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화 - 제36장. 미친개는 몽둥이가 약이야 (1)
“근데 측천무후 얘긴 왜 꺼낸 거지? 너무 뜬금없는 것 같은데.”
영은성의 말에 최현걸은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역사 지식 자랑하려는 건 아닐 것이고……. 측천무후라, 민중에겐 현명한 군주였으나 황실의 권력을 잡기 위해 당시 황후였던 왕씨를 끔찍한 방법으로 모욕을 주고 죽인 과가 있는 여황제.”
“……무측천은 재위 기간에 당제국의 국호를 주(周)로 고친 역사가 있어. 자신만의 무주(武周)를 세운, 당 제국의 역적이지.”
최현걸이 잠깐 멍해진 표정으로 영은성을 쳐다보았다.
“……하하, 그건 너무 나간 것 같은데? 지운천이 그런 역모나 황실을 전복시키려는 의도를 암시했다는 말을 하고 싶은 거냐?”
“나는 그저 네가 말하지 않은 역사의 일부분을 얘기한 것뿐이야.”
황당하다는 표정으로 되묻는 최현걸에게 마찬가지로 영은성도 멋쩍은 표정을 지으며 대답했다.
두 사람의 대화는 더 이어지지 못하고 어색한 공기가 감돌았다. 감히 입에 담기 어려운 ‘역모’라는 단어가 주는 존재감이 크게 감돌았기 때문이었다.
진도건은 그런 분위기 속에 중얼거리듯 짤막한 한마디를 던진다.
“저자를 다시 만날 땐 적으로 마주할 거 같군.”
그의 목소리엔 적의(敵意)가 강하게 담겨 있었으니 지난 동행이 그에게 있어서 얼마나 기분 나쁜 시간이었는지 여실히 드러났다.
그것은 지운천이 떠나면서 비로소 불편한 마음이 해소됐던 천서은에게 또 다른 불편함을 안겨주었다.
천서은은 그 말을 듣고 잠깐 고민했다.
‘내게도 화난 것 같은데 이걸 어떻게 풀지……. 그런데 내가 지운천에게 마음을 준 것도 아니고, 다른 부도덕한 행동을 한 것도 아닌데 왜 나만 죄인 된 기분을 느껴야 하는 거야…….’
천서은은 강한 여자였다.
애통한 감정을 오래 앓아왔기 때문에 진도건에 대한 감정도 각별했지만, 그렇다고 그녀의 강한 개성이 사라질 리는 없었다. 그녀는 의존적이지 않은 자립심 강한 여자였고, 거만하지는 않으나 자존감이 넘치는 여자였다.
존중과 이해, 반성을 위한 성찰은 그녀 자신을 높이기 위해서 언제든 감내할 가치들이었으나 스스로 낮추기 위해 사용하는 법은 몰랐다.
연인 간 관계 속에 잘잘못이 명확하지 않은 모호한 경계에서 그들은 헤쳐 나가본 경험이 없었다. 그렇기에 저마다 올바른 판단을 할 수 있는 시기에도 안이한 판단으로 시간을 끌고 있는 셈이었다.
“가자. 갈 길이 멀다.”
잠깐 쉬어 갈 법도 하지만, 진도건의 단호한 목소리에 네 사람은 일단 그 뒤를 따랐다. 그렇다고 불만이 없는 것은 아니었으나 당장엔 누구 하나 표현하는 사람은 없었다.
분명 그들의 이동은 시간을 촉박하게 사용할 필요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이런 얼어붙은 공기를 깨뜨릴 수 있을지는 아직 아무도 알 수 없었다.
험준한 협곡 속에서 그들은 금우도(金牛道)의 잔도를 타고 빠르게 남서쪽으로 나아갔다.
사람 셋이 나란히 서면, 가득 찰 정도로 좁은 잔도는 가파른 경사로나 깎아지른 벼랑의 돌벽에 만들어져 일반 백성들이나 군사들이라면 진중하게 주의를 기울이면서 다닐 필요가 있었다. 행군을 위해 잔도를 사용한다면 좁은 길 때문에 한중까지 족히 보름은 잡고 가야 하지 않을까 싶었다.
묵묵히 잔도를 따라 어느덧 검각(劍閣)까지 지나게 되었다. 좌우로 높게 솟은 대검산(大劍山)과 소검산(小劍山) 사이를 틀어막은 검각의 성루와 성벽은 말 그대로 천하웅관(天下雄關)이라는 명성에 딱 들어맞는 천혜의 요새였다.
일부당관만부막개(一夫當關萬夫莫開),
한 사람이 관문을 지키면 만 명으로도 뚫을 수 없다는 말이 적절했지만, 한중성이 1차적인 저지선으로 건재한 이상에 당장 이곳에 대병력이 주둔할 만한 일은 없었다. 지금 감숙에서 벌어지는 전쟁도 금나라 영토에서 벌어지는 셈인데 사천은 남송의 영토였다.
