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4화 - 제34장. 한중성(漢中城)까지 (6)
늦은 밤, 귀운선은 안강군의 하구에 정박했다. 원래대로라면 천천히 운항하여 내일 아침에 닿았을 것이나 진도건 일행의 요청을 수용하여 꾸준히 노를 젓고 돛을 조종한 덕에 시간을 단축할 수 있었다.
상원재는 상이령을 통해 전해진 진도건의 청을 받아들여 표국 산하 마방의 자고 있던 주인을 깨워서 말 다섯 필을 바로 내주었다. 한중성과 운현까지 주로 물자를 호송하는 무양표국으로선 이따금 야간작업할 때도 있었기에 그렇게 무리한 일도 아니었다.
또 지하진에 도착해서 다시 배를 구할 수 있도록 무양표국의 지하지부에 보낼 서신과 자신의 직인을 찍어 진도건에게 건네주었다.
충분한 양의 건량과 식수까지 말에 실은 다섯 사람은 상원재 부녀에게 감사를 표하며 바로 출발 준비를 했다.
“늦은 밤인데도 정말 고생이 많습니다. 그리고 놈들 좀 꼭 처리해 주십시오.”
“알겠습니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조심히 가세요.”
상이령은 마지막까지 예의를 다해 준비를 돕고 배웅까지 해 주었다. 건량과 식수를 챙겨 주는 건 그녀의 몫이었으니 진도건이나 영은성이나 최현걸 모두 칭찬해 마지않았다. 그 모습이 야율균은은 피식 웃고 넘어가는 것으로 끝났으나 천서은은 어색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는 걸 세 남자 중 누구 한 사람도 눈치채지 못했다.
안강군에서 한수 너머로 건너가 서쪽을 바라보는 지형의 풍광은 대단했다.
왼쪽으로는 봉황산맥의 웅장한 산봉우리가 높이 솟아 있어 시야를 막고 있고 오른쪽으로도 진령산맥 끝자락의 산세가 거칠게 경사를 이루고 있었다. 어둠 속에 내리쬐는 보름달의 잔잔한 황금빛 광채로 비추는 산세의 운치는 어쩐지 올려다보는 사람에게 주눅을 들게 하기도 하고 또 을씨년스럽기도 했다.
이 사이로 완만한 구릉 지대가 눈앞에 탁 트여 있으니 전날 운현까지 달려온 산길에 비하면 훨씬 수월해 보였다. 한수의 지류도 여길 따라서 흐르고 있었으니 가는 길 심심하지도 않을 듯했다.
이 길을 다섯 사람이 말을 타고 달리기 시작했다.
흑마나 갈색 말 위에서 검은 방립을 머리에 눌러쓰고 흑의장포를 펄럭이며 달리는 다섯 사람은 금방 어둠 속으로 모습을 감추었다.
그들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상원재도 돌아서며 한 마디 던졌다.
“자, 다들 고생들 했네. 우린 내일 아침에 출발할 터이니 다들 일찍 들어가 잠들 청하게나.”
“저 사람들이라면 놈들을 처치할 수 있을까요?”
한두가 옆에서 묻자 상원재가 어깨를 으쓱거렸다.
“맹의 고수들이니 실력을 믿어봐야지.”
상원재와 상이령은 곧장 무양표국 지부로 향했다. 그 전각 안으로 들어서서 상이령과도 각자의 방으로 헤어진 후, 상원재는 바로 침소로 들어가지 않고 자신의 서재로 향했다.
서재로 들어가서 가장 먼저 책상 위의 촛불을 밝혔다.
푸드덕!
늦은 시간 주인의 방문을 반기는 것인가, 또는 갑자기 눈앞이 밝아져서 성질을 내는 것인가?
창문 가까이 걸려 있는 새장 속의 비둘기들이 날갯짓해대며 잠깐 요란을 떨어댄다.
상원재는 자신의 책상 앞에 앉았다. 이미 작은 종이가 책상 한구석에 적당히 쌓여 있었으니 거기서 한 장을 집어 앞에 펼쳐놓았다. 벼루에 먹물을 조금 붓고 서걱서걱 잠시 먹을 갈고는 점도가 적당히 진해지는 걸 확인한 후, 얇은 붓을 들어 짤막한 글귀를 써 내려갔다.
「창천오인(蒼天五人) 패검(佩劍) 행화소암(行火燒庵) 요살(要殺)」
상원재는 다 쓰고나서 붓을 내려놓고 한동안 물끄러미 열두 개의 글자를 바라보았다.
어둠 속 일렁이는 촛불 때문에 그의 표정이 왜곡되어 웃고 있는 것인지 슬퍼하고 있는 것인지 알 수 없었으나 종이를 돌돌 말아 작은 원통에 넣을 때 비친 반응에 그의 심경이 담겨 있으리라.
“하아……!”
구구…….
그의 한숨에 비둘기가 낮게 울었다.
