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8화 – 제38장. 반복되는 불쾌한 기분 (6)
공승지가 하산하는 모습을 물끄러미 보던 환도신마 선우도가 지운천을 돌아보며 입을 열었다.
“그런데 그 천가의 여식에 대한 건 진심입니까? 존자께서 아직 혼인하지 않으셨으니 이 노우로서는 궁금하기도 합니다만.”
“하하하! 글쎄. 사랑이라는 나태한 감정엔 별 관심이 없지만, 신붓감으로 그만한 여자도 없다는 생각은 들어서 말이야. 대단한 미모에 걸맞은 무공까지, 취하기에 앙칼진 맛이 있을 것 같군.”
“허허, 앙칼지다고 얘기하기엔 너무 매운맛일 것 같아 걱정됩니다.”
“그럴 수도 있겠군. 하하하하!”
지운천은 18세가 되었을 때, 자신이 무엇이든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지위가 있다는 걸 깨달았다. 물론 부친이 그에게 요구하는 것들은 달성해내기 어려운 일들이었기에 결코 방심하거나 나태해질 수 없었다.
하지만, 이제는 모든 것을 뜻대로 할 힘과 권력을 손에 쥔 상황에서 천서은이란 여자는 충분히 흥미를 자극하는 일이었다.
‘하지만, 더 중요한 일이 있지.’
지운천은 생각을 정리하면서 곧 웃음을 그치고 비작을 쳐다보았다.
“비작. 안가로 가자. 지금 가장 중요한 것은 광혈종이 벌일 싸움의 결과를 손에 쥐는 것이니.”
“예.”
선우도와 비작을 쳐다보던 지운천의 시선은 동쪽을 향한 상태였다. 안가는 서쪽이었기에 선우도와 비작이 앞장서기 위해 지운천의 곁을 스쳐 지나갔고 지운천도 뒤따라 몸을 돌리고 있었다. 그런 그때 막 돌아서던 지운천이 멈칫했다. 동쪽부터 시작해서 머리 위까지 하늘을 둘러 바라보는 그의 표정이 조금씩 찌푸려지고 있었다.
‘크크크……! 감히 나를 상대로 시험을 해보겠다?’
동쪽에서부터 시작된 먹구름이 어느새 지운천의 머리 위를 지나고 있었다. 대단한 크기의 비구름이 바람에 떠밀려 서서히 서쪽으로 이동할 듯 보였는데, 하늘 전체를 덮은 그 크기를 미루어볼 때, 곧 사천 분지를 대부분 덮으면서 며칠 비가 계속 내릴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왜 그러십니까?”
“보아라. 왠지 하늘이 내게 항의하는 것 같지 않으냐? 불쾌한 기분이 반복되는 것은 내 기분 탓이냐?”
“개의치 마십시오. 승리는 신교의 것이 틀림없을 테니 말입니다.”
선우도의 말에 지운천이 고개를 끄덕였다. 하늘에서 시선을 거둔 지운천이 서쪽 풍광으로 고개를 돌렸다.
“가자.”
세 사람이 몸을 날려 능선을 타고 빠르게 내려갔다.
아침 햇살 한 점 느껴지지 않은 흐린 하늘은 그렇게 능운산 정상을 점점 그늘로 드리우고 있었다.
* * * *
한동안 강우량이 적었기에 그래도 장강의 물살은 생각보다 저항이 세지 않았다.
협곡 사이를 부는 바람은 거슬러 올라가는 함선에게 대부분 순풍이었기에 노꾼들도 평소보다 피로감을 적게 호소했다. 오히려 굴곡이 많은 장강의 물길에 대비해 속도를 제어하는데 더 신경을 써야만 했다.
“걱정했던 것보다 배가 아주 잘 나갑니다. 이 정도 속도면 하루는 더 단축할 수 있겠습니다.”
선봉선을 지휘하는 선장의 목소리엔 힘이 넘쳤다.
함선은 과거 군선으로 사용하던 낡은 것들이었다. 그래도 보수를 착실하게 해왔기 때문에 충분히 현역으로도 쓸 수 있었다. 선장 본인도 퇴역한 군선 선장 출신이었다. 그렇게 상선 용도로 배를 운항해오는 무료한 시간을 보내고 있다가 구룡문의 요청으로 3천여 명의 무림인들을 태우자 마치 수전(水戰)에 나서는 기분에 한껏 들떠 있었다.
