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화 - 제36장. 미친개는 몽둥이가 약이야 (6)
당환은 이화침을 다시 완갑에 꽂아 넣고 팔을 풀었다.
“창천맹에서 오셨다면 일행분들도 저희가 이곳에 있다는 걸 알고 곧 오시겠군요.”
“음……, 그럴 것 같네요.”
“그렇다면 차라리 안에 들어가서 기다리시겠습니까? 환자들을 보는 자리라 불편하실 수도 있겠지만, 일행들이 곧 올 거로 생각한다면 굳이 번거롭게 다시 갔다 올 필요는 없을 것 같군요.”
야율균은은 잠시 강유의원 안쪽을 쳐다보았다. 륜의를 타고 힘들게 움직여가면서 환자를 보는 사내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그녀는 고개를 끄덕이면서 다시 당환을 쳐다보았다.
“그러죠, 뭐.”
그녀의 대답으로 당환은 미심쩍은 부분을 완전히 지워지진 않았어도 믿을 만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마교도라면 안에 들어선 순간, 당문 고수들로 인해 사면초가에 처하는지라 분명히 거절했을 거로 생각했다. 그녀가 이 제안을 순순히 받아들였다는 건 최소한 그런 적의나 흉심(凶心)은 없다고 봐도 괜찮을 것 같았다.
“그럼 들어갑시다.”
당환을 따라 강유의원 안에 들어선 야율균은은 안쪽의 분위기를 좀 더 여실히 체감할 수 있었다.
거의 삼십여 개의 평상이 넓은 마당에 깔려 있었고 저마다 경중은 다르지만, 어딘가 병증이 있는 면주의 백성들이 평상 위에 앉거나 누운 채 자신의 진료 차례를 기다리고 있었다. 강유의원의 전각 문은 모두 개방되어 처방전이 나오는 대로 약재를 포장하고 있었고 간단한 속병이나 해열제 또는 보신용 약은 직접 달이고 있었는데 그렇게 불 지핀 화로와 탕약이 끓는 도자기만 스무 개에 달했다.
흰 면의를 입고 진료를 보는 이는 네 사람이었는데, 수십 년 강유의원에서만 진료를 해 온 75세의 동위의(董葦義)를 제외하면 나머지 셋은 모두 당문 사람들이었다.
한 사람은 ‘당타(唐陀)’라 불리며 당문 제일의 의술을 자랑하는 당부순(唐浮順)으로 그는 동위의와 오랜 친우였다. 면주에서 봉사할 때 강유의원에 자리를 마련하는 것도 바로 그 때문이었다.
다른 한 사람은 진윤지(辰玧智)로서 바로 당혁수의 아내였다. 원래 아미파의 비구니가 되기 위해 사미니(沙彌尼) 수련을 하던 여인이었으나 당혁수의 정성 어린 구애로 당문에 시집을 오게 되었다.
물론 여기엔 아미파가 미래를 위한 포석으로써 당문과 관계를 원만히 하기 위해 지원한 측면도 있었다. 그녀는 지닌 의술도 뛰어났지만, 아미산의 무학과 더불어 당문의 기예까지 일신에 지니게 된 여인이었다. 사천무림에선 그녀를 가리켜 ‘자비로운 보현보살이 당문에 강림하셨다’라는 뜻으로 당림보현(唐臨普賢)이라 불렀다.
여의(女醫)도 역시 눈에 띄지만, 역시 그녀의 눈을 사로잡는 것은 륜의에 앉아 진료를 보고 있는 사내였다.
야율균은이 조금 떨어진 곳에서 그에게 눈을 떼지 못하고 있자 근처에서 이를 본 당환이 다가와 누군지 알려 주었다.
“당한솔. 우리 당문의 소가주이자 내겐 조카가 되는 녀석입니다. ……조카지만, 저런 모습을 보고 있으면 존경스럽기도 하지요.”
“……그렇네요.”
야율균은의 고개가 자연히 끄덕여졌다.
“저래 봬도 당문 최고의 의술가 중 한 명입니다. 게다가 당문 사람이라면 누구나 독과 암기에 능통하지요. 몸이 불편한 조카를 얕보고 기습하다 죽은 마교도가 적지 않습니다.”
당환은 자랑스럽다는 듯이 얘기했지만, 그녀에게 보내는 경고이기도 했다. 아직 정체가 모두 확인된 게 아니기에 허튼짓하지 말라는 의미가 내포되어 있었다.
야율균은도 말속에 가시가 들어 있음을 느꼈으나 그녀와 일행이 이곳까지 온 목적은 명확했기 때문에 별로 개의치 않았다.