새장을 열어 비둘기의 다리에 원통을 묶은 상원재는 창문을 열고 비둘기를 날려 보냈다. 이 전서구는 곧장 밤하늘 높이 날아올라 서쪽을 바라보고 힘차게 날갯짓을 했다. 그렇게 사라지는 것을 잠시 지켜본 상원재는 무거운 몸을 이끌고 자신의 침소로 터덜터덜 걸어갔다.
* * * *
길은 생각보다 괜찮았다.
중간중간 산자락이 불쑥 올라오고 숲이 가로막는 경우가 있긴 했지만, 지대가 워낙 완만하고 한수의 지류도 흐르고 있다 보니 화전민(火田民)들이 논밭을 일구기 위해 숲을 태우고 해서 시야가 트일 정도로 가로막는 것들이 별로 없었다.
더구나 장시간 말을 달릴 때는 역시 진도건의 선풍만큼 도움을 주는 힘이 없었다. 말이 느끼는 체중의 부담을 줄이고 맞바람도 걷어내어 저항을 줄여 주니 마음껏 속도를 낼 수 있었다. 호흡도 지속해서 시원하게 뚫릴 정도이니 체력 소진을 획기적으로 줄여 주었다.
‘말은 내가 제일 잘 타지만, 저 녀석은 마치 텡그리의 비호 아래 있는 것 같구나.’
초원과 험산에서 말을 타왔던 야율균은은 혀를 내두를 수밖에 없었다. 그녀는 야율재, 야율신이 선봉에 서서 그 거대한 존재감으로 적진을 뚫고 지나갈 때 그들의 뒷모습에서 텡그리의 가호를 떠올렸었다. 그러나 지난 며칠간 진도건과 함께 말을 타 본 결과 이젠 과거의 기억을 부정할 지경에 이르렀다.
“저긴 것 같은데?”
시끄럽게 말발굽이 땅을 두들기는 소음 사이로 최현걸의 목소리가 뚫고 나왔다. 앞을 가리키는 그의 손가락을 따라 바라보니 지대는 여전히 높지 않지만, 제법 울창한 숲이 눈에 들어왔다.
두 시진을 줄곧 달려왔으니 시간에 비례한 거리를 가늠해볼 때, 최현걸은 대략 이쯤이 맞을 것 같다는 계산이 섰다.
푸히히힝!
숲에 이르렀을 때, 다섯 사람은 말을 멈춰 세웠다. 앞을 가로막은 숲을 자세히 살피니 너머로 갈 수 있는 오솔길이 눈에 들어왔고 왼쪽을 살펴보니 봉황산 기슭으로 들어가는 오솔길도 찾을 수 있었다.
다섯 사람은 말에서 내려 나무에 잘 걸어두고 숲으로 들어갔다. 얼마간 들어서자 갈림길이 나왔는데 그들은 망설이지 않고 오른쪽으로 방향을 잡아 경공을 펼쳤다.
나무들이 스쳐 지나가며 파스스 거리는 소음을 일으켰다. 나무들이 이파리를 울창하게 피워내며 시야를 가리고 있었지만, 진도건은 그런 것에 별로 방해를 받지 않고 멀찌감치서 이곳을 향해 있는 기척을 읽고 있었다. 그 기척들은 그들이 이동하는 속도에 발맞춰 산속으로 들어가고 있었으니 상원재가 처리해달라던 놈들에게 가는 길이 분명한 것 같았다.
얼마간 들어가자 탁 트인 공간이 눈에 들어왔다. 나무는 거의 없이 풀들만 무성하게 자라 있었는데 허물어진 폐가만 눈에 들어왔지 특기할 만한 점은 없었다.
“별거 없어 보입니다만…….”
영은성이 둘러보며 중얼거릴 때, 최현걸이 오른쪽에 보이는 숲으로 몸을 날렸다. 근처를 서성이며 살펴보던 최현걸이 이쪽으로 오라는 손짓을 했다.
“여기입니다.”
다른 사람들이 그의 곁으로 모였다. 오솔길이 다시 등장했는데 거기엔 표지석이 하나 세워져 있었다.
“화소암. 상 국주가 얘기한 곳이군.”
다섯 사람은 오솔길을 따라 다시 숲으로 들어갔다. 조금 돌아가는 듯한 느낌이 들었지만, 종국엔 처음 바라보았던 방향 그대로 길이 계속 이어졌다. 그리고 진도건의 감각에 잡히는 기척도 두셋 조금씩 늘어났다.
속도에 좀 더 박차를 가했다. 그리고 마침내 종전의 개활지보다 더 넓고 특히 길게 경사로에 뻗은 개활지에 도달했다.
울창한 봉황산 속, 봉황의 깃털 한 개비가 떨어져 숲의 한 부분을 날려버린 듯한 그런 공간이었다. 세 채 지어진 암자를 가리켜 화소암이라 부르는 건 바로 그 때문이었다. 그리고 암자를 향해 오르는 비탈진 경사로 위에서 진도건 일행을 내려다보는 자들이 있었다.
“마교다.”
진도건은 그들을 보자마자 바로 확언했다.
희미하게 흘러나오는 마기의 잔재가 그의 감각을 자극하고 있었다.
