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9화 - 제39장. 범정산 염황문(梵淨山 炎皇門) (1)
귀주지역을 얘기할 때는 운남지역을 빼놓지 않고 설명할 수 없다.
지리적으로 아열대 기후 속에 고산지대를 형성하는 운남에서 시작된 산지가 귀주까지 연결되면서 거대한 고원(高原)지대를 형성하기 때문이다. 사람이 살만한 평탄한 지형마저도 사실상 산중 분지나 마찬가지라 중원의 평야에서 바라본다면 이곳의 원주민들이란 산민(山民)과도 같았다.
이런 지형적으로 접근이 어려운 지역이다 보니 관의 힘이 잘 미치지 않는 지역이어서 황실의 관료체계를 도입하되 토착 부족들의 군장(君長)들로 하여금 지방을 다스리도록 하고 있었다.
자연히 치안은 별로 좋지 않았고 관과 중원 무림의 감시에서 벗어나 있는 편이다 보니 실상 무림 세력이 들어설 가능성도 별로 없었다.
그런 측면에서 어느 순간 귀주에 염황문이라는 무림 세력이 존재한다는 소문은 정말 뜬구름처럼 떠오른 면이 있었다.
귀주 지역의 중심지엔 귀주성(歸州城)이 있어서 여러 토착 부족들과 한족이 어울려 살았다. 새외로 여겨지는 몽골초원과 감숙, 서장, 청해 등의 지역과 다르게 귀주 등의 대륙 남부지역들도 중원 무림의 갈래로 보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개방의 눈이 있었다. 본래 거지 없는 곳은 없다는 당연한 맥락이었으나 개방조차도 염황문의 존재를 알아챈 건 불과 몇 년 되지 않았다.
그 독특한 이름 때문에 양강의 무공을 다룰 거라고 예상은 되었다. 하지만, 개방이 염황문에 대해 추산하기로는 세력이 작았고 큰 사건 사고를 일으키는 법도 없어서 존재를 알게 된 이후로 얼마 지나지 않아 관심을 두지 않게 되었다.
마치 불꽃을 숭상하는 듯한 문파명 때문에 사파 계열로 치부하면서도 범정산이라는 근거지를 두고서 그곳의 사찰들과 관계가 원만해서 경계하지 않는 점도 있었다. 그렇게 관심 밖에서 멀어져 잊어버리게 되었다가 다시 수면 위로 급부상하게 된 건 당연히 3년 전 검림과 강정학을 막아 세운 마교의 염황신마와 염황마종의 등장 때문이었다.
물론 이 염황문과 염황마종을 바로 연결 짓지는 못했다.
왜냐하면, 염황문에 대한 얕은 정보 수준에서 염황신마라는 거대한 존재를 결부시키기엔 인식의 괴리가 너무 컸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한동안은 염황문이란 존재를 무림 정세라는 담론 위에 꺼내두지도 못하고 있었다. 오히려 강정학의 의뢰로 염황마종에 대해 집요하게 추적해온 비혈단에 의해 다시 조명을 받은 셈이니 개방으로선 체면을 다소 구긴 일이 되었다.
어쨌든 비혈단 덕분에 지금은 마교의 염황마종이자 염황문의 본거지가 다시 한번 밝혀지면서 제갈무문의 주도로 검림과 녹림이 장가계나 다른 산로를 통해 귀주고원으로 진입하는 중이었다.
다만 여전히 염황문의 역사나 특징 등에 대해서는 3년 전 검림과의 격돌에서 드러난 정보 외에는 알려진 바가 없었다. 그래서 장가계를 넘는 강정학을 비롯한 검림의 일원들이나 제갈무문으로서는 긴장감을 온전히 떨치긴 어려웠다.
“확실한 증거는 없으나 중원 전역에서 여러 화재 사건들이 있었는데 그중 일부는 염황문과 연결된 마교도가 저지른 게 아닌가 하는 분석이 있소이다.”
장강을 따라 배를 타고 거슬러 올라왔을 때, 검림은 동정호의 군산에 있는 개방 총타에 들렀다. 그리고 길을 안내해 줄 초취개(椒醉丐) 송탁(松濁)도 동행하기 시작했다.
송탁은 호남뿐만 아니라 귀주와 광서, 광동 지역까지 입수되는 중남부 일대의 정보를 총책임하는 개방의 장로이기도 했다. 초취개라는 별명은 그가 산초주(山椒酒)를 즐기기 때문인데 10여 년 전 중풍(中風)으로 홍역을 치르는 바람에 먹게 된 산초에 푹 빠져 살게 되면서 곧 별호로 이어진 것이었다. 그래서 그는 마비 증상을 겪었던 오른팔에 종종 저린 증상이 나타나서 습관적으로 손을 쥐었다 폈다 하곤 했다.