당환이 그런 의심을 그녀에게 쏟는 건 사치스러운 일이었다. 밖에서 소란이 감지되었기 때문이었다.
“밖에 무슨 일이냐?”
진윤지가 큰 목소리로 묻는 말에 두 사람의 고개가 반응하여 돌아갔다.
들어오던 백성은 소스라치게 놀라며 부리나케 마당 안으로 뛰어 들어왔고 밖에서 막 기다리고 있던 사람은 비명을 지르면서 어디론가 도망가는 듯했다.
“마교도다!”
밖에서 외치는 소리가 들려오자 당환의 안색이 어두워졌다.
당문 무사들은 급히 치료받던 백성들을 전각 안으로 피신시켰다. 또 일부는 즉각적으로 밖으로 나갔다.
“저도 도울게요.”
“여기 계시오. 우리의 싸움을 모르니 자칫 끼어들었다가 위험해질 수 있소.”
당환은 야율균은을 말렸는데 그 말엔 다 이유가 있었다. 당문은 보통의 무가와는 달라 도검을 쓰는 법이 거의 없었다. 적수공권의 무공에 독이 묻은 암기를 사용하므로 다른 문파 사람이라면 가장 곁에 두고 싸우고 싶지 않은 문파가 바로 당문이었다.
당문은 빠르게 백성들을 전각 안으로 대피시키거나 밖에서 줄 서던 사람들은 즉시 강유의원에서 벗어나도록 했다. 진윤지가 내부 배치를 지시하는 동안 당환은 바로 밖으로 나가 상황을 살폈다.
“사혈주……!”
당환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
지붕 위나 길목을 지나 강유의원 전면으로 나타난 눈에 보이는 숫자만 30여 명이 넘었으나 당환이 더 신경 쓰고 있는 건 정면의 대로 한가운데를 걸어오는 중년의 녹의인(綠衣人)이었다.
양볼에서 콧등을 가로지르는 흉터의 얼굴은 당환도 익히 아는 자였다.
“부인께 전해라. 녹주팔지(綠蛛八肢) 계유각(桂油角)이 나타났다고.”
녹주팔지.
운남 무림에서 사혈주를 지탱하는 여덟 명의 고수를 가리키는 별호였다. 그러나 지난 3년 전 홍천환 사태에서 사혈주의 후방을 당문이 공격했을 때, 당혁수의 손에 팔지 중 넷이 사망했다. 오랜 은원에 더욱 불을 지피는 사건이었기에 당문을 향한 사혈주의 적의, 사혈주를 향한 당문의 적의는 그 어떤 관계보다 극렬할 수밖에 없었다.
“적은 사혈주, 수괴는 녹주팔지 계유각입니다!”
진윤지의 표정이 진중하게 가라앉았다.
‘넷만 남은 녹주팔지는 남편이 움직일 걸 대비해서 쉽사리 움직이지 않는데 이곳에 나타나다니……. 정말 끝장을 보려는 구나. 하나가 나타났는데 둘이 나타나지 않으리란 법이 없지 않은가?’
진윤지는 급히 주변을 둘러보았다. 당부순은 의원에 가까운 사람이고 당환이 실력이 뛰어났지만, 녹주팔지는 부담스러운 상대였다. 문득 그녀의 시선에 야율균은의 모습이 잡혔다.
당환이 강유의원 안으로 들여온 여인은 스쳐 지나가듯 보아서 존재는 인지하고 있었다.
‘이 상황에서 상당히 침착하구나.’
그녀를 잠깐 살핀 진윤지의 표정에 희미한 미소가 떠올렸다.
“으악!”
밖에서 다투는 소리와 함께 비명이 들려왔다.
“시숙(媤叔)! 원내에서 한솔이를 지켜주세요. 너희 넷은 남아서 이를 도와라. 나머지는 나와 함께 나가 적들을 물리친다. 청성파가 근처에서 순찰을 돌고 있으니 그때까지 버티면 된다. 가자!”
진윤지는 조금 다급해져서 당환을 보며 급히 소리치고 밖으로 당문 무사들을 끌고 밖으로 달려나갔다.
“이런……!”
등 뒤로 당환이 안타까워하는 목소리가 들렸다.
아마 당문의 안주인이 선두로 나서는 것보다 내원에서 자리를 지키고 보호를 받는 것이 순리이기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이곳에서 당문 최고수는 다름 아닌 그녀였으니 직접 계유각을 막지 않으면 곤란했다.
이미 싸움은 벌어지고 있었다.
빠르게 전장을 살핀 진윤지는 구도가 그들에게 불리하게 돌아가고 있음을 파악했다.
