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7화 - 제35장. 지운천(智雲天)이란 남자 (3)
‘칫……!’
하지만, 그런 위협보다 문제인 건 솟구치는 기운에 떠밀려 면사 달린 방갓이 하늘로 날아가면서 얼굴이 드러난 것이었다.
여기저기서 감탄이 들려왔다.
어깨높이에 떨어지는 단발머리가 눈길을 사로잡는 건 둘째치고 험상궂은 장정 다섯 사이에서 그녀의 미모는 마치 어둠 속 야광주(夜光珠)와 같았으니 절로 이목을 집중시키는 것이다.
뒤로 급히 공중제비를 돌면서 자세를 바로 세우는 사이 어느새 다섯 명에게 다시금 포위당했다.
마지막 위협적인 공격을 해온 양추수를 필두로 하여 다른 네 명도 어느덧 기세를 달리하고 있는데 피부가 따끔거릴 정도로 위협적인 투기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내공을 끌어올리며 불쾌한 감각을 걷어낸 천서은은 잠시 갈등했다.
이들은 광혈마종의 마인들이 분명했다.
마기 특유의 섬뜩함보다 마치 맹수를 맞이하는 듯한 그 야성적인 위협감이 앞서 느껴지는 자들이었다. 이 자리를 허투루 넘어가지 않겠다는 듯 제 실력들을 발휘할 태세였다.
‘이래선 파천신공을 제대로 쓸 수밖에 없는데.’
그녀는 이들을 충분히 물리칠 자신이 있었다. 그러나 파천신공의 벽력성(霹靂性)이 바깥으로 드러나면 결국 그 정체를 들키게 될 것이 뻔했다.
천서은은 급히 고개를 돌렸다.
이때 도움을 빌릴 수 있다면 무리하지 않고 물리치거나 몸을 숨기거나 선택지를 넓힐 수 있기 때문이었다.
‘도건……!’
조금 거리가 있는 곳에서 진도건과 영은성의 얼굴을 발견했다. 눈빛이 마주치자 그도 즉시 움직임을 보였다.
“얼굴도 반반한 년이 성깔은 드럽게 드세구나. 내 오늘 네년을 교육시켜 잠자리에 데려가야겠다.”
잠깐 진도건 쪽을 돌아본 사이에 이죽거리며 내뱉은 학총의 말에 천서은의 표정이 차갑게 굳었다. 귀에 꽂히는 패설을 참고 넘길 만한 성격이 절대 아니었다.
“죽여줄게.”
천서은은 낮게 읊조리면서 숙녀검을 꾹 쥐었다.
파천신공으로 쳐죽일지, 검법으로 입을 꿰뚫어 버릴지 사소한 갈등만이 남았을 뿐 직접 해결하겠다고 이미 결정이 돌아섰다.
포위를 구축하며 일제히 달려드는 광혈종 마인들을 노려보며 검을 휘두르기 위해 준비하는 그때.
머리 위로 그림자 하나가 드리워졌다.
그것은 애초에 상정한 적이 아니었기 때문에 멈칫하며 위를 올려다볼 때, 광혈종 마인들의 칼날이 그 그림자에게 향하는 것도 같이 시야에 들어왔다.
채챙! 푹!
“컥!”
날아오는 칼들을 연달아 쳐내면서 망설임 없이 입에 검을 박아넣었다. 게다가 바람처럼 움직이면서 천서은의 주변을 맴돌며 검을 휘두르니 머리 두 개가 하늘로 치솟았다. 발톱을 휘두르며 호조공(虎爪功)으로 덮쳐오는 학총의 품으로 낮게 파고들더니 그대로 턱을 쳐올리고는 복부를 걷어차 날려 버렸다.
퍼억!
“끄윽!”
얼떨떨한 표정을 한 천서은이 갑작스레 나타나 도움을 준 사내의 뒷모습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 사내는 낯빛이 굳어진 양추수를 향해 달려들며 검을 휘둘렀다.
챙! 챙! 챙!
사내의 검법은 날카롭고 매서워서 양추수는 상대가 되지 못했다. 금방 손발이 어지러워지며 밀려나는데 틈을 완전히 보였는지 그대로 손아귀에 목을 붙잡혔다.
쿵!
“끄으……!”
양추수는 사내가 미는 대로 밀려나 등과 뒤통수를 고목에 부딪혔다. 신음을 내뱉은 건 목을 짓누르는 손아귀의 힘 때문이 아니라 검이 그의 어깨에 박혔기 때문이었다.
그 뒷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천서은은 곧 사내의 이름으로 추측되는 말을 들을 수 있었다.
“네놈들의 행패를 보면 다 죽여도 시원찮으나 자비를 베풀어 두 놈은 살려주마. 물론 복수를 하고 싶거든 언제든지 이 지운천을 찾아오너라. 기꺼이 상대해 주지.”
“끄르륵……!”
고통 섞인 신음을 더 듣기 위함인지 잠깐을 그렇게 대치하던 지운천은 학총이 엉거주춤하며 판단을 내리지 못하는 모습을 흘끔 보고는 비로소 손을 떼며 훌쩍 뒤로 물러났다.
