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6화 - 제35장. 지운천(智雲天)이란 남자 (2)
야율균은은 그런 두 사람의 뒷모습을 바라보다가 피식 조소를 머금으며 혀를 찼다.
“쯧쯧! 제대로 붙잡혔네. ……뭐해, 가자?”
야율균은도 뒤를 쫓아가려다가 영은성과 최현걸이 먼지 따라가지 않음을 깨닫고 뒤돌아섰다. 두 사람은 이미 죽은 시신 앞에 한쪽 무릎을 꿇은 채 뭔갈 하고 있었는데 그녀가 가까이 다가가서 보니 시신의 앞섬을 풀어헤치고 있었다.
“있긴 있네.”
명치가 미약하게나마 검게 물들어 있는 상태.
손으로 꾹꾹 눌렀을 때 피부조직에서 느껴지는 탄력 같은 것에서 이상한 부분을 느끼진 못했으나 어쩌면 이 시신의 무공이 낮기 때문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최현걸은 시신의 옷가지를 여기저기 다 풀어헤쳤다. 점점 나신이 되어갔지만, 야율균은은 특별히 고개를 돌리기는커녕 흥미로운 시선으로 내려다보고 있었다.
“문신…….”
그들이 벗기고 있는 시신은 복부 쪽과 등에 부분적인 문신 같은 것이 있었는데 그 문양이 기하학적이어서 무엇을 뜻하는지는 알아보기 힘들었다. 그러나 그것은 첫인상이었을 뿐, 이를 유심히 지켜보던 야율균은이 툭 한마디 던졌다.
“그거 술진 같은데? 특별한 상징물이나 지면에 그린 술진도 없이 이자들 이동하는 것만으로도 환진의 규모가 축소되거나 나누어졌는데 그렇다면 사람과 직접 연결되어 있다는 소리잖아. 그 근거가 저 문신 아닐까?”
영은성과 최현걸은 즉시 다른 사람의 시신을 끌어다가 상의를 풀어 올려보았다. 그리고 하복부에 같은 모양의 문신이 있는 것을 확인했다.
영은성은 그 문신을 물끄러미 보더니 손가락으로 문양을 따라 그려보았다.
“……이해할 수 없는 문양도 있긴 하지만, 전체적인 테두리는 인(印)의 형태를 그리고 있는 것 같아.”
“그럴듯한 지적인데? 다른 건 또 없나?”
등의 문신들을 살펴보긴 했지만, 여기엔 다른 시체들 사이에서 일관성이 보이지 않았다.
“그만 가자. 우리 없다고 그새 부부 싸움할지도 모르니까.”
“후후!”
최현걸이 자리를 털고 일어나자 영은성도 웃음을 흘리며 뒤를 따랐다.
야율균은은 환도마종 마인들의 시체를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두 사람의 뒤를 쫓아갔다. 칼날 위에 선 무림의 생리 속에서 같은 마교 출신으로 달라진 처지가 새삼 떠올랐다. 이 길의 결말이 어디로 이어질지 알 수는 없으나 부디 잘한 선택이길 바랄 따름이었다.
세 사람까지 마저 떠나자 이 공터엔 시신들만 남았다.
곧 있으면 배고픈 수리들이나 산짐승들이 썩어가는 시체의 악취를 맡고 모여들 것이다. 단전 위치에 자리 잡은 문신의 그것이나, 거무튀튀 변색한 명치의 살점도 동물들에 의해 자연으로 돌아갈 것이다. 그리고 진도건 일행이 미처 발견하지 못한 머리카락 사이에 숨겨진 후두부의 염(念) 형태의 문신도 그렇게 사라질 것이다.
진도건 일행이 지하진에 도착할 때쯤엔 서서히 동이 트기 시작하면서 마을도 아침을 맞는 준비를 하고 있을 때였다.
그들은 객잔에서 잠시 쉬면서 아침 식사를 마쳤다. 그리고 무양표국의 지부를 찾아가 상원재의 서신을 건네줌으로써 다시 한수를 타고 한중까지 가는 배편을 구할 수 있었다.
상원재가 배신한 것인지 모호한 상황 때문에 껄끄러운 부분이 있었지만, 그렇다고 위협이 될 만한 상황이 올 리는 없다는 게 공통된 생각이었다. 이미 환도종 마인들을 경험해본 것이 자신감에 차게 한 원인이 되기도 했었다.
더는 거칠 육로가 없으니 그다음부터는 편안한 여행이 되었다. 아니, 분명 몸은 편한 게 맞는데도 어딘가 자꾸 불편한 구석이 조금씩 있었던 건 다름 아닌 진도건과 천서은의 관계 사이에서 부는 냉랭한 바람 때문이었다.
한중성에 도착하는 이틀이라는 시간 동안 두 사람은 오래 대화하는 법이 없었다.
