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칼의 귀신-183화 (183/432)

183화 - 제34장. 한중성(漢中城)까지 (5)

최현걸과 야율균은은 마구간이 빈 마방을 찾아 말들을 맡기고 배에 태울 새 말을 구하러 움직였다. 영은성은 하구로 이동해서 일찍 출발하는 배편을 확인하러 갔다. 그 사이 진도건과 천서은은 갓을 눌러쓴 채 마을을 쭉 둘러보았다. 혹시 모를 마교의 감시망이 있는지 돌아다니면서 기운을 탐지하려는 것이었다. 당연히 그 역할은 주로 진도건의 몫이었다.

“어때요?”

“없는 거 같아.”

이른 아침 작은 마을의 조용한 활력을 감상하면서 쭉 둘러본 진도건과 천서은은 이상한 점을 찾지 못하자 나루터로 이동했다.

때마침 영은성도 나루터에서 나오고 있어서 그에게 가까이 갔다.

“어떻게 됐어?”

“근처에 무양표국(武陽鏢局)이 있는데 한중과 중원의 물자이동을 오래전부터 전담하고 있어서 거기에 알아보면 된다고 합니다.”

영은성은 그리 말하면서 나루터 한쪽에서 짐을 옮기는 장정들을 가리켰다.

단단한 체격의 장정들은 나무 상자를 어깨에 지거나 좀 큰 것 같은 경우는 둘이 함께 든 채 나루 옆 한쪽에 쌓아놓고 있었다. 목판으로 단단하게 마감한 상자는 옆면에 ‘무양(武陽)’이라고 붉은 염료로 적힌 종이를 붙여놔 그 주인이 누군지 알도록 하고 있었다.

진도건과 천서은, 영은성은 그곳으로 가 마침 짐을 내려놓은 장정 하나를 붙잡았다.

“이보시오. 한중성으로 가려고 하는데 배를 좀 얻어타고 싶소이다. 표국주를 뵙고 싶은데 어디로 가면 뵐 수 있소이까?”

장정은 세 사람을 흘겨보았다. 물어본 사람은 영은성이었는데 방립을 들어 얼굴을 드러내고 있었고 진도건과 천서은은 여전히 방립과 면사 등으로 얼굴을 가리고 있는 모습이었다.

“세 사람이오?”

“두 사람이 더 있고, 중간에 육로 이동하려 해서 말 다섯 필도 함께 싣고 가고 싶소.”

“오늘 출발하는 배는 작아서 말은 못 태우는데.”

세 사람은 고개를 돌려 정박한 배들을 바라보았다. 중형급 함선도 있었지만, 장정의 말대로 그보다 규모가 절반 정도 작은 상선이 나루터에 정박하고 있었다. 쌓이는 물자 규모도 그렇게 크지 않아서 작은 배를 이용하는 모양이었다.

“무슨 일이냐?”

그때 한 남성의 음성이 들려왔다. 고개를 돌려보니 작은 키에 조금은 뚱뚱한 체형을 가진 중년인이 묘령의 여인과 함께 걸어오고 있었는데 좋은 비단옷으로 차림을 하고 있어서 신분이 남달라 보였다.

아니나 다를까, 장정들이 일하다 말고 고개 숙여 인사하니 그가 바로 무양표국의 국주 상원재(商元財)였다. 그 옆에서 걷는 여인은 그의 딸인 상이령(商李玲)이었다.

영은성은 상원재에게 다가가 포권으로 예를 갖추며 그들의 사정을 간략하게 설명했다. 그 얘기를 가만히 듣던 상원재가 피식 웃음을 흘렸다.

“맹에서 오신 분들이로구만. 말씀대로 배를 바꿔드리리다. 이봐, 한두(漢頭)야! 가서 장 선장(船長)을 불러 귀운선(龜運船) 좀 끌라고 해라. 노꾼들도 준비시키고.”

“알겠습니다.”

