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7화 – 제38장. 반복되는 불쾌한 기분 (5)
지운천은 피식 웃음을 흘렸다.
알 거 다 알면서도 그에게 이런 말을 내뱉는 건 그를 도발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미친 척 마음을 먹으면 그를 도발한 대가로 이곳을 폐허로 만들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는 할 수 없었다.
한 일가를 몰살시키는 그에게 아무것도 아니었지만, 어머니의 가문이라면 얘기는 달랐다. 이곳은 그의 인간성을 작은 파편이나마 유지해 주는 공간이었다. 이 가문의 사람들이 그에게 보내는 시선에 어떤 사랑도 담겨 있지 않더라도 그는 이곳을 지킬 필요가 있었다.
“외숙, 안타깝게도 신교는 그리 쉽게 무너지지 않습니다. 오히려 우리의 마도대의가 천하로 뻗어 나가 강호의 정의가 될 것입니다. 외숙은 아버지를 증오하시죠? 전 이해합니다. 이해하고 말고요. 저도 어머니를 잃은 이유가 아버지에게 있다는 걸 받아들였으니까요. 그러니 제가 여기에 이렇듯 찾아오는 것입니다. 하지만, 마도대의의 꿈은 저도 다르지 않습니다. 신교가 강호의 정의가 될 것이고, 신교가 강호를 지배하게 될 것입니다. 그 머지않은 미래에 하가장은 더 높은 곳에서 만인을 내려다볼 수 있는 위치에 세울 것입니다. 외숙께서, 외조부께서 거부하셔도 말이지요.”
“……몹쓸 것. 차라리 황제가 되겠다고 하지 그러냐?”
“제 취향은 아니나 그것도 나쁘진 않지요.”
하상정의 눈빛이 두려움에 가늘게 떨렸다.
‘천하의 역적이 하가장에서 태어났을 줄이야 어찌 알았겠는가?’
정말로 세상을 뒤집어엎을 악마가 하씨의 피를 이어 태어난 게 아닐까 하는 이 받아들일 수 없는 잘못된 현실이 너무 두려웠다. 비극에 비극이 겹쳐 하씨 일가의 숨통을 옥죄는 것만 같았다.
지운천은 일어나 방을 나가기 위해 돌아섰다. 그는 잠깐 멈춰서더니 고개를 돌려 하상정을 흘끔 쳐다보았다.
“너무 걱정하진 마십시오. 이 조카가 천하를 뒤엎을 때 뒤엎더라도 외숙께서 바랄만한 것 하나는 꼭 이뤄드리겠습니다. 그 정도의 선물이라면 분명 반기실 겁니다. 외숙도, 외조부도, 제 어머니도.”
달그락!
손에서 놓친 찻잔이 탁자와 부딪쳐 요란하게 흔들렸다. 감당하기 어려웠던 하상정이 고개를 푹 떨군 채 주먹 쥔 두 손을 이마로 누르며 부들부들 떨었다.
그 모습을 한심하게 쳐다보던 지운천은 문을 열고 방을 나섰다.
전각을 나와보니 때마침 부엌에 하상정의 부인과 자식들이 보였다. 아들 하나에 딸 둘이었는데 그들은 지운천과 눈이 마주치자 조심스럽게 고개 숙여 인사했다.
“그새 많이 컸구나. 도훈(度訓)이와 선지(善志)는 성년이 되었지, 아마?”
“예”
하도훈은 22세, 하선지는 21세였다. 사내도 외모가 괜찮았지만, 하선지의 미모가 특히 빼어났는데 가만히 바라보고 있으니 어쩐지 어머니의 모습이 겹쳐져 보였다.
그의 눈길이 부담스러웠던 하선지는 고개를 살짝 틀어 시선을 피했다. 그리고 황 부인은 뒤에서 딸을 보호하듯 끌어안으면서 얼굴을 쓰다듬는 척 눈을 가렸다. 그리고 다른 한 손으로 막내딸 하선유(何善柔)도 떨어질까 두려워 조심스럽게 잡아끌었다.
