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6화 - 제38장. 반복되는 불쾌한 기분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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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씨 가문은 본래 무림에 속하지 않은 평범한 가문이었다. 그래도 파서(巴西) 근처에서는 특이한 지점에서 유명세가 조금 있었는데 하씨 일족이 딸을 낳을 때 그 미모가 대단히 빼어나다는 소문 때문이었다.
딸만 나으면 유난히 도드라지는 하얀 피부와 별빛을 담은 눈빛, 옥구슬이 굴러가는 듯한 목소리가 대단히 매력적이어서 딸만 일단 태어나면 매파가 접근하거나 혼약을 제안하는 일들도 있을 정도였다.
당연히 의도한 일이 아니었지만, 그렇게 예쁜 딸을 낳게 되면 부호(富豪)나 고관대작(高官大爵)의 가문에 시집을 보내곤 하면서 나름대로 재물도 축적해오곤 했었다.
하지만, 생각이 있는 아버지라면 딸이 마치 물건처럼 팔려 나가는 걸 원치 않는 법이다. 또 그렇게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만큼 어여쁜 딸이 안전하게 자라길 바라는 마음은 당연한 일이었다.
하씨 가문은 그래서 산속에 거처를 두길 좋아했고 또 그 재력을 활용하여 강호 무림에 다리를 놓아 무공비급을 사고 스승을 구하기도 했다. 그들은 그렇게 점차 강호의 무가로서 모습을 갖춰나갔었다.
현재 하씨 일가보다 세 세대 이상 앞선 시기, 그러니까 약 100여 년 전 사천에서 국가를 이뤘던 후촉(後蜀)이 송에 멸망할 무렵에 하방자(何芳子)라는 여인이 있었다. 그 시기 하씨 일가의 가주 하선(何宣)은 후촉에서 벼슬을 하다 송의 병사들에게 죽었는데, 그때 일가가 난리 통을 겪으면서 만현(萬顯)의 대부호 임복(林宓)에게 16세의 나이로 시집을 가게 되었다. 그리고 그때 임복의 나이는 51세였다.
하방자는 임복의 다섯 번째 첩이었지만, 나이도 어리고 미모도 대단히 빼어나 사랑을 독차지하였다. 하지만, 하방자는 자신의 이런 처지를 대단히 슬피 여겼다. 임복이 개봉에서 관직을 얻고자 잠시 자리를 비운다는 소식을 듣자 아직 젊고 아름다운 하방자는 새로운 낭군을 만나 도망가고 싶은 꿈을 그렸다.
임복은 자신의 첩들이 아름다우므로 집사들에게 집안일을 배정하면서도 혹시나 하는 불안감에 휩싸였다. 그는 청풍관(淸風觀)이라는 도관의 도사 상을진인(上乙眞人)을 통해 수궁사(守宮砂)를 구하여 처첩의 팔에 붉은 반점을 찍었다. 수궁사는 남성과 정사를 치르면 사라지므로 이것을 통해 자신이 없는 동안 처첩이 정조를 잘 지켰는지 돌아와서 확인하려 한 것이다.
하방자는 첩으로서 정절을 지키는 게 당연한 도리라는 걸 알고 있었지만, 이런 것으로 구속당하는 게 매우 싫어서 거절했으나 당연히 임복은 말을 듣지 않았다.
다른 처첩은 수궁사가 지워질까 두려워 한동안 제대로 씻지도 않았으나 하방자는 수궁사를 신경 쓰지 않고 평소대로 목욕하면서 결국 얼마 지나지 않아 수궁사는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그리고 이어진 것은 그녀를 시샘한 다른 처첩들의 모욕이었다. 하방자는 어느새 불결한 여자가 되어 있었다.
반년가량 세월이 지나 임복은 마침내 개봉에서 관직을 받게 되어서 사천에 남아 있던 처첩을 모두 데려왔다. 그리고 그날 밤에 등불을 켜고 처첩들에게 찍은 수궁사를 검사하였다. 하방자의 팔엔 수궁사가 없었고 임복은 화가 나 그녀의 따귀를 때렸다. 그리고 연유를 물었으나 하방자는 도리에 어긋난 일을 하지 않았기에 그의 의심을 부인했다.
임복은 그녀를 믿지 않았고 관졸들을 시켜 고문하고 채찍질을 퍼부었다. 억울함이 극에 달한 하방자는 결백의 유서를 남기고 목을 매 자살했다.
만현에서 이런 일이 벌어졌다면 돈 몇 푼으로 죄를 탕감했을지도 몰랐으나 개봉은 당시 송의 왕도였다. 즉시 조사가 이뤄졌고 하방자의 결백이 입증되면서 그 억울함을 풀어주었다. 사사로이 형을 집행한 임복은 관직을 박탈당했을 뿐만 아니라 끝내 곤장을 맞아 죽었다.
