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2화 - 제34장. 한중성(漢中城)까지 (4)
“놈들은 술진 안에서 더 강해진다던데요?”
“말 그대로 시간 지연밖에 못 할 숫자에, 창천단에도 환각을 버텨낼 만한 정파 무인들이 그래도 제법 비중을 차지하니까 나는 큰 체감은 못 했지만, 직접 싸워본 사람들은 확실히 그런 느낌을 받은 것 모양이더군.”
“환도신마나 환도종의 주력이 어디로 움직이는지는 종적을 알기 어려워서 불안하긴 합니다. 하지만, 이젠 어영부영 댈 수 없지요. 서쪽으로 조금만 가면 무당산맥이니 매복은 피할 수 있을 것입니다.”
“언제 출발하면 되겠나?”
청명은 저녁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둥그렇게 만월에 가까운 달이 제법 올라와 있어서 어둠을 꽤 밝혀주고 있었다.
“조금 쉬고 자정쯤에 바로 이동하시지요. 마침 보름달이 뜬 날이니 어둠이 불편하긴 하나 이동에 어렵진 않을 것입니다. 또 무당산맥의 지리는 제가 잘 알고 있으니 무리는 없습니다.”
구치상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하도록 하지. 표개 자네는 어떻게 움직일 텐가?”
“저는 또 정보들을 정리해서 맹주님께 보고해야 하니 창천맹으로 올라가 봐야지요. 출발하실 때, 저도 북으로 올라가겠습니다.”
때마침 마을 안으로 진입했던 정파 무인들이 식량 물자들을 구해와 돌아왔다. 백성들도 일부 뒤를 따르면서 간단한 요깃거리와 물지게를 지고 오고 있었다.
창천단은 잠깐 야영하며 불을 지피고 고기들을 구워 먹기 시작했다. 마을에서 구해온 요깃거리도 꽤 많았으니 확실히 정파 무인들을 대하는 백성들의 민심이 긍정적이라는 걸 구치상을 포함한 사파 무인들은 느끼고 있었다.
중요한 임무를 맡게 된 청명은 식사할 때도 구치상, 표개와 함께 자리를 가졌다. 생각보다 많은 양의 음식을 보며 걸신들린 듯 먹어치우던 표개는 문득 낮에 만났던 진도건 일행이 떠올랐다.
“낮에 진도건 일행을 만났었습니다.”
“어디서 말인가?”
“신야성에서 만났습니다. 우연히 말이지요.”
청명도 흥미로운 표정을 보였다. 만약 진도건이 표개와 함께 이곳으로 와 잠시 쉬었다 갔었다면 그 시간 동안 태화무극권의 창안을 완성하는 데 도움을 받았을지도 모른다는 아쉬운 생각도 이어졌다.
“그분들은 아예 사천 땅으로 직행하는 것이지요?”
“그렇지. 사실상 구룡문과 검림이 적들의 시야를 돌리는 역할인 셈이야. 적들 주력도 끊을 겸. 당문이 사혈마종의 전신인 사혈주와 오랜 대립을 이어왔기 때문에 놈들을 잘 알아서 끈질기게 막을 수 있었지만, 지금의 균형은 아슬아슬한 형국이야. 곧 있을 싸움의 결과에 따라 사천의 판도도 많이 달라질 텐데 그때 내부에서 싸워줄 고수가 필요해.”
“만약 저희도 구룡문을 도와 광혈종과 광혈신마를 물리치는 데 성공한다면 사천으로 갑니까?”
“그렇게 되겠지?”
“다행이군요.”
청명의 대답에 표개가 피식 웃었다. 그의 대답에 담긴 의중이 묘했기 때문인데, 다행이라는 반응이 나올만한 상황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뭐가 다행인가? 사천무림을 돕는 것이? 아니면…… 진도건을 만나는 게?”
“음……, 둘 다… 입니다.”
“아닌 것 같군. 왠지 후자 때문에 다행이라고 얘기하는 것 같아.”
청명도 더 대답하기 민망해서 피식 웃고는 음식을 입에 넣고 오물거렸다.
문득 천서은에도 생각이 미쳤다.
사실 오는 동안에 여러 생각을 정리하긴 했었다. 도가에 몸담아 여인을 멀리하고자 하였으나 자신도 모르게 천서은에게만큼은 연정을 품었음을 자각하였다. 그래서 마기가 느껴지는 진도건의 존재가 께름칙했던 것이었다. 그러나 그가 떠나기 전날 밤을 새워가면서 겨루면서 느낀 점은 그가 생각보다 더 크고 넓은 사람이라는 점이다.
어쩌면 청명이 닮고 싶어 했던 무당산의 그 웅대한 기풍을 보았는지도 몰랐다. 게다가 진도건과 천서은 사이에서 보여주는 끈끈한 신뢰감은 부러울 정도로 단단해 보여서 크게 걱정하지 않아도 될 것 같았다. 그렇게 미련을 버리니 영감이 미친 듯이 솟아오르기 시작했다.
