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4화 - 제38장. 반복되는 불쾌한 기분 (2)
“정말 처리하지 않아도 되겠소?”
가까이 있던 당문 제자가 묻자 진도건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바로 천서은도 다가왔는데 그녀를 향한 시야 속에 마차에서 창문을 열고 자신을 바라보는 진윤지와 당한솔의 얼굴도 눈에 들어왔다.
많은 사람이 그가 펼친 대화의 진의를 궁금해하고 있었다.
“전 마기를 그 누구보다 잘 느낄 수 있습니다. 여기 있는 야율 소저가 아무리 내공을 갈무리하고 있어도 전 명확하게 그 존재를 느낄 수 있고 그것이 강자든 약자든 예외는 아닙니다. 글쎄…… 신마급 인물은 어떨지 모르겠지만, 다르지 않을 거로 생각합니다. 그런 제 기준에서 공승지에겐 어떤 마기의 기척도 느껴지지 않습니다.”
“……그럼 지운천을 마교도라고 생각하신 거예요?”
천서은은 문득 드는 생각을 물었다. 그리고 진도건은 고개를 저었는데 그러면서 비스듬히 갸웃거리기도 했다.
“그건 확신할 수 없어. 그걸 마기라고 볼 수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다르면서도 비슷한 기척이 느껴졌어.”
천서은은 진도건이 얘기하는 기척이 무엇인지 알 수 없었다. 그러나 마교도에 대한 진도건의 기감이 매우 뛰어나다는 걸 알고 있었기 때문에 일반적인 중원 무림인들에게서 느껴지지 않는 기척을 느꼈다면 그의 의심이 타당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아…….”
천서은은 깊은 한숨을 내쉬면서 고개를 푹 떨어뜨리고 두 손으로 얼굴을 감쌌다.
만약 지운천이 마교도라면 적에게 놀아난 셈이니 부끄럽지 않을 수 없었다.
진도건은 그런 천서은의 반응에 크게 개의치 않았다.
그가 천서은에게 화를 내거나 혹은 의심을 내거나 하지 않은 것도 나름의 지금 밝힌 이유를 기준으로 침착함을 유지하면서 경계해왔기 때문이었다.
진도건은 마차 창문으로 고개를 내밀고 있는 진윤지를 쳐다보았다.
“진 부인, 혹시 성도성의 북동쪽 타강이 가로지르는 산자락에 배나무 숲이 있다는 걸 들어보셨습니까? 이화림이라고 한다던데.”
“확실히 있어요. 젊었을 때, 남편과 거기서 만남을 즐기기도 했거든요.”
“지운천이 죽찰에서 설명하기를 거기에 환도마종으로 의심되는 마교도가 있다고 합니다.”
“함정? 의도가 뭘까요?”
“알 수 없지만, 우리를 불러냈으니 가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가면 그 의도를 알 수 있겠지요. 이 일을 처리하고 성도성으로 찾아가겠습니다.”
진윤지는 웃으면서도 아쉬움을 표정에 담았다.
“여기까지 오는 동안 별일이 없었으니 사혈주도 포기하고 물러간 것 같고 광한군도 곧 도착할 테니 거기서 저희 가문의 제자들을 더 찾을 수 있겠지요. 이런 날씨 속에서도 덕분에 안심하면서 왔는데, 괜찮겠지요? 후후후!”
면주에서 있었던 습격은 사실 진윤지를 크게 긴장시켰던 사건이었다. 이례적으로 녹주팔비 중 둘이나 움직여서 감행했던 습격이다 보니 사망자가 있었긴 해도 큰 피해는 피할 수 있었던 이 결과가 다행스럽기까지 했다.
여기까지 오면서 진도건 일행의 호위 덕분에 안심했다는 말은 진심일 수밖에 없었다.
“오래 걸리지 않도록 하겠습니다.”
진도건의 대답으로 방향이 정해지자 천서은과 영은성, 최현걸이 고삐를 잡아당기면서 당문 일행과 거리를 벌리며 떠날 채비를 했다. 그러나 야율균은은 움직이지 않고 있었는데 그녀의 표정에 불안감이 느껴져서 그 연유를 궁금케 했다.
“저기…… 거기에 가면 지운천 그자를 만나게 될까?”
“가능성은 있겠죠.”
천서은이 그녀의 물음에 대신 대답해줬다.
“그럼 난 당문을 따라서 먼저 갈게. 어차피 나 하나 없어도 문제없지 않겠어? 난…… 지운천 그자를 다시 마주치기 싫어.”
“당신도 뭔갈 느꼈나 보군.”