금태하는 장강 바람을 정면으로 맞으면서 팔짱을 낀 채 협곡의 풍광을 바라보고 있었다.
구룡문의 전력을 분산했다가 다시 순차적으로 이릉에 집결시켜 함선을 띄운 지 하루가 지났다. 상류를 거슬러 올라가야 하는 데다가 대형선을 띄웠기 때문에 사흘 거리를 잡았는데 생각보다 전진에 탄력을 얻는 상황이었다.
서릉협을 감싸는 강줄기 좌우의 드높은 산자락은 울창한 산림에 둘러싸여 있었다. 만약 적들의 정찰조가 어딘가에 숨어 있다면 분명 이례적인 규모의 선단이 장강을 따라 운항하는 것에 의문을 품을 것이다. 또 이릉에 마교의 세작들이 있었다면 어느 순간 늘어난 대규모 인원들에 대해 깊이 파고들면서 그 정체가 구룡문이라는 것도 알아챘을 것이다.
무엇하나 간과하기 어렵겠지만, 이곳 이릉에서 백제성까지 아무리 상류를 거슬러 올라가는 일이라 한들 산을 넘는 시간보다 서너 배는 빨랐다. 산꼭대기에서 산꼭대기로 날아가 뛰어넘는 신선의 경지에 이른 자가 아니라면 세작 수준에서 빠르게 정보를 전달하기란 무척 어려운 일이었다.
적들이 미처 반응하기도 전에 적의 심부로 들이닥쳐 대장인 광혈신마의 목을 치고 적 전력을 와해하는 그런 상황이 어려운 일은 아닐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이렇게 상황이 일사천리로 진행되지만은 않을 거란 생각도 들었다.
불리한 일이 발생한다면 어떤 문제가 있을까?
그 생각을 곰곰이 거듭하던 금태하는 한껏 들뜬 기분에 취해 있던 선장의 어깨를 툭 쳤다. 그리고 함선이 같이 타고 있던 탁민효를 불렀다.
“예, 문주님.”
“함선의 운항 계획을 바꾸자. 선장은 무산협에 이르면 속도를 줄이고 함선을 강심이 아니라 이 부근의 북쪽 육지에 가능한 가까이 붙이도록 해라.”
“백제성까지 돌격하는 것 아니었습니까?”
선장이 아쉬운 표정으로 물었다. 무림인들의 대전쟁을 두 눈으로 관전할 기회였다. 뒤에서 이를 관전한다면 마치 군사를 지휘하는 기분을 만끽할 기회라 생각했기 때문에 아쉬움이 큰 것이다.
“새외 놈들 특성상 수전을 걸어올 것 같지는 않지만, 백제성의 지형을 보면 남쪽과 동쪽은 구당협이 벽처럼 우뚝 서 있고 바로 밑에는 장강이 흐르고 있네. 북으로는 백제산이 감싼 채 반도(半島)로 장강을 향해 툭 튀어나온 언덕에다 백제성을 세워놨으니 사실상 육로로는 북서쪽, 우리 반대편밖에 없어. 그러니 함선을 빠르게 전진시켜 성터 연안까지 가야 하는 것 외엔 선택지가 없다.”
구경도 호랑이굴 앞에서 하라는 소리였음에도 선장은 오히려 안도하는 표정을 지었다.
탁민효는 그보다 상세한 생각을 듣고 싶었다.
“그럼 왜 무산협입니까?”
“우리 뜻대로 습격이 이뤄지는 상황이더라도 장강을 감시하기에 가장 좋은 건 역시 구당협에 정찰조를 배치하는 것이다. 선장 말대로 하루 앞당길 속도로 가고 있다면 신속하게 구당협을 점령했을 때 습격의 효과가 배가 되겠지. 이를 위해서 함선이 무산협에서 속도를 줄여 완급을 조절하는 사이에 장강 북쪽의 능선과 강쪽을 바라보는 지점을 우리가 장악할 수 있어야 한다. 그렇다면 우리가 가고 있음을 이미 알고 있더라도 적시에 대비할 수 있는 여유는 차단할 수 있을 것이야.”
