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5화 - 제38장. 반복되는 불쾌한 기분 (3)
긴 장포 자락으로 머리를 덮은 채 허리를 깊이 숙이니 얼굴이 보이지 않았으나 아래로 산바람에 나풀거리는 긴 흰 수염과 백발의 끄트머리로 그의 나이가 무척 많다는 걸 알 수 있었다.
허리를 깊이 숙이는 선우도와는 다르게 옆의 남자는 허리를 꼿꼿이 세운 채 서 있었는데 지운천도 개의치 않는 듯 보였다. 오히려 눈에 띄는 건 그의 기괴한 모습이었다.
온몸에 해진 붕대를 칭칭 감은 채 너덜너덜한 옷자락을 그저 걸쳐놓은 듯 입고 있었는데 은근히 몸에서 풍겨 나오는 악취가 매우 불쾌했다. 그래도 이 존재가 무엇인지 알고 있던 지운천은 미리 기막을 펼쳐서 냄새 맡을 일이 없도록 해두고 있었다.
“그동안 중원 천하를 누비면서 고생이 많았어. 나의 노우(老友)의 얼굴 좀 보여 주겠나?”
“예.”
환도마종의 수장 환도신마 선우도.
그가 허리를 펴고는 두 손으로 머리를 덮은 장포 자락을 뒤로 넘겨 그 얼굴을 드러냈다. 치렁치렁했을 백발을 이십여 가닥으로 땋아 정리한 모습, 드러난 목 주변부터 보이는 기하학적인 문양의 문신은 목을 타고 올라가 얼굴까지 덮었다.
문신은 아주 얇고 군데군데 끊어지는 검붉은 선형이 얼굴의 굴곡들을 타고 그려졌는데 이목구비를 부각하는 모양 같기도 했다. 그래서 가까이서 보면 선우도의 얼굴이 보이지만, 조금 떨어져서 보거나 사시(斜視)로 볼 때면 악귀의 형상이 얼굴에 겹쳐 보이기도 했다. 그 선형의 문신 사이사이로는 중원에선 볼 수 없는 이형의 문자가 군데군데 새겨져 있기도 했다.
“오랜만에 봐서 다 그런지 몰라도 노우의 얼굴은 참 멋져. 내 몸에도 새기고 싶은데 말이야.”
지운천의 농담에 선우도가 웃음을 터뜨렸다.
“껄껄껄! 잘생긴 존안을 해쳐선 안 되지요. 게다가 아버님께서 불경하다고 제 목을 치실지도 모르는데 손을 대라 하셔도 댈 수 없다는 걸 잘 아시지 않습니까?”
“후후! 한 번 안아봅시다.”
지운천과 선우도가 얼싸 끌어안았다.
환도마종은 천마신교의 구주마종 가운데서 가장 마지막으로 그 세력의 존립을 구축하여 공유되는 서열도 낮은 편이었지만, 환도신마 선우도만큼은 그 인연이 대단히 오래되었다고 볼 수 있었다.
지운천은 꼭 끌어안았다가 떨어지고는 다시 그의 어깨를 두드리며 격려했다. 그리고 선우도의 옆에 있는 괴인을 흘끔 쳐다보았다.
“성공했군?”
“그렇습니다.”
선우도는 대답하면서 손을 살짝 들었다가 손바닥을 아래로 하면서 내렸다. 그러자 붕대괴인이 지운천을 향해 한쪽 무릎을 꿇으며 고개를 숙였다. 그 자연스러운 동작을 보면서 지운천은 앞서 비작에게 보고를 들었을 때 보다 더 만족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이내 붕대괴인을 바라보는 그의 얼굴에 비릿한 조소가 떠올랐다.
“서녕의 협사 청해악왕(靑海鰐王) 강모도(姜謀刀)의 신세가 우습게 되었군.”
“마도대의의 한 자락을 장식할 소모품으로 쓰임새를 받게 되었으니 영광스러운 일이지요.”
청해악왕 강모도는 한때 청해 서녕 지역의 패자로 군림하던 자였다. 그의 뛰어난 무공과 드높은 자존심은 천마신교의 가입 권유를 물리칠 정도였지만, 결국 무력에 굴복당하여 이렇게 온몸을 붕대로 감은 불쌍한 꼴로 이지를 잃은 채 선우도를 쫓아다니는 신세가 되고 말았다.
“좋아. 다른 보고도 받아보지.”
지운천의 말에 선우도는 비작을 보며 손짓했다. 대신하라는 의미였다.
비작은 환도신마 오방환마(五方幻魔) 중 한 사람으로서 남방환마(南方幻魔)에 해당했다.
오방환마의 특징은 각자 몸에 특수한 술진을 문신으로 새겨놓고 본인의 피를 공명시켜 놓음에 따라 의지만으로 환술을 불러일으킬 수 있는 능력자들이었다. 이들의 무공 자체는 보통의 절정고수 수준을 넘어서진 않지만, 각자 다른 환술의 도움을 받아 그 이상의 힘을 발휘하는 자들이었다. 또 환술적 지식이 뛰어나 큰 술진을 기획할 때, 그 임무의 책임 술사들을 맡곤 했다.