“외숙모, 선유도 많이 컸군요. 올해 몇 살이죠?”
“열여섯이에요.”
하선유가 선뜻 손을 들며 대답했다. 황 부인은 어색하게 미소를 지을 뿐 더 대답하지 않았다.
아직 어린 하선유는 지운천을 크게 불편하지 않았지만, 그 오빠와 누나는 터울이 있는 만큼 자신들의 사촌오빠가 어떤 존재인지 인지하고 있었기에 그 눈빛 속에 두려워하는 기색이 보였다.
“훗, 전 사랑채로 넘어가 보겠습니다. 내일 아침 일찍 떠날 테니 그렇게 불편한 티 안 내셔도 됩니다, 외숙모.”
“죄, 죄송합니다, 도련님.”
지운천이 발걸음을 돌리며 거리가 멀어지자 황 부인은 서둘러 자식들을 데리고 하상정이 있는 전각 안으로 쏙 들어가 버렸다.
사랑채에서 그가 쓰는 방은 언제나 그를 위해 비워두고 있었는데 때마침 하인이 방문을 열고 나왔다가 지운천을 보고 꾸벅 허리를 숙였다.
“청소를 끝냈습니다.”
“고생했네. 붓과 벼루 좀 가져다주겠나?”
“혹시 쓰실까 하여 재작년에 갖다 놓았습니다. 탁자 서랍장에 있으니 살펴보십시오.”
“호오, 그래? 그래도 조카라고 배려는 해주는구나. 알았다.”
어차피 하인들에겐 지운천도 똑같은 높은 사람에 불과하니 하던 대로 하는 것뿐이지만, 지운천에겐 그것도 새롭게 느껴졌다.
“도련님, 오셨습니까?”
하인이 떠나갈 때, 마침 가신 공승지와 전양(全陽)이 처소에서 나와 지운천에게 인사를 건넸다. 둘 다 무공을 익히고 있었기 때문에 마교 소속인 지운천을 두려워했는데 그건 하씨 가문의 사람들이 갖는 두려움과는 조금 성질이 달랐다.
감히 범접할 수 없는 강자에 대한 순수한 두려움과 마교라는 이름에 대한 불안감이었다.
공승지는 황 부인이 하상정에게 시집올 때 함께 따라온 호위무사로 하가장의 바깥 일에 대한 대소사를 담당했다. 그리고 전양은 60대 이상의 나이 지긋한 노인으로 하가장 안의 일을 전담해 처리하는 집사였다. 둘 다 강호의 명성에는 뜻을 접은 상황이라 폐쇄적으로 되어버린 하가장에서의 삶에 나름대로 만족하는 중이었지만, 유일하게 꺼리는 게 있다면 가끔씩 오는 지운천의 존재였다.
지운천은 인사를 대충 받아넘기면서 무신경하게 자신의 방으로 향했다. 그의 태도가 새삼스럽지 않았기에 두 사람은 자신들이 가고자 했던 방향으로 몸을 틀었다.
“아, 공 집사.”
“예?”
갑자기 지운천이 부르자 공승지는 조금 놀란 채 대답했다.
“내 누군가에게 전달할 서신이 있는데 말이야. 내일쯤 공 집사가 좀 전해줬으면 하는데 들어줄 수 있겠나?”
“물론입니다.”
“좋아, 내일 아침에 여기서 기다리게.”
“예, 도련님.”
지운천이 고개를 끄덕이곤 그대로 방 안으로 들어가자 공승지와 전양이 서로의 얼굴을 바라보았는데 두 사람 모두 얼굴에 당황한 표정이 묻어나와 있었다. 지운천이 하가장에 오는 일 자체가 뜸하기도 하지만, 이곳에 와서 그들에게 뭔가 일을 지시하거나 하는 일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공승지는 소곤거리는 작은 목소리라도 지운천의 예민한 청각이라면 분명 들을 수 있다는 걸 알고 있었기 때문에 입 모양만 표시하면서 인상을 찌푸렸다.