일행은 무사히 검각까지 통과하면서 파촉 성도까지 이르는 유일한 관도인 검문촉도(劍門蜀道)를 따라 내달렸다. 때때로 사람을 마주할 때면 눈치채지 못하게 멀리서부터 절벽을 따라 튀어나온 나무들을 밟고 올라가 그들 머리 위로 지나갔다.
그렇게 쉬지 않고 경공을 펼쳐 내달리니 해가 떨어지기 전에 면주(綿州)에 도착할 수 있었다.
* * * *
촉지사절(蜀之四絶).
파촉 땅 사대절경 중 한 곳으로서 알려진 청성천하유(靑城天下幽)라는 명성은 도교의 성지이자 사천삼정의 주축으로 거듭난 청성파가 가진 위세와 동등한 가치로 느낄 정도로 백성들에게 각인되어 있었다.
3년 전, 홍천환이라는 절세 영약의 등장과 함께 이를 노린 사천 땅의 사파 문파들이 북진하던 때에 운남의 악명 높은 독문(毒門)인 사혈주가 은밀히 그 뒤를 쫓아와 무차별 공격을 일삼았다.
이때 주백자의 안배로 은밀히 힘을 키우던 사천 전통의 정파 3강인 아미파와 청성파, 당문이 등장하여 이들을 다시 운남 오지로 쫓아내는 데 성공했다. 이로써 다시 평화를 쟁취하고 사천정파의 위상이 높아질 것으로 여겨졌으나 그것은 구도상 그렇게 보이는 것일 뿐 사천의 실상은 그리 녹록지 않았다.
흩어져 도주한 사혈주의 세력은 앙심을 품고 사천 전역의 강 지류에 독을 풀었다.
익주(益州), 재주(梓州), 이주, 기주(夔州), 네 지역을 합쳐 사천이라 불리는 것이지만, 사천의 천(川) 자를 강으로 오해하는 사람이 많을 정도로 고산지대에서 시작해 장강으로 흐르는 가릉강, 민강(岷江) 등 지류가 정말 많이 흐르고 있었다.
이 강들도 무척 크기 때문에 여기에 풀어봐야 희석되어 사라질 것을 알고 있던 사혈주의 독인들은 민가로 흘러가는 더 작은 지류를 노렸는데 이는 고스란히 백성들의 병치레로 이어졌다. 또 약탈, 방화, 납치 등의 온갖 범죄를 일으키기도 하니 치안이 엉망이 되면서 무림에 대한 원성이 매우 높아졌다.
청성파와 아미파는 도교와 불교라는 양대종교의 뿌리로서 민심을 달래줄 필요가 있었고, 무림에 속하기도 했기 때문에 전역에 잔존한 마교 세력들을 소탕하는 데 힘을 보태기도 했다. 당문은 독과 암기의 명가이지만, 그만큼 의술에도 밝아서 전역을 돌며 아픈 백성들을 치료하는 데 주력했다.
하지만, 이런 수습조치도 수월하게 돌아가지 않았다.
구주마종의 일주로서 천마신교를 등에 업은 사혈주는 다시 운남에서 세력을 불려 호시탐탐 북상을 노렸고 광혈종과 염황종은 중원에서 들어올 수 있는 경로를 장악하면서 심상치 않은 포위 구도를 형성하고 있었다.
이따금 발생하는 국지적인 도발과 희생이 이어지면서 가뜩이나 문도 수가 아직 번성하지 못한 사천의 세 정파는 저마다 나름의 고역에 시달리면서 무척 예민한 상황이었다.
“시펄롬들, 제깟 놈들이 무슨 정파야? 유지비라고 뜯어간 게 도대체 얼마여? 나 같은 양민들에게 기부하지 못할망정.”
“사람들도 제대로 학을 뗀 모양입니다. 청성도관에 우리 같은 무지렁이들 발길 끊긴 지 오래라는데 봉헌금(奉獻金)도 안 걷히니 더 악착같이 뜯어내는 거겠죠.”
청성파의 청색 도복을 입은 도사들이 다녀간 이후, 몇 집 더 건너서 멀리 떨어지는 걸 확인한 오(吳) 숙수가 투덜거리면서 돌아섰다.
청성파 도사들의 그런 상납제로 인해 면주 최고의 면양객잔(綿陽客棧)에서 일하면서도 주머니에 들어오는 녹봉이 줄어드는 것을 체감하던 위군보(韋君寶)로서는 맞장구치지 않을 수가 없었다.
“말코 도사 같으니라고. 으휴, 이러다 가게 문 닫아야 할 지경이다. 어? 군보야, 손님 받아라!”
오 숙수 옆에서 뒷담화를 들어주던 위군보는 그의 말에 급히 고개를 돌렸다.
