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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의 귀신-203화 (203/432)

203화 - 제38장. 반복되는 불쾌한 기분 (1)

남충부는 남북으로 가릉강이 가로지르면서 좌우로 구릉지와 산림이 펼쳐져 있는 지형적 특색을 가진 큰 마을이었다. 언덕들의 높이가 그렇게 높지 않아서 완만한 지대 위로는 밭을 일구며 사는 백성들도 많았다.

그런 구릉지 사이에서도 동쪽의 능운산은 적당히 높은 고도에 동쪽으로 길게 산맥이 뻗어 있어서 눈에 뜨이는 곳이었다. 가릉강과 가까운 지대는 민가가 많았지만, 능운산 깊은 곳은 사람 발길이 자주 닿는 곳은 아니었다. 그 이유는 바로 하씨 성을 가진 일족이 산 깊숙한 곳에 장원을 세우고 그 일대를 자신의 사냥터로 사용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다행히 친절하게 금지구역의 푯말을 세워두곤 했지만, 자칫 길을 잃어 깊숙이 들어갔다간 목숨을 잃는 자도 나와서 보통 가릉강 동쪽에 사는 사냥꾼들은 번거롭더라도 강을 건너 서쪽 산지로 가곤 했다.

하가장은 사천 무림의 가문이었다.

그들은 스스로 정사 어느 쪽을 추구하며 사는 가문은 아니었지만, 사천당문은 그들이 벌였던 행태로 인해 사파로 규정지었다. 그나마 세력이 작고 무공 수준도 높지 않아서 위협이 되지 않았고 대외적인 활동도 별로 보이지 않아서 오래전 관심 밖으로 멀어진 곳이기도 했다.

무림에 별 관심이 없었어도 사천 무림의 지형 정도는 꽤 알고 있는 당부순도 하가장을 기억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런 폐쇄적인 곳에서 천서은을 어떻게 알고 찾아왔는지 의문을 가지며 돌아보았는데 일행 전체의 반응이 썩 반기는 분위기는 아니었다.

지운천.

여러모로 듣기에 반가운 이름이 아니었다.

특히 천서은은 자신의 이름이 지명되었다는 점에서 불편한 심기를 표정에 드러내고 있었다. 그래도 진도건과의 오해나 갈등 같은 것들이 조금씩 해소되려는 상황 속에서 굳이 좋지 않은 기억을 상기시키는 꼴이 된 셈이었기 때문이었다.

“서신을 주시오.”

그녀의 불편한 심기를 읽었는지 진도건이 나서서 손을 내밀었다. 그러나 공승지는 손바닥을 펼쳐 보이면서 거절 의사를 표시했다.

“도련님께선 꼭 천서은 소저에게 이 서신을 전하라…….”

“이보시오, 공승지. 난 당신이 그렇게 강조하는 이유를 알고 있소. 그리고 지금 내가 할 일은 다시 묻는 제안에 당신이 주는 서신을 받던가, 아니면 거절하는 즉시 당신의 목을 치고 품에서 서신을 찾던가. 여기에 어떤 예외도 없소. 그리고 난 내 검에 실패가 없을 거라고 확신하오.”

진도건은 말을 몰아 앞으로 나서면서 동시에 군자검을 뽑고 왼손으로는 손을 내밀었다.

차가운 눈빛과 악다문 입술에서 느껴지는 단호함, 빗줄기 속에서도 광택이 흐르는 흑검의 날카로움이 섬뜩하기 그지없었다.

의사 표시만으로도 공승지는 숨이 막힐 듯한 긴장감을 느꼈다.

방립 아래 피처럼 흐르는 듯한 적안의 안광은 시선만으로도 목에 칼을 들이미는 듯한 착각마저 들 정도였다.

“……드리겠습니다.”

공승지는 품에서 꺼낸 것은 죽찰(竹札)이었다.

그가 죽찰을 꺼내고 다가가기 전에 앞으로 슬쩍 내보였다.

“도련님이 보낸 죽찰입니다. 가서 건네드리……!”

어떤 흉계도 없다는 의사 표시를 위해 돌돌 말린 작은 죽찰을 쥔 손을 펼쳐서 보여주려 한 것이었는데 순간 죽찰이 흔들리더니 그대로 진도건의 손에 빨려 들어갔다.

‘허, 허공섭물……!’

공승지 뿐만이 아니라 당문 무사들이나 당부순, 마차 안에서 창문을 열고 상황을 지켜보던 진윤지 등 모두 깜짝 놀랐다. 앞서서 강유객잔에서 보여 준 독무를 끌어당긴 솜씨도 믿기지 않았는데 지금의 수법으로 그의 무공이 허구가 아니라는 걸 다시 한번 깨닫게 해준 셈이었다.

진도건은 검을 거두고 죽찰을 펼쳤다.

『천 낭자, 지운천이오.

만남은 짧았고 헤어진 시간도 그와 같은데, 마치 십 년을 만났다가 헤어진 듯한 그리움이 남으니 이 애틋한 심경을 어찌하리오?