‘마교?’
전양은 조심스럽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눈을 감은 채 고개를 저으며 어깨를 으쓱거렸다.
알 도리가 없다는 뜻이었다.
다음 날, 공승지는 지운천의 분부대로 그의 방 앞에서 그를 기다렸다. 이윽고 지운천이 나오자 꾸벅 인사를 올렸다.
“좋아, 가지. 따라오게.”
공승지는 지운천의 뒤를 쫓아 하가장 밖으로 나갔다. 그들이 나가는 모습을 하상정이 보았는데 공승지를 데리고 나가는 모습에 의아하면서도 작은 불안감을 품었다. 그들이 나가자 때마침 나오는 전양을 보고 그를 불렀다.
“예, 장주님.”
“지운천이 왜 공 집사를 데려가는지 아는가?”
“서신을 전달하는 일을 시켰습니다.”
“사천에 아는 연고는 없을 텐데, 마교의 일에 공 집사를 끌어들이는 건가…….”
“그럴 수도 있겠지만, 또 함부로 다른 마교도의 신원을 노출하는 일을 만들까 싶기도 합니다.”
“흐음, 전 집사. 오랜만에 바람 좀 쐬러 나갔다 오겠나? 지금 강호에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한 번 알아보게.”
“알겠습니다. 마침 창고도 비워져 가고 있으니 하인들 몇 끌고 다녀오겠습니다.”
“그렇게 하게.”
하상정과 전양의 불안한 시선을 아무것도 모른 채 등 뒤로 받아내던 공승지는 지운천을 따라서 하가장 밖으로 나와 산을 오르기 시작했다. 걸어 올라가는 오솔길의 위치와 방향을 가늠해보던 그는 올라가는 곳이 능운산 정상에 모신 하상정의 누이이자 지운천의 어머니인 하지연의 묘라는 것을 깨닫고 조금 당황하면서도 긴장하기 시작했다.
정상엔 이미 환도신마 선우도와 비작이 와서 기다리고 있었는데 공승지는 그들과 눈이 마주치자마자 공포감에 휩싸여 손이 차갑게 식으면서 덜덜 떨렸다. 그도 강호의 경험이 있었기 때문에 살기라는 게 어떤 건지 나름대로 잘 알고 있었지만, 그가 느끼는 이 감정은 좀 더 근원적인 공포에 기인한 것이었다.
“그렇게 노골적으로 마기를 풍기고 있으면 당연히 겁에 질리지.”
“송구합니다.”
공승지는 지운천의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그를 위축시키던 무형의 기운이 눈에 띄게 사라진 걸 느꼈다. 완전히 감춰진 것은 아니었지만, 생각할 조금의 여유 정도는 생길 정도가 되었다.
‘이런 게 마기인가?’
그런 측면에서 지운천에게선 어떤 탁월한 존재감이나 위압감 등으로 유추할 수 있는 느낌은 그가 가진 마교에서의 지위를 고려해봐도 조금 특이한 것이었다. 어쩌면 하가장이 외가이기 때문에 자신의 기운을 잘 갈무리하고 있어서가 아니겠냐는 추측 정도만 할 뿐이었다.
물론 마기의 속성은 각각 마종마다 특징이 있었지만, 공승지가 그걸 구분할만한 마교에 대한 경험은 없었다.
“그들은 어디에 있지?”
“예측하신 대로 지금쯤 면주에 도착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비작이 공승지를 흘끔 보았다. 그의 시선이 무슨 의미인지 지운천은 알고 있었다.
“괜찮다. 어차피 앞으로 일주일 안에 모든 사태가 정리될 것인데. 얘기해라.”
