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화 - 제37장. 비가 오기 시작한 날 (4)
두 사람도, 다른 당문과 사혈주의 고수들도 두리번거리다가 위로 딸려 올라가는 독무의 분진을 따라 공중에 뜬 진도건의 모습을 발견했다.
원을 그리는 그의 느릿한 손짓에 맞춰 마침내 눈에 분명한 크기의 구 형태로 분진이 모였다. 그리고 천서은이 진도건 가까이 높이 도약하자 푸른 벽력의 전류가 그녀를 따라 꼬리를 물며 쫓아갔다.
쿠르릉!
진도건의 곁에 다다른 천서은이 모인 분진을 향해 쌍수로 벽력장을 때렸다. 곧 비가 오려는지 때마침 구름 짙게 낀 흐린 날씨 아래에서 두 사람을 중심으로 해서 사방으로 뻗치는 번개 줄기에 소름이 돋지 않는 자는 없었다.
“은성아, 네가 놈들을 제압해라. 난 당환 선배와 내원을 살펴볼게.”
“그러지.”
멍하니 하늘을 올려다보던 당환은 자신의 이름이 들리자 퍼뜩 정신 차렸다.
영은성이 암향표의 경공을 펼치며 바람처럼 앞으로 쏘아져 나가자 정평자를 위시한 청성파 고수들도 질세라 그 뒤를 쫓아갔다.
“우리도 가죠.”
“그, 그러세.”
당환이 고개를 끄덕이며 최현걸과 함께 비스듬히 방향을 틀어 담장을 넘어갔다.
사태를 급변하게 만드는 움직임이 아래에서 일어나는 사이 진도건은 천서은을 당겨 허리를 끌어안은 채 잠깐 공중에서 내려오지 않고 있었다.
“……뭐예요?”
천서은은 진도건의 품에서 그를 올려보았다가 이내 고개를 푹 숙이면서 잠길 듯한 목소리로 물었다.
무엇을 물어보는 건지, 아니면 투정인지 혹은 죄책감 때문인지.
아무렇지 않게 이심전심으로 얘기하고 이 높은 지점까지 뛰어 올라와 시원스럽게 벽력장을 때렸지만, 그것이 위장된 평정심이라는 건 본인인 그녀도 알고 또한 진도건도 느끼고 있었다.
두 사람의 신형이 천천히 가라앉는 걸 느낀 천서은은 아무 말도 없이 바로 내려간다는 생각에 조금 당혹스러웠다. 그러나 그런 그녀의 심정을 느끼고 불식시키려는지 진도건의 목소리가 가까이 들려왔다.
“……오해가 어찌 혼자만의 책임이겠어? 그리고 그게 널 사랑하는 내 마음보다 클 수 있겠어? 개의치 마. 의심하지도 마. 하고 싶은 말, 토해내고 싶은 감정 언제든 좋아. 무엇이 되도 난 지금처럼 이렇게 안아 주고 받아 줄 준비가 되어 있으니까. 그걸 알려 주지 못해서 미안해. 그러니까…….”
톡.
발이 땅에 닿자 잠깐 말이 끊어졌다.
“……그러니까 답답해하지 말고 마음껏 토해내. 내가 천무방에 들어왔을 때부터 잘하던 거잖아. 이제 와서 부담스러워하면 어떻게 해.”
진도건은 천서은의 허리를 감은 팔을 풀었다. 그리고 가볍게 그녀의 볼을 어루만지며 옅은 미소를 보였다.
챙! 챙!
선명하게 들려오는 금속성을 자각하며 검자루에 손을 가져가던 진도건은 팔을 붙잡는 천서은의 손길에 다시 고개를 돌렸다.
눈빛이 어쩐지 화나 있는 것 같지만, 또 아련하기도 하다.
“뭘 미안해요? ……언제까지 받아줄 건데요? 내 마음이 어떤지 알고 그런 얘길 하는 거예요? 나는……!”
천서은은 울컥하는 감정을 가까스로 억눌렀다. 여전히 따뜻하게 미소를 지어주는 진도건의 저 표정이 왠지 모르게 미운 감정이 든다.
“알아.”
“뭘 알아요?”
“자기도 나 많이 사랑하는 거.”
“……치.”
진도건의 피식 웃는 모습에 천서은의 표정도 조금 풀어졌다.
답답한 심정은 여전했다.
지금까지 나름의 시간을 가졌어도 어떻게 말하고 풀어내야 할지 갈피를 잡지 못해 끙끙 앓아온 면이 있었다. 미안하다고 말하는 진도건의 목소리가 왠지 모르게 그에게 섭섭한 감정이 들게 하면서도 그녀를 믿고 기다려준다는 목소리는 그 어느 것보다도 더 의지가 된다.
“가자, 우리만 놀고 있어.”
진도건이 전장 쪽을 손으로 가리키며 말했다.
천서은은 고개를 끄덕이며 숙녀검의 검자루에 손을 가져갔다. 그러나 곧 자루를 쥔 손을 풀고 팔을 내렸다.
