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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의 귀신-190화 (190/432)

190화 - 제35장. 지운천(智雲天)이란 남자 (6)

최현걸이 방립에 가려져 보이지 않는 야율균은의 얼굴 쪽을 쳐다보았다. 저 방립 뒤에 무슨 얼굴을 하고 있는지 문득 궁금해지면서 그도 모르게 경계심이 조금 상승하며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그러나 어둠이 조금씩 내려앉기 시작하는 산림으로부터 느껴지는 수상한 기척은 없었다.

진도건의 뒷모습을 보는데 그도 별 반응이 없었다.

감각이 가장 예민한 사람은 바로 그였으니 그가 잠잠하다면 별일 없을 거라 봐도 무방했지만, 최현걸은 어쩐지 작은 불안감과 동행하고 있다는 느낌이 조금씩 들기 시작했다.

“이제 꽤 어두워졌는데 다들 답답하게 방립만 계속 쓰고 있지 말고 바람 좀 쐬시오. 자꾸 흘끔거리면서 세상을 보려고 하면, 이 눈이 나빠진다오.”

지운천의 말에 영은성과 최현걸은 이내 방립을 벗었다. 이어 천서은도 방갓을 벗었다. 이미 한 번 얼굴이 드러났으니 문제 될 건 없었지만, 그녀의 얼굴은 진도건에게로 돌리고 있었다.

진도건도 방립을 벗었다. 상투를 튼 머리카락은 천서은의 머리카락에 가려져 그 색이 드러나지 않았지만, 붉은 눈동자는 산 그림자 속에서 은은하게 제 색을 내고 있었다. 그 붉은 눈으로 천서은을 한 번 보고 미소를 짓고는 그녀의 어깨너머 지운천과도 눈을 마주쳤다.

“역시 잘못 본 게 아니었구려. 붉은 눈동자라, 귀공은 참 희귀한 사람이오.”

최현걸은 슬쩍 두 사람 눈치를 살폈다. 분명 이유가 있겠지만, 진도건이 쉬이 방립을 벗은 것만으로도 의외라는 생각이 들었다. 적안은 당연히 인상에 깊게 남을 수 있어서 이 행동의 결과가 차후 어떤 식으로 돌아올지 예측하기 어려웠다.

의외인 사람은 또 있었다.

야율균은은 아예 벗을 생각이 없었는지 꼼짝도 하지 않았는데 일부러 지운천의 시계에 들어가고 싶지 않았는지 그의 뒤에서만 말을 몰고 있었다.

“태어날 때부터 그런 눈이었소?”

지운천이 다시 질문을 던졌다. 그리고 진도건은 망설이지 않고 입을 열었다.

“태어났을 때는 그렇지 않았소. 다만 어릴 적에 반사된 태양 빛을 직접 눈에 쐬면서 실명할 뻔한 적이 있었는데 돌팔이 의사가 잘못 건드는 바람에 눈동자가 적화(赤化)되었소. 치료하려고 애를 썼는데 시력만 간신히 회복했을 뿐 이건 돌려놓지 못했소.”

뒤에서 가만히 듣고 있던 영은성은 속으로 감탄했다.

진도건이 표정 하나 변하지 않고 뻔뻔하게 거짓말을 잘 해냈기 때문이었다. 고개를 끄덕이는 지운천의 눈치를 보아하니 왠지 먹혀들어 간 것 같았다.

“아하, 그래도 실명하지 않아 다행이구려. 난 사실 귀공이 특별한 무공을 익혀서 그런게 아닐까 싶었다오.”

“재밌는 추측이오.”

“진 공을 의심하는 것은 아니오. 다만 신체의 어느 부분이 변화가 일어난다면 그것은 일종의 부작용으로 볼 수도 있으니 자연스러운 의구심이었다고 생각해 주면 고맙겠소.”

진도건은 지운천을 지그시 쳐다보았다.

