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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의 귀신-199화 (199/432)

199화 - 제37장. 비가 오기 시작한 날 (3)

“크윽……!”

옹견은 간신히 기운을 집중시키긴 했지만, 완전히 막아내지 못해 충격에 깔리듯 넘어지고 상체는 전반적으로 피투성이가 되어 너덜너덜해졌다. 그러나 어쨌든 막아낸 것이므로 서둘러 몸을 일으켜 세우려 했다.

“윽!”

옹견이 다시 신음과 함께 휘청거렸다. 무릎 중앙에 박힌 은침 때문에 오른쪽 다리가 말을 듣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다급히 침을 뽑아내자 피가 삐죽 튀어나왔다.

마비는 풀렸지만, 저릿저릿했다.

옹견은 몸을 바로 세울 생각만 우선하고 있었다. 불편함을 이 악물고 버텨내며 가까스로 몸을 일으켜 세운 옹견의 시야에 륜의에 앉은 당한솔의 모습이 들어왔다. 그리고 당한솔의 어깨너머로 보이는 담벼락을 뛰어오르는 두 사람의 그림자를 발견했을 때, 옹견은 자신이 지금 잘못된 방향으로 일어났음을 깨달았다.

흑풍명천마공 쌍격흑소풍(雙激黑掃風).

그것을 깨달았을 때는 이미 야율균은이 평행하게 뉘어 휘두르는 두 자루 만곡도의 칼날이 그의 목에 닿고 있을 때였다.

퍽!

두 줄기 반원의 흑풍기류가 앞서 공기를 가르는 쌍도를 쫓아 휘몰아치니 그 집중된 힘은 흑사풍파 초식의 배에 이른다. 그리고 그것에 반응조차 못 한 옹견의 머리는 그대로 피를 뿌리며 하늘로 치솟아 올랐다.

당한솔은 뭔가에 홀린 듯 그 광경을 바라보고 있었다.

춤을 추듯 쌍칼을 휘두르며 날아오르는 야율균은의 모습은 마치 붉은 꽃가루를 흩날리며 날갯짓을 하는, 검고 영롱하게 빛나는 나비처럼 보였다.

그런 환상에 취한 당한솔이 새로이 장내에 등장한 사람들이 있음을 눈치챈 건 그들의 목소리가 들리고 나서였다.

“우와! 방금 초식 멋졌는데요?”

공기 중으로 흩어지는 흑풍마기의 중심에서 바로 착지하던 야율균은도 익숙한 목소리를 듣고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대수롭지 않은 듯 가볍게 손을 들어 반겼다.

“왔어?”

담장을 넘어온 사람은 바로 최현걸과 당환이었다.

“다른 사람들은?”

야율균은의 물음에 최현걸이 대답 대신 손가락으로 바깥쪽을 가리켰다. 밖에서 들려왔던 소란이 좀 더 부산스러워지면서 기합에 가까운 함성들도 들려오고 병장기 부딪치는 소리도 거칠게 섞여 들어갔다. 야율균은도 이해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처음 보는 초식입니다?”

“말 위에서 쓰기엔 적합하지 않으니까. 또 그렇게 싸울 일도 많지 않았으니 몸에 익지 않아 잘 사용하지 않았을 뿐이야.”

최현걸은 웃으며 엄지를 들어 추켜세웠다. 장내엔 녹의인들의 시체가 즐비하였다. 의원 가옥 쪽에선 조심스럽게 문이 열리면서 안에 숨어있던 백성들의 모습이 그림자 아래 보였다. 당문 무사들이 그들 사이에 보이니 백성들을 지키기 위해 오히려 안에 배치하였다는 걸 알았다.

고개를 돌리자 당환과 당한솔이 이야기하는 모습이 보였다.

“금방 오셨습니다, 숙부.”

“아아, 때마침 습격이 있단 걸 알고 마주 오고 있었다.”

“어머니는…….”

“이미 정리 중일 거다. ……하아! 엄청난 사람들이 사천에 왔어.”

당환이 놀라움을 금치 못하겠다는 듯 감탄 섞인 탄식과 함께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러면서 한 마디 더 이었다.

“내원 상황을 말해주고 둘로 나눠 이곳으로 오자고 했는데 개방의 소개 한 분만 따라오셨다. 저 여인의 실력이 뛰어나니 문제없을 거라고.”

최현걸이 당한솔 앞에 서서 포권을 취했다.

“당문의 소가주께 인사드립니다. 전 개방의 소개 최현걸이라고 합니다.”

“당한솔입니다.”

“여기는 이미 아실 거고…….”

최현걸이 야율균은을 보며 말끝을 흐렸다.

“야율균은.”

“앙?”

“저분께 성만 알려드렸어.”

