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9화 - 제35장. 지운천(智雲天)이란 남자 (5)
한중은 지형적으로는 고립되어 있었지만, 지리적으로는 사천 일대와 관중 지역 사이에 끼어있어서 어떻게든 문물이 교류될 수밖에 없는 지역이었다. 게다가 한수를 담은 사천 분지의 비옥한 농토는 식량을 풍족하게 하니 발전이 자연스러웠다.
요리도 사천과 관중 지역의 것들이 만나 다양하게 발전하였으니 보기에 색감도 훌륭하고 향미를 강하게 자극하는 요리들이 참 많았다.
다섯 사람은 짧은 휴식을 만끽하기 위해 돈을 아끼지 않고 쓰면서 꽤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신분 노출을 피하고자 행인이 적은 곳을 고르긴 했지만, 그런 곳일수록 의외로 장인 정신을 갖고 요리를 하는 실력자들이 숨은 곳이었다.
기분 좋게 식사를 마친 그들은 정오의 햇살과 바람을 즐기며 잠시 소화할 시간을 가졌다.
“운기조식을 하면 된다지만, 하루쯤 정말 푹 자고 싶습니다.”
“너무 많이 먹었더니 나른해진다, 야. ……꺼억!”
최현걸은 영은성을 보면서 그에게 들으라는 식으로 얘기하며 불룩해진 자신의 배를 쓰다듬었다. 그리고 그를 보며 트림을 뱉어냈더니 되레 반응이 오는 것은 야율균은이었다.
“어유, 추잡하게 뭐 하는 짓이야.”
야율균은이 최현걸의 등짝을 노리고 손바닥을 휘두르고 최현걸이 이를 다시 피하고 있을 때, 영은성이 키득거리고 웃으면서 자리에서 일어났다.
“가시죠. 출발할 때가 되었습니다.”
미리 한수를 건너온 위치에서 다섯 사람은 자리를 털고 일어나 가져온 말에 올라탔다.
남문에 거의 다 이르렀을 때쯤 최현걸이 손으로 엉덩이 부근을 쓰다듬으면서 중얼거렸다.
“말을 너무 많이 탔더니 엉덩이가 뻐근하네.”
“사내가 그거 가지고 툴툴거리냐?”
야율균은의 핀잔에 최현걸이 익살스러운 표정을 하며 그녀를 보았다.
“야율 낭자의 엉덩이는 철판 같아서 말을 아무리 타도 끄덕없……, 으악!”
갑자기 날아든 만곡도에 최현걸이 급히 고개를 숙였다. 쓰고 있던 방립이 살짝 비뚤어졌는데 야율균은의 만곡도가 방립의 꼭지를 뎅강 따 버렸기 때문이었다.
“야, 자리 바꿔.”
최현걸이 급히 말을 물리면서 야율균은과 자신 사이에 영은성이 있도록 자리를 옮겼다.
두 사람이 티격태격하는 모습들은 지루할 때마다 있어 와서 일행에게 종종 웃음을 주었다. 이런 상황이 지치지 않고 반복되는 걸 보며 다른 셋은 두 사람이 이어지길 바라는 생각도 저마다 한 번씩 하곤 했다. 그러나 냄새나고 추레한 거지는 절대 싫다는 여자와 기분 내키는 대로 칼을 뽑는 여자는 절대 싫다는 남자의 관점은 절대 좁혀지지 않았다.
천서은도 그 모습을 보며 키득거리다가 진도건과 서로 눈을 마주치며 다시 웃음을 공유했다. 그때쯤엔 남문을 지나고 있었는데 문득 다시 앞을 보던 천서은의 눈빛이 살짝 떨렸다.
남문 옆에서 한 사내가 말에 실은 장구류(裝具類)와 안장을 정비하고 있었는데 그 뒷모습이 눈에 익숙했다. 천서은은 의식적으로 시선을 돌렸지만, 때마침 말에 올라타면서 돌아가는 사내의 시야 속에 진도건 일행이 들어오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이랴!”
그 목소리에 천서은은 불안한 생각이 들었다.
한 필의 인마가 그들을 앞지르며 모습을 비추니 바로 지운천이었다.
“여기서 다 뵙는군요. 벌써 떠나실 줄 몰랐는데.”
지운천이 진도건과 천서은을 보며 아는 체했다. 두 사람은 크게 반응하지 않았으나 면사 속에 가려진 천서은의 얼굴엔 불편한 감정이 떠올라 있었다.
진도건은 살짝 고개를 숙이면서 포권으로만 화답했다. 그에 지운천이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
“후후! 여전히 과묵하신 분이로군.”
영은성과 최현걸은 느닷없는 새로운 인물의 등장에 고개를 갸웃거렸다.
“누구예요?”
“지운천이라고 합니다. 오전에 여기 계신 낭자를 주제넘게 도와드렸던 인연이 있는데 이렇게 또다시 마주치니 반가워서 인사를 하고 싶어 왔습니다. 반갑습니다.”
