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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의 귀신-212화 (212/432)

212화 - 제39장. 범정산 염황문(梵淨山 炎皇門) (4)

‘사패련에서 먼발치로 봤었지만, 이리 가까이 보게 될 줄이야.’

주태소는 고작 다리 하나를 사이에 둔 바위 위라는 가까운 거리에서 강정학의 실물을 다시 보게 되자 내심 감탄할 수밖에 없었다.

구름 위로 솟은 금정의 정상에서 장포 자락과 더불어 길고 흰 수염과 머리카락을 바람에 휘날리고 허리춤에 검을 차고 있는 강정학의 모습은 검선 여동빈이나 다를 바 없었기 때문이다.

세 사람은 두 봉우리를 잇는 천선교를 건너 배불대 위에 올라섰다. 그리고 강정학도 돌아서서 세 사람을 둘러보다가 주태소에게 시선이 머물렀다.

“자네는 누군가?”

“녹림의 주태소라고 합니다.”

“끌끌! 포위망만 쳐놓고 기다리기엔 좀이 쑤셔서 올라온 게로구먼.”

“하하……, 그렇습니다.”

주태소의 등장 이유를 알아채는 일이 그리 어려운 영역의 추론은 아니었다. 그러나 사파 출신이라손 쳐도 세상 이치에 통달한 듯한 혜안으로 쳐다보고 있었으니 주태소는 발가벗겨진 기분이 들었다.

‘이런 기분……, 천무방에서 천무경을 직접 봤을 때와 비슷하군. 과연 천하제일검 백령신검 강정학이다.’

강정학은 세 사람에게 눈길을 거두고 다시 시선을 멀리 던졌다.

사위를 향한 시야에 가득 찬 것은 자욱한 운해요, 드넓은 창공의 푸르름이었다. 간간이 운해를 뚫고 빼꼼히 고개를 쳐드는 산봉우리도 있는가 하면 오늘 하루 동안 구름에 가려져 영 볼 수 없었던 햇볕의 따스함이 저 창공 위에 있었다.

“보아라. 비구름 한 층으로 인해 피 튀기는 전장이 된 금정 아래의 현실을 생각하면 너무나 동떨어진 세상에 온 듯한 느낌이 아니 들 수 없지 않은가? 금정을 가리켜 범천정토(梵天淨土)로 오르는 하늘 사다리라 한다더니 그 말이 딱 어울리는구나.”

강정학이 어디를 가리키는지 모를 아득히 먼 곳을 향해 손을 뻗으며 감상을 늘어놓았다.

마치 현실에서 초탈한 듯한 그 문장 속에서 강도혁과 제갈무문은 염황신마를 향한 증오심을 품었던 그 강정학과 동일 인물인지 잠시 헷갈렸다.

“아버님, 한 놈 붙잡아 추궁한 결과 염황신마는 금태하를 잡기 위해 광혈신마에게 공조하러 이미 떠난 것 같습니다. 이제 어찌해야 합니까? 여기서 백제성까지는 쉬지 않고 달려도 사흘은 걸릴 것입니다.”

“총수, 송구합니다. 좀 더 미리 신중하게 고민하고 한발 앞서 출발하도록 조언했어야 했는데 제 능력이 부족했습니다. 전황을 헤아려본다면 아마 오늘 밤에 백제성에서 전투가 벌어질 수도 있습니다. 중천이 움직이도록 사람을 보내보겠습니다만, 저희가 거기까지 닿기는 불가능합니다.”

어중간해져 버린 현재 검림의 위치에 대해 결정을 요청하는 강도혁.

허점이 고스란히 드러나 버린 불완전했던 계획에 자책하는 제갈무문.

본인의 성정상 불편한 분위기를 싫어함에도 강정학의 반응이 궁금한 주태소.

가장 먼저 산 정상에 이르렀던 강정학은 범천사와 승은사에서 느껴지는 사람들의 기척이 매우 적은 걸 확인했다. 그래서 곧장 금정에 오르면서도 염황신마를 마주할 거라는 기대감은 일찍이 사그라들었다.

석가전과 미륵전을 차례로 훑어보았었다.

석가와 미륵의 금불상을 제외하면 큰 특이점이 없었던 불전들이었지만, 며칠 전까지만 해도 불자가 관리한 것처럼 내부는 정갈했다. 물론 그 관리자는 불자가 아닌 염황신마였겠지만, 승려들이 사찰에서 쓸법한 간소화된 침구류 등을 보고 있으니 그의 기억 속에 박힌 화마(火魔)의 화신과도 같은 염황신마의 모습과 대비되어 웃음이 나왔었다.

“구름이 볕을 가리고 그 아래는 피바람으로 혼란이 가득하다 해도 이렇게 구름 너머까지 올라오면 저 푸른 하늘과 태양은 언제나 변함이 없다. 무엇이 걱정되고 또 무엇 때문에 자책하느냐? 어차피 우린 염황신마를 치기 위해 길을 떠났으니 계속 그 길을 가면 될 것이고, 아직 사천의 싸움은 끝난 게 아니니 미리 실패를 예단할 이유는 없느니라.”