영은성과 잠시 대화했던 한두는 냉큼 장 선장을 모셔오기 위하여 뛰어나갔다.

“갑작스러운 요구였는데 괜찮겠습니까?”

“안 그래도 엊그제 하오문을 통해 창천맹으로부터 서신을 받았습니다. 한중성으로 가는 일행이 있으니 협조를 부탁한다고 말입니다. 대신 저희도 곤란한 지점이 있으니 가시는 길에 부탁 하나만 들어주시기 바랍니다.”

“그게 무엇입니까?”

“안강군에서부터는 육로를 통해 가시지요? 이 육로의 오른쪽은 진령산맥의 지맥(支脈)에 해당하는 산지가 있고 왼쪽은 봉황산(鳳凰山)의 산계가 직접 높은 봉우리로 병풍처럼 서 있습니다. 이를 따라가다 보면 다음 한수를 만나는 지하진(池河鎭)에 이르기 직전에 산림이 우거진 길목이 있는데 최근 이곳을 웬 도적놈들이 점거하여 통행료를 요구하는 상황입니다. 이놈들을 처리해 주십시오.”

“숫자가 많습니까? 표국도 고수들을 고용해서 하는 거로 알고 있는데.”

“열 명 정도 되는데 무공이 고강하여 저희 같은 지방 표국은 감당할 수 없는 자들이었습니다. 어찌나 무도한지 제가 가장 아끼는 정 표사가 벌써 한 달 넘게 병상 신세를 지고 있어서…….”

“저희가 해결하겠습니다.”

“창천맹에서 오신 분들이라고 하니 부탁하는 겁니다. 꼭 좀 해결해 주십시오.”

서로 원하는 바가 맞아떨어지자 일이 일사천리로 진행되었다.

상원재의 말에 따르면 지하진에서 다시 배를 타고 한중성까지 갈 수 있다고 하였다. 한중성과 안강군 모두 분지로 연결되어서 강이 흐르고 있는 지대의 높이 차이가 크지 않아 비만 오지 않다면 물살이 거칠지 않다는 것이다.

이는 단순히 지도와 글로써 지리를 파악한 최현걸의 오류였다. 그래서 말들도 아예 마방에 팔아버리고 몸만 이동하기로 하였다.

물론 함선은 운항 중 휴식을 위해서 좀 더 큰 중형급 함선으로 교체되어 표물도 같이 옮겨졌다.

상원재는 특별히 깨끗한 객실을 두 곳 내어 주었다. 천서은과 야율균은이 한 실을 쓰고 나머지 남자들이 남은 한 실을 사용했다. 밤새 달려온 그들은 곧장 잠에 빠져들었다. 그 사이에 무양표국의 전문 노꾼들이 힘있게 노를 저으며 귀운선을 한수의 물결을 부수면서 서쪽을 바라보고 나아갔다.

운현에서 시작된 한수의 초입부는 굽이진 곳이 많았지만, 귀운선은 숙련된 노질을 통해 방향을 틀어가며 빠르게 지나갔다.

해가 중천에 떴을 때쯤엔 가장 굽이져 흐르는 한수의 물길을 지나게 되었다. 중간에 조절할 일이 있었지만, 때마침 바람도 순풍으로 불고 있었기 때문에 돛을 펼치지 않을 수 없었다.

네 장의 돛이 동시에 촤르륵 펼쳐짐과 동시에 순풍을 받아 팡! 하는 소리가 터져 나왔다. 중간에 급히 방향을 틀어야 할 구간이 나올 때면 선원들은 능숙하게 돛을 잠시 접어두었다가 다시 앞이 트일 때가 되면 바로 돛을 펼쳤다. 그리고 그때는 노꾼들도 식사를 하거나 쉬는 등 체력을 비축했다.

해가 서쪽으로 기울어가는 미시(未時)쯤 되었을까.