“호남이나 귀주 일대가 아니라 중원 전역 말입니까?”
제갈무문의 물음에 송탁이 고개를 끄덕였다. 제갈무문은 제갈세가의 가주고 송탁은 개방의 장로였지만, 송탁의 나이가 열 살 이상 많았기 때문에 존대하였다.
“그렇소. 물론 전체 화재 사건들 대비 3할 이내 수준이긴 하지만, 생각해 보면 사실 그것도 매우 많은 횟수 아니겠소? 아마 염황문은 자기들의 마공을 완성하기 위하여 다양한 분파(分派)를 만들어서 중원 전역에 뿌려 놓고 실험을 했던 모양이오. 어떤 건 평범한 문파로, 어떤 건 산적 집단으로, 어떤 건 정말 방화범처럼 일을 벌이고는 관에 붙잡히면 뇌물을 먹이거나 습격을 해서 풀어주는 방법으로 말이오.”
제갈무문은 개방 총타로 미리 전갈을 보낸 상황이었고 송탁은 그들과 합류할 때까지 염황문과 관련된 정보들을 준비해둔 상태였다. 물론 며칠 뒤에 닥칠 싸움에 도움이 될만한 건 별로 없었지만, 어쨌든 적에 관해 상세히 알고 있을수록 여러 작전 수립에 도움이 되므로 제갈무문도 이런 이동 간 시간의 여유 속에서 충분히 들어둘 필요가 있었다.
“그렇게 추정하는 근거가 있습니까? 귀주도 따지고 보면 오지(奧地)이니 접점을 찾기 어려울 법한데.”
“워낙 신출귀몰하게 거점을 바꾸고 또 점조직처럼 움직이기도 해서 쉽지 않았소만, 그래도 본방이 기록하고 있는 분타별 무림사서 속에 염황문처럼 불을 상징하는 글자를 사용한 집단명이 기록으로 남은 건이 세 건 있었소.”
“궁금하군요.”
“한 번은 무척 오래전 일이오. 약 100여 년 전 안휘의 구화산(九華山)에서 남궁세가에게 멸문당한 화동파(火東派)라는 문파요. 문도는 30여 명에 지나지 않은 작은 문파였는데 그 장문인이 인근 마을에서 한 낭인과 시비가 붙은 것이오. 결국, 낭인을 살해하고 시신을 태웠는데 하필 그 낭인이 남궁세가의 손님인 탓에 결국 야밤에 보복 습격을 받아서 멸문하였다 하오. 그때 장문인이 칼에서 불꽃을 일으켜 당시 남궁가 일원에게 작은 화상을 입혔다는 기록이 있었소.”
“허허, 거기까지 기록을 찾아보셨습니까?”
“두 번째는 40여 년 전 일인데 강서 명월산(明月山)에서 일화단(日火團)이란 도적 떼가 명월산에 거점을 둔 녹림 산채를 습격한 일이 있었소. 후에 녹림총채가 개입하여 일화단을 척살하긴 했으나 놈들이 불을 다루는 듯한 신기를 보여주었는데 그 두 싸움 동안에 일대에서 산불이 심하게 일어나면서 그때 받았던 깊은 인상으로 개방에까지 그때의 소문이 흘러들어오게 되면서 기록으로 남아 있게 되었소.”
송탁의 얘기를 들으면서 제갈무문은 특이한 인상을 받았다. 그는 청취한 자신의 감상을 얘기하기 전에 송탁의 마지막 얘기까지 들어보기로 했다.
“재밌는 일화군요. 마지막은 무엇입니까?”
“여기 귀주에서 안휘도 상당히 먼 곳이지만, 그보다 더 먼 곳에서 여러 마을이 습격과 더불어 큰 화마에 휩싸인 일들이 있었소. 산서 노주(潞州:지금의 상당구上黨區) 근처의 마을들이 각각 일정한 시일을 두고 정체 모를 집단에게 차례로 약탈을 당하고 마을은 불태워진 일이었소. 그게 불과 1, 20여 년 전 일이었으니 당시 천무방에서 그 일을 조사한 적이 있었지만, 흉수를 찾을 수는 없었소. 한 가지 특이점으로 기록된 것이 화재 현장과 떨어진 곳에서 발견된 시신들에서 여러 상처가 화상을 동반한다는 점이었소. 작금에 벌어진 일이라면 바로 염황문을 의심했겠으나 당시엔 그저 찝찝함만 남기고 넘길 수밖에 없었던 모양이오.”
“천무방이 찾지 못했다니…….”