다른 사방환마가 저마다 임무를 맡아 움직일 때, 비작은 이곳 능운산을 거점으로 하여 사천 무림에서 진행할 계획에 참여한 조직들의 보고를 입수해왔었다.
주요한 사안은 이미 앞서 보고했고, 남은 것은 세 집단에 관한 것이었다.
“일단 저희가 원하는 대로 구룡문이 빨리 움직여 주고 있습니다. 장강을 타고 거슬러 올라가 백제성을 향하고 있으니 보고에 따르면 내일 새벽녘부터 격전이 벌어질 거로 추측하고 있습니다.”
“재밌는 싸움일 텐데 보지 못해 아쉽군. 상대는 천하오절 흑사왕 금태하가 아니냐?”
“저희의 변수로 광혈신마가 오기를 부리는 일이 없어야만 했는데, 다행히 백제성 기준으로 봉명적들이 차례로 울리면서 뻗어 나가는 걸 저희 환마인들이 포착했습니다. 작전을 무리 없이 소화할 것으로 보이니 저희가 승리할 수 있을 것입니다.”
“염황종은?”
“말씀드린 대로 봉명적이 남쪽으로 뻗어 나갔으니 염황종도 계획대로 움직였으리라 짐작하지만, 광혈종보다는 숫자가 적고 귀주의 산지 속이라 직접 파악된 움직임은 없습니다. 다만 염황종을 노리고 검림이 움직인 것을 저희가 포착했는데 염황신마가 봉명적을 듣고 바로 움직였다면 충분히 적들의 노림수를 벗어날 수 있을 것입니다.”
“백제성 쪽으로 부하들을 보내서 싸움이 끝난 뒤 염황신마와 염황종은 범정산으로 돌아가지 말고 청해로 빠져나가도록 확인해두어라. 강정학을 유인하는 좋은 미끼이니. 그것만으로도 창천맹의 중요 전력을 다시 분산시킬 수 있으니 말이야.”
“두 세력이 무너지면 중원 무림의 사파천하가 다시 정파천하로 기울겠군요.”
“물론 그렇다고 바로 내전을 바라진 못하겠지. 천무경이 건재하니까. 그래도 그의 존재가 가져오는 지배력이 흔들리고 이번 기회에 당문이 멸망하면 정사의 세력 구도는 위태로울 거야. 사혈주도 얘기해보라.”
“사혈신마는 예정대로 당혁수를 아미산 쪽을 주시할 수밖에 없도록 하고 있습니다.”
“성동격서의 계책은?”
“중상 때문에 운신이 힘든 맹호가 이 일을 맡아 사혈주 쪽에 가 있습니다.”
지운천이 선우도를 향해 고개를 휙 돌렸다. 그의 얼굴엔 못마땅한 표정이 떠올라 있었다.
“맹호 그놈은 갈아치워야 하지 않나?”
“운이 좋지 않았을 뿐이지 그의 능력을 탓할 것은 아니라고 봅니다. 다행히 회복의 여지가 충분해서 후에 존자를 위한 밑거름이 될 수 있으니 고정하십시오.”
“노우가 보기에 당혁수가 그 정도로 대단한가?”
“흐음, 존자께 송구하지만, 당혁수를 상대하려면 일월신마나 염황신마 두 사람 정도는 고려하셔야 하고 그마저도 승부를 장담하긴 힘들 것입니다.”
“혁무술을 패퇴시킨 소요자의 등장도 놀라운데 그보다 강한 정파의 화경 고수라니. 저력이 있다, 이건가? 천하오절과 비교하면?”
“저희가 가진 자료를 통해 비교해본다면 현재 칠성파의 칠성도존 구치상보다는 뛰어나다고 생각합니다.”
“그래? 흐음……, 일월교라도 들일 걸 그랬나? 사혈신마가 걱정되는군. 대술진이 역할을 못 할 가능성은 없나?”
“오히려 소요자였다면 불안요소였을 것입니다. 당혁수가 대단히 뛰어난 인물인 건 맞지만, 저희는 금태하보다 아래로 분석하고 있습니다.”
“금태하라면?”
“천하오절의 삼강은 신마 둘 이상을 붙이거나 존자께서 나서셔야 할 만큼 대단히 강하니 무용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하하하하! 하긴 나도 너무 노인들만 전장에 밀어 넣을 수는 없겠지.”
“살려 주십시오.”
지운천이 웃음을 터뜨리자 선우도도 그 앞에서 엄살을 피웠다.
비작은 감히 지운천 앞에서 너스레를 떨 수 있을 정도의 친분이 선우도에게 있다는 사실에 안도했다. 환도종의 위상이 사혈주를 제외하면 다른 구주마종에게 상대적으로 낮은 편이었지만, 선우도만큼은 일월신마 등과 동등한 신뢰를 받는 것이다.
“그래, 노우가 보기에 나라면 천무경이나 강정학을 상대로 어떨 것 같나?”