진도건을 마교도라고 의심했었다는 듯한 지운천의 말에서 일행들은 저마다 나름의 판단을 하겠지만, 대부분은 그가 마교도가 아닐까 하는 의심이 줄어드는 쪽으로 이어졌다. 그리고 그런 판단들은 지운천이 의도한 바와 맞아떨어졌을 것이다.

오히려 지운천에게서 알 수 없는 느낌을 받는 중인 진도건만이 그의 의도에서 벗어나 있는 듯하다.

“기(氣)라는 것을 제대로 인지하고 다루기 시작한 이후부터 무공이란 것은 이미 상식 밖의 영역을 보여 주는 힘의 대명사가 되었소. 그렇게 따지고 보면 무림인들은 모두 부작용을 겪고 있다고 얘기할 수 있지 않겠소?”

예상치 못한 답변에 지운천은 적잖이 감탄했다.

“아하……! 놀라운 지적이오. 과연…… 우리가 정상이었다면 세상은 무림인이 절대다수여야 할 테니 말이오.”

지운천은 그 말에서 와닿는 게 있었는지 잠깐 멍한 표정으로 앞을 보고 있었다. 이따금 좁아지는 미간과 미세하게 씰룩이는 입술에서 무언가 중요한 생각에 잠긴 듯했다.

천서은은 둘의 대화 사이에서 다소간 불편한 마음으로 가다가 침묵이 시작되자 지운천을 흘끔 쳐다보았다. 그의 표정에서 전해지는 미세한 떨림에서 그녀도 진도건이 한 말의 의미가 무엇이었는지 곱씹어 보았다. 그리고 다시 진도건에게 고개를 돌리려 할 때, 마침 지운천이 먼저 고개를 돌리면서 그녀와 눈이 마주쳤다.

“천 낭자, 궁금한 게 하나 있는데 물어봐도 되겠소?”

“……그러세요.”

천서은은 지은천과 갑자기 눈이 마주쳐 내심 흠칫 놀랐는데 대뜸 궁금증을 피력하니 얼떨결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의 대답에 지운천이 미소를 먼저 짓는데 왠지 모르게 부담스러웠다.

“진 공과는 언제부터 만나셨소이까?”

“그게 무슨…….”

진도건의 시선이 지운천에게 꽂혔다. 천서은도 얼떨결에 진도건의 눈치를 슬쩍 보면서 황당해했다.

“하하하! 이런 말이 실례인 건 알지만, 너무 궁금해서 물어봤소이다. 오전에 내가 주제넘게 나서긴 했지만, 내 살면서 천 낭자처럼 아름다운 여인을 본 적이 없어서 가슴이 무척 떨렸소. 천 낭자가 진 공과 연인 사이라고 하니 마음이 허허롭기도 하고 한데 진 공과 대화하면서 천 낭자가 사이에 있어 자꾸 보게 되니 생각난 김에 물어보는 거라오.”

지운천이 늘어놓는 변명에 진도건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어졌다.

“지 공의 도움으로 사천의 협로를 편하게 가고 있지만, 그런 질문만큼은 무례해서 참기가 어렵소.”

지운천은 두 손을 모으고 고개를 숙여 보였다.

“무례했다는 걸 인정하오. 이 지운천이 보기엔 진 공은 진중한 매력이 있어서 천 낭자와 잘 어울리는 것 같소. 다만 나는 진 공과는 다르게 궁금한 걸 참지 못하고 속마음을 다 얘기해야만 직성에 풀리는지라. 어쨌든 본인의 관심이 그대에게 있어 과했음은 분명하니 사과드리겠소.”

진도건의 표정엔 전에 없던 불쾌한 기분이 고스란히 드러났다. 지운천에게서 느껴지는 꺼림칙한 감각과는 무관한 감정의 표출이었다. 그리고 오전에 어째서 천서은에게 불안한 표정이 감지되었는지 그 이유를 깨달았다.

며칠간 두 사람 사이에서 이어진 다소간 불편했던 감정들에 대해 차분하게 기다리면 될 거로 생각한 게 얼마나 안이한 생각이었는지 이제야 깨달은 것이다.

