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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의 귀신-201화 (201/432)

201화 - 제37장. 비가 오기 시작한 날 (5)

늦은 오후, 비가 추적추적 내리기 시작했다.

사혈주가 뿌려 놓은 독무가 워낙 많아서 천서은이 태웠다고는 하나 잔여 분진이 남는 건 어쩔 수 없었다. 그런 잔량들이 남아서 토양을 오염시키고 병마를 불러일으킬 수 있었는데, 다행히 제때 내리기 시작한 비가 흙에 머물러 있던 독을 씻어내렸다.

“햇빛이 완전히 가려졌군. 이른 시각인데도 벌써 저녁이 된 것 같아. 마치 오늘 싸움으로 인한 상처들이나 독기를 견딜 수 없었는지 하늘이 비를 내려 씻어주는 것 같구나.”

“그렇다면 이 구름이 어디까지 이어졌을까요? 또 어딘가에서 이런 싸움이 있어서 이만한 먹구름들을 보내서 비를 내리게 하는 걸까요?”

“공기가 금방 차갑게 식고 습도도 매우 높으니 이삼일은 족히 내릴 것 같구나.”

더는 햇빛을 찾을 수 없는 먹구름이 가득한 하늘을 올려다보며 진윤지와 대화를 나누던 당한솔은 고개를 돌려 진도건 일행을 흘끔 쳐다보았다.

“창천맹에서 이곳의 일을 우려하여 저 사람들을 파견하지 않았겠습니까? 어쩌면 어디 다른 곳에선 그들과 마교가 이미 큰 싸움을 벌이지 않았을까요? 그럼 이 비를 떨어뜨리는 하늘의 의도도 납득이 될 것 같습니다.”

비가 내리는 것이 정말 그런 의도는 아닐 것이다. 그러나 그들에게 지금의 비 소식이 시의적절하다는 걸 생각해보면 원시천존이 헤아려 비구름을 보낸 게 아닌가 싶은 것이다.

문득 당한솔의 시야에 야율균은의 모습이 들어왔다. 그를 줄곧 빤히 쳐다보고 있었기에 바로 시선을 돌렸다. 이럴 때 어떻게 대처하는 게 좋을지 몰랐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바로 진윤지와 눈이 마주쳤는데 그녀의 날카로운 눈썰미로 아들의 시선이 어딜 향해 있었는지 눈치챘다.

진윤지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몸은 어떠십니까?”

“한 이틀은 무공 사용을 조심해야겠구나. 해독은 잘 되긴 했지만, 그래도 운기를 하면 단전이 쿡쿡 쑤신다.”

“동 의원께 봉진단(鳳辰丹)을 제조해달라고 부탁해 두었으니 이따가 건네받으시거든 꼭 복용하세요, 어머니.”

“그러도록 하마.”

봉진단은 당문 비전의 보양단(補陽丹)이었는데 그저 양기를 보충해 주는 것 이상으로 중독 증세에 대한 후유증까지 빠르게 해소해 줄 수 있는 단약이었다. 독무에 중독된 당문 제자들이 많았기 때문에 서둘러 제조할 수 있도록 조처해 둔 상태였다.

진윤지는 당한솔이 앉은 륜의를 돌려 그들이 앉았던 모퉁이 마루에서 반대쪽으로 밀면서 천천히 걸었다. 당한솔은 진도건 일행과 야율균은이 있는 쪽으로 향하고 있음을 깨닫고 조금 두근거리는 마음을 가라앉히면서 겉으로 태연해 보이도록 신경을 썼다.

진윤지가 가까이 다가오자 정평자, 당환과 얘기를 나누고 있던 진도건 등은 자세를 고치며 가볍게 목례했다. 싸움이 끝난 직후에 한 차례 인사를 나눴기에, 과한 예의는 갖추지 않았으나 당문의 안주인에 대한 조심성이 엿보였다.

“아까는 미처 인사를 못 드렸어요. 정평자께서 이렇게 창천맹 분들과 함께 와주셔서 참 다행이라고 생각합니다.”

“제자들이 엄한 데만 뒤지고 다니는 바람에 당문과 진 부인께 큰 누를 끼칠 뻔했습니다. 빈도들을 용서하십시오.”

“감사한 마음뿐이니 그런 말은 안 하셔도 됩니다.”

“원시천존!”

정평자가 미안한 마음에 도호를 외며 고개를 숙였다.

진윤지가 당환에게 시선을 돌렸다.

“시숙, 의문은 해결이 되었나요?”

“예.”

당환이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싸움이 끝나고 청성파 제자들이 부서진 기물이나 시체 등을 정리하는 사이에 당문 제자들은 일단 의원 내에서 보호했던 환자들의 병세 위주로 살펴주었다. 물론 중독되어 치료가 필요한 제자들에게도 조치를 진행했다.

