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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의 귀신-185화 (185/432)

185화 - 제35장. 지운천(智雲天)이란 남자 (1)

야율균은의 지적에 천서은이 고개를 돌려 쏘아보았다. 그러나 최현걸과 다르게 그녀는 그런 거로 움찔할 여자는 아니었다.

“저기…… 서은아, 내 말은 그런 뜻이 아니라…….”

“됐어요.”

천서은이 차갑게 대꾸하면서 앞으로 걸어 나갔다.

적들에게 포위되어 환도종 특기인 환진까지 발동된 마당이었지만, 영은성이나 최현걸 모두 신경이 적들보다는 천서은의 반응에 가 있었다. 특히 최현걸에겐 그녀의 분노보다 무서운 건 없다고 생각했다.

“아무도 나서지 말아요. 내가 처리할 테니까.”

“뭐? 그래도 위험할…….”

“나서지 말라면 말아요.”

단호한 천서은의 눈빛에 진도건도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철컥.

야율균은은 아예 만곡도를 도집에 돌려놓고 팔짱을 꼈다.

“뭐, 접근하는 놈들이나 처치하고 일단 맡기자고.”

“하하…….”

야율균은의 문제 없다는 식의 시원스러운 반응은 오히려 영은성이나 최현걸을 당황스럽게 만들었다.

천서은은 머리에 쓰고 있던 면사 달린 방갓을 벗어던졌다. 단발머리를 찰랑거리면서 드러난 여인의 미모에 놀라는 것도 잠시, 당당하게 홀로 다가오는 그 모습에 환도종 마인들의 수장인 도문광(陶問廣)이 피식 웃음을 흘렸다.

“계집년이 혼자 나서다니. 창천맹의 족속들이란 이리 오만한가?”

“본녀가 지금 심기가 많이 불편하거든? 죽기 싫으면 전력을 다해야 할 거야.”

챙!

천서은이 말 끝나기가 무섭게 숙녀검을 뽑자 시커먼 검신이 달빛 아래 섬뜩한 빛을 내었다.

보통의 철검이 아니라 흑검인 것을 본 도문광의 미간이 살짝 좁혀졌다. 한눈에 보기에도 범상치 않은 흑검에 단발머리 미모의 여류고수라는 범상치 않은 특징에서 당장 떠오르는 명부(名簿) 속 이름은 없었다.

“건방진 년!”

세 사람이었다.

도문광과 우측의 인물이 어느새 천서은의 좌우 방향에서 좁혀들어오는 두 사람과 합을 맞춰 동시에 달려들었다.

환진에 영향을 받은 그들의 검에는 하늘까지 에워싼 방진에서부터 내려온 마기로 연결되고 휘감아져 섬뜩한 살기를 뿌렸다. 그 날카로운 칼끝이 지척에 이른 순간 천서은의 숙녀검이 가늘게 떨렸다.

터터텅!

도문광은 순간 움찔했다.

천서은의 검이 워낙 빠르게 움직여 동시에 세 사람을 강타했기 때문이었다. 그 빠르고 강력한 검격에 동시에 나가떨어졌으니 놀람을 금치 못했으나 그건 천서은도 마찬가지였다.

‘베이지 않았어?’

천서은의 검속은 확실히 빨라서 적들이 검으로 막기도 전에 분명 몸을 갈랐음을 인지했다. 그러나 검날과 소음으로 자신의 검이 이들을 베지 못하고 무언가에 막힌 것이다. 그리고 그녀의 시선이 적들이 가까이 머물렀던 허공에 이르러 마기의 기류가 꿈틀거리는 걸 보고 이유를 직감할 수 있었다.

‘환진의 보호도 받는 것인가?’

세 사람이 꿈틀거리더니 엉기적거리며 일어났다. 도문광도 잠깐 놀랐지만, 그들이 속한 환도마종에서 구축한 환진의 힘은 무궁무진하다는 걸 재확인했다는 생각으로 실소를 머금었다.

도문광이 한 손을 번쩍 들자 네 사람이 진도건 일행의 주변으로 거리를 좁혔다. 동시에 그를 포함한 열 명이 일제히 천서은을 향해 달려들었다. 그들이 움직임과 동시에 거대한 방원진을 형성했던 환진의 장막이 둘로 나뉘었다.

전혀 예상하지 못한 눈앞의 현상에 적잖이 놀랄 수밖에 없었다.

“환진의 근원이 술사에게 있구나.”

진도건이 작게 중얼거렸다.

무슨 자신감인지 똑같이 네 사람으로 숫자를 맞춰 포위한 환도종 마인들을 흘끔 돌아본 진도건이 슬며시 왼손으로 군자검의 검병을 만지작거렸다. 그러자 적들은 방어적으로 경계하는 자세로 마치 공격을 기다린다는 태세를 보였다.

“애인 말 대로 할 건가?”

야율균은이 슬쩍 묻자 진도건이 쓴웃음을 머금었다.

“제가 실수했나요?”

“음, 글쎄? 후후! 상재원의 딸한테 친절했어?”