‘아…….’

짧은 설전 속에서 불안한 표정으로 그저 앞을 바라보고 있는 천서은의 모습에서 진도건은 가슴이 덜컥 내려앉는 기분이 들었다.

“우리는 3개월 정도밖에 되지 않았지만, 인연의 깊이는 그 열 배의 시간으로 설명해도 부족해요. 그쪽의 그런 관심은 저도 매우 불쾌합니다. 이해하고 넘어갈 수 있는 것도 여기까지예요.”

“후후, 용서하시오. 이런 아름다운 연인 사이를 보면 격려는 해 주지 못할망정 샘이 나는 것이, 내가 나이를 헛먹은 것 같소.”

멍한 기분으로 듣고 있다가 급히 입장을 내었지만, 그녀의 경고는 조금 늦어버렸다. 너스레를 떨면서 고개 숙여 사과하는 지운천의 입가엔 미소가 지어졌고 그걸 뒤에 비스듬히 자리했던 영은성이 보고 흠칫 놀랐다.

미묘한 시간 차이에서 생기는 오해, 늘어지는 말들과 그 속에서 각자 내뱉는 감정의 표현들은 사람 마음에 작은 상처를 남기는 법이다. 끈끈했던 관계가 이 고된 여정 속에서 삐걱거리기 시작했고, 어쩐지 껄끄럽게 느껴지는 존재의 간섭은 작은 균열에 이르고 있었다.

‘저자는 독(毒)이다. 그저 지나가는 바람이라 생각했지만, 요혈에 독침을 박아넣은 것과 같구나.’

천무경이 이 일행을 꾸리고 제갈무문이 사천 진입의 임무를 맡긴 건 다섯 사람의 관계가 끈끈하다는 믿음 때문일 것이다. 그런데 지금 지운천이란 한 사람의 존재 때문에 그 믿음의 근간 자체가 흔들릴 위험에 처해있음이 느껴졌다.

물론 진도건과 천서은의 사이가 아무런 불화도 없이 애정도가 최고조였다면 이런 상황으로 이어질 리 없으니 자초한 측면이 있었다. 그렇기에 영은성으로서는 부디 두 사람이 이 위기를 잘 헤쳐나가길 바랄 뿐이었다. 그리고 어서 빨리 지운천과 각자의 갈 길로 헤어지길 고대했다.

해가 완전히 저물고 어둠이 오롯이 제 세력을 펼칠 시간 때가 되면서 불편한 동행을 하는 여섯 사람도 이제는 험준한 산세 속으로 접어들자 이동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대파산맥(大巴山脈)은 한중분지와 사천 분지 사이를 가로지르면서 감숙, 섬서, 사천 세 지역의 경계를 형성하고 있었다. 산세가 험준하나 상대적으로 낮은 봉우리들도 있어서 그에 따라 고도가 낮은 지대도 있었다. 한중에서 발원한 한수는 서쪽으로도 흐르는데 여기의 지류나 가릉강이 대파산맥의 좁은 협곡 사이를 흐르기도 했다.

지운천이 안내하는 길이란 이 대파산맥의 험지로 길을 잘못 들지 않고 이 지류의 물길을 찾는 것이었다. 강이 흐르는 협곡의 가파른 산지나 절벽을 따라 만들어 놓은 잔도(棧道)는 예로부터 한중에서 촉으로 진입하기 위한 적절한 이동 경로라는 것이 지운천의 설명이었다.

특히 한낮에 명월협(明月峽)의 잔도를 달리며 힐끔 바라본 천 리 가릉강의 푸른 물색은 하늘색을 능가한다고 칭송하던 당나라 시인 이상은(李商隱)의 시구 일부를 지운천이 읊기도 했다. 그런 식으로 지운천은 아무렇지도 않은 듯 너스레를 떨면서 동행 간에도 종종 화두를 던지며 대화를 주도했다.

하지만, 일행들은 알고 있었다.