진도건은 잠에서 깨어나 갑판으로 나왔다. 밖으로 나와 강바람을 쐬고 나서야 줄곧 쓰고 있던 방립을 쓰지 않고 나왔음을 깨달았다.

‘괜찮겠지.’

상선엔 귀운선의 선원들과 표국 사람들 외엔 없었고 진도건도 상투를 줄곧 유지하고 있었기에 자세히 살펴보지 않으면 머리카락 색깔은 크게 눈에 띄지 않았다. 그러나 붉은 눈썹과 붉은 눈동자를 가릴 수는 없었기에 일부러 사람들과 눈 마주칠 일을 피해서 난간까지 나왔다.

한수의 넓은 강물 위에서 물길을 밀고 나가는 함선의 속도감은 제법 빠르게 느껴졌다. 지형의 굴곡을 타지 않고 바람을 이용할 수 있으니 효율도 좋다는 느낌이 들었다.

흐르듯 시야를 벗어나는 풍광도 운치가 있었다.

몇 점 없는 구름은 태양을 전혀 가리지 못하여 햇살이 고스란히 내리쬐었고 강물에까지 부딪쳐 사방으로 빛을 더했다. 그로 인해 시야에서 지나가는 풍광을 바라보고 있으면 산림을 덮은 녹음이 더 진하게 일렁이고 있었다.

“저기…….”

흔한 선원들의 지나가는 인기척이라고 생각하고 굳이 돌아보지 않았으나 들려오는 여성의 목소리에 진도건은 고개를 돌릴 수밖에 없었다.

가까이 다가온 여인은 상원재의 딸 상이령이었다. 그녀의 손에는 작은 손바구니가 들려 있었는데 거기엔 하얀 면포로 반쯤 덮인 월병(月餠)이 담겨 있었다.

진도건과 눈이 마주친 상이령은 그의 붉은 눈동자에 깜짝 놀랐다. 강물에 반사된 햇살은 붉은 눈동자를 더 영롱한 선홍빛을 띠게 만들어서 상이령이 보기에 아름답다는 느낌이 들 정도였다.

그런 뜻하지 않은 인상 때문인지 눈이 마주치자 그녀는 얼굴을 살짝 붉힌 채 고개를 숙이고는 바구니를 내밀었다.

“곤히 주무시는 것 같아서……, 허기지실 것 같아 가져왔어요.”

“고맙습니다.”

진도건은 웃으면서 감사를 표하곤 바구니에서 월병 세 개를 집었다.

그때 마침 선실 쪽에서 천서은이 나오는 모습을 발견하고 손을 흔들었다. 갑작스러운 그의 행동 때문에 상이령은 내심 흠칫 놀라면서 뒤를 돌아보았다.

‘아……!’

상이령도 빼어난 미모로 칭찬과 관심을 많이 받아 왔지만, 눈앞에 나타난 천서은의 미모에 주름잡을 수 없다는 걸 보자마자 자각했다. 처음 봤을 때도 행동거지에 기품이 있어 보였지만, 왜 굳이 면사로 얼굴을 가리고 있었는지 알 것 같았다.

“일어났어?”

진도건은 다가오는 천서은을 맞이하며 손에 든 월병 하나를 건네고 자기도 하나를 입에 물었다. 달콤한 팥과 호두, 땅콩이 섞인 소가 혓바닥을 자극하면서 괜스레 허기를 더 자극하고 있었다.

“월병이네요. 상 소저께서 주신 건가요?”

“네……. 여기 좀 드세요.”

상이령은 천서은에게도 조심스럽게 바구니를 내밀었다. 성격이 무척 소극적인 데다가 무림인들이라고 하니 조심스러워하는 것이었다.

천서은은 월병 하나를 집어 입에 넣었다. 바삭거리는 식감과 더불어 오물오물 씹으니 소의 단맛이 입안에 계속 감돌았다.

“맛있네요.”

상이령은 수줍게 미소를 지으면서 두 사람을 번갈아 흘끔 바라보았다.