동에서 서로 흐르던 장강은 구당협에 이르렀을 때, 물길은 협곡을 끼고 북서쪽으로 향해 흘렀다. 구당협은 이 장강을 양옆으로 감싸고 있는 거대한 절벽산을 일컬음이니 실상 강 건너 서쪽 산자락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곳은 어찌합니까?”
“오면서 계속 생각해 봤는데 만약을 대비한 퇴로를 고려한다면 역시 장강을 확보하는 것이 최선이다. 이때는 노를 젓는 대로 지금보다 속도가 더 붙을 테니 제아무리 무림 고수라고 하더라도 장강 한가운데 뜬 함선 위를 쫓을 수는 없지. 그러니 당연히 구당협 양쪽 산 모두 장악해야지.”
“그 일을 저희에게 맡기려고 하십니까?”
후방을 지키는 역할을 추응계파가 맡기로 했으므로 탁민효의 질문에 금태하도 바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하지만, 역시 우리가 오고 있는 방향을 놈들 처지에서 생각해 본다면 굳이 매복이 목적이 아닐 경우 서쪽 산의 중요성은 낮아. 강 쪽을 바라보는 지점만 훑어도 충분할 것이다. 장강이 있으니 매복지로 적합하지 않지만, 북동쪽 산지는 조금만 위로 돌아가도 북서쪽 육로를 사용할 수 있으니 중요한 곳이야.”
“그렇다면 전력을 좀 더 붙여 주십시오. 차라리 힘을 주어 북쪽 산지를 일거에 점거해 버리면 말씀하신 북서쪽 육로도 이용할 수 있습니다. 함선을 붙여 단번에 성내로 침투해서 소란을 일으키면 그 육로를 지키던 적들의 전력도 성내로 이동할 테고 그러면 저희가 포위를 구축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괜찮은 생각이군. 사열이의 백호계파와 장 계수의 창월계파를 데려가게.”
“장 계수의 창월계파만 해도 충분하지 않겠습니까?”
“이곳을 놈들이 열어두고 있을지 혹은 닫아두고 있을지는 모 아니면 도. 아까도 말했듯이 중요한 지대이므로 확실히 할 필요가 있어. 만약 적들이 대규모로 밀집해있어서 치열한 싸움이 되거나 광혈신마가 있기라도 하다면 그땐 내가 직접 올라가서 정리할 것이다.”
“크흠, 알겠습니다.”
“반대로 비어 있다면 다음 산자락까지 넘어가 빠르게 자리를 잡고 함선이 백제성에 도착하는 걸 기다렸다가 신속하게 입구를 쳐야 할 것이야. 물론 자네 쪽은 여길 지키고 있어야 하고.”
“지시를 따르겠습니다.”
탁민효는 금태하의 작전을 제대로 이해하면서 그의 세심한 지적들을 듣고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아무리 무림의 싸움이라 하나 가용 되는 인원이 수천에 이른다면 이만한 작전지침은 필수적일 수밖에 없었다.
“문주님, 완전히 장군님 같으시군요.”
선장의 감탄하는 소리에도 금태하는 표정에 미동도 없었다. 그는 침착하게 지형도를 계속해서 바라볼 뿐이었다.
잠시 후, 탁민효는 곧장 작은 조각배를 띄웠다. 그는 구룡문 안에서도 경공이라면 금태하를 제외하고 가장 뛰어났기에 조각배 한 척만으로도 장강을 따라 나아가는 함선들 사이사이를 오고 가면서 서신을 전달했다.
대부분은 군말하지 않고 서신에 대한 설명을 듣고는 고개를 끄덕였는데, 유종화만큼은 그에게 묻는 말들이 많아서 조각배로 돌아가기까지 다른 함선들보다 시간이 더 걸렸다.
“이보게 탁 계수. 문주님께서 평소보다 신중하신 거 같은데, 곁에서 지켜보기에도 그런 것 같소이까?”
“구룡문의 전력을 지휘하는 만큼 더 신중을 기하는 것이지요.”
