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화 - 제37장. 비가 오기 시작한 날 (1)
당한솔은 침착하게 주변을 살폈다. 당환이 곁에 있었고 당문 무사들이 정문을 바라보며 경계하고 있었다.
‘뒤에서 올지도 모르는데.’
그의 뒤는 강유의원의 가옥이 있었는데 지붕이 높지 않은 단층집이어서 무림인들에겐 그리 어려운 높이가 아니었다. 의원 쪽을 잠시 돌아보았던 그는 가옥 내 숨은 환자들의 두려워하는 눈빛과 마주쳤다.
“네 분은 저 안을 지켜주십시오.”
“저희는 소가주님을 지켜야…….”
“숙부님이 있고 저분도 계시지 않습니까? 만약 사혈주가 백성들을 노리면 순식간에 참사가 일어날 것입니다. 천독해갈단을 드시고 준비하십시오.”
“한솔아, 그건 네가 감당할 수 없는 지시다.”
당환이 당한솔의 어깨를 붙잡고 말렸다.
다리에 장애가 있어 운신이 불편하고 아무리 륜의를 익숙하게 다룬다고 하더라도 시의적절하게 방향 전환하는 것은 사실상 무척 어려운 일이었다.
‘게다가 저 여자를 믿으라고……?’
기둥에 기대어 선 채 팔짱을 끼고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이쪽을 바라보고 있는 야율균은의 모습에선 잠깐 가졌던 기대조차 사라지고 있었다.
당한솔이 어깨에 얹어진 당환의 손을 잡았다.
“제 판단을 믿습니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알았다.”
당환은 호위를 보고 있던 무사들이 가옥 안으로 들어서도록 했다. 만약 건물 안에 독무라도 터뜨리면 당문 고수들만이 신속하게 대응하는 것이 가능했으므로 백성들 안전을 생각한다면 탁월한 선택이었다.
문제는 당한솔의 안전을 보장할 수 있느냐였다.
‘젠장, 그래 네 판단을 믿으마.’
불비기룡(不飛奇龍).
‘장애 때문에 날지 못하는 기재’라 하여 당문 내에선 당한솔을 가리켜 그렇게 불렀다. 무림인으로서 발을 묶여 륜의에 의존할 수밖에 없는 신세라면 이미 사문(死門)에 발 하나는 걸친 셈이다. 그러나 그의 지성과 판단, 당문이 가진 기술을 다루는 섬세함 그리고 무엇보다 중요한 불굴의 의지는 그에게서 포기란 단어를 찾을 수 없게 만들었다.
당혁수는 내원에서 나오지 못하는 아들을 괴롭히다시피 할 정도로 혹독하게 가르쳤다. 또 혹여나 다시 걸을 수 있지 않을까 자기 전 언제나 추궁과혈을 거르지 않았다. 약관이 되고 다시 1년이 지났을 때, 다시 걷기 위한 가망은 없다는 걸 깨닫고 추궁과혈은 멈췄으나 당혁수가 들인 공(功)이 오롯이 당한솔에게 담겨 있을 거라 기대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당환이 당한솔을 반드시 지켜야 한다고 생각하는 이유가 바로 그것이었다.
“아버지는 제가 이렇게 밖으로 나올 때면 언제나 주변 반경을 맴돌면서 암살자들을 처리하곤 하셨지요.”
“응?”
당환이 당한솔을 쳐다보았다. 당한솔은 차분한 표정으로 주변을 돌아보면서 계속 말을 이었다.
“여기 면주에 오면서 생각했습니다. 서문질(西門嫉)은 노골적으로 운남 경계지에서 종종 모습을 드러내며 아버지가 다른 곳에 가지 못하게 발을 묶어 놓았습니다. 저희가 이곳으로 떠나던 날에도 어김없이 보고가 있었죠. 저는 왠지 오늘 같은 일이 벌어질 거로 생각했습니다만, 의원을 직접 공격할 줄은 몰랐습니다. 오가는 길에서 습격이 있으리라 생각했거든요.”
원래 당문은 사혈신마라는 이름보다 사혈주령(死血州領) 독수흉인(毒手凶人) 서문질이란 이름이 더 친숙했다.
“그럼 지금은 어떻게 판단하느냐?”
“오가는 길에서 습격한다면 대대적인 작전을 폈겠으나 이곳을 택했다면 아마 속전속결. 저를 직접 노리기 위한 수를 구상했을 것입니다.”
“그게 무엇이겠느냐?”
“성동격서가 가장 쉽게 펼칠 수 있는 전술이겠지요. 밖에서 소란을 피워 여기서 가장 강한 고수인 어머니를 담장 밖으로 불러내 발목을 붙잡아 여기가 비워지면 그때 직접 절 노리는 방법.”
당한솔은 그렇게 말하면서 강유의원 지붕 위쪽을 가리켰다. 당환이 고개를 뒤돌아 위를 바라보자 아무도 없던 지붕에서 하나둘씩 녹의인들이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사혈주……!”