양추수는 새하얗게 질려 버린 얼굴을 채 가쁘게 숨을 몰아쉬며 찌푸린 인상으로 지운천과 천서은을 번갈아 보았다. 그리고 다시 학총을 돌아보며 고개를 까닥거렸다.
“돌아가자!”
학총도 위험을 감지한 상태여서 바로 고개를 끄덕이고 양추수와 같이 장내를 서둘러 떠났다.
그들이 떠나는 걸 잠시 기다렸다가 뒤돌아서니 곧 지운천과 천서은의 눈이 마주쳤다.
지운천의 시선에서 가까이서 본 천서은의 미모는 더욱 빛이 났는데, 천서은의 시선도 지운천을 바라보면서 눈을 반짝였다.
남색 바탕의 무복이었으나 황색 꽃 자수가 옷 테두리를 따라 있으니 보기에 고급스러웠다. 외모는 수려한 미남자에 눈빛이 맑고 미소가 부드러웠으니 차림새와 어울려 기품이 넘쳐흘렀다.
그를 보며 문득 양자성을 떠올렸던 천서은은 비열하게 남은 그의 인상보다 지운천의 인상은 훨씬 좋게 다가왔다. 스치듯 마음 한구석에 머물렀다가 사라지는 감정은 마치 이상형을 보고 첫눈에 반했던 것과 같은 묘한 두근거림이 일었다.
“실력이 빼어나 간섭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했지만, 그래도 이런 미인을 대하는 놈들의 태도가 마음에 들지 않아 주제넘게 나섰습니다. 불쾌하셨다면 용서하십시오.”
“……아니에요. 고맙습니다.”
정중하게 이해를 구하는 지운천의 말과 행동은 그만큼의 부드러운 품격을 담고 있었으니 절로 미소가 지어질 수밖에 없었다.
지운천도 미소로 화답하며 포권을 취했다.
“지운천입니다.”
“전…….”
천서은은 하마터면 순순히 대답할 뻔했다. 조용히 이곳을 빠져나갈 생각이었기에 가명 같은 건 전혀 생각하지 않고 있어서 조금 당황하는데 지운천이 그런 그녀의 마음을 읽었는지 피식 웃음을 흘리며 고개를 살짝 숙여 보였다.
“곤란하시면 알려 주지 않으셔도 됩니다. 어쩔 수 없지요.”
천서은은 조금 당황스러웠다.
그저 보기에 잘 생겼다 하는 사람은 있었지만, 큰 관심이 갔던 적은 없었다. 영은성이 일행 중에선 객관적으로 제일 잘 생겼다고 생각했지만, 그런 관점과는 별도로 사랑하는 사람이 있으니 괘념치 않는 정도라 볼 수 있었다.
다만 지금은 조금 감정의 골이 파인 상황인 것과 겹쳐서 지운천이란 사내는 겉보기에도 매력적이어서 가만히 서 있는 것만으로도 그녀의 관심을 끌어당기고 있었다.
“괜찮아?”
그때 진도건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가까이 다가온 것도 뒤늦게 인지했을 정도로 정신이 팔렸었다는 생각이 들자 당황함을 넘어 죄책감이 들었다. 진도건과의 감정이 상한 원인은 일부 그녀에게 책임이 있는데 그를 이런 상황에서 마주하고 나니까 마치 자신이 한눈을 판 것 같은 모양새가 되어 버렸다.
물론 그런 그녀의 생각까지 두 남자가 알 수는 없었지만, 이런 경험이 처음이다 보니 어쩔 줄 모르는 것이다.
“어, 어…… 괜찮아요.”
진도건도 처음 보는 그런 그녀의 반응이 어색하긴 마찬가지였다.
잠시 쉴 곳을 알아보고 말을 구하기 위해 각자 흩어졌을 때, 좀처럼 그녀의 곁에서 떨어질 줄 몰랐던 그도 잠깐 기분 전환을 하고 싶다는 그녀의 말에 알겠다면서 떨어진 상황이었다.
‘도건, 나 때문에 불편했을 텐데 미안해요……. 나 잠깐 혼자 기분 전환 좀 하고 싶은데? 괜찮죠?’
떨어지기 직전 들었던 그녀의 목소리를 떠올려 보면 분명 전날보다는 따스한 느낌이 전해져 이제 기분이 거의 다 풀렸다고 느꼈다.
지운천은 두 사람의 관계가 보통 사이가 아님을 눈치챘다. 두 사람과는 다르게 그는 이런 관계 사이의 경험들이 있었기에 대충 어떻게 돌아가는 상황인지 짐작할 수 있었다.
‘아하……! 재밌는 상황이로군.’
