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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의 귀신-210화 (210/432)

210화 - 제39장. 범정산 염황문(梵淨山 炎皇門) (2)

강호 무림의 음지에 숨어 있었던 염황문의 분파 화아문의 멸문.

그 일을 벌인 검객의 정체는 바로 조강선이었다.

우연히 지나가게 된 산서 노주 근처의 어느 폐허가 된 마을.

조강선은 새까맣게 타버려 허물어진 가옥들과 석탄처럼 변해 버린 시신들 가운데서 고아로 떠돌고 있는 어린 진도건을 제자로 거두었다. 그리고 수년 뒤 우연히 또 다른 마을을 불태우고 은밀히 돌아가는 화아문의 뒤를 추적해 한 사람도 남김없이 일검에 베어 제자의 복수를 대신 해주었다.

진실은 여전히 보이지 않는 저편에 숨어 있긴 했으나 그래도 비록 추정에 불과한 이야기로나마 기록으로 남아 있을 줄은, 이제는 세상을 떠나고 없는 조강선이나 피해당사자인 진도건조차 꿈에도 모를 일이었다.

얘기들을 듣던 강정학은 흥미가 동하긴 했으나 이내 잊어버렸다.

곧 다가올 큰 싸움에 대비한 마음의 준비를 다지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엄밀히 장가계는 사람이 모여 사는 마을을 가리키지만, 강호에서는 그곳의 깎아지른 산지로 이뤄진 엄청난 비경을 장가계라 통칭하여 불렀다. 운귀고원 지대는 대부분이 석회암으로 이뤄진 산지였는데 고대부터 이 석회암 산지가 부분 녹아 지하로 흘러내림으로써 마치 산이 쪼개진 듯한 지형을 일궈냈다. 이를 올려다보든, 산에 올라 내려다보든 약간의 구름과 햇살로 장식을 해 놓으면 마치 무릉도원(武陵桃源)을 보는 듯했다.

옛말에 “사람이 태어나 장가계에 가 보지 않는다면 백 세가 되어도 어찌 늙었다고 할 수 있겠는가(人生不到張家界, 百歲豈能稱老翁)?”라는 말이 있다.

죽기 전에 가볼 수 있는 이상향이 있다면 바로 무릉의 장가계를 일컬음이다.

그런 곳이어도 상시 그 비경의 전부를 감상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아열대 기후인 이곳에선 언제나 운무가 자욱하게 끼어 있기 마련이라 창공의 시계를 확보하기 어려운 편이었는데 당장의 날씨도 조금 흐린 편이다 보니 더 심하게 느껴졌다.

습도도 높은 편이라 이동하면서도 금방 땀에 젖기도 해서 약간의 짜증이 계속되고 있었다. 이따금 하늘을 올려다볼 때 그 소문의 비경이 눈을 즐겁게 만들어준다면 좋겠다는 생각도 들곤 했었다. 그러나 목적을 달성하는 데 있어서 그들 앞에 놓인 난관이 쉽지 않을 것이었다. 오히려 눈앞에 가득한 운무로 인해 비경이나 감상할 여유를 막을 수 있으니 감사한 일이었다.

그래도 사람의 발길이 잦은 산길을 따라 움직이는 검림은 조금 나은 편이었다.

아무리 산과 친숙한 녹림도라도 고원의 산지들이 겹겹이 가로막은 눈앞의 풍경을 뚫고 나아가는 것은 심리적으로 부담스러운 일이었다. 경로에 있는 마을 사람들에게 눈에 띄지 않아야 하니 더욱 심산을 뚫고 가야만 하는 일이었다.

“어디쯤이지?”

험산을 뚫고 내려와 남북으로 흐르는 강을 마주하자 주태소가 물어보았다. 천하를 주유한 그라도 운귀고원 쪽으로는 갈 일이 없었다. 녹림의 세력권도 아닌 데다가 귀주 무림의 수준이 낮은 편이고 부촌(富村)도 별로 없으니 관심을 둘 일이 거의 없었기 때문이었다.

“이건 장강 지류 원강(沅江)이니 아직 호남 지역을 빠져나오진 못했습니다.”

“큭큭! 그래도 정강산을 넘고 호남을 가로질러 끝자락에 도달했으니 삼분지 이는 지난 셈인가? 빡빡하구먼!”

길잡이의 답변에 주태소가 헛웃음과 함께 탄식을 늘어놓았다.

“형님, 목적지가 범정산이 아닙니다. 앞으로 가야 할 길의 반도 오지 못했습니다.”

그를 말리는 도태무의 말은 다시금 창천맹으로부터의 지령에 대한 기억을 상기시키고 있었다.

전쟁의 끝자락까지 다소 거추장스러운 일을 맡아 처리하기 위하여 녹림이 바라보고 걷는 길은 더욱 먼 곳에 있었기 때문이었다.

“쳇, 어쩌다 이런 귀찮은 일에 휘말렸는지.”