“감히 존자의 신위에 견줄 수나 있겠습니까?”
“일월신마도 천무경에게 진탕 당했었는데 그자라면 내 기대를 충족시켜 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어.”
“일월신마가 앞선 싸움들로 기력이 떨어진 상황이 아니었다면 그리 일방적이진 않았을 것입니다. 또 그동안 거절해오던 천산의 방문을 마쳤으니 이전과 비교할 수 없겠지요.”
짝!
“……아아! 그래, 그랬었군. 으하하하하! 내가 왜 눈치채지 못했을까? 하하하하하!”
갑자기 지운천이 손뼉을 세게 치면서 뭔가를 깨달았다는 표정을 하며 웃음을 터뜨렸다.
갑작스러운 반응에 선우도와 비작이 조금 놀란 눈으로 지운천을 보며 궁금증을 드러냈다. 지운천은 한 손으로 이마를 만지작거리면서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큭큭 거리며 흘러나오는 웃음 속엔 기뻐하는 기색과 더불어 그의 심기를 건드리는 불쾌함이 혼잡하게 담겨 나오고 있었다.
“큭큭큭……! 진도건, 진도건, 진도건……. 아아, 내가 왜 너의 이름을 듣고도 바로 떠올리지 못했을까? 어쩐지 붉은 눈동자가 몹시 거슬리더라니…….”
그의 말을 가만히 듣고 있던 선우도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혈마검귀 진도건 말씀입니까?”
지운천의 날카로운 눈빛이 선우도의 동공에 꽂히자 어깨가 움찔 떨렸다.
“뭐? ……혈마검귀?”
“불과 몇 달 전, 최근에 취합된 정보입니다. 화산에서 사망한 것으로 추정되던 진도건이 살아 있고 홍천환의 그것까지 온전히 이은 것으로 파악됐습니다. 흑풍대가 전멸하고 흑풍신마가 사망한 게 그의 소행이라는 정보를 간신히 입수했기에 즉각 보고서를 올렸습니다만…….”
지운천의 표정이 조금 심각해졌다. 잠시 머릿속에 몇몇 이름을 떠올리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군. 알았다.”
조금 전 다소 흥분한듯한 기분에서 차갑게 가라앉은 목소리를 듣는데 절로 섬찟한 기분이 들었다. 방금의 이야기들로 지운천에게 큰 불쾌함을 안겼다는 걸 직감할 수 있었다.
“예상치 못한 큰 변수가 사천에 기어 들어왔군. 천무경의 딸만 주목해서 눈에 거슬려도 크게 염려하지 않았는데 진도건이 그러하다면 얘기가 달라지지.”
“……그 둘이 사천에 있다는 말씀입니까?”
“그래, 웃기게도 한중성에서부터 이주까지 동행했다.”
“아셨다면 어째서 그 자리에서 죽이시지 않고……?”
“다들 내 상대가 아니었다. 가장 기백이 분명하게 느껴졌던 천서은이 무리의 최고수라 봤지만, 내 기준에선 한참 못 미쳤어. 그리고 무엇보다 미모가 아주 뛰어나서 내 신부로 삼고 싶었거든.”
천서은의 아름다운 용모를 떠올리자 다시 기분이 좋아졌는지 지운천의 입가에 옅은 미소가 떠올랐다.
“그러고 보니 본교의 종자도 있었는데……. 그래, 별 존재감이 없어서 신경 쓰지 않았는데 생각해 보니 흑풍마종이었구나. 큭큭큭! 이거 재밌군. 좋아! 재밌어. 어쨌든 이렇게 변수가 될만한 존재가 있다는 걸 깨달았으니 그렇다면 나도 교란작전을 펼쳐줘야겠지. 비작.”
“예.”
“촉도를 따라 면주 근방에서 움직이는 세작들이 있겠지?”
“그렇습니다.”
“아마 그 방향으로 녀석들이 움직일 것이다. 그 위치를 포착하여 내일까지 내게 가져와라.”
“명을 받들겠습니다.”
“좋아, 난 슬슬 외숙부를 만나러 가야겠다. 노우는 나와 함께 내일쯤 출발합시다.”
“조용히 그림자 아래서 명을 기다리겠습니다.”
지운천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터벅터벅 산 아래로 걸어 내려가기 시작했다. 비작도 경공을 펼치며 빠르게 선우도가 붕대괴인과 나타났던 방향으로 내달리면서 모습을 감췄다. 선우도는 존자가 숲으로 모습을 감출 때까지 공손한 태도를 유지하며 그 뒷모습을 가만히 지켜보고 있었다.
스무 걸음쯤 걸어갔을까? 갑자기 지운천이 한껏 불쾌해진 얼굴로 선우도를 쳐다보았다.
선우도는 혹시 그 감정이 자신 때문인가 싶어서 불안했는데, 이어 들려온 지운천의 말은 무척 뜻밖의 내용이었다.
“그런데 왜 진도건에게선 마기가 느껴지지 않았던 거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