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1화 - 제39장. 범정산 염황문(梵淨山 炎皇門) (3)
“녹림은 범정산 주변을 포위하는 것이 임무 아니었나? 그대가 왜 여기 있지?”
강도혁이 달려와 이현탁 옆에 서서 물어보았다.
피아의 구분이 바로 서자 조금 여유가 생긴 주태소가 경계를 풀고 껄렁대는 자세를 취했다.
“기다리면서 떡고물 떨어지는 걸 기다리기엔 내 성미에 맞지 않아서 말이오. 그런데 당신은 누군데 반말이지?”
“검림의 강도혁이다.”
“아아, 백령검왕 강도혁! 드문 강자를 이리 만나게 될 줄이야.”
주태소의 눈빛이 번들거렸다.
강도혁은 그의 눈에서 호승심을 읽었다.
‘……이런 자인가?’
서로 안면을 틀 기회는 없었지만, 그도 여러 소식을 통해 주태소라는 이름을 알고 있었다.
최근 녹림에서 벌어진 사단은 중천의 안효철이라는 이름이 주는 상징성으로 인해 마치 그의 개입으로 정리가 된 것처럼 세간에 묘사되곤 했지만, 그 가운데서 낭아도 주태소라는 위명은 이야기의 중심에서 빠지지 않고 거론되고 있었다.
녹림칠악이 강호에서 명성이 높긴 하지만, 강도혁 개인의 판단하에 한 수 아래의 수준으로 여겨졌었다. 그러나 이렇게 주태소를 마주 보고 있으니 그 기백이 결코 만만하게 느껴지지 않았다.
“전쟁 속에서 불필요한 사치를 누리려 하는군.”
“하하하하!”
강도혁의 대꾸에 주태소가 웃음을 터뜨렸다. 그는 이내 웃음을 그치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하, 아무튼. 이게 맞소? 싸움이 시시하게 돌아가는데.”
범천사의 경내에 휘몰아치던 불꽃도 점점 규모가 줄어들고 있었다. 애초에 사찰에 불이 붙은 것이 아니라 염황문 마인들의 무공에 의한 불길이었으니 하나둘씩 쓰러질 때마다 불길도 줄어드는 것은 당연했다.
“이 형, 이곳 정리를 맡아주시오. 난 승은사로 가볼 테니. 거기도 같은 상황이라면 어쩌면 우리가 허탕을 친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드오.”
“여긴 걱정하지 말고 어서 가보시오.”
이현탁이 부탁을 수락하자 강도혁은 곧장 경내를 가로질러 좌측 담장을 뛰어넘었다. 그 뒤를 쫓아 주태소도 바짝 따라붙었다.
범정산의 정상 부근에 이르면 초입에는 층층이 가로로 결이 져 있는 모습이 마치 만권의 책을 쌓아 올린 듯한 형상을 가져 만권서(萬卷書)라 불리는 바위가 보이고 그 맞은편에 범천사가 있었다. 범천사 좌측의 산길을 따라 능선을 타고 더 오르면 다시 또 하나의 사찰을 마주하게 되는데 이곳이 바로 승은사였다.
승은사에 이르자 범천사와 다르게 바깥에서부터 싸움이 벌어지고 있는 광경이 눈에 들어왔는데 그마저도 형세가 전혀 불리해 보이지 않았다.
승은사의 산문은 이미 활짝 열려 있어 강도혁과 주태소가 주위를 경계하면서도 망설이지 않고 빠르게 경내에 진입했다.
두 사람이 들어서자마자 가까운 곳에서 불꽃이 크게 일렁였다.
파앙! 푹!
“크륵!”
그 불꽃은 이내 그 중심을 꿰뚫는 검광과 거기에 실린 검기에 의해 터져나갔다. 동시에 염황문 마인의 목을 꿰뚫는 소리가 목에서 피 끓는 소리와 겹쳐 들렸다.
힘이 빠진 육신에서 쑥 검을 뽑아 털어내던 제갈무문이 막 들어온 강도혁과 눈이 마주쳤다.
“군사! 상황이 어떻습니까?”
“저항이 개개인별로 심하지만, 전체적으로는 우리에게 아무런 위협이 되지 못하고 있습니다. 대비했던 숫자에 한참 못 미쳐요.”
“범천사도 다르지 않습니다.”
“대체 무슨 상황이지? 혹시 매복해 있는 것인가?”
“그러기엔 여기 남은 자들이 저희가 파악한 규모의 십분지 일도 되지 않습니다…….”
“답답하게 뭘 그리 고민하시오? 한 놈 잡아 족쳐보면 될 일이지.”
제갈무문과 강도혁이 자리에서 신중한 얼굴로 얘기하는 모습을 지켜보기 힘들었는지 주태소가 그 말을 남기고는 바로 몸을 날렸다.
“그놈 살려 놓읍시다!”
주태소의 주문에 매연선이 제대로 반응했다.