주태소가 못마땅한 표정을 지었다.

마교의 손아귀에서 녹림을 구해내겠다고 설쳐대다 보니 여기저기 빚을 너무 많이 져버렸다.

주태소는 조직을 수습하자마자 바로 사천 전쟁에 가담해달라는 창천맹 군사의 요청을 당연히 거절할 수 없었다. 총표파자가 되어 정강대산채의 제일 좋은 집을 차지하고 거드름을 피우고 있을 독고구의 늙은 얼굴을 떠올리면 부아가 치밀어올랐다.

“더 살아봐야 십 년 밖에 못 살 늙은 놈까지 끌고 갈 셈이냐? 네가 내게 표주박을 넘겼고 넌 그동안 밖으로만 싸돌아다녔으니 이젠 조직을 좀 이끌기도 해야지. 아랑도위 명성에 먹칠하지 말아라.”

독고구가 킬킬대며 겁박하는 목소리가 새삼 머릿속에 다시 울려 퍼졌다.

“바로 강을 건너시지요. 그래도 범정산이 멀지 않으니 부지런히 산을 넘으면 검림이 도착하기 전에 충분히 천라지망을 펼칠 수 있습니다.”

“자동수 선배 위치는 확인됐나?”

후임자들이 정해지지 않으면서 이젠 녹림오악(綠林五惡)이 된 다섯 명 중 한 사람인 금비원패 자동수는 주태소와 같은 조로 움직이기 싫다고 하루 먼저 수하들을 이끌고 길을 떠났었다.

자동수가 이끄는 녹림도가 범정산 서부를 틀어막으면 주태소가 지금 따라오는 부하들을 데리고 남부를 틀어막을 예정이었다. 북쪽은 주태소와 같은 날 출발한 도판수가 틀어막을 예정이었는데 검림이 범정산 북쪽을 경유할 예정이므로 주태소, 자동수가 이끄는 숫자의 절반에 해당하는 3백 명만 데려갔다. 그보다 더 북쪽은 안효철의 중천이 2개 조로 지나고 있으므로 이중의 포위가 형성되어 있는 것과 다를 바 없었다.

“그쪽은 이미 귀주로 진입하여 계속 나아가고 있다고 합니다. 내일이면 범정산 남단을 지날 듯합니다.”

“흐음, 그럼 대충 사흘 뒤면 검림과 염황문이 한 판 붙는 건가?”

“이틀 뒤입니다, 형님. 검림이 저희가 포위망을 형성하는 걸 기다리고 움직이진 않을 겁니다.”

“그래? 화끈한 싸움이 될 건데 구경을 못 해서 아쉽구먼.”

“남쪽에 이르면 다녀오십시오. 형님 정도라면 검림의 검객들에게 방해가 되는 일은 없지 않겠습니까?”

“내가 가주면 저쪽에선 고맙다고 큰절해야지. 크하하하!”

도태무의 말에 주태소가 웃으며 너스레를 떨어댔다.

원강을 건너는 주태소가 이끄는 녹림도, 그들보다 하루 일찍 원강을 건너서 범정산 남단을 지나려는 자동수, 점점 범정산의 염황문을 향해 거리를 좁혀오는 강정학의 검림과 급변할 수 있는 전장에 조력자로 나서기 위해 은밀히 이동 중인 안효철의 중천까지.

귀주 고원의 산림은 깊고 어두워 인적이 드물었다. 그런 환경 속에서 제갈무문이 세워 놓은 계획하에 전력의 배치는 적들의 눈을 피하여 착실하게 이뤄지고 있다.

이틀 뒤 이른 새벽 아침, 화창하지만은 않은 하늘 아래서 마침내 검림은 염황문의 발밑까지 도달했다.

우거진 수풀 사이로 보이는 범정산 홍운금정의 우뚝 솟은 버섯 바위의 위용을 올려다보며 제갈무문이 차분하게 읊조리듯 계획을 설파한다.

“사찰 승려들은 공세적이지 않다면 무시하고 염황문만 노리면서 나아갈 것입니다. 조용하고도 신속하게, 홍운금정까지 강 총수님이 갈 수 있도록 길을 열겠습니다.”

“늦지나 말아라.”

짧게 한 마디 툭 던진 강정학은 이내 범정산을 바라보며 경공을 펼쳤다. 강정학의 신형이 숲속으로 순식간에 거리를 벌리며 시야에서 점점 작아져 갔다.

“우리도 산개해서 간다!”

강도혁과 검림의 검객들도 뒤질세라 빠르게 산을 타고 오르기 시작했다.

이동하는 데 있어서 은밀함을 유지할 필요는 없었다. 범정산의 숲은 충분히 우거져 있어서 시야가 제한되어 있었고 산 중턱이나 정상 부근에 사찰들이 있어서 이용할 수 있는 길은 사실상 정해져 있었다.