본래가 정직한 성격인 편이었던 진도건은 언제나 천서은 근처에 맴돌면서 작은 배려들로 그녀에게 말을 걸었다. 하지만, 천서은은 짤막하게 대답할 뿐 이전까지 보여주었던 살갑고 정겨운 반응들은 없었다.
어쩌면 신분을 숨기기 위하여 줄곧 방립과 면사로 얼굴을 가리고 있는 이 상황이 그렇게 만든 것일지도 몰랐다.
이속우원(耳屬于垣).
한중성에 가까워짐에 따라 당연히 배 위에서도 듣는 첩자들의 귀가 있을 수 있으니 말조심해야 하는 건 당연하지만, 이 두 연인을 제외한 나머지 세 사람은 그런 식으로 생각하지 못했다.
세 사람 본인들도 가시방석 위에 앉은 느낌인데 좀처럼 입을 떼지 못하는 두 사람은 어떤 심경인지 궁금할 지경이었다.
그렇게 편함과 불편함이 공존한 배를 타고 출발한 지 이틀째 되던 날, 그들은 선수(船首)와 가까운 갑판 위에서 점점 눈에 들어오는 한중성의 하구를 바라볼 수 있었다.
* * * *
오래간만의 외출이므로 여유로운 기분이었으나 목적지가 있던 행보였기 때문에 금방 무료한 감도 찾아왔었다. 분명 이 성에 이르기까지 계속해서 동행(東行)하는 상황 속에서 손댈 수 있는 일들이 있었음에도 애써 무시하고 지나간 것은 여정의 목적지가 사천에 있었기 때문이었다.
뒷짐을 진 채, 손가락으로 쓰고 있던 방립을 살짝 들어 한중성 시가지의 모습을 스윽 둘러본 지운천(智雲天)은 잠시 눈을 감고 천천히 숨을 들이쉬었다.
“흐으음……!”
확실히 한중성이 중원에서도 바깥에 있는 곳이긴 했으나 그래도 사천과 섬서 경계를 지키며 한중분지의 비옥한 땅 위에서 번창한 성과 도시가 보여 주는 활기는 분명 대단했다.
“이곳의 특산 요리 정도는 먹고 내려가야지.”
콧노래를 부르면서 길을 걸었다. 그리고 예민한 후각을 발휘하면서 어떤 객점의 요리가 괜찮은지 탐색을 시작했다.
‘오……, 이건 뭐지?’
콧속을 자극할 정도로 매콤한 향기 속에 돼지고기의 기름 냄새가 묻어나오는 것이 절로 군침을 자극했다. 어딘가 고소한 냄새도 섞여 있는데 맡기만 해도 절로 침이 고였다. 그 향기를 쫓아 도달한 객점에 가니 숙수가 무쇠 냄비를 큰불 위에 올려놓고 열심히 흔들고 있었다.
예상대로 돼지고기를 비롯해 파와 양파, 감자 등 온갖 야채를 넣고 무쇠 냄비를 흔들면서 공기 중에 띄웠다가 받아내길 반복했다. 그때마다 불꽃들이 탁탁 튀면서 기름을 태우니 그 향기도 은근 스며 나왔다.
‘여기가 좋겠군.’
객점 안에도 사람이 북적였다. 다행히 구석 한자리가 비어있어 자리에 앉을 수 있었다.
매콤한 고기볶음이 고슬고슬한 쌀밥 위에 덮여서 나왔다. 비벼서 먹으라는 안내에 따라 해서 먹어보니 과연 맛이 일품이었다. 익숙하지 않은 화끈한 매운맛이 얼얼하기도 했지만, 어릴 때부터 3, 4년에 한 번씩 이곳과 사천 지방에 온 경험이 있어서 먹을 만했다. 30줄의 나이대로 완연한 어른이 되었으니 이젠 고통보다 맛으로 느껴지는 것이다.
한 그릇을 깔끔하게 비우고 물 한 잔으로 입안을 헹구면서 정리한 지운천은 만족한 미소와 함께 돈을 탁자에 올려놓고 객점을 빠져나왔다.
“싸움이다! 위험해!”
때마침 들려오는 외침은 매운맛으로 다소 흥분된 감정을 자극하기에 충분한 것이었다.
‘어떤 깜찍한 것들이 감히 이몸이 있는 곳에서 싸움을 벌이는지 한 번 볼까? 후후후!’
그는 곧바로 싸움이 벌어지는 곳을 찾아 움직였다.
길이 다섯 갈래로 나누어지는 오거리 공터에서 칼과 긴 발톱 무기를 찬 장정 다섯 명을 상대로 방립에 검은 면사를 쓴 여린 몸매의 여인 한 사람이 상대하고 있었다.
처음 보기엔 구도상 다섯 명의 괴한이 여인을 핍박하는 것처럼 보였는데 가만히 살펴보니 그들의 공격이 여인의 몸에 하나도 닿는 것이 없었고 그런 여인은 오히려 아슬아슬함을 즐기는 듯 숨은 여유가 느껴졌다.