불길을 휘감은 칼을 피해내고는 반격으로써 급소를 노리던 검광이 주태소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방향을 틀어 칼을 쥔 쪽의 어깨를 꿰뚫었다.
푹!
“윽!”
마인이 몸을 휘청거리자 매연선의 검이 재차 두 허벅지까지 꿰뚫었다. 그제야 비로소 무릎을 꿇고 쓰러졌고 마침 거리를 좁힌 주태소가 그대로 걷어차니 발끝이 명치에 꽂혀버렸다. 숨넘어갈 듯 끅끅거리는 마인 앞에서 주태소가 매연선을 보며 엄지를 치켜세워 보였다.
“쾌검 솜씨가 일품이오. 꼭 누굴 떠올리게 만드는군.”
“당신은 누구죠?”
서로 모르는 사이였기에 매연선이 당황하여 되물었다.
“녹림의 늑대요.”
매연선은 대답이라고 하기도 뭐한 이상한 말을 툭 던지고 가버리는 주태소를 보며 얼굴에 헛웃음을 지었다.
주태소는 마인을 제압하여 강도혁 앞으로 끌고 왔다. 그리곤 간신히 정신을 차리는 마인의 목에 낭아도를 겨눈 채, 마치 ‘어때?’라고 묻는 듯한 의기양양한 표정으로 강도혁을 쳐다보았다.
강도혁에겐 주태소의 그런 무언의 물음에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이곳은 염황문의 본거지일 터, 이게 네놈들 숫자의 전부가 아닐 것이다. 다른 놈들은 어디 있지? 아니면 염황신마를 지키기 위해 금정(金頂)에 가 있나?”
“킥킥킥……! 조용히 지냈는데도 용케 찾아 여기까지 왔구나. 그러나 너희들은 헛다리를 짚은 게야. 범정산은 그저 중원에서 숨기 좋은 곳을 찾아서 선택된 곳일 뿐.”
“……뭐 좋다. 염황신마는 어디에 있지?”
“크크! 너 본 적 있다. 검림 강정학의 아들 강도혁이지? 성화(聖火)에 데이고도 정신을 못 차린 자들. 본 마종과 신마께선 신교의 성화, 그 불길이 절정에 달하고 있으니 당연히 그 쓰임을 받기 위해 길을 떠난 지 오래다.”
텁!
“커억!”
강도혁의 우악스러운 손아귀가 목줄을 움켜쥔다.
“염황신마는 어딨느냐?”
강도혁이 목소리에 힘을 주며 몰아붙였다. 그러나 전혀 위협이 되지 않았는지 마인은 충혈된 눈을 하고도 입가에 조소를 흘렸다.
“크크…… 크! 운귀고원의 마천로(魔天路)를 따라 봉명적의 울음소리가 꼬리를 물고 이어졌으니 염황신마께서 성화의 전사들을 이끌고 떠나신 지가 이미 오래전 일이다. 촉왕의 별이 떨어졌던 백제성에 아홉 마리 용도 성화로 불태워 죽일 것이니 이미 돌이킬 수 없느니라.”
뜻을 알 수 없는 단어들이 처음 나왔을 때는 내심 고개를 갸웃할 일이었으나 뒤이은 내용이 주는 말뜻은 명확했다.
“설마 구룡문이 움직일 걸 알고서 광혈마종과 협공하러 간 것인가?”
옆에서 함께 얘기를 들은 제갈무문이 당황한 표정으로 반문했다.
그가 알고 있는 한도에서 예측 가능한 범주란 광혈종을 처단하기 위하여 금태하가 독단적으로 움직일 가능성이었지 내부에서 마교와 내통을 획책하는 자가 있을 거라는 것까지는 예상하기 어려웠다.
“크크……! 그것은 단지 시작일 뿐이다. 용케 여길 찾아냈다만, 결론적으로 너흰 목적을 달성하지 못했지. 비단 여기뿐이랴? 이미 죽음의 문은 열리고 있음을…….”
꼭 답을 다시 들어야 할 질문이 아니긴 했으나 죽음이 결정된 마인 입장에서 비웃음에 끝을 둘 이유는 없었다. 그리고 그 조롱을 강도혁이 계속 들어줄 이유도 없었다.
푸우욱…….
“끄으윽……!”
그의 검이 쇄골에서부터 심장까지 속도를 조절해가며 꽂히자 마인이 고통에 몸을 부들부들 떨다가 절명했다. 그 끔찍한 광경은 제갈무문이 두 눈을 질끈 감게 만들었고 주태소는 강도혁의 냉혹함에 혀를 내둘렀다.
‘역시 증오심이 대단하군.’
손속에 잔인함을 두는 일은 정파의 제갈무문이 받아들이기 어려웠으나 마교 가운데서도 염황종을 바라보는 검림의 입장을 잘 알고 있기에 묻고 넘어갈 수밖에 없었다.