최현걸은 머릿속에 있는 인물 정보를 샅샅이 뒤지며 지운천이란 이름이 있는지 찾아보았지만, 어디서도 발견할 수 없었다. 본능적으로 보이는 안정된 자세와 기도는 상당한 고수라는 걸 느낄 수 있었는데 어떤 인물인지 쉽게 가늠하기 어려웠다.
다만 말의 억양에서 미세한 차이가 있다는 한 가지는 포착할 수 있었다.
“혹시 중원인이 아닙니까?”
지운천이 씩 웃었다.
“귀공께선 귀가 참 밝으시군요. 그렇습니다. 청해 공화현(共和顯) 출신인데 갑자기 전쟁도 일어나고 마적 떼도 설쳐대니 혼란만 가득해서 잠시 몸도 피신할 겸 들어 왔습니다.”
“그렇습니까? 그쪽 지역 사정은 잘 몰라서 말이지요. 그래도 그쪽 억양이나 사투리는 들어본 적이 있는데 지 공자의 억양에선 별로 느껴지지 않는군요.”
“어릴 때 일찍 새외로 나가긴 했으나 사천 태생입니다. 그래도 아버지를 따라 사천 땅을 밟을 일이 2, 3년마다 한 번씩 있었습니다. 아무래도 이곳 말투가 좀 더 세련된 거 같아 연습해왔던 것이 그럴듯하게 자리 잡은 것 같습니다. 듣기에 불편함이 없으셨다면 좋겠습니다.”
“듣기 아주 편합니다.”
지운천의 화술은 밝은 편에다가 영은성과 같이 예절도 잘 갖춰져 있어서 최현걸이 느끼기엔 좋은 사람 같았다.
“그럼 이번에도 사천으로 가시는 길입니까?”
“그렇습니다. 남충부(南充府)에 외가(外家)가 있어서 그곳에 가는 길입니다. 성도 다음가는 큰 마을인데 가릉강(嘉陵江) 유역에서 발전한 곳이다 보니 이곳 한중만큼이나 아름답고 사람도 많은 곳이지요.”
지운천의 상세한 설명에 최현걸은 그가 꽤 믿을만한 사람일 거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때 진도건이 입을 열었다.
“내려가는 길을 잘 알고 있겠군요.”
지운천이 씩 웃었다.
“물론입니다. 사천 땅의 강산이란 지난 20년 가까이 크게 변한 적이 없어서 산속 세세한 곳까지 찾아다니는 건 무리여도 남쪽 산지를 가로지르는 길 찾는 건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괜찮다면 동행하는 것이 어떻소?”
“저야 좋지요.”
진도건이 뜻밖에도 동행을 청하자 지운천이 반색하면서 반겼다.
이에 천서은이 놀라 진도건을 살펴보았지만, 방립 때문에 가려져 표정이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 그녀는 그의 등장만으로도 불편할 지경인데 진도건이 동행하자고 얘기하니 더욱 혼란스러웠다.
“하하……, 이거 뜻하지 않게 말동무가 더 생겨 버렸군요.”
최현걸도 진도건이 직접 그런 제안을 할 줄 예상하지 못해서 멋쩍게 웃으며 중얼거렸다.
그들 일행의 신분이 노출될 만한 상황은 피해야 하는데 지운천과의 동행은 그런 측면에서 적절치 않았다. 그러나 이 일행의 수장은 진도건이었으니 부디 그에게 고심이라고 할 만한 것이 있었길 바라는 마음일 뿐이었다.
졸지에 한 사람이 늘어난 일행은 남서쪽으로 길을 나아갔다. 오르막은 천천히 걸어 올라갔다가 평지가 나오면 말을 달리곤 하면서 완급조절을 했다. 지운천이 인도하고 있는 길은 그들이 가고자 하는 방향에도 크게 틀리지 않아서 사천을 종종 오갔다는 이야기에 점점 믿음이 실렸다.
일행을 한 번 크게 당황시킨 건 진도건이 자신들의 이름을 지운천에게 모두 밝힌 것이었다. 다들 방립 아래로 표정을 숨겼지만, 그의 선택이 너무나 갑작스러운 측면이 있어서 각자 판단이 쉽게 서질 않았다.
물론 출신 등을 모두 밝히진 않았으나 최근 무림사에 밝은 사람이라면 최소한 천서은이나 진도건의 이름 정도는 알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만약 지운천이 마교의 끄나풀이었다면 이 또한 공교로운 난관을 마주할 장애가 될지 모를 일이었다. 게다가 그는 청해 지역 출신이니 더 의심이 가는 부분도 있었다.
“지 공(智公)께서는 별호가 없습니까?”
지운천은 야율균은보다 나이가 한 살 더 많았기에 이젠 모두 그를 지 공이라고 불렀다.
“부친께서 재주가 있어 무공을 배우긴 했어도 제가 무림에 뜻이 별로 없어서 그저 마적 떼 정도만 상대해왔을 뿐인데 별호 따위가 있겠소? 그냥 일개 낭인일 뿐이라오.”
이름과 나이를 모두 알게 되니 대화에서 서로를 향한 말의 존대 같은 것도 많이 달라졌다.
