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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의 귀신-202화 (202/432)

202화 - 제37장. 비가 오기 시작한 날 (6)

“야율 낭자에겐 특별히 고마워요. 밖으로 나갈 때 왠지 모르게 도움을 줄 수 있을 거로 짐작했는데 다행히 맞아떨어져서 안심했어요.”

“별말씀을요.”

야율균은은 가볍게 고개를 숙이며 목례했다. 그리고 당한솔을 흘끔 쳐다보고는 고개를 돌렸다.

‘혹시……?’

진윤지의 얼굴에 미소가 살짝 그려졌다. 왠지 기분 좋은 직감이 드는 순간이었다.

“어쨌든 만약 마교의 신마급 대마두가 한 놈 더 나타난다면 두 사람이 대응하면 되는 건가?”

“그 정도는 너무 낙관적으로 보는 것 같군. 광혈신마, 환도신마, 염황신마 셋 모두 나타날지도 모르는 일 아니오?”

“천하오절이 허명도 아니고 설마 아무도 막지 못할까, 그렇지 않은가?”

정평자의 걱정에 당환이 천서은을 보며 물었다. 천무경의 딸인 만큼 천하오절의 무위에 대해 잘 알 것 같아서였다. 그녀라면 움직일 것으로 보이는 금태하와 강정학의 무공에 대해 가늠할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이었다.

“확언하긴 힘들지만, 믿을 수 있을 거라고 봐요. 저희가 흑풍신마를 겪어봤고 또 일월신마를 상대로 아버지가 싸우는 걸 봤는데 흑사왕과 백령신검의 무공이 아버지와 비교하면 뒤지지 않으니 각자 맞대결하는 구도라면 승산이 높다고 봐요.”

“맞대결하는 구도라…….”

그들의 대화를 듣고 있던 당한솔이 턱을 쓰다듬으며 중얼거렸다.

“왜요?”

천서은이 눈을 빛내며 물었다.

“아, 아니…… 문득 든 생각이 부정적이어서 괜히 입 밖에 내놓기 꺼려집니다.”

당한솔은 난색을 보이며 손사래를 쳤다.

“위험할 수 있겠군.”

진도건이 불쑥 입을 열었다. 그의 표정이 조금 심각하게 굳어져 있었는데 당한솔은 진도건이 자신과 같은 생각을 했음을 깨닫고 쓴웃음을 지었다.

“왜요? 뭔데요?”

당한솔의 표정도 변하자 천서은은 진도건과 그를 번갈아 쳐다보았다.

강렬히 요구하는 그녀의 눈빛을 받은 당한솔이 마지 못해 입을 열었다.

그는 양손을 말아 쥐고 들었다가 검지를 하나씩 폈다. 그리고 두 손을 부딪치며 입을 열었다.

“제갈군사는 맞대결을 유도하여 검림을 움직인 거죠. 하지만, 귀주는 지역 대부분이 산과 구릉지로 둘러싸여 있는 곳이라 염황종의 행적을 상시 감시하기 어려울 겁니다. 더군다나 남쪽 지방은 개방이나 하오문의 인적 자원의 분포가 적은 편으로 알고 있습니다.”

당한솔은 왼손을 흔들며 중지를 하나 더 펼쳤다. 그리고 다시 검지만 편 오른손을 반복해서 맞닿게 했다.

“만약 선제적으로 움직여 한쪽을 헛걸음시키고 다른 한쪽을 포위하는 구도로 만들면…… 위치나 규모로 볼 때 염황종이 광혈종과 협력하여 구룡문을 에워싸면 어떻게 될까요? 구룡문주는 과연 광혈신마와 염황신마 둘을 상대로 이길 수 있을까요?”

그 말을 들은 천서은이 진도건을 돌아보았다.

“어떻게 될 것 같아요?”

“……힘들 것 같아. 특히 염황신마는 강 총수와 검림을 위험한 지경에 몰아넣었던 장본인이라서.”