강정학은 돌아서서 강도혁과 제갈무문 두 사람의 어깨를 함께 두드려주었다.

아무것도 문제 될 것이 없다는 표정.

“갈 길을 가면 되고 할 선택을 더 하면 된다. 그렇게 최선을 다했다면 그 결과의 흥망을 결정하는 것은 저 불변하는 하늘의 뜻에 달렸을 터.”

강정학이 강도혁을 쳐다보았다.

“우리는 계속 염황신마의 뒤를 쫓는다. 다른 길을 선택할 이유가 있느냐?”

“……없습니다.”

강정학이 제갈무문을 쳐다보았다.

“이미 판은 돌아가고 있네. 손이 닿지 않은 곳까지 걱정할 필요 없어. 당장 손에 쥔 것들로 올바른 결정이 무엇일지 생각하게나. 장기 말을 먼저 잃었다고 해도 승부는 끝까지 가봐야 아는 것이 아니더냐?”

제갈무문의 눈빛이 가볍게 흔들렸다.

금태하와 구룡문이 패퇴할 가능성, 천하오절 중 한 사람을 잃을 가능성을 놓고 혼란에 빠진 그에게 강정학은 최악을 상정하라 충고하고 있었다.

금태하가 패하리란 상상을 강정학이라고 쉽게 할 수 없는 일이었다. 서로를 비교한다면 강정학 자신이 백중세 가운데 근소 우위를 자신하겠지만, 지금 이 무림의 판세 속에서 천하오절조차도 결국 장기판 위의 말에 불과한 상황임을 그도 잘 알고 있었다.

전쟁이란 무릇 예상을 벗어난 상황에도 직면하게 되는 법.

지휘관은 창천맹에 있을 천무경이나 여기 제갈무문의 몫이지 강정학 자신과 금태하는 그들의 판단하에 놓이거나 활용될 장기 말에 불과함을 충분히 인지하고 있었다.

‘그래. 아직 판은 끝나지 않았다. 마교가 한발 빠르게 준비하여 구룡문을 포위해서 패퇴시킨다면 차라리 그 꽁무니를 쫓기보다 적들의 작전에 간섭할 수 있는 수를 두는 것이 중요하다.’

제갈무문이 인상을 찡그린 채 손으로 턱을 쓰다듬었다.

골몰히 생각을 거듭하는 데 그 시간은 오래 걸리지 않았다.

“금태하나 구룡문이 패퇴한다고 해도 적들도 피해나 피로가 만만치 않을 것입니다. 안효철의 중천은 차라리 사천으로 발 빠르게 전진시키겠습니다. 염황과 광혈 두 마종의 다음 선택지가 사천이라면, 특히 성도의 당문을 노리는 것이라면 중간에서 맥을 끊을 수 있습니다. 총수께선 뜻하신 대로 염황신마의 뒤를 쫓아주십시오. 놈들도 사천으로 들어간다면 중천과 더불어 앞뒤로 포위할 수 있을 것입니다. 대신 쉬지 않고 전력으로 달리셔야 합니다. 밤낮으로 달린 피로가 격전 후의 피로보다 크지 않을 것입니다.”

강정학이 피식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좋다. 우리는 내일까지 백제성을 찍는다. 길잡이가 지치지 않도록 내공을 빌려줘야겠군.”

제갈무문이 주태소를 돌아보며 입을 열었다.

“녹림은 계획한 대로 즉시 움직여주시오.”

“여부가 있겠소? 군사는 당문의 지원이나 늦지 않게 당도하도록 신경이나 써 주시구려. 아, 그 전에 사천 전쟁부터 이기는 게 먼저이려나?”

제갈무문은 말뜻을 알아듣고 고개를 끄덕였다.

독공을 다루는 사혈마종 사혈주와 필시 충돌할 수밖에 없기에 중독자에 대한 의료지원을 챙겨달라는 말이었다.

“성도엔 그들이 갔으니 분명 제 몫을 해줄 것이오.”

“누구 말이오?”

“두 사람이라면 신마 하나를 능히 처치할 수 있다 하였소. 바로 맹주의 딸 천서은과 진도건인데 알고 있소? 두 사람을 일찍이 사천으로 보냈는데 잘 찾아갔는지 모르겠소.”

주태소가 피식 웃었다.

그는 녹림의 임무 외에는 대략적인 개요만 전해 들었던 터라 다른 세부 사항에 대해 잘 몰랐다. 그래서 두 사람의 이름이 제갈무문의 입에서 튀어나오자 뜻밖이라는 생각이 들면서도 금방 얼굴에 흥미롭다는 표정이 가득 차올랐다.

