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칼의 귀신-188화 (188/432)

188화 - 제35장. 지운천(智雲天)이란 남자 (4)

* * * *

번가산(藩家山)은 한중성 서쪽 가까이 자리하고 있는데 그곳에 올라가기 위해 성을 나서려면 서문보다는 남문이 빠를 때가 있었다. 한중을 가로질러 비스듬히 북서쪽으로 방향을 트는 한수 때문인데 서문으로 나가면 이를 건너야 하기 때문이었다.

서문 가까운 나루터를 오가는 사공은 한 사람뿐이라 만약 사공이 강을 건너기 위해 준비된 상태라면 바로 갈 수 있겠지만, 행여나 반대편에 있다면 반 시진 가까이 기다려야만 했다.

지운천은 십여 년 전에 번가산을 오를 일이 있어서 이 지형 특성을 잘 알고 있었다.

굳이 사공이 있는지 알아보기 위해 시간을 허비하기보다 바로 남문을 택해서 밖으로 나간 지운천은 바로 서쪽으로 방향을 틀어 말을 달렸다. 번가산은 그리 멀지 않아서 말을 타면 반 시진이 채 걸리지 않았다.

번가산 기슭에 이르자 말에서 내려 경공을 펼쳐 산에 올라갔다. 그리고 잠시 후, 그가 도착한 곳은 5부 중턱에 있는 용강사(龍崗寺)라는 작은 절터였다.

용강사는 속세와 거리를 둔 여섯 명의 수도승이 운영하는 평범한 사찰이었는데 산문 근처엔 용두암(龍頭岩)이라는 기이하게 생긴 거대한 바위가 있었다.

수도승들은 감히 올라가 볼 엄두조차 내지 못할 만큼 크고 표면이 매끄러워서 일반인들이 사찰에 와서 올라가 보려다 다치고 돌아가는 일도 있었다. 그러나 경공이 뛰어난 무림 고수들에겐 별로 어려운 일이 아니라서 이곳을 아는 자라면 용두암에 올라가 한중성을 한눈에 내려다보는 풍경을 즐기는 자도 해마다 몇 명씩 왔다 가기도 했다.

지운천은 도약 한 번으로 금방 용두암에 올라갔다. 그리고 그곳 위엔 이미 양추수와 학총이 무릎을 꿇고 있다가 그를 보자마자 머리를 땅에 찧으며 엎드렸다.

“양추수와 학총이 존자(尊子)를 뵙습니다.”

“일어나라.”

양추수와 학총은 그의 말에 따라 일어났지만, 누구도 고개를 들지 못하였다.

“죽은 놈들은 동료들이냐?”

“부하들입니다만, 괘념치 마시옵소서.”

“모두 영광으로 여길 것입니다.”

“적과 싸우다 죽은 것도 아닌데 영광이라 할 일이 있겠느냐?”

“송구합니다.”

양추수는 깊이 허리를 숙이며 사죄했다. 학총도 그를 따라 행동거지를 조심했다.

“광혈종은 사천 분지를 에워싸기로 했는데 너희들은 왜 여기 있지?”

“저희는 혹시 모를 퇴로를 확보하기 위해 감시조로 남아 있었습니다. 이곳에 남은 인원은 일 할이 채 되지 않으니 저희 마종은 전력을 다해 준비하고 있음을 아룁니다.”

“혁무술(赫蕪鉥)이 겁이 많아졌군. 그렇게 기고만장해서 자기들만으로 구룡문을 잡아먹으려 하다가 된통 당해 버렸으니 주의할 만하지.”

“그래도 신경 써 주신 덕분에 저희 마종의 숫자가 이전만큼 회복하는 것 이상으로 늘어났으니 구할 운용으로도 과거의 총 전력에 가깝습니다.”

지운천은 양추수를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피식 웃었다.

“꽤 많이 알고 있군. 이곳의 책임자인가?”

“그렇습니다.”

양추수의 수긍에 지운천은 고개를 끄덕였다. 안 그래도 한중성에 도착한 김에 책임자를 찾아갈 생각을 했는데 번거롭지 않게 된 셈이다.

“광혈종의 상황을 보고하라.”

“감히 존자께서 지닌 정보를 헤아리건대 광혈종이 여전히 사천을 바라보고 산개 포진해 있을 거로 생각하지 않을까 사료되옵니다. 그러나 중원 쪽 연락책의 정보를 통해 구룡문에서 백제성을 노리고 접근을 시도하고 있음을 확인하였습니다. 이에 저희 전력은 은밀하게 백제성을 향해 움직이고 있는 것으로 파악하고 있습니다.”

“구룡문? 복수를 하겠다는 거로군. 백제성이라, 혁무술을 노리는 것이야.”

혁무술은 바로 광혈신마의 본명이었다.

지운천은 구룡문에 대한 광혈종의 학살극을 익히 들어 알고 있었기 때문에 구룡문이 백제성을 직접 노린다는 말을 듣고 그 의도를 간파할 수 있었다.