야율균은이 상이령을 거론하자 진도건도 자신의 실수가 무엇인지 깨달았다. 당연히 간신히 ‘인지’했을 뿐이지 ‘이해’한 것은 아니었다.

“……그게 토라진 이유라고요?”

“그렇진 않을 수 있지만, 아마 네 애인을 불편하게 만들 이유 중 하나는 되지 않을까 싶은데?”

“흐음!”

진도건은 야율균은의 충고가 같은 여자로서 하는 말이라는 생각에 좀 더 진지하게 들을 수밖에 없었다.

“하! 이것들이 여유를 부려?”

그때 두 사람이 태연히 얘기를 나누는 모습이 심기에 거슬렸는지 언성을 높였다.

최현걸이 킥킥대며 웃었다.

“저 단발머리 아가씨가 우리보고 움직이지 말라고 했으니 그러는 거뿐이야. 너희들은 곧 천녀(天女)의 진노를 감당해야 할 테니 얌전하게 모가지 씻고 기다리고 있어.”

“후후!”

영은성이 공감한다는 듯이 따라 웃음을 흘렸다. 두 사람의 반응에 진도건이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너희들에게 형수가 그런 인상이냐?”

“산서에서 내려올 때 직접 형수의 진노를 경험해 본 한 사람으로서 확신하는 말입니다, 대형.”

“원시천존.”

최현걸과 영은성의 대답에 진도건이 피식 웃었다.

그들이 여유를 부릴수록 열불이 터지는 것은 환도종 마인들이었다.

여유를 부린다는 것은 실력에 자신 있다는 소리니 환진의 보호를 받고 있다고 하더라도 섣불리 움직일 수는 없었다. 그들이 모습을 드러낸 것은 그래도 환진과 더불어 수적 우위에 있다는 자신감 때문인데 지금 이 조는 그 수적 우위가 없으니 조심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런 침착한 경계심은 곧 무너졌다.

꽈르릉!

엄청난 천둥소리가 산줄기를 관통할 정도로 울려 퍼졌다.

달과 별이 선명하게 보이는 맑은 밤하늘이었음에도 느닷없는 천둥소리에 모두 화들짝 놀랐다.

“시작 됐구만.”

최현걸이 낮게 중얼거렸다.

꽈르릉!

재차 울리는 천둥소리와 최현걸의 중얼거림을 들은 한 마인이 다른 동료들이 있는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그는 좁아진 방원의 환진 벽 사이로 푸르스름한 기운이 번쩍거리면서 밖으로 새어 나오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응, 너흰 끝났어! 이젠.”

키득거리면서 중얼거리는 최현걸의 목소리에 마인의 어깨가 흠칫 떨렸다. 그리고 그들의 머릿속에선 한 여자의 이름이 서서히 떠오르기 시작했다.

‘설마……!’

공통된 설마 하는 생각들.

푸른 벽력의 기운을 동반한 무공의 전설적 위력은 이미 일월신마와의 격돌에 관한 이야기를 통해 소상히 전해진 바 있었다. 그 주인은 바로 창천맹주인 파천무봉 천무경이었는데 그와 유사한 무공을 다루는 여자는 천하에 딱 한 사람밖에 없었다.

백봉천녀 천서은.

미모는 소문대로 아름다웠으니 인지하고 있는 정보와는 일치하지만, 단발머리는 그들이 가진 정보에 없었다. 처음엔 평범한 검기로 상대하던 그녀는 어느 순간 끈덕지게 몰아붙이는 환도종 마인들에 대항하여 푸른 벽력의 기운을 뽑아내어 세 사람을 일격에 쓰러뜨리는 걸 본 순간 도문광은 점점 확신하게 되었다.

‘어떡하지? 주, 죽일 수 있나……?’

사패련 시절 비무제에서 우승했단 기록은 있었지만, 그 이후의 무공 수준에 대해 자세하게 서술된 정보는 없었다. 아무리 그들의 환진이 더 많은 마기를 공급해 주면서 무공의 수준을 올려준다고 하더라도, 만약 그녀가 천무경의 딸로서 그 핏줄다운 실력을 보유하고 있다면 현재 여기 있는 환도종 마인들의 수준으로는 어쩌면 그녀를 처치한다는 게 요원한 일일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이 있었다.

‘그, 그래도 지금의 환마강진(幻魔降陣)이라면……!’

만일이라는 가능성.

그것은 분명 환도마종 환술, 환진에 대한 무한한 자부심 때문에 가질 수 있는 생각이었다.

하지만, 그 가능성을 점치느라 잠깐 멈칫거리는 사이에 천서은의 검격은 이미 벼락처럼 뻗어 나가고 있었다.

“크악!”

환진이 제공하는 방벽조차 쪼개버리는 검격에 도문광의 낯빛이 점점 사색이 되어가고 있었다.

“후, 후퇴……!”

서둘러 내뱉으려는 말 한마디를 잡아낸 천서은의 눈빛에 서슬 퍼런 살기가 흘렀다.

파천신공 뇌정백적운(雷霆白積雲).