“아하!”

최현걸은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그녀의 시선이 당한솔에게 줄곧 머물러 있는 걸 보고는 희미한 웃음을 띠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주변을 둘러보고는 입을 열었다.

“일단 장내를 좀 정리하시죠. 밖에 중독된 당문 사람들이 많아서 바로 치료에 들어가야 할 것 같습니다.”

“알겠네.”

당환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가옥 안에 있던 당문 무사들을 불러냈다. 그사이 당한솔이 바깥을 살피기 위해 륜의의 바퀴를 밀어 이동하기 시작했다. 버거운 움직임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흔히 볼 수 있는 광경은 아니기에 보기에 조금 불편했다.

당한솔은 근접한 기척에 고개를 돌려 뒤를 올려다보았다. 어느새 야율균은이 다가와 륜의의 등받이에 달린 손잡이를 잡고 있었다. 그녀가 슬며시 륜의를 미는 걸 느끼면서 당한솔도 살포시 바퀴의 손잡이에서 손을 떼고 앞을 바라보았다.

당환이 청성파 정평자 등을 포함해 진도건 일행과 만난 것은 강유의원의 담벼락을 넘어 달린 지 그리 오래 지나지 않아서였다.

“정평자!”

“당환!”

당환은 정평자를 비롯해 청성파 제자들이 열 명 이상 따라붙은 걸 보고 속으로 계산을 해 보았다. 그들의 실력을 크게 의심할 건 아니지만, 적들이 독무를 사용한 걸 봤기 때문에 쉽지 않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분들은?”

당환이 방립을 쓴 흑의인들을 보며 물었다.

“저흰 창천맹에서 왔어요.”

천서은의 대답에 당환이 적잖이 놀라면서도 창천맹이란 이름이 반가웠다. 사천의 세 정파 안에선 창천맹이 곧 고수들을 파견할 거라는 개방의 전언을 듣고 나름 서둘러 와주길 기대하고 있었다. 한편으로는 넘어오는 길이 쉽지 않아 반쯤 기대를 접은 것도 사실이었는 데 이리 나타나 주었으니 반기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런데 여기 계신 분들이 전부입니까?”

다들 방립 등을 쓰고 있어서 면면을 확인할 순 없었고, 숫자는 네 명뿐이었으니 조금 아쉬웠다.

“동료가 한 명 더 있어요. 잠깐 바람 쐰다고 돌아다니는 것 같은데 이 상황을 들었다면 올 것도 같아요.”

“그렇소? 아무튼, 통성명은 나중에 하고 일단 갑시다.”

일단 아군이라는 사실을 확인했으니 당환은 서둘러 움직임을 재촉했다.

다시 경공을 펼쳐 달리면서도 강유의원 쪽 상황이 걱정이 된 당환이 계속 말을 이어갔다.

“현장이 녹록지 않소. 담장을 넘을 때 봤는데 바깥쪽은 독무가 자욱이 껴 있어서 쉬운 상황이 아니오. 독무의 특성을 생각하면 속전속결로 끝내지 못한다면 오히려 고전을 면치 못할 수도 있소.”

“가진 해갈단이 더 없으시오?”

“두 알밖에 없소. 둘로 쪼개면 네 사람이 잠깐 버티기엔 용이하겠지만, 복용량이 줄어들면 약효가 급감하니…… 청성파도 해독제가?”

“우리가 가진 건 신경독에 별 효과가 없어서 사혈주의 독무엔 반쪽짜리요.”

보통의 독이 운기나 고통으로 인한 행동에 불편함을 가져다주는 것과 별개로 독무가 주는 환각은 다른 문제였다. 당환이 난감한 표정을 하자 옆에서 듣고 있던 진도건이 입을 열었다.

“독무는 분진 형태입니까?”

“그렇소.”

“그건 제가 어떻게 해 보겠소.”

당환은 뭘 어떻게 하겠다는지 설명이 없어서 그의 의도를 헤아리지 못했다.

쉽게 생각하면 똑같이 해독제를 분진으로 뿌리는 것도 있으나 이는 실상 독무에 사용된 분진의 네 배 이상은 더 사용해야 효과를 거둘 수 있는 비효율적인 방법이었다. 대차게 돌풍이 불어서 독무를 걷어내 준다면 당장 싸움터에선 운신이 자유로울 수 있으나 심각한 민간의 피해를 야기할 수 있었다. 내공이 없다면 버티기 어려울 것이다. 게다가 그만한 권역에 그만한 바람을 일으키려면 상당한 기공술의 조예가 필요한 일이었다.

반면 천서은은 진도건의 의도를 이해했다.

“한데 모아주면 제가 태워 버릴게요.”