객잔 문이 열리면서 방립을 쓴 검은 무복 차림의 네 사람이 들어왔는데 그들 중 셋은 검을, 하나는 그 비슷한 길이의 나무 지팡이를 들고 있었다. 나무 지팡이는 이해가 선뜻 되지 않았지만, 다른 사람이 검을 찬 것을 보고 일단 무림인이라고 파악한 위군보는 조심스러운 태도로 다가갔다.
“면양객잔에 어서 오십시오. 식사하러 오셨는지요?”
“그렇네. 그리고 하룻밤 묵을 방도 빌릴 수 있겠나?”
“아아, 저희 객잔은 최대 2인실입니다만, 세 개면 되겠습니까?”
“일행이 한 사람 더 있긴 한데……, 그래도 되겠네. 그렇게 해 주게.”
목봉을 든 사내가 수를 헤아려 보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일단 이쪽에 앉으시지요.”
위군보가 접객용 미소를 지어 보이며 그들을 빈자리에 안내했다.
위군보는 점소이의 능력으로 빠르게 새로 들어온 손님들의 행색을 살펴보았다.
일단 모두 면주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느꼈다. 방립을 쓰고 나타난 것부터 조금은 체취도 풍기는 게 오랫동안 옷을 갈아입지 못한 듯한 것이 아무래도 여행객 같았다. 외모도 다들 괜찮았다. 사내 한 명이 좀 잘 생기긴 했지만, 다른 이들도 크게 나쁘지 않았는데 특히 한 사람은 눈동자가 붉은색이어서 그의 관심을 잠깐 사로잡기도 했다. 중원인의 얼굴형과 색목은 처음 보는 조합이었기 때문이었다. 무엇보다 여인의 미모가 대단히 뛰어나서 그의 20년 인생사 스쳐 지나갔던 수많은 여인 가운데서도 단연 으뜸인 것 같았다.
“여긴 뭐가 맛있는가? 며칠 동안 말라비틀어진 건량만 먹었더니 허기가 져서 말일세. 어서 얘기해보게.”
목봉 든 사내가 자기 배를 만지작거리자 거기에 바로 반응했는지 꼬르륵 소리가 요란하게 흘러나왔다.
위군보는 큰손이 왔다는 생각이 들자 웃으면서 면양객잔이 자랑하는 요리들을 소개하기 시작했다.
“일단 면주에 오셨으면 쌀국수를 드셔보시는 것이 좋습니다. 이 지역의 대표적인 주식인데 저희는 소고기를 삶고 파도 같이 우려서 국물을 내어 고소한 맛이 일품입니다. 면양화과(绵阳火锅)도 추천해 드릴 수 있습니다. 마라(麻辣)한 홍탕에 고기를 넉넉히 찍어 드시고 백탕의 구수함으로 입가심도 하면, 크으……! 이만한 맛이 없습니다. 석팽양육(石烹羊肉)도 드셔 보십시오. 서장에서 넘어온 요리인데 양 뱃살 가죽에 뜨겁게 익힌 돌과 양고기를 넣어 찐 요리입니다. 처음 보신다면 동그랗게 부풀어 오른 양 뱃살이 신기하실 것이고, 그걸 갈라서 안에 든 양고기와 채소들을 드셔보시면 제가 왜 추천하는지 절실하게 느끼실 겁니다. 그리고 또…….”
“얘기해준 순서가 딱 먹기 좋은 조합인 것 같은데?”
“헤헤, 그럼요.”
“그럼 쌀국수는 간단한 요기용으로 2인분만 내주시고 면양화과와 석팽양육도 2인분씩 부탁하네.”
“허기지실 테니 잽싸게 준비해드리겠습니다.”
위군보는 기대만큼은 못 먹는 것 같아 아쉬웠지만, 겉으로는 전혀 내색하지 않은 채 주문한 요리들을 쪽지에 적고는 빠른 걸음으로 주방으로 갔다.
“칠호(七號)에 쌀국수 둘, 면양화과 하나, 석팽양육 하나 주문이요!”
오 숙수는 이미 밖에서 위군보가 하는 얘기를 들어서 벌써 양고기를 담을 양가죽을 준비해두고 있었다. 그는 큰 그릇에 양고기와 야채들을 수북하게 붓고 미리 만들어놓은 양념장을 뿌렸다. 그러면서 위군보를 향해 손짓하자 그가 가가이 다가왔다.
오 숙수는 위 군보에게 몸을 살짝 기울이며 턱으로 주방 밖을 가리켰다.
“혹시 청성파 놈들이냐?”
“여행객인 거 같습니다요. 그 말코들은 자기 문파의 자부심이 세서 도관과 도복을 벗는 법이 없지 않습니까?”
“속가제자도 있지 않으냐? 그놈들은 도복 안 입잖아?”
“속가제자들도 청성파의 명성에 먹칠하면 안 된다고 청색 계열의 복장으로 색을 맞추어서 입고 다닙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