마치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가로로 넓게 포진한 자들은 진도건 일행을 향해 천천히 걸어 내려왔다. 내려오는 걸음걸이는 자연스러우나 손에 든 병장기에서 그 의도가 확연하게 드러난다.
“어떡할까요?”
“숲 바깥도 움직인다. 기왕이면 모두 끌어냈을 때, 처리하자.”
다섯 사람도 천천히 걸어 올라가면서 각자의 검과 타구봉, 만곡도를 뻬들었다.
그들의 위치가 공터의 중앙으로 점점 옮겨갈수록 진도건의 감각에 잡혔던 숲속의 감시자들도 그 거리가 가까워졌다. 적들도 의도하는 바가 있는지 천천히 거리만 좁힐 뿐 특이하다 할만한 행동을 하지 않고 있어서 주의를 기울이고 있었다.
“근데 저놈들 어디 마종 소속이죠?”
거리가 조금씩 가까워짐에 따라 어둠 속에서도 그들의 뛰어난 안력으로 면면을 살펴볼 수 있게 되었는데 생각보다 겉보기에 평범한 자들이었다.
일대에 광혈마종의 세력이 퍼져 있다고 들었기에 눈빛에서 특유의 광기가 흐르는가 싶은데 그런 건 느껴지지 않았다.
갑자기 적들이 접근을 멈추었다. 그러더니 진용을 더 넓게 펼쳤다. 숲에 있던 자들도 어느새 모두 공터에 그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모두 12명.
진도건 등은 차분히 그들의 행동을 기다렸다. 마치 기꺼이 포위를 기다리는 것처럼.
“당돌한 놈들이로군. 창천맹이란 이름을 지나치게 자신하는 거 아닌가?”
전면의 적들 가운데에 선 자가 외쳤다.
그는 손에 든 무언가를 진도건을 향해 던졌다. 워낙 물건이 작아 어둠에 가려져 잘 보이지 않았지만, 암기가 아닌 듯 받기 좋게 포물선을 그리며 날아왔다. 그것이 진도건 앞에 이르러서 속도가 확 죽어 버렸다.
진도건은 가볍게 손을 뻗어 그것을 잡았다.
“이거 전서구에 쓰는 건데?”
최현걸이 옆에서 보고 얘기해 주었다.
마개 부분을 여니 과연 돌돌 말린 조그마한 서신이 들어 있었다. 진도건은 서신을 손바닥에 펼쳐 보였다. 그리고 그걸 옆에서 본 천서은이 인상을 찌푸리며 입을 열었다.
“상원재가 마교와 한통속이었구나.”
진도건은 특별히 반응하지 않고 물끄러미 서신을 바라보았다. 잠시 그렇게 서 있다가 천서은을 보며 대꾸했다.
“그렇게 보이진 않았어. 한통속이라기보다는 협박을 받은 거겠지. 괜히 우리보고 처리해달라고 한 거겠어?”
“저 마교도들이 기다리고 있었어요. 이 서신은 분명 상원재가 보낸 게 틀림없고요.”
천서은의 말에 영은성은 내심 조금 놀랐다. 천서은의 의견은 일견 맞는 부분도 있었으니 큰 문제가 아니었지만, 어째선지 목소리에서 감정이 조금 묻어나온다는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이건 곁에서 듣고 있던 최현걸이나 야율균은 모두 같은 생각을 하는 중이었다.
“알고 있겠지만, 그들은 무공을 익힌 사람들이 아니야. 게다가 그 딸은 순진하기 그지없는 인물인데 어떻게 마교에 의탁해 맹을 적으로 돌리려고 하겠어? 말 못 할 사정이 있는 걸 거야.”
진도건의 대답을 듣던 중, 영은성은 자기도 모르게 천서은의 표정을 살폈다. ‘딸’이라는 상이령에 관한 얘기가 나왔을 때, 천서은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는 걸 그는 보고야 말았다.
그때였다.
“이런! 저놈들 환도종이다!”
최현걸이 당황한 목소리로 외쳤다.
앞서 중앙에 선 자가 갑자기 합장하며 염을 외는 듯하더니 포위한 자들 모두 따라 하기 시작했다. 그에 따라 그들에게서 시작한 자줏빛 섬뜩한 기운이 일대의 공간을 에워싸기 시작했다.
방원의 환진이 완성된 것은 순식간이었다. 그리고 별 것 아닌 것처럼 느껴졌던 적들에게서 무시할 수 없는 마기가 흘러나오기 시작하니 모두 피부로 그 힘을 느낄 수 있을 정도였다.
“사정을 모른다면서 그 아가씨에 대해서는 어떻게 그리 단언할 수 있죠?”
“보고 느낀 그대로를 얘기한 것뿐인데…….”
“그 아가씨가 마음에 들었나 봐요?”
그 한 마디에 갑자기 분위기가 차갑게 가라앉았다. 그리고 진도건도 그제야 자신이 뭔가 실수를 했다는 걸 깨닫기 시작했다.
뒤에서 이를 지켜보던 야율균은이 피식 웃으며 한마디 했다.
“귀엽네, 너희들. 적 앞에서 사랑싸움이나 하고 있고 말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