지운천은 잠시 여흥으로 두 사람 사이를 흔들어 볼까 생각했다. 여인의 미모도 그의 마음에 쏙 들 정도로 훌륭했으니 이 정도면 잠깐 유희를 즐길만한 가치가 있다 여겼다. 또 여인의 반응을 보았을 때, 지금 나타난 이 사내의 방립 아래 가려진 용모가 자신보다 못할 거 같다는 생각이 들어서 어렵지 않을 것 같았다.
지운천은 단발머리 여인에게 적극적으로 호의를 표시하기로 마음을 먹고 바로 말을 걸려던 그때, 방립 사내의 고개가 돌아가면서 자신을 보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그에 반응하여 그의 시선도 방립 사내에게 닿으니 마침내 방립의 그늘 속에서 두 사람의 눈이 마주쳤다.
‘어……?’
그 순간 아주 잠깐 지운천의 사고 회로가 정지했다.
1초.
주변의 소음이 전혀 들리지 않을 정도의 짧은 순간 시각에 온 감각을 집중하면서도 머릿속은 어느 때보다 빠르게 회전하면서 무엇을 떠올리고자 했는지 헤아렸다.
“반갑습니다. 지운천입니다.”
지운천은 몸을 살짝 틀어 진도건을 바라보고 포권을 취하며 고개를 숙였다.
“반갑소.”
역시나 신상을 밝히고 싶지 않으려는 듯 딱딱하고 짤막한 어조의 대답을 들으며 지운천은 천천히 고개를 들면서 눈을 치켜뜨고 흘끔 올려다보았다. 그리고 방립의 그림자에 바로 밑에 가려져서 제대로 인지하지 못했던 사내의 붉은 눈을 분명하게 볼 수 있었다.
‘적안…….’
중원인과는 다르게 그는 새외 출신이므로 색목인(色目人)에 대한 경험이 많았다. 그러나 그런 그들에게서도 이토록 선명한 붉은 눈은 좀처럼 찾아볼 수 없는 것이었다. 방립의 그늘에서도 그 적색의 존재감을 오롯이 뿜어낼 수 있는 이런 적안의 ‘이유’는 그가 알기로 단 한 가지밖에 없었다.
‘하지만,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는군.’
그것 한 가지가 의아한 부분이지만, 그들에 대해 좀 더 관찰해본다면 신상에 대한 진위는 명백하게 밝혀질 것이었다.
지운천은 미소 띤 얼굴로 천서은을 잠깐 보았다가 다시 진도건을 보며 입을 열었다.
“귀공이 오실 줄 알았다면 감히 제가 나서지 않았을 것입니다. 되려 두 분께 실례를 범한 것 같아 마음이 무겁군요.”
“괜찮소. 도움을 받았다면 감사해야 할 일이니.”
“하하하! 귀공은 성격이 참 시원스럽군요. 마음에 듭니다. 전 이만 가 보도록 하지요. 또 만났으면 좋겠습니다.”
지운천이 다시 포권을 취하며 인사를 했다. 진도건과 천서은은 조심스럽게 포권하는 것으로 작별 인사를 대신했다.
지운천이 미소를 짓고는 돌아서서 자리를 떠났다.
금방 민중들 사이로 멀리 사라져가는 그 사람의 뒷모습을 물끄러미 보던 진도건이 돌아서면서 아주 작게 중얼거렸다.
“마음에 안 드는군.”
그 말을 들은 천서은이 가늘게 어깨를 떨었다.
말에 주어가 없었기 때문에 무엇을 가리켜 얘기하는지 몰랐지만, 그걸 머리로는 이해하고 있어도 가슴에서는 마치 그녀에게 들으라는 듯한 말인 것 같아서 상처가 되었다. 게다가 이렇게 바로 몸을 돌려 발걸음을 옮겼으니 더욱 그런 느낌이 강하게 들었다.
혼란스러운 심경에 잠깐 우두커니 서 있었을 때, 다시 진도건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가자.”
그의 목소리에 천서은의 고개가 들렸다.
진도건이 그녀를 향해 손을 내밀고 있었는데 그 손엔 학총의 무공 때문에 날아가 버렸던 그녀의 방갓을 들고 있었다.
천서은은 자신이 잘못 생각했음을 깨달았다.
방갓을 받아 다시 머리에 쓰고 면사를 정리하면서 얼굴을 가렸다. 세상에 검은 물감을 살짝 칠해놓은 것처럼 변해 버린 시야 속에서 진도건의 얼굴을 다시 보았다. 마찬가지로 방립에 거의 가려져 그 눈빛과 얼굴을 제대로 볼 수 없었던 그녀는 묘한 벽이 두 사람 사이에 존재하고 있음을 느꼈다.
마치 검은 면사가 둘 사이에 존재했던 연정이란 감정 요소를 걸러내는 듯한 그런 기분이 들었다.
“……네, 가요.”
천서은은 진도건의 손을 잡고 바짝 붙어 걸었다.
진도건의 손은 여전히 따뜻했다.
하지만, 슬쩍 올려다본 그의 얼굴은 방립의 그늘로 인해 무엇이 걸러졌는지, 앞을 바라보는 붉은 눈동자는 무슨 감정을 담아내고 있는지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
‘하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