶었다. 그리고 부싯돌을 꺼내 부딪쳐 천에 불을 지폈다.

손바닥에 경력을 집중하여 피부를 보호한 채 불붙은 돌멩이를 장강을 향해 힘껏 집어 던졌다. 마치 하늘에서 유성이 떨어지듯 작은 불꽃이 꼬리를 물며 선봉선과 두 번째 함선 근처로 퐁당 떨어졌다. 그리고 그 신호를 기다렸다는 듯이 함선이 속도를 내며 장강의 물살을 가르기 시작했다.

탁민효는 함선이 빠르게 이동하는 것을 바라보며 속도를 맞춰 석미대를 향해 이동했다. 능선을 따라 이백여 명의 추응계파 문도들도 때맞춰 차례로 올라오고 있었다.

“다 올라오면 석미대 근처로 집결하도록 해라.”

“예, 계수.”

구당협의 길이는 고작 20리에 불과하다.

비록 물살을 거슬러 올라가는 것이지만, 중원을 가로지르는 대강(大江)인 만큼 격류는 아니기에 앞으로 반 시진이면 구당협을 돌파할 것이 분명했다.

그럼 바로 백제성이었다.

어느덧 석미대에 이르니 여섯 척의 선단도 구당협을 끼고 북서쪽으로 방향을 트는 구간을 지나기 시작했다.

조금 긴장 어린 시선으로 고개를 숙인 채 내려다보던 탁민효의 고개가 퍼뜩 들렸다. 그렇게 들린 시선은 구당협의 장강 건너편에 있는 반대쪽 산지를 향하고 있었는데 그가 선 곳과 비슷한 높이의 바위산이 송림 옷을 입은 채 묵직하게 서 있었다.

‘방금 뭔가가……?’

고개 숙여 내려다보는 동안 시야의 상단을 따라 희미한 빛무리가 찰나 번쩍거린 느낌을 받았다. 그래서 반사적으로 고개를 든 것인데 건너편 산림은 깊이 가라앉은 어둠을 끌어안아서 산바람에 나무들이 흔들리는 풍경조차 잘 보이지 않았다.

그저 아직 구름이 덮지 않아 어스름한 서쪽의 밤하늘을 배경으로 삼고 있어 산지의 경계를 간신히 드러내고 있을 뿐이었다.

‘기분 탓이었나?’

그런 생각을 할 때, 건너편 산지의 정상 부근에 달빛이 잠깐 지나가듯이 비추었다. 고개를 돌려 하늘을 바라보니 구름의 중간 구멍 뚫린 부분이 있어서 달빛이 새어 나오다가 그가 쳐다보자 이내 사라졌다. 이후로는 구름이 제법 짙게 껴있어서 달빛이 스며들지도 못한 채 시커멓게 어둠을 더하고 있었다.

“달빛 때문이었나? 횃불인 줄 알고 깜짝 놀랐네.”

조금은 가슴이 철렁했기에 탁민효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다 문득 주변을 둘러보니 그들이 선 곳은 나무가 별로 없어 보였다. 장강에서 올려다봐서는 잘 모를 수 있으나 반대편 산지에서 바라본다면 왠지 이쪽 지형이 보일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모두 자세를 낮추고 대기하라.”

사주를 경계하고 있긴 하나 모두 능선 위에서 멀뚱멀뚱 서 있었는데 조금 날카롭게 지시하는 탁민효의 목소리에 서둘러 무릎을 꿇으며 몸을 낮췄다.

탁민효도 바짝 낮춘 채 조금 불안한 시선으로 건너편을 잠시 살펴보았다.

‘……없겠지.’

그런 생각이 들면서도 섣불리 일어나 돌아다닐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달빛이 구름을 뚫지 못해 사람 그림자도 잘 보지 못하겠지만, 절대 고수들에겐 이런 어둠 속에서도 강 건너 꿰뚫듯 보는 건 일도 아니었으니 주의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이 백제성 전투는 두 명의 절대고수가 낀 싸움이 아니었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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