그녀는 자신을 보는 진도건의 시선을 마주하며 픽 웃음을 흘렸다.
“가세요. 날 이런 기분으로 만들어 놓고 검에 피를 묻히게 하려고요? 이번엔 좀 쉴게요.”
“알았어. 그럼 쉬어. 그리고 정리가 되면 당신이 날 안아줘.”
“후후, 그럴게요.”
천서은이 웃으며 얼른 가라고 손짓을 했다.
바람을 타고 날 듯 달려가는 진도건의 뒷모습을 보면서 천서은은 조용히 한숨을 내쉬었다. 가까이서도 들릴 듯 말 듯한 작은 목소리로 조용히 회한을 털어놓는다.
“왜 넌 먼저 미안하다고 말을 하지 못하니……, 이 못난이야…….”
진도건이 뒤늦게라도 합류하러 갔지만, 독무가 두 사람에 의해 소멸된 상황에서 영은성과 청성파의 개입만으로도 이미 대부분 상황은 정리되어 가고 있었다. 그래서 진도건은 도주하는 자들을 쫓아 처리하기 위해 바깥으로 움직일 뿐이었다.
주요한 싸움이었던 진윤지와 계유각의 싸움은 영은성이 바로 개입하면서 국면을 전환시켰다.
암향표로 내달린 영은성의 신형은 상대가 반응하기 어려운 각도로 파고들면서 검을 휘두르고 지나갔다. 그때마다 검광이 적들의 신체를 깊게 훑고 지나가면서 붉은 핏물이 튀어 올랐다.
‘망설임 없이, 간결하게. 초식이 아니라 내 행동의 옳음에 가치를 부여한다.’
여기까지 달려오면서 이미 마음의 준비를 한 영은성이었다.
살업을 쌓는 것은 무림인에겐 피할 수 없는 숙명과도 같으면서 그것이 무분별한 살인에 지나지 않도록 협의에 방점을 찍기 위해 심기일전(心機一轉)했다.
진도건과의 대련부터 시작해서 충분히 단련된 그의 검속은 빠르고 주저함이 없어서 얕은 수준의 적들이라면 제대로 반응할 수 없었다. 그렇기에 그의 시선은 빠르게 이 싸움의 핵인 계유각의 존재를 찾아 고정되었다.
휘익-!
“으윽!”
갑작스럽게 날아드는 검에 계유각이 신음과 함께 간신히 몸을 뒤로 젖혀 피해냈다. 공중제비를 돌며 급히 거리를 벌린 계유각이 화가 나 버럭 소리쳤다.
“웬 놈이냐?”
영은성은 잠깐 진윤지를 보다 그녀와 눈이 마주치자 가벼운 목례로 인사를 대신했다.
“화산파의 영은성입니다. 몸부터 추스르십시오.”
진윤지는 화산파란 말에 깜짝 놀랐다. 그리고 시선을 돌릴 새도 없이 정평자를 포함한 청성파 제자들도 난입하여 각각의 싸움들에 끼어드는 모습들이 시야에 들어왔다.
어째서 화산파가 이곳에 나타났는지 영문을 알 수 없었지만, 일단 한숨 돌릴 수 있겠다는 생각에 고개를 끄덕이며 물러났다. 그리고 급히 해독제를 더 챙겨서 입안에 털어 넣으며 호흡을 가다듬었다.
영은성은 계유각을 무섭게 몰아붙였다.
그가 펼치는 매화검법은 어느새 이전과 다른 수준에 있었다.
초식이 초식이 아니게 되었고 또 그렇다고 무초식이라고도 볼 수 없는 몸에 밴 동작들이 섬세하게 쪼개져서 그의 검 끝에 펼쳐졌다.
“크윽……!”
계유각이 신음을 흘렸다.
간신히 피해내고 있는 듯했지만, 깊은 상처만 피하고 있을 뿐 조금씩 잔 상처들이 생기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검의 표면을 덮고 있는 자색 빛깔의 검기까지 모두 피하지 못하는 것이다.
‘불리하다. 어째서 갑자기 이렇게 변해버린 거지? ……아니?’
계유각은 혼란스러운 생각과 눈앞에 휘몰아치는 검광 사이에서 의원 정문에 륜의를 타고 모습을 드러낸 당한솔을 발견했다.
‘……도망쳐야!’
일이 틀어졌음을 깨달은 계유각은 더 미련을 남기지 않고 즉각 몸을 틀어 도망치기 위해 전력으로 몸을 날렸다.
부웅!
휘두른 검이 허탕을 쳐도 재차 공세를 이어가려던 영은성은 아예 등을 돌려 도망치는 계유각의 등을 보며 내심 혀를 찼다.
팟!
화산파의 대표적인 경공술 암향표는 빠르기로는 천하에서도 손꼽힌다.
계유각이 순식간에 먼 거리를 달아났음에도 불구하고 영은성의 신형이 빠르게 거리를 좁혔다. 그리고 그 사실을 계유각도 본능적으로 느끼고 있었다.
점점 엄습해 오는 기척과 살기에 품속에 들어간 오른손에 힘이 꽉 들어갔다.