조금 서먹하고 어색한 공기가 여전히 둘 사이에 흐르고 있었지만, 그래도 이심전심(以心傳心)이다.

진도건이 고개를 끄덕였다.

“내원도 중요하오. 소가주가 그대들을 빨리 불러오라고 보내서 오긴 했지만, 사혈주의 포위에 적인지 아군인지도 알 수 없는 마공을 사용하는 여자의 손에 위기를 맡겨 놓은 꼴이라 불안하기 짝이 없소. 소가주를 사혈주에서 반드시 지켜야만 하오.”

“혹시 만곡도 두 자루를 사용하지 않나요?”

“어떻게 아셨소?”

“아까 제가 말한 동료가 그 사람이에요.”

“에에?”

당환이 당황스럽다는 표정으로 천서은을 쳐다보았다.

세상에.

마교와 격렬하게 대립하는 창천맹이 마교의 인물을 동료라고 얘기하다니, 당환으로서는 이들의 신분마저 의심스러울 지경이었다. 그저 정평자가 아군이라고 가늠을 하고 있으니 간신히 믿음의 끈을 붙잡고 있을 따름이다.

“내원의 적 중에 특기할 만한 고수가 있나요?”

“녹주팔비 중 한 사람인 독구도 옹견이 있소.”

“사혈신마 같은 자와 비교하면?”

“상당한 고수지만, 거기엔 한참 못 미치오.”

“그럼 그녀가 충분히 해결할 수 있겠네요. 흑풍대 장수 출신인 데다 흑풍신마의 사촌동생이라서 무공이 매우 뛰어나니 걱정하지 않으셔도 될 것 같아요.”

당환은 그녀의 말을 들을수록 정신이 나갈 듯 혼란스러웠다.

마교도 출신이라는 사실 자체도 놀랍고 그런 그녀를 동료라고 얘기하는 사람들이 창천맹 인사라는 사실도 놀라운데, 이제는 마교의 핵이자 대마두라고 봐도 다름없는 흑풍신마의 가까운 혈족이라니…….

고개를 돌려 정평자를 보았는데 그도 쓴웃음을 지을 뿐, 현실을 받아들이라는 뜻인지 그를 보며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보인다.”

강까지 넘어서 달려온 그들의 시야에 멀찍이 강유의원의 담장과 그 앞에 싸움을 벌이는 인영들 그리고 그들의 모습을 가리는 뿌연 안개가 보였다. 그리고 진도건이 더 속도를 높이며 앞으로 튀어 나갔다.

선풍.

일대에 바람이 불기 시작했다.

열려 있는 상단전은 대기(大氣)와 감응하여 흐름을 만들기 시작하니 진도건이 바라보는 시야 전체를 아울러 움직이기 시작한다. 하늘 높이 도약해서는 부드럽게 어루만지듯 천천히 휘두르는 손짓이 마치 태극을 그린다는 착각이 들 때, 일대를 휘감는 대류가 일어나면서 그것이 점점 진도건의 높이까지 휘감겨 올라와 한점으로 보이기 시작했다.

“허, 허공답보……!”

“이럴 수가……!”

당환과 정평자가 동시에 경악을 금치 못했다.

진도건이 공중에 뜬 상태를 유지하는 그것은 허공답보와 같은 경공술에 있어 지고의 경지와는 다른 염력에 의한 것이지만, 그 역시 결코 보통의 무림인들은 도달할 수 없는 경지였다.

그뿐만 아니라 정평자는 도가문파의 제자로서 현문정종(玄門正宗)의 내기엔 그들만의 현기가 느껴지기 마련인데 진도건이 아우르고 있는 대류의 회오리에서 그런 기운이 느껴지고 있으니 놀라움의 연속일 수밖에 없었다.

어디 혈마검귀라는 이명에 어울리는 기운이던가?

진도건이 일으킨 대류로 분진들이 휘말려 올라가자 정말로 뿌옇게 시계가 좋지 않았던 강유의원의 앞마당도 훤히 보이기 시작했다.

이미 당문 고수 대부분이 천독해갈단의 복용에도 불구하고 독무 속에 오래 있다 보니 중독 증세를 겪고 있었는데 독무가 빨려 올라감으로써 호흡이라도 다소간 편해지자 표정들이 한결 나아졌다.

“뭐, 뭐야?”

진윤지를 상대로 공세를 밀어붙이던 계유각은 느닷없는 환경변화에 깜짝 놀라 공격마저 멈추고 두리번거렸다.

진윤지는 좋지 않은 혈색을 하고 있었는데 잠깐 틈이 생기자 급히 거리를 불리면서 호흡을 가다듬었다. 한줄기 맑은 공기가 폐부를 조금 씻어내는 것만으로도 고통에 차 있던 표정이 누그러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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