그 사이 당환과 정평자는 진도건 일행으로부터 궁금한 부분을 물어보면서 이들의 신분에 대한 명확한 확인과 무림 정세에 관한 얘기들을 들을 수 있었다.

당환이나 정평자가 가진 중원 정세에 대한 정보는 제한적이었다. 그러나 창천맹주 천무경의 명성은 익히 알려져왔기에 천서은이 독무를 태울 때 보여 주었던 기공의 특성으로 그녀가 천무경의 딸 백봉천녀 천서은이라는 걸 인정할 수 있었다.

특히 몽골 초원 전쟁에서 일어났던 일은 개략적으로 사천 무림에도 전해졌었는데 진도건의 이름이 혈마검귀라는 별호로 전해져 있었다. 그래서 그 적발적안이라는 신체적 특징은 아무래도 주목할 수밖에 없는 부분이었다.

야율균은에 관한 얘기는 단번에 받아들이기엔 까다로운 부분이 있었다. 자신의 친오빠와 사촌을 죽인 사람들을 따라다닌다는 상황이 여러 이유를 들어도 이해하기 어려웠다. 그러나 이곳에 이르기까지 따지고 보면 거의 반년에 가까운 시간을 진도건 등과 같이 보냈으니 믿지 않을 수도 없었다.

무엇보다 결과적으로는 당한솔을 구해주었으니 그 전에 방관하던 모습은 마교도였던 기질에 기인한 것이라 억지로 이해하면서 인정하는 것이다.

“그래서 내 남편을 만나고 싶다고?”

“예. 현 상황을 어떻게 파악하시는지, 그리고 우리의 역할을 어떻게 가져가야 할지 아무래도 당문 가주님과 상의를 해보는 게 좋지 않을까 하는 게 저희 생각입니다.”

“제갈 군사는 어떻게 정세를 보고 있는가?”

“아무래도 삼협 북단의 산지로 광혈종 세력들이 퍼져서 포위망을 형성하고 있는 걸 주의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구룡문이 그걸 칠 움직임을 가져갈 것 같은데, 아마도 지금쯤이면 싸움이 곧 시작되거나 아니면 끝났거나 할 것 같습니다. 그렇지요?”

최현걸이 대답하면서 다른 사람을 돌아보았다. 진도건은 가만히 있었고 천서은과 영은성이 고개를 끄덕이면서 동의했다.

“신야성에서 표개 어른과 얘기했을 때 보면 구룡문이 움직일 수 있는 상황을 상정하고 있는 듯했으니까 그 시점에서 움직였다면 지금쯤이면 싸움이 벌어졌을 수 있을 겁니다.”

“만약 제갈군사의 뜻대로 구룡문이 이겼다면 큰 문제가 아니겠지만, 그 반대라면 여긴 큰 위기라고 볼 수 있겠네.”

“어찌 됐든 검림이나 중천, 녹림에 창천단까지 움직이고 있으니 시일에 맞게 적들의 움직임을 차단할 수 있다면 이곳의 상황도 곧 정리될 수 있지 않겠습니까?”

“자리들을 선점한 것은 마교 쪽이니 그렇게 낙관하긴 쉽지 않을 거야. 그리고 우리 당문이 청성파, 아미파와 함께 개방도들의 도움을 빌려 파악한 바로는 다른 마종의 마교도가 사천에 이미 들어와 있다고 보고 있어.”

“염황종?”

“염황종이 대규모 집단은 아닌 데다가 귀주 지역의 산지 한가운데 숨어 있어서 근황을 모두 파악하긴 힘들고, 일단 환도종이라고 추측하고 있네. 마교라고 확신하고 놈들의 은신처를 급습한 적이 두 번 있었는데 모두 환술에 당해 종적을 놓치고 말았지.”

“역공 당하진 않으셨나 보군요?”

천서은은 한중에 도착하기 전에 화소암에서 마주쳤던 환도종 마교도를 떠올렸다.

실력 차이가 극명하여 부담스러운 적들은 아니었지만, 일반적인 관점에서는 매우 까다로운 적들임은 틀림없었다.

“다행인지 그런 일은 없었어. 하지만, 얼마만큼 주력이 침투해 있는지 알 길이 없으니 우리도 어디까지 경계해야 할지 고민이야.”

“청성파나 아미파는 어떻습니까? 고수들의 숫자가 중요할 텐데.”

영은성이 정평자를 보며 물었다.