비작이 고개를 끄덕이며 입을 열었다.
“알아본 바로 면주에 지금 당문 소가주가 있어서 사혈마종에서 습격을 한다는 정보가 있습니다. 그래서 아무래도 그들과 엮일 가능성이 매우 큽니다.”
지운천의 인상이 찌푸려졌다.
“남만(南蠻)의 멍청한 족속들. 요 며칠은 자중하라 지침을 내렸건만.”
“녹주팔비 중 둘이 나섰다는데 독의 특성상 불리함을 뒤집을 수도 있으니 그들 손에 당할 수도 있지 않겠습니까?”
“그럴 확률이 없다고 할 순 없어도 별 효과를 거두지 못할 것이다. 오히려 목표인 당문 소가주나 처리할 수 있을지도 의문이지.”
비작은 지운천이 진도건 일행의 실력을 자신보다 낮춰보긴 했지만, 그래도 본심은 상당한 실력이라고 평가한다는 걸 깨달았다.
“다음 목적지는 어디일 것 같나?”
“당문 일행과 합류하여 성도성으로 향한다면 아마 높은 확률로 광한군을 지날 것입니다.”
“좋아, 공 집사.”
“예.”
지운천은 품속에서 죽찰을 하나 꺼내 공승지에게 건네주었다.
“지금 바로 출발하여 면주에서 광한군으로 가는 길목에서 당문과 동행하는 무리를 기다리게. 시간상으로는 내일 정오께는 도착해서 기다리는 게 좋을 것이야. 기다렸다가 그 죽찰을 천서은이란 여인에게 전달해주게.”
공승지는 서신을 전달하는 대상이 당문과 동행하는 사람들이라는 점에서 무척 의아했다. 그의 얄팍한 기억에 당문은 마교와 적대적 관계였기 때문이었다.
“실례가 안 된다면 당문과 동행한다는 여자가 도련님께 무슨 관계가 있는지 여쭤봐도 되겠습니까?”
“감히.”
공승지의 물음이 끝나자마자 비작이 낮게 으르렁거렸다. 공승지가 본능적으로 어깨를 움츠렸지만, 지운천은 그런 비작을 말리면서 공승지의 어깨를 두드려주었다.
“괜찮아. 내가 자네에게 심부름을 시키는 건 자네가 신교의 교도가 아니라서 특별한 의심을 사지 않을 거로 생각하기 때문이네. 그리고 천 소저는 무공도 강하지만, 대단히 아름다운 여인이야. 장차 내 신부로 맞이하고 싶은 사람일세. 그 죽찰은 내가 그녀에게 쓰는 일종의 연서랄까? 그러니 자네가 부디 예의를 갖춰서 꼭 그녀에게 전달해줬으면 좋겠군.”
“아아, 그렇다면 말씀하신 대로 꼭 이 죽찰을 그분께 전달해드리도록 하겠습니다.”
“그래. 부탁함세. 지금 출발해 주게.”
지운천이 신부로 삼고 싶은 여인에게 보내는 연서라고 하니 공승지는 묘한 느낌을 받았다.
잔악무도하다 알려진 마교의 일원이라는 점에서 공포감이 드는 존재라는 건 틀림없었다. 그러나 그가 모시는 하가장의 핏줄인 탓에 도련님이라고 부르는 지운천이 생각하는 사랑이라는 감정은 여느 평범한 무부들과 다를 바 없는 거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드는 것이다.
공승지는 바로 경공을 펼쳐 능운산을 내려갔다. 잠깐 하가장에 들러 이 일을 장주에게 보고할까 생각도 했지만, 지운천이 따로 그를 불러 주문한 것을 보면 그건 원하는 일이 아닐 거라는 생각에 바로 머릿속에서 지웠다.
오히려 문득 천서은이란 여자를 보고 나서 든 느낌을 이후 하상정에게 어떻게 보고할지에 대한 생각이 들 따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