개방과 비혈단의 교차정보로도 염황문의 규모는 추산 500명을 넘지 않아서 사실상 길목이나 중간지대에서 경계를 서는 인원은 소수일 거로 예상했다.

하지만, 그런 예상보다 검림이 범정산을 오르는 과정은 훨씬 수월했다. 정상에 이르기까지 세 개의 사찰을 발견했지만, 승려들 모두 무공을 몰랐던 탓에 감히 저항하는 자도 없었다.

오히려 염황문과의 관계를 캐물었을 때, 불편한 얼굴로 답변을 피하는 경우가 대다수였다.

“범정산은 석가모니(釋迦牟尼)께서 미륵보살(彌勒菩薩)을 데리고 수행을 위해 도량을 세운 곳입니다. 본래 우리는 그곳에서 배불(拜佛)하며 설법수행을 하는 승려들이었습니다. 지금은 금정으로의 접근이 불허되어 있으니 불자로서 부처께 깊은 죄를 짓고 있는 셈입니다. 이런 처지로 어찌 통탄하지 않을 수 없겠습니까?”

천관사(天冠寺)의 주지가 남긴 말은 이 산의 승려들이 염황문에 동조하는 게 아니라는 걸 여실히 드러내고 있었다.

그런 관계를 알게 된 것과는 별개로 사찰에 염황문의 마인들이 있을 거로 생각했으나 한 번도 마주치는 일이 없었다.

오히려 산 정상 근처에 다다라 하늘을 향해 툭 솟아오른 듯한 바위 봉우리들이 가까이 보일 때쯤 되어서야 비로소 염황문의 움직임이 관측되기 시작했다.

“적이다!”

어디선가 외침이 들려왔다.

다른 방향에서 올라온 검림 검객들과 염황문이 맞닥뜨린 것이다.

곧 병장기 부딪치는 소리와 함께 비명들이 들려왔다. 그사이 도착한 강도혁은 사찰의 정문에 마주 보고 섰다.

범정산 정상에는 두 채의 사찰이 있었는데 하나는 범천사(梵天寺), 다른 하나는 승은사(承恩寺)라 하였다. 모두 유서 깊은 사찰이었으나 염황문이 이곳에 자리 잡기 위해 수행하던 승려들을 쫓아낸 것이었다.

두 사찰의 현판을 떼어 대충 문기둥 근처에 비스듬히 세워 놓은 채 세월이 흘렀으니 수북이 쌓인 먼지나 낙엽, 나뭇가지 조각 등은 어떤 관리도 없이 고된 풍파를 맞은 모습이 역력했다. 새로이 단 ‘염황문(炎皇門)’의 현판과 비교하면 산 중턱의 천관사 주지의 안타까운 심정이 다시 떠오를 일이었다.

끼이익!

강도혁의 두 손에 열리는 문 사이로 장내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도검이 맞부딪치면서 터져 나오는 금속성이 비명과 뒤섞이고 사방에선 불길이 연신 일렁여댔다. 적색과 흑색을 혼용한 무복을 입은 자들이 휘두르는 칼이나 손짓에 불길이 따라 움직이는 것을 보며 3년 전의 기억이 떠올랐다.

“모두 죽여라!”

원수들을 마주하자 바로 살기가 흘러나왔다.

강도혁의 신형이 전장의 한 가운데로 가로질렀다.

강도혁의 손끝에서 시작된 검광이 흔들거리는 불길 사이로 허공에 찬란함을 수놓았다. 자비 없는 백령검법의 검기는 불꽃을 다루는 자들이라면 여지없이 도륙해 버렸다.

염황문 마인들의 무공은 그 극양의 속성 때문에 그들의 실질적인 무공의 경지보다 파괴력이 높았다. 거기다 기습을 받은 상황에서 필사적으로 저항하다 보니 각 싸움이 팽팽해 보였지만, 검림 검객들의 수가 더 많아 이대일의 형국이 자주 만들어지면서 일찍 수세에 몰렸다. 거기에 강도혁의 개입은 염황문에게 치명적이었는데 다섯 명이 연속으로 그의 검 끝에 쓰러지자 전세가 금방 기울었다.

‘……숫자가 적군.’

강도혁은 전세가 바로 검림 쪽으로 꺾여버리자 의아하게 생각했다.

이곳에 올라옴에 있어서 임전무퇴(臨戰無退)의 각오를 다지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게 뭐야? 뭐 이리 시시해? ……어어? 나 같은 편이오!”

그때 한쪽에서 들려온 목소리에 강도혁의 고개가 돌아갔다.

백포적화 이현탁이 다른 두 명의 검객과 함께 한 사람을 향해 검을 겨누고 있었는데 그 사람 손엔 피 묻은 패도가 들려 있었고 발밑엔 염황문 마인이 쓰러져 있었다.

“누구냐?”

“나 녹림의 주태소요. 아랑도위 낭아도 주태소.”

주태소가 씩 웃으며 대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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