진도건과 천서은, 영은성, 최현걸 네 사람은 동시에 강정학의 팔과 얼굴 일부를 덮었던 끔찍한 화상의 흉터를 떠올렸다.

“하하……, 괜찮겠지?”

최현걸이 어색하게 웃었다.

“흐음……. 야율 낭자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당한솔은 곰곰이 생각하다가 야율균은을 보며 물었다.

그의 질문을 예상하지 못해서일까, 야율균은이 움찔거리며 고개를 돌렸다. 당한솔과 잠시 눈이 마주쳤고 그녀는 이내 고개를 돌렸다. 떨어지는 비를 물끄러미 바라보는 그녀의 모습에 당한솔은 답을 들을 수 없다고 생각하며 시선을 다른 사람에게 돌렸다.

그때 야율균은이 입을 열었다.

“나도 잘은 몰라. 구주마종 가운데 공석인 혈마종을 제외하면 여덟 신마의 마공들은 전부 특징이 명확해서 강력한 만큼이나 저마다의 상성이나 한계도 존재한다고 들었어. 그나마 광혈신마의 서열이 낮으니 금태하가 무서워할 상대는 아닐 거로 생각하지만, 염황신마는 교주를 제외하면 세 손가락 안에 드는 강자라 둘이 힘을 합치면…… 나도 위험하다에 한 표를 던지지.”

“아, 답변 고맙습니다.”

“한 가지 더 얘기하자면 염황신마는 도법의 고수라서 근접전도 뛰어난데 염룡마공의 화염은 보통의 불길이 아니라 강정학도 3년 전 화상에 아직도 고생할 정도고, 그 극양기공을 다루는 정교함은 피아마저 구분한다는 소문을 들은 적이 있어. 야율재가 다른 신마들과 자웅을 겨뤄본다면 가장 피하고 싶은 상대가 그 사람이라고 했을 정도니까.”

최현걸이 인상을 찌푸리며 야율균은을 쳐다보았다.

“왠지 우리한테도 얘기 안 해 준 것까지 다 얘기해 주는 것 같소? 이거 섭섭한데?”

야율균은이 그 말에 콧방귀를 뀌었다.

“흥! 따지고 보면 너희들은 내 원수인데 그간 협조한 것만으로도 감사하게 여겨야지.”

야율균은의 냉정한 말에 최현걸이 상처받았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러나 모두들 그녀의 성정을 잘 알고 있고 틀린 논리는 아니었기 때문에 이내 멋쩍은 웃음들을 지었다. 오히려 일행이 다투는 모양처럼 비치니 질문을 던졌던 당한솔의 표정에 미안함이 담겼다.

이런저런 정세에 관한 얘기들과 더불어 사소한 얘기들이 더 오갔다.

저녁이 되자 환자들은 하나둘씩 떠나가면서 번잡했던 강유의원도 여유를 찾을 수 있었다. 그리고 진도건 등도 내일 아침 만나기로 약속하고 면양객잔으로 발길을 돌렸다. 야율균은은 발걸음을 떼는 일에 대해 아쉬움을 느꼈는데 면양객잔에 이르면서 그 이유를 정확하게 깨달을 수 있었다.

이튿날 아침, 추적추적 내리는 비 때문에 날이 썩 밝지는 않았다. 숙실에서 나와 1층 식당에 하나둘씩 모이기 시작했는데 두 번째로 나왔던 최현걸은 꽤 놀란 눈이 됐다.

“웬일이요? 첫 번째로 나와서는?”

“그냥 잠에서 일찍 깼어.”

한쪽 탁자에 야율균은이 먼저 나와 있었는데 은은한 미소가 떠오른 표정 등을 보니 기분이 꽤 좋은 듯했다.

최현걸이 씩 웃었다.

“내 왠지 이유를 알 것 같소.”

“뭐.”