“흑사왕의 패도는 호북 무림의 전설인데 이런 건 너무 소극적이지 않냐 하는 것이오. 우리가 응성에서 출발할 때만 하더라도 광혈종을 당장이라도 씹어 먹어 버릴 듯한 기세였는데 예까지 와서는 조심조심하는 모양새가 기세를 꺾는 일이 되지 않을까 우려스럽소이다.”
탁민효는 유종화의 말을 들으면서 그가 마교의 끄나풀과 만났다는 사실이 떠올랐다. 그래서 그가 하는 걱정 어린 말들이 기실 입바른 소리로밖에 들리지 않았다.
“양염계파는 구룡문 안에서도 그 무력이 수위에 꼽히는데, 유 계수님께서 무용을 뽐내주신다면 어떤 난관도 타개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탁민효가 예의를 갖춰 대답하지만, 그것도 입바른 소리라는 걸 본인도 그렇고 유종화도 잘 알고 있었다. 서로에게 미소를 보이면서도 눈에 비치는 저 미소가 가식적이라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정말 오랜만에 흑사왕의 무용을 견식할 기회가 마련되었는데 어쭙잖은 실력으로 근처에서 어슬렁댈 수는 없는 일이지요. 광혈신마를 상대로 마음껏 활약하실 수 있도록 내 공간을 충분히 열어드릴 것이오.”
“의외로군요. 그래도 양염계파가 광혈종에게 처참하게 당했기에 계수께서는 복수심에 불타고 있을 줄 알았는데 의외로 별 관심이 없으신 모양입니다. 3년 전 안타까운 제자들의 죽음을 어찌 보상하려고 그러십니까?”
탁민효의 물음에 유종화의 표정이 살짝 굳어졌다. 그는 바로 반박하려다 자신에게 쏟아지는 일부 제자들의 따가운 시선이 느껴졌다. 그의 속셈이 구룡문주직을 움켜쥐는 데 있다는 소문에 일부 제자들은 반신반의하고 있었다.
계파의 제자로서 계수령을 따르는 것은 당연하지만, 문주직에 대한 도전 행위는 분명 판단기준이 달라야 했기 때문이었다. 특히 금태하가 사패련의 인적 자원을 이용해 각 계파에 충 가입시킨 중원인들은 외지인 성격이 여전히 남아 있기에 이들로부터 여론이 조성되어 퍼진다면 그가 세운 계획이 물거품 될 우려가 있었다.
유종화가 껄껄 웃음을 터뜨렸다.
“허허허, 탁 계수는 이 유종화를 뭐로 보고. 광혈신마와 광혈종은 이 유종화의 분노로 점철된 염무신공(炎舞神功)의 화염에 타죽을 것이오. 이 유모의 화염공이 결코 염황신마 못지않다는 것을 보여 줄 것이니 두고 보시오.”
양염계파엔 두 가지 대표적인 무공이 있었는데 양화기공(養火氣功)은 일반 제자들에게 가르치는 것으로 각자의 권장술이나 도검법에 화기를 입히는 양강의 기공이었다. 계파의 장로급 이상과 계수의 적전제자는 이 염무신공을 익히는데 경지에 이르면 불꽃으로 강기를 형성할 수 있게 되니 실상 무공의 질적 수준으로 따지면 구룡문 가운데서도 첫손에 꼽힐 만했다.
실제로 양염계파는 초대 구룡문주를 배출한 계파이기도 했다. 그런데도 여태 빛을 보지 못한 것은 그만큼 금태하의 그늘이 거대했다는 의미였다.
유정화가 패기롭게 외치니 그에게 쏟아지던 일부 불신의 눈빛들이 줄어드는 게 느껴졌다. 그러나 그를 쳐다보는 탁민효의 눈빛은 결코 호의적이지 않았다.
“부디 유 계수님의 염무신공의 진가를 볼 수 있길 고대하는 이 탁모의 진심을 알아주십시오.”
탁민효는 유종화에게 예의를 갖춰 인사를 고하고 자신이 타고 온 조각배로 건너가 다음 함선으로 이동했다.
그 뒷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유종화가 속으로 콧방귀를 뀌었다.
‘흥, 두고 보라지. 이 유종화가 구룡문의 잃어버린 규율을 다시 바로 세울 테니까 말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