“아아, 군사께서 재밌는 녀석들을 보내셨구만. 그런데 마교의 신마들이 뉘집 개이름이요? 두 사람으로 그리 쉽게 잡을 수 있는 놈들이라면 나도…….”

주태소는 ‘나도 잡을 수 있다’고 말하려고 했으나 끼어든 강정학의 목소리에 곧 입을 다물었다. 그리고 그 말은 조금 전 흥미로운 표정을 가득 지어 보였던 얼굴을 일그러뜨리게 했다.

“자네, 녹림의 울타리에 있기 싫어하는 자유로운 영혼을 가졌다지? 하지만, 그게 간섭받기 싫어하며 놀기만 좋아하는 성격을 말하는 거라면 자네는 지금도 그렇고 앞으로도 두 사람을 이길 수 없네. 자네 자신에게 책임을 지우고 정진할 것인지 혹은 이번 일이 끝나고 나면 또 어디로 도망가서 놀 것인지 결정부터 하게나.”

그 말에 주태소는 충격을 받은 표정이 되어 강정학을 바라보았다.

“……백령신검께선 그 둘을 아십니까?”

“내게 한 수 배우고 떠났으니 네놈보단 내가 더 잘 알겠지.”

“흥, 날 상대해보지 않으셨으면서 그런 소리를 너무 쉽게 하시는 것 같습니다.”

“흘흘! 유희로는 쓸만하겠구나!”

강정학은 웃음을 흘리면서 배불대 바위에서 내려왔다. 강도혁도 피식 웃으면서 제갈무문과 함께 그 뒤를 따르니 주태소가 뒤에서 툴툴댔다.

그의 성질대로라면 당장 강정학에게 도전장을 내밀만큼 당돌함을 보였을 테지만, 앞선 얘기에 따라서 가야 할 길이 바쁘니 그럴 여유가 없는 게 아쉬울 따름이었다.

‘쳇, 놈이 그렇게 쎄졌다고?’

뒤에서 연신 툴툴거리던 주태소는 특별히 작별 인사도 하지 않고 바로 범정산에서 내려가 부하들에게 돌아갔다. 후에 강정학의 충고에 대해 불만 가득한 목소리로 혼잣말하던 걸 옆에서 듣게 된 도태무가 진도건과 천서은이 흑풍신마를 처치한 장본인이란 사실을 전했을 때, 운남에 도착할 때까지 분함에 씩씩거렸다던 후문(後聞)은 한참 나중에서야 조금씩 세간에 전해졌다.

주태소가 그렇게 녹림과 함께 운남쪽으로 이동할 때.

제갈무문은 먼저 검림에서 경공이 가장 뛰어난 비천검(飛天劍) 반문기(班聞忌)를 보내 안효철과 중천을 찾도록 했다. 그렇게 하루 뒤 산중에서 반문기를 마주치며 제갈무문의 전언을 접한 안효철은 상황이 심각하게 돌아가고 있음을 인지했다.

당연히 백제성에 가야 하는 거 아니냐는 의문이 있었지만, 반문기도 화술이 좋았던 덕에 제갈무문의 뜻을 관철시킬 수 있었다.

강정학을 위시한 검림의 검객들도 밤낮으로 쉬지 않고 경공을 펼치면서 산자락을 넘으며 북상하고 있었다. 공교롭게도 그들은 안효철의 중천이 반문기와 만났던 그 자리를 정확히 반 시진 뒤에 지나가게 되었다.

범정산과 백제성 간의 긴 거리를 감안했을 때, 그만큼 검림은 뒤에 어떤 싸움이 기다리고 있는지 고려도 하지 않고 어떻게든 염황신마의 뒤를 붙잡으려는 의지를 불태우고 있었다.

그렇게 함으로써 마침내 강정학이 다짐했듯이 이틀 만에 구당협 정상에 올라서서 장강 너머를 바라볼 수 있었다.

촤아아아!

범정산을 떠나던 날부터 시작하여 지금까지도 하늘에선 억수같이 비가 내리고 있었다. 구당협의 물이 불어난 장강도 기승을 부리면서 연신 굽이치는데 그 물살 소리가 빗소리를 뚫고 들려올 지경이었다.

비록 지금 내리고 있는 소나기로 인해 크게 번지지 않고 그쳤으나 백제성과 그 주변 산지는 산불이 한 차례 휩쓸고 간 바람에 새까맣게 변한 모양새였다.

이미 검게 타버린 나무들로 아름답게만 보여야 할 백제산의 풍경은 앙상하기 그지없었고 여기저기 성벽이나 건물 등이 무너진 백제성은 그 자리에서 거대한 전투가 벌어졌음을 고스란히 설명해주는 듯했다.

“이런…….”

그래도 일말의 기대를 가진 채 수중산림을 뚫고 여기까지 달려온 제갈무문은 눈에 들어온 참상에 입에서 절로 탄식이 흘러나왔다.

강정학도 침중해진 표정으로 지켜보다 입을 열었다.

“……강을 건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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