“청해에서 살고 있으면 마교도에 대해서도 잘 알고 있겠습니다.”
“아아, 중원 무림은 아무래도 걱정이 많겠지요. 그들의 준동이 이만큼 거셌던 적도 없으니. 심지어 백성들을 군사로 징발하고 새외 무림에까지 교리를 확장하고 나서는데 이래저래 치안이 많이 망가져서 걱정스럽기 그지없소이다.”
“지 공은 그들이 어디까지 영향을 미치려 한다고 보십니까?”
최현걸의 물음에 지운천은 뭔가 고민을 거듭하는 눈치였다. 그는 잠시 숙고하는 시간을 갖더니 곧 입을 열었다.
“기세를 보면 확실히 심상치 않소. 서방 새외에 천마신교의 이름이 미치지 않은 곳이 없으니 그나마 그 명성이 드높았던 서장의 포달랍궁도 지금은 기세가 많이 죽었지요. 게다가 적룡단은 서하국 관군까지 끌어들여 전쟁을 일으키고 있으니 금국의 황실까지 넘보는 게 아닌가 싶기도 하고. 물론 거기까지 가기엔 역부족이지 않나 싶습니다만, 어쨌든 무림 정복이 1차 목표 아니겠소?”
“적룡단? 적룡마종을 거기서는 그렇게 부릅니까?”
“아아! 놈들은 청해, 감숙 그리고 더 북쪽의 사막 지역까지 활개 치는 악명높은 마적단이라오. 나도 놈들이 출몰하면 그 패악질을 피해 숨어 있다가 떠나면 다시 나와 마을을 복구하고……. 아주 지긋지긋한 일이지요. 예전엔 부친께서 놈들의 표적이 된 일이 있어서 도망 다니던 적도 있었소이다.”
지운천이 이야기하는 내용은 새외 출신답게 확실히 중원에서 보는 관점의 해석과는 일견 차이가 있어서 최현걸로서는 지닌 정보를 개정하는 데 도움이 되었다. 또 지운천이 은근하게 드러내는 마교와 적룡단을 향한 적개심 등은 그를 더 신뢰하게끔 만들고 있었다.
시간이 좀 더 지나고 얘깃거리가 떨어졌는지 대화의 수가 줄어들었다. 숲을 헤쳐나갈 일이 있을 때면 거슬리는 수풀 정리를 하느라 신경이 거기에 미치지 못하는 점도 있었다.
그렇게 계속 나아가다 보니 어느새 지운천은 천서은의 옆에서 말을 몰고 있었다.
주변 산세가 겹겹이 늘어서고 수풀이 우거져 있다 보니 그들이 지나는 협로로 그늘이 지면서 때 이른 초저녁 느낌이 나기 시작했다. 하늘은 퍼런데 해가 들지 않은 그늘진 느낌이 어쩐지 을씨년스럽기도 했다.
‘암습 당하기 좋은 상황이군.’
산자락 속 아주 먼 발치서 느껴지는 마기가 있었다. 존재감이 희미한 자도 있었지만, 꽤 짙은 마기를 풍기는 상당한 고수도 종종 느껴졌다. 그러나 일관되게 거리를 유지하는 느낌이 들었지 날이 어두워진다고 접근하는 자들은 없었다.
한중성을 떠날 때부터 계속 같은 느낌을 포착하고 있으니 어쩌면 그들을 암습하기 위한 자들이 아니란 생각도 들었다. 주로 동쪽 산지에 포진하고 있으니 아마 광혈종 무리들이 이동하는 게 아닐까 싶기도 했다.
‘좀 더 두고 볼까.’
사실 그에게 거슬리는 건 먼 산지에서 잡히는 마기의 느낌보다 바로 가까이 알 수 없는 존재감으로 동행하고 있는 지운천이었다.
지운천도 방립을 쓰고 있었는데 잠시 하늘을 올려다보더니 방립을 벗어 목줄을 이용해 등 뒤로 넘겼다. 사내로서 외모가 출중하니 같은 남자들도 절로 시선이 갔는데 뒤에서 흘끔 보던 영은성과 최현걸도 절로 고개를 끄덕이며 지운천의 외모에 감탄했다.
최현걸은 옆에 있던 야율균은을 보고 그녀의 팔을 콕 찔렀다.
야율균은이 쳐다보자 지운천을 손으로 한 번 가리키면서 목소리는 내지 않고 입 모양으로 발음만 흉내 냈다.
‘어.때? 잘.생.겼.지?’
최현걸은 틀림없이 야율균은이 좋아할 만한 외모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물어본 것인데 그녀의 반응은 뜻밖이었다.
방립을 더 눌러쓰는 모습에 부끄러워하는 줄 알고 키득거리려던 최현걸이 호흡을 꾹 참고 멈추었다. 말고삐를 쥔 야율균은의 손이 가늘게 떨리는 것을 보았기 때문이었다.
그 떨림은 말타기의 들썩임과는 다른 종류임을 본능적으로 느꼈다.
‘불안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