칠갈독(漆蠍毒).
운남에는 꼬리 침에 맹독을 품은 칠갈이라는 전갈이 있다. 옻칠(漆)은 옻나무에서 처음 채취할 때는 회백색 진액이었다가 공기 중에서 시간이 지나면 적갈색으로 변하는데 이 전갈도 새끼 땐 회백색이었다가 몇 차례 탈피하면서 점점 적갈색으로 변한다고 하여 칠갈이라고 불렀다.
칠갈독은 이 칠갈 일백 마리의 독을 채취한 후, 고형의 분말처럼 만든 것인데 이렇게 가공하면 고작 새끼손톱만큼의 분량 밖에 나오지 않아서 사혈주에서도 사실상 취급하는 사람도 드물었다. 그 대신 한 번 고형화하면 손으로 쥐어도 반 시진 안에 물로 손을 씻으면 될 정도로 취급이 쉬워지는 장점도 있었다. 물론 땀이 많은 체질이라면 역시 다룰 수 없을 정도로 수분에 대한 용해 반응이 빨라서 작은 상처나 점막에 닿는다면 1분 안에 즉사할 정도로 위험했다.
계유각은 이 칠갈독을 얇은 피막에 담아 비상시에 사용할 수 있도록 상시 몸에 지니고 있었다. 그리고 지금 엄습해 오는 위협을 최대한 가까이 접근할 때까지 기다렸다.
그 살기가 등골을 타고 모골이 송연해질 정도에 이르렀을 때, 계유각은 기습적으로 몸을 돌리며 적을 향해 칠갈독을 터뜨렸다.
“죽어랏!”
핏!
따끔한 고통.
‘검……?’
있어야 할 자리에 사람의 모습은 보이지 않고 그의 손짓에 튕긴 한 자루 검만이 팽그르르 돌았다.
꽈광!
한층 짙어진 먹구름이 뇌운이었는지 천둥·번개가 번쩍거렸다.
돌아서자마자 갑작스럽게 환해진 그의 시야 아래를 스치듯 지나가는 그림자의 존재를 느낀 순간, 칠갈독의 손톱만 한 분말이 공기 중에 흩어지기 시작한 게 눈에 들어왔다. 그리고 다시 시야가 조금 어두워졌을 때 집중된 시신경은 검날을 건드림으로써 자신의 손끝에서 흘러나온 핏방울이 허공에 흩날리는 것도 포착했다.
그의 신경은 등 뒤를 점한 영은성의 존재보다 손끝의 핏방울과 칠갈독 분말에 더 집중하고 있었다.
저릿한 감각.
머릿속을 스치는 죽음의 공포.
손끝에서부터 손가락, 손목까지 빠르게 파고드는 칠갈독에 의한 고통에 인상이 일그러지며 절로 입이 벌어졌다.
“끄아아-!”
뜻하지 않았던 현실에 비명을 지를 때.
검을 발로 밀어내면서 측하단을 파고든 영은성이 어느새 계유각의 등을 정면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그리고 영은성의 쌍장이 계유각의 등판 정중앙에 곧바로 비틀어 때렸다.
혼원장(混元掌).
퍼엉!
“커헉!”
계유각의 신형이 뒤로 활처럼 굽으며 고통에 얼굴의 눈과 입이 그대로 쩍 벌어졌다. 튕겨 나가는 기세 그대로 아직 다 퍼지지 않은 칠갈독의 분말이 고스란히 눈과 입안 점막에 달라붙어 빠르게 침투한다.
영은성의 강력한 쌍장이 제대로 적중했지만, 계유각은 고통을 느낄 수 없었다. 손끝에서 시작된 칠갈독의 고통이 얼굴 전체를 휘감아 다른 모든 고통마저 집어삼켰기 때문이었다.
“끄아아아악-!”
계유각은 비명을 지르면서 두 손으로 얼굴을 쥐어뜯고 데굴데굴 발버둥 쳤다. 그리고 그 단말마의 비명을 끝으로 거짓말처럼 움직임이 뚝 멈추었다.
투툭……!
문득 머리 위를 적시는 빗방울에 영은성은 잠시 고개를 들어 하늘을 바라보았다.
시간이 좀 지나면 비가 곧 쏟아질 것 같았다.
올 때도 흐린 하늘이었지만, 점점 먹구름으로서 그 농도를 더해가고 있었다. 그래도 주변의 풍광이 제법 훤하게 들어온다는 것은 아직 한낮의 시간대임을 인지할 수 있게 해 주었다. 그래도 이 정도 구름이라면 좀 더 지나선 초저녁처럼 어둑해질 것 같은 느낌이었다.
‘운이 좋았군.’
가차 없이 제 손에 쥐어 뜯겨 나간 끔찍한 시신의 얼굴을 내려다보니 영은성은 왠지 마음이 심란해졌다. 그저 독을 풀어 죄 없는 양민들까지 고통과 죽음으로 몰아넣었던 마교 사혈종의 마두를 심판했다는 논리만이 그를 조금이나마 위로할 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