“광혈신마께서 무공이 더 강해졌고 저희 광혈종의 세도 강해졌으니 충분히 쓸어버릴 수 있을 것입니다.”

“크크! 글쎄, 구룡문주인 흑사왕 금태하는 중원의 천하제일을 다투는 천무경, 강정학과 직접 비견될 정도로 강한 자라 들었다. 혁무술은 자신만만한 게 장점이지만, 그를 상대로 통할지는 의문이로군.”

“이곳은 후방이라 상세한 정보는 모르겠지만, 광혈신마도 평범하게 상대할 생각은 없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뭐 좋아, 내 아버지께서 기껏 살려놨는데 그 몫도 해 주지 못하면 한심한 일이니까. 하하하하!”

지운천이 웃음을 터뜨리면서 시선을 한중성으로 돌렸다.

옛 한나라가 태동한 곳이라 할 수 있을 만큼 유구한 역사를 자랑하며 또 전략적인 요충지이기도 한 한중성의 위용은 볼 때마다 감탄이 나왔다. 새외에서는 볼 수 없는 대규모 성채인데 이렇게 가만히 보고 있으면 때로는 무림에 태어나지 않고 오히려 대하국(大夏國) 황제의 황자로 태어나서 저 성을 상대로 정벌 전쟁을 벌였으면 어떨까 하는 상념에 젖곤 했다.

“죄송하지만, 아까 성에서 저희와 다투던 그 여자는 아는 분이십니까?”

“아니, 처음 봤다.”

“그, 그럼 직접 취하실 여자를 저희가 감히…….”

“하하하! 그것도 아니다. 물론 그런 생각도 잠깐 했었지만, 그자들은 그보다 더 흥미로운 존재들이지.”

지운천의 대답은 양추수를 조금 혼란스럽게 했다. 그래도 그의 손에 죽은 부하들은 꽤 오랫동안 같이 동고동락한 자들이었기 때문에 안타까운 마음이 분명 있었다. 그러나 지운천과 전혀 관련 없었던 여자였다면 말 그대로 재수 없게 마른하늘에 날벼락 맞고 죽은 셈이었다.

한 가지 신경 쓰이는 것은 지운천이 말하기로 그 단발머리 여자 한 사람을 지칭한 것이 아니라 ‘그자들’이라고 말했다는 부분이었다.

“너희들은 그자들에 대해서 신경 쓰지 말고 각자 할 일들 하여라. 내 알아서 할 터이니.”

“존자의 명을 따르겠습니다.”

지운천은 두 사람을 보고 씩 웃었다. 그리고는 용두암 아래로 몸을 훌쩍 던졌다. 훌쩍 떠나버린 그의 뒤를 쫓아 용두암 끄트머리까지 달려와 내려다보았지만, 지운천의 신형은 어느새 용강산의 울창한 숲속으로 사라지고 보이지 않았다.

학총은 조용하면서도 깊이 한숨을 내쉬었다.

“하아! 양 형님, 이게 대체 무슨 일입니까? 제 아우들은……”

“길 가다 벼락 맞고 뒈졌다고 생각해. 어쩌겠느냐? 그만치도 재수가 없던 거지. 가자.”

양추수는 투덜거리면서 학총과 함께 용두암을 내려왔다.

신교의 과업을 마치고 광혈신마가 돌아올 때는 앞으로 최소 한 달의 시간은 지날 것으로 예상해서 자유와 쾌락을 맘 편히 즐기나 했었는데 날벼락도 이런 날벼락이 없었다. 두 사람에겐 이를 항의할 일말의 권리도 없었으니 억울한 것도 당연했다.

* * * *

진도건 일행은 당분간 맛있는 요리와 충분히 휴식할 기회가 없다고 여겼기에 그들은 이곳 한중성에서 잠깐이라도 편한 휴식을 즐기기로 상의하였다.

흩어져서 말들을 미리 구하고 목욕할 수 있는 가옥도 알아보았다. 객잔은 감시가 있을 수 있으니 차라리 민간에서 찾는 것이 낫다는 판단에서였다. 적당히 한적한 데에 있으면서도 솜씨가 뛰어난 요리점을 찾기도 했었다.

다른 네 사람이 먼저 목욕을 마치고 마지막으로 진도건은 뜨거운 물을 새로 받은 탕에 들어가 잠시 몸을 녹이고 있었다. 그리고 그 속에서 조금 전 천서은을 돕기 위해 난입했던 지운천이란 사내를 곰곰이 곱씹어 보고 있었다.

적당한 요리점을 찾아보면서도 진도건은 기분 전환 삼아 잠깐 혼자 있고 싶다던 천서은을 언제나 시야 안에 두고 움직였다. 그녀를 배려하여 거리를 충분히 벌리면서도 언제든 그녀가 찾는다면 바로 한달음에 달려갈 수 있도록 준비한 것이었다.

천서은이 파락호들에게서 희롱당하던 묘령의 소녀를 구한 건 정의감의 발로인 것도 있지만, 상이령에게 질투 아닌 질투를 느꼈던 자신을 위한 속죄의 의미도 있었다.