먼저 강유의원 전면의 길목에서 잿빛 분진이 자욱하게 깔려 있었다. 분진 사이사이로 녹색 빛깔의 분진도 섞여 있었는데 진윤지는 보자마자 사혈주가 깔아놓은 독무(毒霧)임을 깨달았다.
“천독해갈단(千毒解渴丹)을 물어라!”
진윤지가 같이 나온 사람들에게 바로 외쳤다. 천 가지 독에 저항하고 호흡기를 보호해 줄 수 있는 당문 비전의 해독약이었다. 사전 사후에 모두 효과가 있지만, 역시 가장 효과가 좋은 건 사전에 복용하는 것이었다. 그렇지 않으면 담벼락에 붙어서 고통스러워하며 호흡을 고르는 당문 제자들과 같이 짧으면서도 이런 전투 상황에서는 꽤 길다고 볼 수 있는 시간을 버텨야만 했다.
독무는 그녀도 처음 본 것이었지만, 사혈주가 괴이한 독무를 사용한다는 보고는 들은 적이 있었다.
부작용이 큰 독공을 수련하는 사혈주의 특성상 이를 극복한 소수의 고수를 제외하면 소속 제자들은 평균 수명이나 무공이 낮은 편이었다. 당연히도 독과 의약에 모두 능통한 당문은 그들에게 상극과 같은 존재였다. 함부로 건드리기에는 두려우면서도 불가피하게 맞붙기 시작하면 사생결단을 내는 사이인 것이다.
3년 전 당문에게 후방을 공격당하면서 사혈주는 끔찍한 피해를 보았다. 독도 잘 통하지 않는 데다가 그들이 사용하는 기관장치의 살상력은 끔찍한 수준이었다. 일신의 무공도 상당히 뛰어나 개개인으로 상대하기 까다로운 등 전체적으로 열세가 될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사혈신마가 고안해 낸 것이 이광혈독무(以狂血毒霧)였다.
이광혈독무는 사혈주의 독공에 사용하는 독들과 광혈종이 사용하는 홍문단을 배합하여 만든 분진독(粉塵毒)이었다. 이를 공기 중에 뿌리면 마치 안개처럼 지역에 머물면서 천천히 퍼져 나가는데 일정량 흡입하면 신경계 자극으로 인한 광기를 얻음과 동시에 사혈주가 수련용으로 사용하는 사혈백독(死血百毒)에 중독된다. 미량만 흡입한 정도면 견딜 수 있을 것 같이 보지만, 홍문단의 내공 증폭 효과가 일부 작용하면서 중독 증세를 촉진하므로 무척 치명적이었다.
즉, 적에게는 자체로 치명적인 독무요, 사혈주 고수들에겐 무력을 증폭시켜주는 좋은 구역을 만드는 셈이었다.
‘나를 기다리고 있었구나.’
진윤지는 천독해갈단을 씹으면서 기분 나쁜 미소와 함께 자신을 쏘아보는 계유각을 쳐다보았다.
“할망구야, 당혁수도 여기에 없는데 아들은 다리 병신이라 도망도 못 가고. 그래도 다행이야, 저 의원에서 네년 관짝은 준비해 줄 테니.”
“글쎄, 다리 넷 남은 거미가 하나를 더 잃게 생겼으니 제집에서 곧 떨어질 형국일 거 같구나.”
진윤지는 어처구니없다는 듯 웃으며 받아치고는 양손에 하얗게 빛나는 장갑을 꺼내 착용하고 있었다.
천독해갈단을 먹어도 독공을 사용하는 녹주팔지 이상의 고수들은 확실히 부담스러웠다. 손바닥만 마주쳐도 그 독기가 침투하는데 그 농도가 매우 짙어서 아무리 해독단을 복용해도 감각이 무뎌지거나 작은 마비 증상, 통증 등이 오는 건 피할 수가 없었다.
금사장갑(金絲掌匣)은 그래서 제작된 것이었다. 최초엔 여러 독이 묻은 침을 다루기 위해 처음 제작되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를수록 백금사의 강성을 높이고 이중으로 조직하여 도검까지 상대할 수 있도록 하고 사혈주의 존재로 인해 중국엔 속가죽에 해독제까지 도포 경화하여 독기의 침투를 차단할 수 있도록 발전시킨 기물이었다.
“클클, 요망한 할망구 같으니라고. 그래, 어디 재주껏 죽음을 피해 봐라. 끝이 어디일지는 오래 걸리지 않을 것이니.”
진윤지는 그의 말 속에 담긴 가시가 상당히 거슬렸으나 오래 고민할 겨를은 없었다. 계유각이 노골적인 살의를 드러내며 달려들었기 때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