“안강군까지는 얼마나 걸리죠?”

“날씨가 좋고 강물도 잔잔하니…… 자정 무렵엔 도착할 거 같아요.”

“길을 서두르려면 바로 출발하는 게 좋겠죠?”

천서은이 묻자 진도건은 고개를 끄덕였다. 한중성까지 나흘 거리는 잡아야 했지만, 운현부터 안강군까지 한수를 통해 물길로 이동하면서 하루의 시간을 번 셈이었다. 한중성에서 사천 진입까지 사나흘 또 걸릴 것을 고려하면 그다지 쉴 틈은 없다고 봐도 무방했다.

진도건이 사이를 가로막은 천서은을 피해 고개를 숙이며 상이령을 쳐다보았다.

“늦은 시간이라 어렵겠지만, 말은 바로 구할 수 있겠습니까?”

“거점 마을마다 저희 표국 지부가 운영하는 마방도 있으니 문제없을 거예요.”

“그럼 부탁을 좀 드리겠습니다.”

“아버지께 말씀드려 놓을게요. 아마 충분히 허락하실 거예요.”

“고맙습니다.”

상이령이 수줍게 대답했고 진도건은 미소로 화답했다. 두 사람 사이에서 천서은은 조금은 이상해진 기분으로 월병을 먹으며 두 사람의 대화를 듣고 있었다. 진령산맥을 향한 북쪽 산림의 풍광은 아름다웠으나 눈에 썩 들어오지 않았다.

상이령은 인사를 건네고 돌아가자 비로소 두 사람만 남게 되었다.

“운이 좋은 것 같아. 한중성까지 좋은 사람들을 만나 도움을 받게 되었으니.”

“맹에서 다 값을 지급해 줄 텐데요 뭘.”

“후후! 그래도 창천맹의 서신 한 장으로 움직여 줄 정도의 호인이란 소리 아니겠어?”

천서은이 다소 심드렁한 표정으로 중얼거리듯 대꾸했다. 그러나 진도건은 상원재 부녀가 적극적으로 도움을 주려는 태도가 마음에 들었다.

천서은은 다시 상이령이 사라진 쪽을 힐끔 돌아보았다.

상이령의 나이는 21세였다. 용모도 어여쁜 데다가 어쩐지 자꾸 수줍어하는 태도를 보니 귀엽기도 하고 여성스러워 보이기도 했다. 어린 나이의 풋풋함도 갖추고 있어서 경국지색의 미모라 할 순 없어도 상당히 매력적이었다.

‘같은 여자에게 신경 쓰일 줄은 몰랐는데…….’

의심하는 건 아니지만, 저 어린 소녀에게 미소를 보여 주던 진도건의 그 얼굴이 보기 싫었다고 하면 과한 감정일까?

“상 소저가 참 예쁘네요. 풋풋하고 싱그러운 매력을 가진 거 같아요. 그렇죠?”

별생각 없이 그저 무심코 상이령에 대한 칭찬을 던져보았다. 그리고 말의 마지막을 질문으로 끝낸 것을 곧 후회했다.

“후후! 예쁠 나이지. 이런 것도 갖다 주고…… 심성도 고운 거 같아.”

진도건은 손에 든 남은 월병 하나를 입안에 던졌다. 그리고 아직 잠에서 덜 깬 찌뿌둥함을 날려버리기 위해 한껏 기지개를 켰다.

천서은은 그런 진도건에게 고개를 돌리지 않았다. 왠지는 모르지만, 지금 표정을 보여주고 싶지 않았다.

왠지 얼굴에 섭섭함이 묻어 있을 것 같은 불안감과 실제의 서운함까지 가슴 한구석에서 요동쳐댔기 때문이다. 그래서 마음을 가라앉힐 때까지 풍광을 감상하는 척 일부러 눈을 마주치지 않고 딴청을 피웠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