검을 뽑지 않고 적당히 상대해 주면서 소녀가 달아날 시간을 벌어준 게 그런 의도 때문이지 않을까, 라는 생각이 들었다. 다만 공교로운 것은 그 파락호들이 평범한 파락호가 아닌 광혈종의 마인들이였다는 것이다.

천서은은 처음엔 알아차리지 못했겠지만, 진도건은 한눈에 그들이 마인이라는 걸 느낄 수 있었다.

‘마’에 대한 감각은 점점 예민해져 있으니 천서은과 마주한 자들을 제외하고서라도 성내를 돌아다니면서 기십은 더 발견한 듯했다.

진도건은 그들이 천서은의 상대가 되지 않을 걸 예상했다. 다만 한 가지 우려스러웠던 것은 어쩌면 진신 실력을 제대로 꺼내야 물리치는 것이 가능한 수준이라면 그녀를 도울 필요가 있었다.

파천신공의 벽력성은 자연스럽게 발현되는 성질이라 일정 수준 이상 내공을 끌어올리면 감추기가 어려웠다. 그러나 진도건의 검력과 검속은 굳이 혈마단의 마기를 끌어다 쓰지 않아도 위력을 발휘할 수 있으므로 정체를 들키지 않을 정도로 운신 폭이 넓다 할 수 있었다. 그래서 마인들이 본격적으로 무공을 사용하면서 물러날 기미를 보이지 않자 그도 다른 데 신경을 쓰지 않고 천서은을 예의주시하고 있었다.

마침내 그녀와 눈이 마주쳤을 때, 진도건은 빠르게 발걸음을 옮겼다.

버틸 수 있으리란 믿음은 절대적이었기에 움직임을 빠르되 요란하지 않게 가져가고자 했다. 그런 그때 그의 발걸음이 멈춘 것은 아주 기이한 존재감을 느꼈기 때문이었다.

그는 마인을 귀신같이 찾아낼 수 있었다.

그들에게서 흘러나오는 특유의 기색은 다른 사람은 몰라도 진도건에겐 꽤 예민하게 느껴졌다. 마치 어둠 속에서 촛불을 피워 그 위치에 세워놓은 것 같은 감각이었다.

그 외에는 다른 사람과 비슷한 오감의 정보로 사람을 보고 판단하는 것이다. 그런데 천서은이 다투는 현장 주변의 민중 속에서 전혀 알 수 없으나 은근하게 도드라지는 존재감이 느껴졌다. 그리고 그것을 감지한 순간, 어느새 천서은의 머리 위에 나타나더니 그녀를 돕는 것이 아닌가?

장내가 정리되면서 그도 다시 움직여 천서은에게 이르면서도 신경을 그 지운천이란 사내에게 집중하고 있었다.

그 알 수 없는 존재감은 가까이 있다고 해서 더 크게 느껴지거나 하지 않았다. 오히려 이렇게 가까이 접근했다면 지운천 스스로 관리할 법한데도 그의 기척은 감춰지지 않은 채 처음 느낀 그 수준 그대로였다.

어딘가 꺼림칙한 기분이 들게 하는 그런 존재감이었다.

잘생긴 얼굴, 기품 넘치는 몸짓에 사교성 있는 태도는 그에게 중요한 정보가 아니었다.

촤아아…….

진도건은 욕조에서 나와 마른 수건으로 몸을 닦았다. 그리고 새 속옷과 입던 옷을 다시 걸치면서도 뇌리에선 지운천의 미소 띤 얼굴이 떠나지 않았다.

‘내가 너무 지나치게 생각하는 건가…….’

문을 열고 나서자 이 가옥의 주인인 아주머니와 어린 사내아이 그리고 일행들의 모습이 보였다.

진도건이 나온 걸 본 영은성은 준비해 두었던 돈주머니를 아주머니에게 넘겨주었다.

“신세 졌습니다.”

“어유, 별말씀을요. 뜨신 물만 받아드렸을 뿐인데, 쇤네가 더 감사하지요.”

진도건은 아주머니의 목소리를 흘려들으면서 천서은에게 다가갔다. 그녀는 자신의 방갓과 진도건의 방립을 들고 있었는데 그의 것을 내밀었다.

진도건은 방립을 잡았으나 천서은이 바로 손을 놓지 않아 그녀를 쳐다보았다.

“개운하죠?”

“응, 좋았어.”

“이제 우리 맛있는 요리 좀 먹으러 갈까요?”

천서은이 밝게 미소를 지으면서 묻자 진도건의 얼굴에도 따뜻한 미소가 떠오르며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가자.”

천서은은 내심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녀를 바라보는 진도건의 미소와 목소리는 한결같이 따뜻하고 좋았기 때문이었다. 일행들이 먼저 나가고 마지막으로 문을 나서는 천서은은 진도건의 손을 꼭 잡고 편해진 마음으로 다시 방갓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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