아직 사람들의 시선에선 그런 여유를 느끼기 어려웠는지 한숨과 탄식을 연이어 토해내면서 걱정하는 기색만이 들려오고 있었다.
‘상당하군.’
경험상 아직 그를 만족시킬만한 수준의 여류고수는 본 적이 없었기 때문에 지운천은 몹시 흥미로운 눈으로 바라보았다.
방립면사의 여류고수, 그녀는 바로 천서은이었다.
어쩌다 보니 시비에 휘말려 공격을 당하고 있었지만, 그녀가 느끼기에 이들은 자신의 상대가 아니었다. 그저 그녀도 흥미를 느끼는 한 가지가 있다면 이들의 기세가 종전에 성을 들어왔을 때 진도건이 말했던 자들과 비슷한 느낌을 품고 있다는 점이었다.
‘마인들이 제법 많아. 어쩌면 광혈마종의 마인일지도 모르겠어.’
한중성의 백성들도 성내 도시의 분위기가 예전과 달라졌음을 인지하고 상시 조심하는 눈치였다. 지나가는 말들을 들어보면 근래 들어 치안이 많이 안 좋아졌다는 얘기를 하는 것이다.
관도 상당히 민감해져 있는 눈치였지만, 상주한 병력이 많지 않은 데다가 흉흉한 분위기의 원인이 무림인들 때문이라 그런지 오히려 몸을 사리는 모양이었다.
천서은은 이들을 속 시원하게 처치하고 싶었지만, 어쨌든 목적은 조용히 사천으로 진입하는 것이기에 마지막 관문인 한중성에서 일을 그르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런 난감한 심정임에도 한편으로는 이들의 실력을 직접 상대해 보면서 어느 정도 수준인지 감을 잡고자 하는 지점도 있었다.
두터운 가죽 장갑에 칼날을 발톱 형태로 달아놓은 쌍수무기가 파고들었다. 날카롭고 맹렬한 기세였지만, 펄럭이는 옷자락을 아슬아슬한 간극으로 닿지 못하고 되려 뒤로 돌아간 천서은이 등으로 부딪쳐왔다.
학총(郝總)은 덤벼들었던 기세를 따라 밀리자 앞으로 한 바퀴 나동그라졌다.
“이 개 같은 년이 날 제대로 자극하는구나!”
학총이 벌떡 일어나 버럭 소리를 지르자 이에 반응한 천서은이 잽싸게 몸을 돌렸다.
학총은 이미 발톱을 휘두르며 그녀를 덮치고 있었다. 전에 없던 날카로운 기운이 서려 있어서 더 위협적이었다.
퉁!
발로 지면을 밀어내면서 뒤로 몸을 날리는데 학총은 멈추지 않고 연격을 휘두르며 덮쳐왔다. 설상가상 뒤에서 칼을 든 두 사람 역시 도기를 뿜어내며 상단과 하단을 동시에 베어 들어오니 꼼짝없이 당하는 게 아닌가 싶었다.
챙!
여태껏 잠자고 있던 숙녀검이 뽑히면서 햇살 아래 칠흑의 검신을 드러낸다. 뒤로 몸을 띄우고 숙녀검으로 바닥을 긁으면서 하단을 노리고 들어오는 검을 쳐올린다. 동시에 그녀의 왼손은 대담하게 위로 뻗더니 짓쳐 드는 칼등을 눌렀다.
가녀린 몸에서 뿜어져 나온 믿을 수 없는 완력. 여지없이 휘둘린 두 자루 칼날을 당겨 전면에 뿌리니 바로 학총의 발톱을 향해 날아간다.
카카칵!
기운들이 충돌하고 칼들은 발톱 사이에 끼어버린다. 그와 함께 학총을 비롯한 세 사람이 동시에 몸이 엉키면서 땅을 나뒹굴었다.
“건방진 년.”
꺼림칙하게 걸걸한 그 목소리를 듣기도 전에 천서은은 이미 접근해오는 존재를 눈치채고 몸을 돌리고 있었다.
어떤 공격이든 문제 되지 않을 거로 생각했다.
하지만, 이 자들의 수장은 학총이 아니라 바로 이 양추수(羊追隨)였다.
광무혈폭마공(狂武血暴魔功) 후폭류(後爆流).
그것은 아주 간단하면서도 악착같이 상대의 목숨을 노리는 기공술이었다. 쳐올리는 도격이 경로를 가로막는 흑검에 의해 막히는 순간, 터져 나오는 기류의 폭발이 얼굴을 노리고 솟구쳤다.
파앙!
본능적으로 천서은의 허리가 활처럼 휘고 고개가 뒤로 젖혀졌다. 호신강기까지 발동되어 피부를 덮을 정도로 위협을 느낀 것인데 가까스로 피하긴 했지만, 얼굴이 화끈거릴 정도로 그 후폭류의 기세가 주변에까지 미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