당환의 표정이 굳어졌다.
“쳐라!”
7인의 사혈주 고수들이 허공에 도약했다.
당한솔의 손이 륜의의 팔걸이 모서리를 누르자 귀퉁이가 열리면서 은색 원반이 반쯤 튀어나왔다. 그의 손이 원반을 잡아채자마자 바로 적들을 향해 던졌다.
휘리릭!
하얀 섬광이 되어 솟구친 원반이 한 사람의 목을 뚫고 지나갔다. 회전하는 원반의 원심력에 의해 핏물이 흩어지는 사이 당한솔이 손을 휘두르자 방항을 급선회한다. 원반에 연결된 흑강사(黑鋼絲)는 그대로 두 사람을 동시에 휘감아 버렸다.
“엇!”
공중에서 거미줄에 걸린 것처럼 멈칫하며 제동이 걸리는 사이 새하얀 섬광을 뿌리는 회전하는 원반은 그대로 두 사람의 목젖을 자르고 지나가 버렸다.
뛰어오른 자들 가운데 셋이 그렇게 순식간에 당할 때, 당환도 반대쪽의 자들을 노리고 이화침을 던졌다.
“큭!”
둘을 노렸지만, 비명은 한 명에게서만 나왔다. 그조차 완전히 숨통을 끊지 못했는데 당환은 당황하지 않고 허리춤에서 뽑은 비수 세 개를 연속으로 던졌다.
날아가는 세 자루 비수.
첫 번째와 두 번째는 같은 속도지만, 세 번째 비수는 더 빠르게 뻗어 나가 첫 번째에 아슬아슬하게 못 미쳐 도달한다.
챙! 푸푹!
장도를 이용해 연속으로 쳐내려 했던 녹의인은 첫 번째 비수를 튕겨내자마자 세 번째 비수가 무릎을 관통하는 바람에 공중에서 자세가 무너졌다. 그리고 두 번째 비수가 그대로 이마에 꽂혀 비명도 지르지 못하고 절명했다.
추연비도(追燕飛刀)의 수법이었다.
당한솔과 당환이 네 사람을 처리했으나 셋은 지면에 발을 딛자마자 산개했다. 또 지붕에선 추가로 다섯 명의 녹의인이 다시 도약했다.
‘너무 많아……! 소가주를 호위할 제자들까지 백성들 곁에 붙여 놨으니…….’
당환은 다급함에 잠깐 시선을 건물 쪽에 던졌다가 여전히 팔짱을 낀 채 기둥에 기대어 서 있는 야율균은이 눈에 들어오자 화를 버럭 냈다.
“계속 구경만 하고 모른 척할 텐가!”
분노에 찬 외침은 주목을 받을 수밖에 없다. 이는 때마침 근처에 떨어져 진형대로 자리를 찾아 움직이려던 녹의인도 그녀를 발견하게 했다.
“엇!?”
지붕 아래 가려져 있어서 발견하지 못했던 것도 있지만, 세상 태평한 자세 때문에 당황하여 멈칫할 때 눈이 마주친 야율균은이 콧방귀를 뀌며 입을 열었다.
“뭘 봐? 죽을래?”
그것은 당환도, 사혈주 녹의인도 전혀 이해할 수 없는 답변이었다.
그 사이 당한솔은 륜의의 바퀴를 한 손으로 밀어내며 다른 한 손으로 륜의에 연결된 흑강사를 당겼다.
“숙부!”
당환을 부르면서 흑강사를 조종해 유성반(流星盤)을 회수하는 듯했다가 다시 떠오른 적들에게 날려 견제했다. 륜의로 방향을 돌리니 먼저 지면에 발을 딛고 달려드는 적을 정면으로 바라보았다.
철컹!
푸푸푹!
“끄윽……!”
왼쪽 바퀴 바로 위쪽의 일(一)자 홈에 손가락들을 넣어 당기자 륜의에 설치된 다리 옆 기관이 열리면서 비수들이 발사됐다.
가까이 접근해 달려들던 녹의인이 미처 반응도 하기 전에 정확히 신체의 세로 중심에 비수가 꽂히는 기가 막힌 정확도. 그 기예의 수준을 즐기지도 못하고 서둘러 고개를 돌리는 그의 시야에 당환이 도약하면서 떨어지는 적들을 향해 이화침과 장력을 펼치는 잔상이 잡힌다.
허공의 다섯을 당환이 모두 감당할 수 없기에 유성반을 틀어 나머지를 노려보지만, 집중해서 조종할 수 없으니 견제에 지나지 않는다.
펑!
작은 폭음 뒤에 공기의 흐름이 무거워지는 것을 느꼈다.
분진이 퍼지는 느낌이니 아마 이광혈독무일 터.
‘뒤……!’
어느새 후방을 점하여 달려드는 기척이 넷.