이 조의 중심을 잡고 있어야 할 진도건과 천서은의 사이에서 불편한 삐걱거림이 감정적으로 들리고 있음을.

지운천의 제안대로 중간에 쉬어 갈 법도 했지만, 진도건은 일정의 다급함을 앞세워서 밤을 새워 계속 산을 넘었다. 말은 진작에 버린 지 오래고 줄기차게 경공을 펼쳐나갔다. 그가 왜 재촉을 하는지는 누구나 말하지 못하고 있을 뿐 다 알고 있었다.

지운천과의 동행을 빨리 끝내고 싶은 마음이 누구보다 큰 것이다.

그렇게 밤낮을 달려서 사흘째 늦은 오후가 돼서야 이주(利州)에 도착할 수 있었다.

이주 안으로는 북에서 남으로 가릉강이 굽이치며 관통하는데 동쪽으로도 그 지류를 흘려보내면서 세 갈래로 길이 나뉘게 되었다. 그리고 진도건 일행이 가릉강이 갈라지는 유역의 남서쪽에 모여서 서고 지운천은 동쪽에 서면서 사흘간 여정의 작별을 준비하고 있었다.

지운천이 쓴웃음을 지으며 진도건 등을 향해 포권을 취했다.

“어째 내가 괜히 일행에 끼어들어서 여기까지 오는 길이 불편해진 것 같아서 미안하구려.”

“괜찮소. 그동안 신세를 졌소이다.”

지운천은 시선을 돌려 마을을 둘러보았다. 강을 따라 자리 잡은 민가들과 허름한 전각의 관청도 눈에 보였다.

“산속의 한 가운데 있어서 지리적인 요충지라는 점을 제외하면 사람의 왕래가 적은 촌구석이라 할만한 이곳 이주는 바로 당제국(唐帝國)을 이끌었던 측천무후(則天武后) 무조(武照)가 태어난 곳이오.”

느닷없는 역사 이야기에 일행들은 내심 의아해했으나 지운천은 반응이 어떻든 개의치 않고 말을 계속 이어갔다.

“이렇듯 사소하고 평범한 사안 속에서도 비범한 무언가가 탄생하기 마련일진데, 비록 나와 그대들의 시간이 짧아 보잘것없어 보여도 언젠가는 오늘의 인연이 귀한 것이었음을 서로가 깨닫는 때가 왔으면 좋겠소이다. 남은 여정 부디 평안하길 바라오.”

지운천은 다섯 사람 모두를 향해 포권을 취하며 작별 인사를 건네기 시작했다.

딱딱한 표정의 진도건, 불편한 감정을 애써 숨기려 하는 천서은과 어색하게 웃으며 작별 인사에 화답하는 영은성, 최현걸까지 차례로 예의를 갖추었다. 그리고 마지막까지 방립을 한 번도 벗지 않은 야율균은을 흥미로운 표정으로 바라본 지운천은 마침내 경공을 펼치며 일행으로부터 멀어졌다.

“하아! 드디어 갔네. ……야율 낭자는 괜찮소?”

최현걸은 진도건과 천서은에게 먼저 물으려다가 야율균은에게로 돌렸다. 그도 그녀가 왜 방립을 한 번도 벗지 않으면서 그 묘하게 불안감을 내포한 떨림을 보였는지 궁금했기 때문이었다.

“후우우…….”

야율균은은 방립을 벗고 한숨을 푹 내쉬면서 잠시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그리고 들릴 듯 말 듯 한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저 남자…… 뭔가 위험해. 다시 만나지 않았으면 좋겠어.”

야율균은은 말을 마치면서 자신의 어깨를 두 손으로 움켜쥐고 부르르 떨어 보였다. 예상하지 못한 반응과 지난 여정에서 맞닥뜨린 인지의 변화 속에서 영은성과 최현걸은 답답한 표정으로 서로를 바라보았다. 어쩌면 지난 사흘간 두 사람은 제삼자의 처지에서 조심스럽게 세 사람을 관조했던 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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