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화 - 제36장. 미친개는 몽둥이가 약이야 (5)
진도건은 다시 방립을 썼다. 그의 적안을 몇 사람이나 봤을지는 모르겠지만, 사천 상황이 정리되기 전까지는 굳이 다시 드러내고 다닐 필요를 느끼지 못했다.
최현걸은 위군보에게 다가가 머리를 쓰다듬었다.
“괜찮으냐?”
“예, 지금은 괜찮습니다. 무공이 대단히 뛰어나신데요?”
“흐흐! 얼마나 볼 줄 안다고 그런 소리를 하느냐?”
“너덧 명을 동시에 상대해서 이길 수 있으면 뛰어난 거 아니겠습니까?”
큰 충격을 받았을 법한데도 불구하고 웃음을 보이면서 이야기하는 게 제법 기특했다. 최현걸이 위군보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나 때문에 험한 꼴 당한 셈이니 내가 어찌 갚으면 되겠느냐?”
“중요한 일 때문에 온 거 같으신데 마무리되면 손님들 많이 데려와서 매상 올려 주시면 그게 좋은 일 아니겠습니까?”
“넌 이 지경이 돼서도 장사할 생각이 나느냐?”
옆에서 듣고 있던 오 숙수가 괜히 위군보에게 핀잔을 주었다. 하지만, 그게 또 싫지 않은 위군보의 매력이었으니 얼굴엔 미소가 떠올라 있었다.
“습격! 습격이다!”
그때였다.
남쪽 방향 길에서 한 사내가 다급한 외침과 함께 달려왔다.
그는 청성파 속가제자였는데 처음은 여문위를 발견하고 달려온 것이었다. 그러나 곧바로 그 옆의 정평자 주윤을 발견하고 서둘러 예의를 갖췄다.
“정평자 사숙께 인사 올립니다.”
“무슨 일이냐? 습격이라니?”
“순찰을 하다가 우연히 발견했습니다. 마교 놈들이 강유의원을 포위하였는데 그 수가 대충 서른은 넘습니다.”
“강유의원? 거기에 누가 있느냐?”
정평자는 이제 막 면주에 온 것이기 때문에 마교가 습격할 만한 주요한 인물이 누가 있는지 알지 못했다.
여문위가 무거운 표정으로 대답했다.
“당문 소가주가 진료를 하고 있습니다.”
“이런! 그를 지켜야 한다!”
정평자가 놀라 소리쳤다.
거리상으로 청성파는 성도와 가까웠지만, 그곳엔 당문이 성내에 자리하고 있었기 때문에 실상 성도 북쪽의 면주와 덕양구(德陽區)의 치안을 위주로 담당하고 있었다. 이곳에서 당문 소가주가 마교도의 손에 당한다면 청성파의 체면이 말이 아닐 것이다.
게다가 당한솔은 장애가 있지 않던가?
“저희도 가겠습니다.”
“갑시다! 꾸물거릴 시간이 없소!”
영은성의 제안에 정평자는 망설이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 * * *
면주에 도착하기까지 얼마나 쉬지 않고 달려왔는지 몰랐다. 진도건과 천서은이 애정전선을 펼치면서 절로 숨 막힐 듯한 분위기가 형성된 상황은 야율균은으로서 별로 환영하기 어려웠다. 거기에 더해 특히 지운천을 만났을 때, 본능적으로 느껴지는 위협적인 느낌은 가슴 한편에 작은 불안감으로 남아 있었다.
‘누굴까?’
그렇게 물음을 던져도 바로 툭 튀어나와 그녀를 만족시킬 수 있는 답은 아직 떠오르지 않았다.
마기의 흔적은 진도건만큼은 아니지만, 그녀도 그 기척을 느낄 수 있었다. 진도건이 지나치게 예민할 뿐이었다. 근처 시야에 둘 수 있는 곳에 있는 자들 가운데 마인이 있다면 그녀가 그 기척을 느끼지 못할 리가 없었다.
흑풍대원들에게서도 느꼈고 야율신에게서도 느꼈다. 심지어 기를 갈무리하던 야율재조차도 말을 붙여 달릴 수 있는 거리라면 느낄 수 있는 것이었다.
하지만, 지운천에게서는 그 어떤 것도 느껴지지 않았다. 그렇기에 그녀에겐 더욱 위협적이었다. 초원 전사의 본능은 자꾸 그가 위험하다고 외치고 있는데 오감이나 기감은 그 어떤 위험신호도 보내지 않고 있는 그 괴리감이 그녀를 혼란에 빠뜨린 것이다.
다행히 지운천은 일행에서 다시 떨어져 나갔고 그가 그녀에게 큰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는 사실에 그저 안도할 뿐이었다. 다만 한 가지 껄끄러운 점이 남아 있다면 그가 마교 고수라고 가정했을 때, 야율균은은 자신의 정체가 탄로 났을지도 모른다는 부분이었다.