하지만, 그대에겐 이미 낭군이 있으니 그대에게 내 진심을 보여줄 기회가 없어서 슬픔을 금치 못할 것 같소. 여기 하가장에 도착하여 뒤뜰에 어머니가 가꾸셨던 화원을 보고 있으니 더더욱 마음이 아려오오.

그대의 일행이 천마신교를 예의주시하고 있을 텐데 때마침 여기에 와서 보니 쓸만한 정보가 있어서 전달하오.

성도성의 북동쪽 타강이 관통하는 산지에 천마신교의 교도로 추정되는 자들이 모여 흉계를 꾸미고 있다는 정보가 있소. 그곳은 산림 속 배나무 꽃이 만발한 곳이어서 인근 마을 사람들에겐 이화림(梨花林)으로 부르고 휴식을 하러 가는 곳인데, 지난달부터 사람들이 거길 진입하면 숲이 움직여서 길을 잃어버린다고 하오. 그러다 갑자기 잠에 빠지는데 깨어나면 이화림 밖에 나와 있었으니 무서워서 발길이 끊어졌다고 하였소.

이 일련의 맥락으로 살펴볼 때 아마 천마신교의 환도마종이 숨어 있지 않을까 생각하오.

천 낭자의 무공과 일행의 실력이 뛰어난 것 같으니 걱정하진 않겠소. 그러나 만약 도움이 필요하다면 이 지모에게 힘을 빌려달라 공승지를 통해 전해주시오.

그럼 내 언제든 그대를 위해 한달음에 달려가리다.

보고 싶소.』

찰칵.

움켜쥔 손아귀 안에서 죽찰이 제대로 말리지 못하고 접혔다.

진도건은 지운천이 보낸 마치 연서(戀書)와도 같은 글을 보면서 화가 나지 않고 오히려 감정이 차갑게 식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그와 함께했던 며칠간 천서은은 단 한시도 그의 곁을 떠난 적이 없었으므로 당연히 지운천과 천서은이 외도했다고 볼 수 없었다. 오히려 일행의 수장이 진도건임을 지운천이 알고 있다는 점을 고려한다면 어쩌면 이 상황을 예상하고 보낸 것일지도 몰랐다.

‘그자가 나를 도발하는군.’

진도건의 손에서 죽찰이 다시 공중으로 떠올랐다. 그것은 그대로 천서은의 앞으로 날아가니 이 받아들일 수 없는 연서를 수신인에게 제대로 전달한 셈이었다.

천서은이 받아들었음을 느낀 진도건은 다시 공승지를 바라보았다.

“당신은 저 죽찰에 무슨 내용이 적혀 있는지, 지운천이 무슨 뜻으로 보냈는지 알고 있나?”

공승지의 눈빛이 살짝 흔들렸다.

“……대충만 알고 있습니다.”

“그럼 당신이 이 일로 인해서 죽을지도 모른다는 것도 알고 있나?”

공승지의 눈빛이 더 크게 흔들렸다.

다른 사람들은 깜짝 놀랐다. 그러나 죽찰에 담긴 내용이 심상치 않다고 의심할 뿐 감히 물어보지 못했다. 그것을 읽어내려가는 천서은의 표정은 방립의 그림자 때문에 잘 보이지 않았지만, 아랫입술을 질끈 깨문 모습이 심상치 않았다.

“그, 그런 생각은 못 했습니다. 살려 주십시오.”

“지운천은 하가장에 있나?”

공승지는 자신이 심문당하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그도 무림인이었지만, 진도건의 검 앞에 자신의 목숨은 바람 앞 등불 신세임을 깨닫고 있었다.

그것은 본능적인 인지였다.

공승지는 지운천이 마치 연서처럼 죽찰을 쓴 걸 알고 있어서 이 전달을 선의로 이해했으나 지금의 상황과 분위기는 너무나 위험하게 느껴졌다. 연서인 줄 알았는데 눈앞의 남자는 마치 선전포고를 받아든 사람처럼 보였다.

“제, 제가 나온 날 도련님도 다른 곳으로 갈 예정으로 알고 있습니다.”

“어디로 간다던가?”

“모릅니다.”

“답신을 받아가야 하는데 모른다?”

“그, 그런 소리는 듣지 못했습니다.”

그것으로 명확해졌다.

진도건이 먼저 죽찰을 읽을 것을 노린 것이 틀림없었다.

그와 천서은 사이에서의 의심을 키워 불화가 생기도록 유도하는 것.

진도건의 적안이 더욱 차갑게 가라앉을 때.

콰직!

부서지는 소리.

파즈즈!

푸른 벽력기가 천서은의 두 손을 타고 맴도는 듯하더니 빗속임에도 불구하고 푸른 불꽃의 삼매진화(三昧眞火)가 일어나 죽찰을 한 줌 재로 만들어버렸다.