“지난밤에 우리 영 도사와 얘길 해 봤는데 말이오. 왠지 우리의 야율 낭자께서 당문의 소가주에게 관심이 있는 거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소. 어떻소? 맞지 않소?”

반쯤 확신에 차 물어보면서도 최현걸은 반사적으로 바짝 긴장했다. 그녀에게 무슨 거친 말이 쏟아질지, 혹은 칼이 날아들지 알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의외로 야율균은은 별로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그저 짤막한 한 마디를 남겼을 뿐이었다.

“시끄러워.”

“넵.”

어쩐지 차갑지 않은 말을 들으면서 최현걸은 조심스러운 몸짓으로 자리에 앉았다.

“뭐가 그리 재밌으십니까?”

어느새 옆으로 다가온 위군보가 와서 탁자에 찻잔들을 놓고 있었다.

“몸은 괜찮으냐?”

“여전히 쑤십니다.”

위군보가 배를 쓰다듬으면서 쓴웃음을 지었다. 최현걸이 그의 어깨를 두드리며 위로했다.

“강유의원에 얘기해 놓았으니 틈나는 대로 가서 진료를 받아라. 어릴 때 치료를 잘 받고 보양도 해야 나중에 후유증 없다.”

“명심하겠습니다.”

“그래.”

“아, 숙수님께서 아침 식사는 값을 치르지 않아도 된다고 합니다. 편히 드시고 가십시오.”

위군보는 행여나 최현걸이 거절할세라 잽싸게 자리를 떴다. 물론 최현걸은 그런 걸 거절할 사람은 아니었다.

“잘 먹겠다 전해드려라!”

최현걸의 댓바람 외침에 주방에서 웃음소리가 흘러나왔다.

곧 다른 사람들도 내려왔고 오 숙수가 준비한 간단한 식사들이 탁자 위에 올려졌다.

여유 있게 식사를 끝내고 저마다 정비를 마친 그들은 객잔 입구 쪽에 모였다. 머리에 방갓을 썼고 녹사의(綠蓑衣:도롱이)를 어깨 위로 둘러서 끈을 동여맸다.

“불편하네.”

촘촘하게 엮인 기다란 깃대가 둔부 근처까지 깊이 내려와 있으니 최현걸이 팔을 휘적휘적 저어보면서 불편함을 호소했다.

“가시는 여정을 비에 젖은 생쥐 꼴로 다닐 생각이 아니시다면 입는 게 좋습니다. 보시기에 촌스럽긴 해도 이만한 게 없습니다.”

오 숙수가 영은성이 녹사의 입는 걸 도와주면서 말했다.

“고맙습니다.”

“저희가 더 고맙지요.”

“안녕히 계십시오. 혹시 또 여유가 생긴다면 이곳에 또 들르겠습니다.”

“아이고, 기약도 없이 가시면 그때가 언제가 될지 알고 여기서 계속 일한답니까?”

“뭐? 네가 그만둘 생각을 했느냐?”

작별 인사를 건네는 최현걸을 향해 위군보가 하소연하자 오 숙수는 깜짝 놀랐다. 그러자 기다렸다는 듯이 위군보가 짓궂은 표정을 지었다.

“아, 뭐 요리도 제대로 안 가르쳐주시는데 제가 언제까지 허드렛일만 하면서 남아 있어야 합니까? 이제 갓도 고쳐 쓰고 뜻을 펼칠 나이인데 저도 제 뜻을 펼쳐야지요.”

“커어……! 알았다, 임마! 이 나를 어디 주방일 부려먹는 놈으로 만들 셈이냐?”

“하하하! 네가 이 틈을 노려 고용인에게도 수완을 부리는구나.”

최현걸이 웃음을 터뜨리고 다른 사람들도 그 모습에 웃음 지었다. 위군보가 청성파 제자들에게 겁박을 당했을 때, 오 숙수가 그를 걱정하는 마음은 진심이었으니 이들의 화합이 기대되는 일이다.

“그럼 정말로 안녕히 계십시오.”