어쨌든 이런 이중고의 답답함 속에서 면주에 도착하자마자 좀 쉬고 가자고 의견이 일치되었을 때, 그녀는 곧바로 혼자 바람 좀 쐬고 가겠다는 얘기부터 던졌다.
그녀도 배가 고프긴 했지만, 그들처럼 당장 포식부터 할 생각보다는 잠깐의 자유와 여유가 더 시급했다. 그녀는 시장을 지나면서 박취자(薄脆子)라는 주전부리로 대충 허기를 달래며 사람들 사이를 걸었다. 박취자는 밀가루 반죽을 노릇하게 튀겨낸 것인데 반죽에 여러 과일이나 향신료 등과 섞어 맛을 내게 한 것이었다.
처음 먹어본 시큼한 향미가 괜스레 식욕을 자극하자 과일도 하나 더 샀다.
그녀는 처음 보는 과일이었다. 과일상이 좌판에 깔아놓은 초록과 빨강의 영롱한 빛깔이 탐스러운 자두(李子)였는데 초록 자두와 빨간 자두 하나씩 사서 입에 물었다.
달콤한 과즙이 입안과 손끝을 적셨다. 이어서 느껴지는 게 새콤하면서도 톡 쏘는 향에 절로 인상이 찡그려지지만, 답답한 기분을 일깨우는 신선한 느낌을 선사한다. 냉큼 두 개나 먹어치우며 그 씨를 뱉어 나무 아래 던져 놓았다.
때마침 가까이 흐르는 강가로 내려가 가볍게 손을 씻었다. 그리고 좀 더 방향 상관없이 계속 걸었다.
얼마나 걸었을까, 문득 제법 북적이는 곳이 그녀의 눈에 들어왔다.
무엇보다 그녀의 신경을 쓰게 한 것은 그 북적거림이 무림인들과 평범한 백성들이 한 데 섞여 만들어내고 있다는 것이었다.
제법 넓게 이어지는 담장과 그 너머로 보이는 전각.
자연스럽게 조금 거리를 두고 담장 길을 따라가서 큰 정문에 걸린 현판을 보았다.
강유의원.
면주 최대 의원답게 상당한 규모의 의원이었다. 일전에 잠깐 천무방에 들렸을 때, 산서 태원에서 비슷한 규모의 의원을 봤던 기억이 있었다. 한 가지 다른 점은 그때 본 의원보다 이곳을 드나들고 있는 사람들이 더 많았다는 점이었다.
문득 궁금증이 생긴 그녀는 의원 쪽으로 걸어갔다.
정문과 반대쪽 담장을 따라 진료를 기다리는 백성들이 제법 길게 줄을 서고 기다리고 있었다. 중간중간 무공의 기척이 있는 무림인들이 사이사이 경비를 서면서 주변을 감시하고 있었는데 그들의 복색이 조금 특이했다.
보통 무림인들이라면 적수공권의 무공이 특기가 아닌 이상에야 도검 등의 알아보기 분명한 무기를 지니고 있기 마련이었다. 그녀의 일행이 갖춘 행색이 일반적일 것이다.
하지만, 이들은 그런 도검류 병장기보다는 오히려 허리춤에 가죽 주머니 같은 것이 달린 복대를 차고 있었다. 하의에도 주머니를 달아 놓은 자들도 있었고 팔에 두른 완갑에도 묘한 형상들이 눈에 들어왔다.
그들도 야율균은을 발견하고 그녀의 행색을 살폈다.
검은 무복을 입고 등 뒤엔 보기 드문 만곡도 두 자루를 차고 있으니 영락없는 무림인이긴 했지만, 그래도 빼어난 그녀의 미모와 더불어 정말 의원을 구경하러 온 사람 같은 행동거지가 경계심을 다소 떨어뜨리고 있었다.
오히려 신기한 점은 그런 무인들이 줄 선 백성들의 상태를 살피면서 들고 있는 장부에 뭔갈 적고 있는 모습이었다. 아마 환자가 아픈 부분을 미리 점검하는 모양이었는데 그렇게 한 쪽지 적고 나면 정문을 지키는 자에게 건네주어 안에 전달되게 하고 있었다.
어쩌다 보니 정문 앞에 이르러 안을 바라보게 되었다. 문 너머로 넓은 마당이 보였고 거기에 평상들을 깔아놔 환자들이 눕거나 앉아 있도록 하고 흰색 면의(綿衣)를 한 겹 걸쳐 입은 사람들이 환자들을 보고 있었다.
그때 야율균은의 눈에 문득 한 사람이 눈에 들어왔다.
한 사내가 바퀴를 달아 놓은 의자, 륜의(輪椅)를 타고 평상을 다니면서 환자들을 살피고 침을 놓는 등의 일을 하고 있었다. 안에서 환자를 보는 일이 그를 중심으로 굴러가고 있는 느낌이었다. 어질고 부드러운 인상에 아픈 백성들을 공감하는 표정에서 느껴지는 따스함은 전에 본 적 없던 느낌이었다.