수궁사를 구해준 상을진인은 도가에 죄를 지었음을 깨닫고 호수에 몸을 던져 죽었고 만현에는 이 소식이 전해지면서 하방자를 기리는 정녀묘(貞女墓)가 세워졌는데, 이를 달리 수궁묘(守宮墓)라고 부르기도 했다.
일족의 딸들이 받는 취급 때문에 마음을 졸여왔던 하씨 가문은 세상의 부정함을 한탄하며 파서를 떠나 더 남쪽으로 내려왔다가 능운산에 이르렀다. 힘없는 여인에 대한 비인간적인 통제와 차별은 하가장에 있어서 유난히 큰 문제로 느껴졌고 그런 일을 대단히 경멸했다.
그렇기에 하씨의 딸을 시집보내는 데 있어서 하씨 남자들은 언제나 조심하고 또 주의를 기울이면서 상대 남자의 성정을 철저하게 따졌다. 그래서 사위를 들이게 된다면 반드시 일처(一妻)만 거두도록 백 번 강조하면서 시집을 보냈다.
그런 일가의 풍토를 이어 받아가면서 몇 세대를 평안하게 지냈던 하가장이었다. 그러나 하씨 일족은 피하고 싶은 그런 비극을 다시 한번 마주하고 말았다. 그것도 더욱 참담한 모습으로 그들에게 돌아왔다. 그래서 그들은 능운산 일대에 어떤 사람의 접근도 허락하지 않을 정도로 더욱 폐쇄적으로 변해 있었다.
그 비극의 당사자는 바로 하지연(何智燕)이란 이름의 여인이었다.
하가장.
문에 들어가기 전, 현판을 가만히 올려다보고 있으면 왼쪽 고정 못이 아래로 축 처져 있어서 살짝 비스듬히 기울었음을 볼 수 있었다. 저 모습을 볼 때마다 수리 좀 하라고 일렀는데도 몇 년 뒤에 다시 찾아와 보면 전혀 손을 데지 않아 결국 흙먼지만 쌓여 있었다.
외가의 장원 현판이 저렇게 처연하게 기울어 있는 모습이 마음에 들지 않기도 하지만, 지운천은 자신에게 저걸 고칠 권리가 없다는 걸 잘 알고 있었다. 그렇게 손을 대지 않는 것이 최소한으로 외가를 보호하고 존중하는 조처이면서 동시에 시위이기도 했다.
끼익.
가만히 현판을 바라보며 감상에 젖어있을 때, 문이 열리면서 반백의 주름 가득한 얼굴의 남자가 지운천 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그는 지운천의 위아래로 훑어보더니 그대로 돌아섰는데 문은 닫지 않았다.
“왔나…….”
맥없는 목소리로 흐릿하게 얘기하는 목소리를 지운천은 놓치지 않았다.
지운천은 이전보다 조금 더 구부정해진 등으로 걸어가고 있는 초로의 남자를 향해 고개를 숙였다.
“조카가 외숙께 인사 올립니다.”
초로인은 이곳 하가장의 장주 하상정(何想正), 지운천의 외숙부이며 지운천의 어머니 하지연의 남동생이었다.
하상정은 그의 인사를 듣긴 했는지 화답도 없이 발걸음을 계속 옮기면서 멀어져갔다. 그런 반응은 익숙했기에 지운천은 답을 기다리지 않고 안으로 들어갔다.
제법 넓은 마당엔 하인 하나가 비질을 하고 있었고 한쪽에 있는 평상에선 다른 하인이 말린 버섯을 살펴보다가 들어오는 지운천을 보고 일어나 꾸벅 인사했다.
평범한 백성들이었지만, 지운천의 얼굴 정도는 알고 있었다. 몇 년에 한 번씩 잊을만하면 찾아오는 장주의 조카라는 정도만 인지하고 있었는데, 와서도 왕래가 없으니 이렇게 인사로써 예의만 차리는 정도에 그쳤다.
하가장은 탁 트인 공간과 화단으로 이뤄진 외원이 있었고 담벼락과 중문을 넘으면 나오는 내원이 있었다. 내원은 중앙의 주방과 창고, 좌측엔 하씨 일가가 사는 가장 큰 전각이 있으며 우측엔 가신이나 빈객들이 머무는 작은 전각이 있었다. 하씨 일가가 사는 전각의 뒤쪽엔 쪽문을 통한 숲길이 나 있었는데 그곳을 따라 한동안 걷다 보면 측백나무 숲 안에 공간을 내어 지은 작은 가옥의 별채가 있었다.
“외조부께선 여전히 별채에 계십니까?”
“그래.”
“건강은 하십니까?”
“그렇다.”