“글쎄, 자네가 얘기하는 기준이 어느 정도인지 모르겠군. 그래도 나름대로 꾸준히 세력을 늘려왔고 부족한 절정고수들의 숫자는 제자들에게 진법 수련을 시켜왔으니 어느 정도 보완은 되지 않을까 싶군. 우리 청성칠자 그리고 아미파의 삼장로와 복호승(伏虎僧)들은 각파의 상징적인 고수들이지만, 모두 사혈신마와 같은 자들은 부담스러운 것이 사실이네. 당가주께서 사혈신마를 처음 상대했을 때 보았던 그 신위들은 우리로서 가히 충격적이었으니.”

정평자의 말 속에서 당혁수를 향한 경외감이 느껴졌다. 사천 유일 화경에 이른 고수이며 동시에 무당파의 소요자와 함께 정파 양대고수라는 강호의 평가에 큰 신뢰를 보내고 있는 듯했다.

“사혈신마가 충격을 받고 꽁지 빠지게 도망쳤었죠. 하하하!”

당환도 공감하면서 웃음을 터뜨렸다.

당혁수는 그들의 상징이요, 자부심이었다. 주백자가 떠나기 전에 사천 무림에 대한 걱정을 하면서도 당문 가주 덕분에 한시름 덜 수 있다고 평가한 말은 아직도 잊지 않고 있었다.

당한솔도 뿌듯해하며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진도건과 천서은을 보며 입을 열었다.

“듣기로 흑풍신마는 마교 내에서도 손꼽히는 강자라고 들었는데 두 분께서 그자를 처치했다면 분명히 우리 사천 무림에 큰 도움이 될 겁니다.”

“과찬입니다.”

당한솔의 칭찬에 천서은이 미소로 화답했다.

진윤지는 천서은을 유심히 살펴보았다. 샘이 날 정도로 빼어난 미모에 여걸다운 당당한 면모도 갖춘, 어깨 위에서 찰랑거리는 단발머리도 잘 어울리는 탐나는 신붓감이었다. 그러나 진도건 옆에 찰싹 달라붙어 있으니 감히 며느릿감으로 탐을 내선 안 될 듯했다. 설령 진도건과의 관계가 없던 것이었을지라도 이렇게 륜의에 앉아 있는 아들의 모습을 마음에 들어 할지도 의문이었다.

‘후우, 이렇게 예쁜 아이를 보면 참 아쉬워.’

문득 그녀의 시선이 마루 구석에 앉아 만곡도를 들어 떨어지는 빗방울을 가지고 장난을 치고 있는 야율균은에게 닿았다. 그리고 조금 전에 당한솔이 그녀를 흘끔 보았던 모습을 떠올렸다.

진윤지는 그들 일행을 모두 돌아보며 입을 열었다.

“그러고 보면 일행의 조합이 참으로 진귀하구나. 정파와 사파 둘둘이서 한 조를 이뤄 함께 움직이는 모습도 참 드문데 마교도 출신까지 있으니 말이야.”

마지막 말에선 야율균은에게 시선을 던졌다. 그리고 그녀의 말에 반응하여 만곡도 다루던 걸 멈추고 고개를 돌린 야율균은과 눈이 마주쳤다.

당한솔은 마교도란 단어가 무례한 것 같아 깜짝 놀랐는지 움찔거렸다. 진윤지도 그 반응을 느끼고는 멋쩍은 웃음을 지었다.

“아, 미안하네. 마공을 다루는 자들을 보통 그렇게 부르다 보니, 기분 나빴다면 사과하겠네.”

진윤지는 곧바로 야율균은에게 사과했다.

야율균은은 진윤지를 잠깐 바라보다가 시선을 돌리며 바깥에 내리는 비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만곡도를 거둬 옆에 두었던 헝겊으로 칼날을 닦아내고는 도집에 돌려놓았다. 그리고 다시 진윤지를 돌아보았다.

“괜찮아요. ……다만 전 어쩔 수 없이 마공을 익힌 쪽이에요. 천마신교를 별로 신봉하지도 않고, 흑풍대는 애초에 요 거란의 전사조직이었으니…… 차라리 제 근본을 생각하신다면 이쪽이 맞겠네요.”

화답과 함께 야율균은은 대수롭지 않다는 듯 표정을 지으면서 어깨를 으쓱거렸다.

사람들은 그녀가 자신의 입장을 잘 설명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진도건 일행은 새삼스러운 눈길로 야율균은을 바라보고 있었다.

‘내가 아는 그 야율균은이 맞아?’라는 공통된 눈빛이었다.

마교 출신이었다는 점을 귀찮아서 숨기는 것이라 저렇게 상세하게 설명할 사람이 아니기 때문이었다. 무심한 듯 얘기하긴 했으나 마치 자신의 이런 처지를 이해해달라는 어떤 마음이 그 무심함 속에 담겨 있는 것 같았다.

하지만, 깊이 대화하지 않고는 당장 그 연유를 알 도리는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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