진도건의 물음에 야율균은이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그리고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사실…… 그자와 며칠 같이 달리는 동안 난 한 번도 그자와 눈을 마주칠 수 없었어. 너같이 어떤 기운의 기척을 분명하게 느끼진 못했지만, 뭐랄까…… 마치 늑대가 내 목을 송곳니로 덮은 채 언제든지 물어뜯을 듯한 느낌을 받았거든. 그래, 공포…… 너무 무서웠어. 그래서 네가 그자를 마교도라고 추정하는 말에 일정 부분 동의해. 이런 느낌은 내 사촌오빠 야율재가 내게 화내며 협박할 때와 느낌이 비슷했거든. 도망치고 싶을 지경으로.”
일행 모두 처음 듣는 이야기였기 때문에 조금 심각해진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지운천이 남기고 간 분란의 불씨는 이미 모두 느끼고 있었다. 그리고 진도건이 느낀 기운과 그녀가 토로하는 두려움은 그의 존재가 가져온 문제가 보통 심각한 일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불길한 직감을 하게 만들었다.
“그럼 우리끼리 가는 거로 하지. 진 부인, 당문에서 뵙겠습니다.”
“그래요. 야율 낭자의 무공도 뛰어난데 우리와 같이 간다면 조금 더 안심할 수 있겠군요. 그렇지?”
진윤지가 당한솔을 보며 물어보았다.
“예? 예, 물론입니다…….”
갑자기 자신에게 물을 줄 몰랐던 당한솔은 얼떨결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문득 바깥을 다시 보았을 때, 자신을 쳐다보고 있는 야율균은과 시선이 마주쳤다.
그는 자신의 귀가 뜨거워지는 걸 느꼈다. 어색하게 올라가는 손으로 귀 위쪽의 머리카락 부분을 긁었다. 마차 안에 드리워진 그림자와 떨어지는 빗줄기 때문에 들키지 않았을 거로 생각했어도 괜히 신경이 쓰였다.
진윤지는 그 모습에 미소를 짓고는 떠나려는 진도건을 향해 손을 흔들었다.
진도건 등은 진윤지를 향해 포권을 하고는 말머리를 돌려서 앞서 달리기 시작했다. 이화림을 찾는 것도 일이었지만, 거기에 숨어 있을 마교도들을 처리하고 당문으로 돌아가 다시 재회하려 한다면 서두르는 게 좋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우리는 예정대로 광한군으로 갑시다.”
빗속을 달리는 네 기의 뒷모습을 잠시 지켜보던 진윤지가 목소리를 조금 높여 외쳤다.
* * * *
지운천이 남충의 능운산에 도착한 것은 진도건 일행과 헤어지고 난 이틀만의 일이었다.
사천 분지라고는 하나 이주에서부터 남충부까지 가는 길은 500리에 이르고 가는 길의 지형 대부분은 구릉지였기 때문에 순탄한 길을 걷는 일은 아니었다. 그러나 끊임없이 용솟음치는 막대한 내력은 밤낮으로 경공술을 유지해도 좋을 만큼 여유로운 여정이었다.
‘정말 오랜만이군.’
이곳에 도착하면 그는 항상 하가장을 찾기 전에 능운산의 정상에 올라가 사위를 바라보았다.
동쪽으로는 제법 높은 산지가 일맥을 형성하며 뻗어 있고, 서쪽으로는 남북으로 흐르는 가릉강과 그 유역에 형성된 큰 마을이 눈에 들어왔다. 사방으로 펼쳐진 사천 분지의 울퉁불퉁한 구릉 지형과 초원지대, 지평선 끄트머리쯤 보이는 사천 분지를 둘러싼 산맥들은 보고 있으면 강보(襁褓)에 싸인 아이가 된 기분이 들곤 했다.
“어머니, 안녕히 계셨는지요?”
지운천은 먼 산지를 바라보며 분명한 목소리로 말했다.
주변에 듣는 자는 없었다. 그러나 그가 선 자리 옆엔 작은 봉분과 묘비가 세워져 있었으니 바로 그 묘의 주인에게 말하는 것이리라.
초라한 크기의 묘비엔 다음과 같이 적혀있었다.
하씨지연지묘(何氏智燕之墓).
능운산을 차지할 정도로 지역의 나름 이름난 가문임에도 불구하고 그 초라한 비문(碑文)과 봉분 위로 무성하게 자라난 잡초를 보고 있으면 어쩐지 서글프다.
“흐음…….”
어머니의 묘를 내려다보던 지운천이 조금 깊은 한숨을 쉬었다.
어린 시절 기억하는 어머니와 있었던 추억은 단편적이었지만, 행복한 느낌이 남아 있었다. 그러나 사별하기까지 마지막 1년은 어린 시절의 추억을 고통으로 난도질 된 흉터로 남아 있었다. 그래서 이곳에 오래 머물고 싶어도 그럴 수 없는, 그래도 그 짤막한 향수를 느끼기 위해 3년여 시간 전후로 찾아왔다 가는 그런 곳이었다.