야율균은은 자기도 모르게 한동안 넋을 잃고 바라봤다. 중원에 넘어오면서 처음 느껴본 기분이 가져다주는 설렘에 조금 취했던 것이다.
“무슨 일로 오셨습니까?”
그래서였을까, 바로 옆에서부터 목소리를 듣고 나서야 누군가가 가까이 다가왔다는 사실을 비로소 인지할 수 있었다.
경비를 서거나 줄 선 백성들에게 문진(問診)하던 무인들과 비슷하게 팔다리에 이런저런 주머니들이 달린 복장의 중년인이었다. 다만 다른 사람들과는 다르게 하얀 면의를 한 겹 더 입었다는 것이었다.
야율균은은 그에게 포권을 취하며 고개를 숙였다.
“아, 불편하게 했다면 미안해요. 단지 어떤 문파이길래 이렇게 일반 백성들을 상대로 의료행위를 하는지 궁금했는데, 생각보다 진심으로 하시는 것 같아서 넋 놓고 쳐다봤네요.”
중년인은 그녀를 신기하게 쳐다보았다. 사천 사람이라면 당문을 모른다는 게 말이 안 됐기 때문이었다.
“저희는 당문 사람들입니다. 무림에선 독공과 암기술 등으로 유명하긴 하지만, 백성들에겐 이름 높은 의가(醫家)로도 많이 알려져 있습니다. 독을 만들면 해독제도 같이 만드는 것처럼 의술도 따라서 발전할 수밖에 없으니 자연스럽게 백성들에게 봉사하는 것으로 나름의 속죄를 하는 것이지요.”
“아, 사천당문. 들어본 것 같습니다.”
“허허, 그것도 신기한 표현이군요. 여협의 행색과 기백이 예사롭지 않으니 무림에 적을 두고 계신 듯한데…… 외람되지만, 외지에서 오셨습니까?”
그가 말한 외지란 당연히 사천 바깥의 중원이 아니라 새외를 일컫는 것이었다.
“제 성은 야율 씨에요. 북쪽 몽골 초원과 요국이 제 출신이지요. 그래서 중원 무림의 사정은 잘 모릅니다.”
“야율 낭자셨군요. 전 당환(唐煥)이라고 합니다. 그렇다면 따로 소속된 문파는 없으시겠군요.”
야율균은은 잠시 흑풍대 시절을 떠올렸다.
“……지금은 없어요. 다만 같이 온 일행이 있는데 성도의 당문이 목적지였던 걸로 기억합니다. 그런데 말씀을 들어보니 제가 잘 찾아온 것 같군요.”
당환이 팔짱을 끼면서 웃음을 터뜨렸다. 그러면서 손가락이 면의로 가려져 있는 완갑 쪽에 닿았다.
“허허허! 그렇습니까? 이거 손님이었을 줄은 꿈에도 몰랐군요. 그런데 저희를 잘 모르셨으면서 또 어떻게 일행은 저희를 알고 찾아오려고 하셨습니까? 무척 오묘한 조합이로군요.”
당환은 웃으면서 얘기하고 있지만, 그 웃음 뒤엔 은밀한 독수가 숨겨져 있었다. 그의 상식적으로 야율균은의 이야기는 이해하기 어려운 부분이 있었고, 그런 목적을 지닌 일행이라면 어쩌면 마교도가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었기 때문이었다. 그렇기에 팔짱 낀 손가락 사이로 이화침(梨花針)을 끼운 건 여차하면 제압할 생각이 있어서였다.
그런 측면에서 야율균은의 이러한 접근은 매우 순진한 짓이었다. 당문은 백성들에게 그 의료행위로 추앙받지만, 무림에서는 어쩌면 사파나 마도보다도 더 냉혈한 면모를 갖춘 집단이 바로 그들이었다.
“뜻하지 않게 함께 다니고 있지만, 일행들은 모두 중원 무림 문파에 적을 두고 있으니까요. 음……, 저흰 창천맹의 지령에 따라 이곳에 온 겁니다.”
야율균은은 애초에 이 여정의 목적에 대한 책임 의식이 어중간했기 때문에 말하는 중간에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잠시 고민했다. 다만 이들이 당문이라고 한 이상 굳이 정체를 숨기지 않아도 된다는 생각이 들어서 창천맹 얘기를 꺼냈다.
당환이 듣기에 야율균은의 설명이나 어투가 무척 어설프다고 느껴졌다. 그러나 창천맹이 당문을 비롯한 사천삼정을 돕기 위하여 고수들을 파견할 궁리를 하고 있다는 건 알고 있었다. 그래서 미심쩍긴 해도 듣기에 타당한 부분도 있어서 마냥 의심할 수도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