정면 담장에서도 넘어와 기척이 늘었다. 독무를 들이키자마자 단숨에 신경계를 흥분시키고 기운을 증폭시키는 효과 속에서 힘을 빌려낸 독공의 일격들을 쏟는다.
철컹!
타타타타탕!
지척에 이른 순간 륜의의 등받이 아랫부분 기관이 열렸다. 그리고 불꽃과 함께 연달아 터진 폭음에 덤벼들었던 네 명의 녹의인이 순식간에 피떡이 되어 나가떨어졌다. 또 그 반동 때문에 륜의도 앞으로 튕겨 나가며 당한솔도 앞으로 나뒹굴었다.
“큭……!”
당한솔은 다리를 가눌 수 없어 낙법 구사도 불가능하여 그대로 땅에 머리를 박았다. 그나마 방아쇠를 당긴 게 본인이라 미리 심적 준비로 다행히 기절하지 않고 신음과 함께 꿈틀거리는 것이었다.
당혁수와 함께 만든 구기륜의(九機輪椅)에서도 가장 살상력이 높은 분화총포(噴火銃砲)는 지근거리라면 화경 고수라도 감당할 수 없는 위력을 가졌으나 그 반발력 때문에 이렇게 앞으로 튕겨 나갈 수밖에 없었다. 아직 발동 안 한 장치들이 더 있음에도 최후의 무기를 꺼낼 수밖에 없던 상황.
‘등을 너무 일찍 내줬어……!’
다리의 장애 때문에 일어설 수도 없었던 당한솔은 급히 몸을 굴려 륜의를 향해 손을 뻗었다.
“한솔아, 위에!”
그때 그의 위로 그림자가 드리워졌고 동시에 당환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당환의 목소리를 듣자마자 당한솔은 허리춤에서 이화침을 뽑아 하늘을 향해 투척했다. 하늘을 덮은 인영의 급소에 정확히 명중했지만, 당한솔의 크게 당황했다. 그림자의 머리 옆으로 머리 하나가 더 삐죽 튀어나왔다. 번들거리는 민머리의 중앙을 세로로 가로지르는 적갈색 머리카락이 눈에 띄는 두상(頭相)이었다.
“잡았다, 요놈!”
녹주팔지 계훼살도(鷄喙殺刀) 옹견(邕犬)이 두 눈을 희번덕거리며 외쳤다.
나흘 전, 면주 내 사혈주의 안가(安家).
옹견은 가운데 세로로 손가락 굵기 정도만 머리카락을 짧게 남기고 나머지를 깔끔하게 밀어버린 자신의 용모를 멋스럽게 여겼다. 그래서 그는 두 손이 바쁠 일이 없는 상황에선 언제나 한 손으로는 자신의 머리카락을 만지작거리곤 했다. 특히 머리카락을 적갈색으로 염색한 후로는 더욱 만족스럽게 머리카락을 만져댔다.
물론 다른 녹주팔지는 그가 없는 장소에선 닭 볏 같다며 깎아내리곤 했다. 그 생각이 말하던 중간에 떠오른 계유각이 옹견의 머리를 흘끔거리면서 입을 열었다.
“의원에 있을 때 직접 습격하자고?”
“그래, 인적 없는 밖에서 습격하는 건 놈들이 자랑하는 암기를 마음껏 쓸 수 있게 판 깔아주는 거라고.”
“이해가 안 가는 건 아냐. 근데 그렇게 당한솔을 먼저 쳐서 죽인다고 해도 시체를 뒤질 시간을 벌거나 들쳐메고 탈출할 수 있을 만한 확신이 없잖아.”
사혈주는 당문이 가진 독에 관한 연구와 그를 뒷받침하는 의학의 깊이 그리고 암기와 기관장치를 설계한 역사에 대한 욕심이 있었다.
독공을 수련하는 그들의 부작용을 극복하고 또 독공의 위력을 배가시켜 줄 당문의 기술은 어떤 천하제일의 무공비급보다 더 간절했기에 당문 내원 어딘가에 있다는 당성기곡관(唐成機谷關)에 들어갈 수 있는 ‘열쇠’가 간절했다. 그리고 그들이 파악한 맥락에서 이 열쇠의 소지자는 당혁수와 당한솔 두 사람이 갖고 있을 개연성이 높았다.
“야이, 무식한 놈아.”
“뭐 이 새끼야?”
옹견이 손가락으로 자신의 머리를 툭툭 쳤다.
“생각 좀 해라, 이 새끼야. 당한솔이 아무리 다리 병신이라고 해도 그 당혁수의 아들이다. 당문 담장 안에서 두문불출하면서 재활만 했을 것 같니? 확실하게 확인된 정보가 없어서 그렇지 암기에 무척 뛰어나다거나 기관설계의 귀재라는 소문 정도도 못 들어봤냐? 대가리에 하자가 있지 않다면 이 정도는 손쉬운 예측 아니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