이미 검기 수준으로 환진을 부술 수 없다고 느낀 그녀가 꺼낸 건 거대한 내공의 방출이었다. 파천신공 개천과 개벽으로 이어지는 폭발적 분출을 아직 감당할 수 없기에 이를 대신해서 창안한 초식이었다.

꽈꽈꽈꽝!

굉음과 함께 분출된 강기들이 순식간에 사위를 휩쓸었다. 검격을 동반한 강기에 마인들이 우후죽순 쓰러지고 주변부터 하늘까지 뒤덮었던 환진의 자색 벽을 뚫고 밖까지 분출되었다.

“하! 이래도 안 깨지다니!”

천서은이 기가 차다는 듯이 콧방귀를 뀌었다.

그녀의 강기가 밖으로 분출될 정도로 환진이 흔들렸고 죽은 자들도 발생했지만, 환진은 다시 비워진 공간을 복구했다. 그러나 마인들의 죽음에 영향을 받았는지 환벽의 색은 바깥의 풍경이 꽤 선명하게 보일 정도로 급격하게 옅어졌다.

“술진 작동의 근간은 술자 자신인가? 두 장로님이 환도신마에게 고생한 이유가 이것 때문인가?”

냉철하게 쏘아대는 물음에 도문광은 황망한 기분에 대꾸도 할 수 없었다.

열 명 중 일곱이 순식간에 쓰러졌기 때문이었다.

“후퇴해라!”

도문광이 뒤로 훌쩍 뛰어오르면서 소리쳤다. 이젠 이 자리의 누구든 천서은이 자신들이 감당할 수 없는 고수라는 걸 깨달았다. 이미 기다렸다는 듯이 산개하여 몸을 날리는 그들을 바라보며 천서은이 어딜 먼저 쳐야 할지 잠시 멈칫할 때.

그들과 달리 진도건 쪽에선 후퇴가 아니라 되려 공격이 들어왔다. 검은 무복과 방갓의 일관된 차림 때문에 단순히 수행원이라고 생각했는지.

영은성이, 최현걸이, 야율균은이 적들의 공격을 막을 때, 진도건만이 붉은 검기를 뿜어내면서 가로막는 환진의 마기를 마인과 동째로 갈라버렸다.

서컥!

한 사람의 죽음으로 환진이 옅어지고 위협도 줄어든다. 또 진도건의 검기가 지나간 공간으로 환진에 틈이 만들어졌는데 쉬이 닫히지 않았다. 종전의 천서은이 뚫어냈으나 곧바로 그 틈을 메운 반대쪽 환진의 반응과는 전혀 달랐다.

진도건은 그 틈 사이에서 천서은에게서 도망치는 세 마인의 움직임을 보았고 그곳을 향해 손을 뻗었다.

멈칫했던 천서은이 잠깐 그대로 목석처럼 굳어졌다가 뒤를 휙 돌아보았다.

자줏빛 환진의 갈라진 틈에서 손을 뻗은 진도건의 모습이 보였다. 다시 고개를 돌려 주변을 바라보는 그녀의 시야 속엔 달아나지 못한 채 염력에 붙잡혀 꼼짝도 못 하는 적들의 뒷모습이 있었다.

‘치……!’

서컥!

자비 없는 검기가 반원을 그리며 퍼져나가는 순간 도문광을 포함한 세 마인의 목이 날아가며 그대로 쓰러졌다.

그 잠깐의 급변한 사태를 진도건 쪽에 있던 남은 세 마인은 미처 감지하지 못했다. 그리고 허약해진 환진의 보호로는 세 사람의 강력한 일초들을 견뎌낼 수 없었다.

매화검법 매개이도.

항룡십팔장 항룡유회.

흑풍명천마공 흑사풍파.

고작 넷만 배치한 것도 제아무리 환진의 공능이 위력적이라 한들 힘의 균형이 맞지 않았는데 한 사람이 죽었으니 상대가 되지 않음은 당연하다. 세 사람의 절초는 사정없이 환진에서 비롯된 마기의 보호까지 찢어발기며 마인들의 목숨을 앗아갔다.

진도건은 군자검을 검집에 돌려놓고는 공손히 손을 모은 채 점점 다가오는 천서은을 무거운 마음으로 기다렸다.

“나서지 말라고 했죠?”

“우도할계(牛刀割鷄). 상대도 되지 않은 적들로는 기분이 썩 풀리지 않겠지. 난 둔하니까 내게 화난 거라면, 차라리 날 혼내고 가르쳐줘. 널 향한 내 마음이 진심인데 내가 감히 다른 생각을 하겠어?”

진도건이 미안한 감정을 표정에 담으면서도 부드러운 미소로 얘기하자 천서은의 눈빛이 잠시 흔들렸다. 그러다 야율균은과 잠깐 눈이 마주친 천서은은 그녀가 그에게 언질을 주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흥! 됐어요. 아직 갈 길이 구만리인데 제게 투정 부릴 여유나 있나요?”

천서은이 휙 몸을 돌려 앞서 나가자 진도건은 풀이 죽은 채 그 뒤를 졸래졸래 따라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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