이곳에 오면 언제나 똑같은 질문을 던졌고 똑같은 대답이 돌아왔다.
무신경하고 냉담한 대답이었다.
내원으로 들어서던 하상정은 때마침 지나던 하인을 붙잡았다.
“사랑채에 방 하나 청소해 두어라.”
“예, 장주어른.”
하인은 허리를 꾸벅 숙였고 지운천을 보고서도 인사를 올렸다. 그리고 우측의 사랑채로 터덜터덜 걸어갔다.
지운천은 하상정을 따라 그의 방 안에 있는 집무실에 들어갔다.
한 탁자를 두고 마주 앉아서 서로를 보는데, 그를 바라보는 하상정의 눈빛엔 일말의 반가움도 없이 부담감만이 남아 흐르고 있었다.
“그래도 제가 오는 걸 어찌 알고 문을 열어 주셨습니까?”
지운천이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물어보았다.
“먼 산을 보다 누이의 묘가 있는 산 정상 방향에서 숲 위를 달리는 인형을 보았네. 자네가 왔음을 깨달았지. 기척도 숨기지 않고 문 앞에 서 있으니 나 같이 별 볼 일 없는 무공을 갖춘 자라도 느낄 수 있겠더군. 차 한잔하겠나?”
“좋습니다.”
하상정은 탁자 위에 놓인 다반 위에 새 잔을 꺼내고 찻주전자의 찻물을 따랐다.
평범한 녹차였는데 찻물이 이미 차갑게 식어 김이 전혀 나지 않았다. 날이 덥고 습해지고 있으니 냉차처럼 마시는 것이었다.
지운천은 찻잔을 입술에 대고 가볍게 기울이면서 하상정의 표정을 살폈다. 그리고 찻잔을 내려놓으면서 방 주변을 둘러보았다. 꽤 깔끔하게 정리되어 있지만, 책장이나 장식장 등에 먼지가 쌓인 게 보이니 무기력한 기분이 저절로 전해지는 듯했다.
“이 조카가 오는 건 여전히 달갑지 않으시지요?”
“달가울 건 또 뭐고, 달갑지 않을 건 또 뭔가? 조카가 왔으면 문을 열어주고 차도 내어주고 밥도 지어주고 하는 것이지. 그저 편히 쉬다 가주면 되네.”
“편히 쉬다라…….”
“얼마나 묵고 갈 텐가?”
“하룻밤 자고 내일 오전에 출발하려고 합니다.”
“그렇군. 주방에 일러두겠네.”
한동안 찻물만 홀짝홀짝 마시면서 침묵이 이어졌다.
어느 쪽도 서로에 대해서 궁금해하지 않았다. 형식적인 대화나마 무슨 말을 할지 생각해 보던 지운천이 한 번 더 입을 열었다.
“언제쯤 다시 강호에 문을 여실 생각입니까?”
그의 물음에 문 앞에서 처음 만났을 때 말고는 한 번도 눈을 마주치지 않던 하상정이 그를 흘끔 쳐다보았다.
“그런 건 왜 묻는가? 우리 같은 것들, 네겐 별 존재도 아닐 텐데.”
“그래도 제 외가인데, 이렇게 스스로 격리하듯 사는 모습이 안쓰러워서 그렇습니다. 어찌 신경이 안 쓰이겠습니까?”
“신경 쓸 것 없네.”
하가장은 분명 외가였지만, 지운천은 하가장에 대해서 사실 아는 게 많지 않았다. 이곳에서 나고 자랐음에도 그는 태어날 때부터 아버지의 손에 끌려 이곳을 떠날 때까지도 어떤 외척으로부터 살가운 눈빛을 받아보지 못했다. 언제나 애증이 함께 섞여 있었으니 사실 어린아이가 감당할 만한 환경이 아니었다. 그러나 그런데도 이따금 이곳을 찾는 것은 그들의 냉담한 시선의 이유가 무엇인지 어렴풋이나마 짐작하고 있다는 점과 어머니에 대한 향수가 남아 있다는 점에서 발길을 끊을 수 없는 것이다.
“가문을 일으키고 싶으시다면 어머니 묘비에 가서 제 이름을 적은 종이를 돌멩이 아래 깔아두십시오. 재화(財貨)든, 무공이든 필요한 걸 지원해드리겠습니다.”
지운천으로서도 평소 하지 않았을 말이었다. 언제 또다시 여길 찾을지 몰랐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그게 하상정의 심기를 건드린 모양이었다.
“……나는, 우리 하씨 가문은 마교가 망하길 바라네.”
“하하, 뜬금없이…….”
“알려 주지 않아도 자네가 가진 마교의 지위라는 걸 충분히 짐작하네만, 우린 마교가 망하길 바라기에 굳이 우리에게 뭘 해주려 할 필요 없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