강도혁이 검을 쑤욱 뽑아 올리자 검신이 피에 흠뻑 젖었다. 무심히 검을 휘둘러 바닥에 피를 털어내면서 고개를 돌렸다.
“매연선.”
“예.”
“염황문 주력은 이미 빠져나간 모양이다. 난 군사와 같이 아버님과 얘길 해봐야겠다. 정리를 부탁한다.”
“알겠습니다.”
강도혁은 막 발을 떼려다 멈칫하고 다시 매연선을 돌아보았다.
“샅샅이 뒤져 한 놈도 살려두지 말도록.”
고개를 끄덕이는 매연선의 눈빛은 강도혁의 눈빛만큼이나 얼음장처럼 차갑게 빛났다.
강도혁과 제갈무문, 주태소는 함께 승은사를 나와 능선을 따라 올라갔다.
구름은 어느새 더 짙게 끼면서 산에 오를 때보다 낮아진 듯했다. 주변에 점점 운무가 끼고 있었으나 그 뿌연 시계 속에서도 구름을 뚫고 수직으로 높이 솟은 거대한 바위 봉우리의 위용까지 가리기엔 역부족이었다.
홍운금정.
아침에 되면 일조(日照)로 인해 구름이 붉게 물든 채 금정을 에워싼 모습을 볼 수 있다는 풍경을 가리킨 말이었다.
그런 금정을 올려다보는 제갈무문의 머릿속에 잠시 잡념이 스치고 있었다.
‘……세평이 그러해도 작금의 내게 홍운이란 말은 염황신마의 불길을 감싼 구름이란 뜻으로 떠오른다. 그런데 회색(灰色)빛으로 짙게 드리워져 봉우리 정상을 가리고 있는 저 구름 떼를 보고 있으니 이미 저들의 악의에 불태워 더럽혀진 재로 덮여있는 듯한 모습이구나. 염황신마가 떠나면서 대부분의 마교도들을 끌고 나섰다는 건 더는 여기에 볼일이 없다는 뜻. 아아, 더 신중하게 생각했어야 했는가? 아니면 너무 여유를 부린 것인가?’
고고하게 홀로 서 있을 뿐인 금정의 벽을 따라 그래도 오를 수 있는 계단을 만들었으니 그 수가 자그마치 팔천여 개.
범정산의 원주인이었던 산중턱께의 천관사 등 사찰 승려들은 고행(苦行)으로서 올랐을 계단이었다.
이를 세 사람은 경공술이 뛰어난 무림인들답게 무리 없는 듯한 모습으로 빠르게 올라갔다. 그런데도 오름길 환경의 혹독함과 고지대에서의 희박한 공기로 인해 숨이 벅차지는 기분을 다들 새삼스러운 기분으로 느끼고 있었다.
마침내 두꺼운 구름까지 뚫고 올라가자 갑자기 몹시 맑고 푸른 하늘이 세 사람의 시야를 확 사로잡았다. 그리고 마침내 금정 꼭대기의 구불구불한 소나무들 사이로 사찰 지붕의 기와 끄트머리가 보였다.
금정의 정상은 마치 칼로 쪼개놓은 것처럼 봉우리가 둘로 갈라져 있었다. 산을 오르는 계단은 이 금도협(金刀峽) 사이를 관통하여 정상으로 이어져 있었고, 세 사람은 이 협도의 계단마저 지나면서 마침내 정상에 다다르고 있음을 느꼈다.
더욱 발에 박차를 가한 세 사람이 마침내 금정의 남봉(南峯) 위를 밟았다.
그들의 시선을 먼저 사로잡은 것은 남봉의 작은 사찰과 그 비좁은 공간 속에 본래 이 산의 것이었을 거대한 바위였다. 둘은 각각 석가전(釋迦殿)과 설법대(說法臺)였으며 북봉엔 마찬가지로 미륵전(彌勒殿)과 더불어 설법대보다 조금 작은 크기의 배불대(拜佛臺)라는 바위가 있었다.
“왔느냐?”
강정학의 목소리에 세 사람이 고개를 돌렸다.
강정학은 미륵전 앞 배불대 바위 위에서 뒷짐을 진 채 서 있었다.
주태소는 애써 두근거리는 마음을 달랬다. 부하들을 도태문에게 맡긴 채 혼자 범정산까지 오게 된 이유는 당연히 염황문을 상대하는 전투에 대한 기대감도 있었지만, 어쩌면 염황신마를 상대하는 강정학의 신위를 구경할 수 있을지 모른다는 기대감이 더 컸다.
그런 큰 기대 자체는 헛심에 그치긴 했어도 어쨌든 천하오절 중 한 사람을 직접 대면할 기회는 언제고 다시 오는 그런 쉬운 기회가 아니었다.
그 천무경과 능히 자웅을 겨룰 수 있다는 백령신검 강정학이었다.
같은 천하오절이라도 어쩌다 인연을 맺은 철갑권왕 안효철과 비교할 수 없는 명성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