“조심히 가십시오.”

다섯 사람은 작별인사를 마치고 면양객잔을 나와 강유의원으로 향했다. 빗줄기가 세차게 떨어지고 있으니 면주를 가로지르는 강물도 제법 불어서 이제는 강을 건너는 다리 가까이 물길이 찰랑거리고 있었다.

강유의원에 이르자 당문 사람들도 때마침 준비를 마치고 나오기 시작했다. 정평자와 청성파 제자들도 한쪽에 서서 당문과 진도건 일행을 기다리고 있었다.

앞서서 그들과 인사를 나눈 최현걸이 진윤지에게 다가갔다.

“진 부인, 성도까지 가는 데 얼마나 걸릴까요?”

“경공을 펼쳐서 쉬지 않고 달리면 해지기 전에는 도착하겠지만, 알다시피 우리 당문인들은 아직 중독의 여파가 조금 남아서 무리하기는 좀 그렇네. 광한군(廣漢郡:현 덕양德陽)에서 하룻밤 지내고 나면 다음 날 점심 때쯤에는 도착할 수 있을 거야.”

“그렇군요.”

“시숙, 몸 상태 괜찮은 한 사람 시켜서 앞서 성도로 보내죠. 남편에게 연락해서 가능하다면 잠시 본가로 돌아와 얘기를 나누는 게 좋지 않을까 싶어요.”

“직접 가겠습니다. 든든한 고수들의 호위도 받을 수 있게 됐으니 차라리 제가 빨리 가서 준비하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그럼 그렇게 해 주시겠어요?”

“그럼 본가에서 다시 뵙겠습니다.”

당환이 먼저 경공을 펼치며 자리를 떠났다.

정평자도 포권을 취하며 입을 열었다.

“사혈주 잔당이 남아 있을 수 있으니 저희는 이곳 면주 근방을 좀 더 조사하면서 바깥쪽을 주시하겠습니다.”

“하송진인께 안부를 여쭙지 못하고 떠나는 걸 용서해달라고 전해주십시오.”

“원시천존.”

정평자 등 청성파 제자들에게 작별을 고하면서 당문과 진도건 일행은 남쪽으로 길을 떠났다. 마을 가장자리 마방에는 당문 사람들이 미리 마필과 마차를 가지고 기다리고 있었다. 마차는 먼 거리를 올 때마다 당한솔을 태우기 위해 제작된 것이었다.

마차 문을 열고 뒤편에 거치해 놓은 판자를 가져다가 안으로 들어설 수 있게 발판을 놓았다. 진윤지는 능숙하게 판자 위로 륜의를 밀어 올려 마차 안 구석에 위치시키고 바퀴 쪽에 고정목(固定木)을 놓았다. 그리고 반대편 의자에 앉으니 바깥에서 마차 문을 닫아주었다.

나머지 사람들도 모두 안장 위에 올라 말 고삐를 쥐었다.

방향은 남서쪽, 성도에 자리한 당문을 향해 남하하기 시작했다.

비는 계속해서 내렸다.

비에 젖은 흙길 위로 마차를 모는 일에는 어느 정도 주의를 기울일 필요가 있어서 그리 빠르지는 않은 속도로 남하했다.

진윤지가 예고한 대로 해가 서쪽으로 기울 때쯤 멀리서 광한군 마을의 모습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그리고 녹사의와 찢어진 방립을 쓴 한 중년인이 그들이 가는 길목 한가운데 서있었다. 그는 마치 진도건과 당문 일행을 기다리고 있었던 것처럼 가까워지는 그들을 향해 포권을 취하며 예의를 갖추고 있었다.

“누구냐?”

선두에서의 외침에 중년인이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당문이 아닌 진도건 일행 등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소인은 남충 능운산(凌雲山)에 있는 하가장(何家莊)의 가신(家臣)인 공승지(公乘志)라고 합니다. 지운천 도련님의 서신을 전하기 위해 천서은 여협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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