물끄러미 묘를 내려다보던 지운천이 눈을 감고 돌아섰다. 그리고 다시 눈을 떴을 때, 앞에 있는 숲의 그림자 아래서 한 사내가 마치 원래 거기에 있던 것처럼 모습을 드러냈다.
짧은 머리, 자색 무복과 복면을 쓴 사내였는데 눈가 주변으로 마치 날개인지 눈꺼풀인지 모를 선형의 문신이 그려져 있었다.
“왔느냐?”
“비작(非雀)이 존자께 인사드립니다.”
“별일 없었느냐?”
“언제나 그렇듯 단절된 삶을 보내고 계시니 오히려 저희가 환진을 일으켜 놓은 게 아닌가 착각할 정도입니다.”
“우리가 사천에서 떠날 때가 되면 다시 밖으로 나가시려나.”
비작과도 정말 오랜만에 보았지만, 그가 묻는 안부는 당연히 하가장에 관한 것이었다.
“그래도 장주님은 물론 어르신도 정정하십니다.”
“적어도 내 아버지가 죽었다는 소식을 듣기 전까진 먼저 돌아가실 분이 아니지. 그건 그렇고 선우도(鮮于禱)는 어디 있나?”
“존자께서 오심을 이미 전하였습니다. 곧 당도할 것입니다.”
“준비는 어떻게 돼가지?”
“저희 마종은 이미 모든 준비를 끝마쳤습니다. 도등진(圖騰陣)의 구성을 마쳤고 환막음극진(幻幕陰隙陣)까지 설치하여 위장처리도 끝냈습니다. 환마인(幻魔人)들도 단향도(斷香圖)를 그려서 준비를 해 두었는데 아직 무탈합니다.”
“청성산도 준비하였나?”
“물론입니다.”
만족스러운지 지운천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내 미소와 함께 아쉽다는 기색도 표정에 떠올랐다.
“아미산도 처리했으면 좋았을 텐데 말이야. 당혁수가 그렇게 무서우냐?”
마지막 물음은 핀잔도 섞여 있었으니 비작은 허리를 숙여 자신들의 능력 부족에 대한 용서를 구했다.
“존자의 기대에 미치지 못해 송구할 따름입니다. 아미산을 담당했던 맹호(盲虎)도 극히 조심하면서 접근했다는데도 끝내 그자에게 발각되어 중상을 입었습니다. 뛰어내린 절벽 아래 강이 흐르는 천운이 따르지 않았다면…….”
“됐다. 변명을 듣고자 함이 아니니.”
말을 끊는 냉담한 반응에 비작이 부르르 어깨를 떨었다. 비록 맹호가 그들 수장의 용서를 받았다고 하더라도 지운천이 과연 어떻게 처리할지 걱정도 들었다.
당혁수에게 당한 맹호의 상태는 사실 무척 끔찍했다. 온몸 여기저기 뚫린 수십 개의 혈공(血孔)이 고작 솔잎으로 생긴 상처라는 사실은 소름 돋는 일이 아닐 수 없었다. 그런 그의 놀라운 무공과 엄청난 범위의 기감은 분명 두려운 것이었기에 그들로서도 일의 우선순위를 고려해 아미산에 대한 작업을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그럼 성도성과 청성산은 누가 담당하고 있지?”
“성도성은 백기린(魄麒麟)이 직접 담당하고 있고, 청성산은 영무(影武)와 허룡(虛龍)이 준비를 마치고 대기 중입니다.”
“다른 곳들은 무사히 마쳤다면 당혁수에게 너희가 무슨 작업을 하는지 들키지는 않은 모양이로군.”
“존자의 기대를 하늘이 거스르지 못하였는지 다행히 시운이 따라줬다고 생각합니다.”
지운천이 피식 웃음을 흘렸다.
그의 고개가 서쪽으로 돌아갔다. 멀리서부터 점차 가까워지는 분명한 마기의 기척은 익숙한 것이었다.
“오는군.”
점점 가까워지는 기척은 모두 둘이었다. 그런데 두 기척은 놀랍게도 매우 닮아 있었다. 가진 마기의 보유량으로 인하여 느껴지는 존재감만 다를 뿐, 느껴지는 기운에 따라 비유하면 마치 똑 닯은 아버지와 아들을 보는 듯한 느낌이었다.
그것은 지운천에게 한 가지 일이 성공했음을 설명해주는 것이었다.
산자락 아래 중턱에서 산림 위로 두 인영이 불쑥 솟아올랐다. 두 사람은 하반신을 감싸는 회색 운무를 타고 나는 듯이 숲을 따라 올라왔다. 그리고 마침내 지운천의 앞으로 떨어지며 그 모습을 보였다.
“환도신마 선우도가 존자를 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