“몇 년이 지난 뒤에 흉수로 추정되는 문파 하나를 결국 조양산(朝陽山)이라는 산서지역의 어느 산지 깊숙한 곳에서 찾아내긴 했지만, 이미 누군가에 의해 멸문된 후였소. 그때 그 문파 이름이 화아문이었소.”
“누군가? 왠지 한 사람이 했다는 소리처럼 들리는군요.”
“그렇소. 단 한 사람이었소. 그자의 정체는 지금도 알 수 없으나 하나 추정할 수 있는 건 아주 대단한 솜씨를 가진 검객이라는 점이오. 초식조차 추정할 수 없는, 아주 간결한 검격으로 흉수들을 일검에 처리하였는데 그 솜씨가 너무나 깔끔해서 이 일을 기록한 개방도는 혹시 강 총수께서 왔다 간 게 아니냐고 기술해 놓을 정도였소.”
대단한 솜씨의 검객이라는 말에 근처에서 함께 듣고 있던 강정학이나 검림 검객들도 모두 귀를 쫑긋 세우고 있었다. 그리고 마지막 말에서 많은 시선들이 강정학에게로 모였다.
강정학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난 그런 문파를 멸문시킨 기억이 없군. 산서 땅을 밟아본 기억도 없고.”
“천무방과 왕래는 없으셨습니까? 일전에 천 맹주가 왔다 간 것처럼 아버님도 천무방에는 들러보셨을 것 같았는데.”
“왕래는 없었다. 천무방에야 사람만 보내는 수준이지 직접 간 적은 없다. 그와 내가 만나 실력을 겨루거나 대화를 나눴던 곳은 사패련이 있었던 하남 인근뿐이었단다.”
강정학의 말을 들으면서 강도혁도 기억을 더듬어 보았다.
당시 사패련의 삼강에 해당하는 세 문파가 아슬아슬한 경쟁 관계에 있으면서도 천무방과 검림의 관계가 구룡문 대하듯 나쁘지만은 않았기에 직접 왕래가 없었다는 말은 의외처럼 들렸다. 그러면서 최소한 그의 기억 안에서도 부친이 직접 천무방에 간다는 얘기를 그에게 남긴 적이 없었다는 걸 헤아렸다.
“어쨌든 흥미롭군. 결국, 그 검객은 못 찾았나?”
“그렇습니다. 오히려 총수께서 발길을 놓은 적이 없다고 하시니 누군지 더 궁금해지는군요.”
“나와 같은 수준으로 추정하는 것도 의아하군.”
“기록을 비교해 본다면 앞서 언급한 화동파나 일화단이 다루었던 화염공(火焰功)의 수준은 사실 눈길을 끄는 정도이지 무림 주류를 위협할만한 수준은 아니었습니다만, 화아문은 달랐습니다. 무림에 알려지지 않았음에도 절정고수들을 보유한 문파임엔 틀림없었습니다. 저희가 발견했을 땐 시신만 즐비하고 다른 것들은 먼지만 쌓인 채 그대로 남아 있어서 많은 걸 알게 됐었지요. 본방은 화아문에서 여러 기물이나 무공비급, 연구자료 등을 입수하였는데 직접 본 걸 기술하진 못하였어도 비급의 내용으로 추정할 때의 위력은 지금 염황종에 대한 기록과 가까운 부분이 있습니다. 또 발견한 기물들 가운데는 광증을 일으키는 단약도 있었고, 연구용으로 기록된 사료(史料)들엔 지금 보면 마교가 다룰 법한 내용도 있었습니다. 아마 지금의 염황종과 매우 가까운 수준이었다는 것이겠지요.”
강정학은 염황신마와 격돌했을 때를 떠올렸다.
그들의 격돌이 발생시킨 여파를 감당하기 어려웠으니 근처에서 싸우는 다른 사람들의 모습을 보지 못했었다. 그러나 검림 제자들의 얘기를 들어보면 염황마종의 개개인이 결코 검림 검객들에 뒤지지 않은 무공을 소유하고 있다 하였다.
“그런 문파의 고수들이 모두 단 일검에 명을 달리하였으니 저희로서는 당연히 천하제일검 정도의 실력은 돼야 가능한 일이라고 생각하고 기록한 것입니다만, 어쨌든 간 일이 없다고 하시니 더 궁금해지긴 합니다.”
송탁의 말에 강정학도 동의하는지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개방이 그의 실력을 어느 정도로 인식하고 있을지는 모를 일이나 그만한 평가를 한 데는 분명 이유가 있을 터이기에 그 존재가 궁금해졌다. 그러나 그 정체를 안다면 강정학도 고개를 절로 끄덕일 수밖에 없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