공승지가 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빗방울이 도롱이에 부딪히면서 흔들려 보인 게 아니라 정말 겁에 질려 떠는 것이었다.

천서은은 진도건보다 더 노골적으로 적대감을 드러내고 있었다. 턱을 세울 듯 고개를 들어 방립 아래로 천서은의 표정이 고스란히 드러났다. 표정에 큰 변화가 없음에도 분노가 고스란히 드러나는 기색을 본 공승지는 당혹스러움과 두려움에 휩싸였다.

“도건, 할 말이 더 없다면 제가 저자를 죽이겠어요. 전 이 농간을 도저히 참을 수가 없어요.”

“살려 주십시오!”

공승지가 무릎을 꿇고 바짝 엎드리며 머리를 조아렸다. 떨리는 음성이 진심으로 두려워하는 것 같았다.

앞으로 나서려는 천서은을 진도건이 손을 들어 제지했다.

“살려 주겠다.”

“도건!”

천서은이 항의하듯 그의 이름을 불렀고 공승지는 불안과 안도가 섞인 표정으로 고개를 들었다.

진도건은 여전히 공승지에게 시선을 떼지 않은 채 말을 이어갔다.

“내 물음이 끝나면 떠나도 좋다.”

“대답할 수 있는 건 모두 대답하겠습니다.”

“지운천은 하가장을 외가라고 했다. 그자의 말이 진실인가?”

“그, 그렇습니다.”

“지운천의 부친은 누구지?”

“그…… 지, 지수원(智水原)이라고 합니다.”

“말에 뜸을 들이는군.”

공승지는 그 말에 반응을 삼가는 눈치였다.

천서은은 진도건이 왜 그런 것을 물어보는지 몰랐다. 그 궁금증이 치밀어 올랐던 화를 넘어서서 진도건의 의도가 무엇인지 알고 싶어졌다.

진도건은 계속해서 물었다.

“지수원과 지운천 부자. 두 사람에 대해 얼마나 알고 있지? 지금 어디서 사는지 그리고 어떤 문파인지, 어떤 무공을 익혔는지 등등 말이야.”

“……전 그 두 분에 대해 아는 게 없습니다.”

“외척이라 하고 도련님이라 지칭하면서 아는 게 없다? 모순적이군.”

“……일개 가신일 뿐이라 드릴 수 있는 말은 정해져 있습니다.”

진도건은 더 자세히 물어볼까 생각했지만, 그런 개개인의 신상과 관련된 정보는 왠지 더 얻어낼 수 없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흐음.”

더 물어볼 것이 있다는 눈치였으나 전과는 다르게 바로 입을 열지 않자 공승지는 초조한 얼굴로 진도건의 눈치를 보았다.

공승지는 속으로 자신의 처지에 대해 셈을 해보고 있었다.

과연 정말로 자신이 살아 돌아갈 수 있을지, 만약 답변에 만족하지 않아 고문하려 든다면 불가피하단 이유로 어디까지 얘기해줘야 할지도 고민했다. 하씨 가문에 대한 충심도 중요했지만, 그것이 생존의 욕구보다 중요한 것은 아니었다.

“마지막으로 하나만 더 묻지. 할 수 있는 대답을 하고 끝나면 가도 좋다.”

진도건의 말에 공승지는 더 불안해졌다.

“무, 물어보십시오.”

“하가장은 천마신교와 어떤 관계이지?”

진도건을 제외한 천서은과 일행들 그리고 당문 사람들까지 내심 놀라 조금 긴장한 채로 진도건과 공승지를 번갈아 바라보았다. 죽찰을 직접 읽은 천서은은 진도건이 어째서 그런 질문을 던졌는지 선뜻 이해되지 않았다. 하지만, 흐린 날씨와 빗속 시계의 혼잡함 속에서도 공승지의 사색이 된 얼굴을 보고 있으면 분명히 의표를 찌른 질문이었음을 깨달을 수 있었다.

“……어, 어째서 그런 질문을 하십니까?”

“관계없다고 부정할 수 없나 보군.”

“소인이나 하가장은 마교를 위해 어떤 일도 돕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그렇게 말씀드리니 부디 해량(海諒)하여 주십시오.”

공승지가 방립이 흙바닥에 박힐 정도로 바짝 고개를 숙이며 대답했다.

“좋아. 약속대로 가기 전에 나의 짧은 언질 정도는 기억 속에 담고 돌아가라.”

“마, 말씀하십시오.”

“장주에게 전해라. 마교의 대적자(大賊者) 진도건이 지운천에 관하여 직접 들을 것이 있길 기대한다고 말이야.”

“……무슨 말인지 이해했습니다.”

진도건이 고개를 끄덕였다.

공승지는 조심스럽게 몸을 일으켰다. 진흙과 빗물에 하의가 흠뻑 젖었으나 그것을 털어낼 여유도 없이 포권을 취하고는 행여나 공격당할까 봐 경공을 펼치며 쏜살같이 달아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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