태극권의 무리를 기공 자체로만 담아낸 태화무극권 창안의 시작은 그 안정된 마음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한편 구치상도 얘기를 듣다 보니 떠오르는 사람이 있었다.
“그 화산파의 답답이는 어떤가?”
구치상의 물음에 표개가 껄껄 웃음을 흘렸다. 그도 소식을 전해 들어 저간의 사정을 어느 정도 알고 있었기에 그가 왜 영은성의 소식을 묻는지 이해했다.
“표정이 훨씬 좋아 보이더이다. 그래도 도검이 서로 쓰임새에 차이가 있어서 그런지 강 총수의 지도가 효과가 있었나 봅니다. 대충 들어보니 화산파의 상징이라는 검향 경지의 초입에 들어선 모양입니다.”
구치상은 그 말이 탐탁지 않았는지 심통 난 표정이 되었다.
“쳇. 뭐 나도 강 총수를 존경하고 있으니…… 잘 풀린 것 같다니 다행이군.”
표개가 껄껄 웃음을 터뜨렸다.
‘이런 걸 보면 아무리 같은 천하오절의 반열로 칭해진다고 한들 파천무봉 천무경, 백령신검 강정학, 흑사왕 금태하를 유독 독보적으로 보는 것은 그만한 이유가 있는 것일 터. 금태하와 강정학이 그 저력을 보여서 두 신마를 끝낸다면 중원 무림은 승기를 잡을 수 있겠지. 구룡문의 갑작스러운 출발 때문에 불안해지긴 했지만, 여기까지 판을 끌고 온 제갈가주의 전략은 분명 유효하다.’
세 사람을 포함하여 반 시진 정도 지나자 대부분 식사를 마쳤다. 기력에 여유가 있었던 구치상과 표개가 주로 경계를 돌기 시작했고 청명을 포함한 창천단 전체는 바로 운기조식에 들어갔다.
그렇게 두 시진 정도 휴식 끝에 표개는 말을 타고 북상하기 시작했고, 창천단은 무당산 쪽으로 말을 달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무당산맥 동쪽 산지 초입에서부터 말들을 마을에 맡기고는 청명의 인도를 따라 일제히 경공을 펼치며 산을 오르기 시작했다.
* * * *
창천단이 무당산맥 산림의 그늘로 그 대규모 인원들이 스며들듯 빠르게 모습을 감추던 시점에 진도건 일행은 한수 유역을 따라 서쪽으로 계속 말을 타고 달리고 있었다. 신야성에서 새 말을 구해서 꾸준한 속도로 달려왔으니 꽤 먼 거리를 이동한 셈이었다.
중간중간 조금씩 쉬면서 말의 체력을 관리해오긴 했지만, 서서히 산자락을 걸쳐서 이동해야 하면서 지치는 게 눈에 들어왔다.
다섯 사람은 말에서 내려 다시 쉬기로 했다.
한수 하류의 물살은 잔잔했다. 말들도 머리를 내려 물을 섭취하고 사람들도 따라 목을 축였다. 하나같이 뛰어난 내가 고수들이었기 때문에 체력적으로 문제는 없었지만, 그렇다고 피로가 아예 없을 순 없었기에 손으로 찬물을 떠서 세수하기도 했다.
“아직 멀었지?”
“당연히 멀었소, 아침까지는 이 속도로 가야 운현하구에서 배를 탈 수 있을 거요. 잠은 거기서 잡시다.”
“밤샘은 피부에 안 좋은데…….”
야율균은이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는데 그걸 또 들은 최현걸이 피식 웃었다.
“사천에 있을 신랑 보러 갈 생각하니까 두근거리오?”
“……혼나고 싶니?”
“그러지 말고 얘기해 보시오. 누가 괜찮을 것 같소? 청성파의 여문위? 아니면 파룡문의 민도진?”
“시끄러워.”
“그래도 호색한보다는 멀쩡한 여문위 쪽이 낫지 않겠소?”
칼같이 자르는 야율균은에게 최현걸이 다시 능글거리면서 물었다.
스르릉!
두 자루 만곡도가 그녀의 허리춤에서 반쯤 뽑혔다. 그제야 최현걸은 입을 꾹 다물고 시선을 피했다.
진도건과 천서은은 신발과 덧신을 벗고 강물에 발을 씻고 있었다. 진도건이 천서은의 것까지 덧신을 강물에 문지르면서 빨아내고는 공력을 뿜어내어 한 번에 말렸다.
“호호호!”
그 모습을 보면서 천서은이 웃음을 흘렸다.
“왜?”
“3년 전에 그때도 이랬던 적이 있었어요. 똑같이 강물에 덧신을 빨았는데 내공이 약하니까 이런 건 꿈도 못 꾸고 양지바른 바위 위에 널어놓은 모습을요. 해가 질 때까지 기다려도 다 마르지 않아서 철퍽거리며 돌아왔던 게 기억나네요.”
“하하하! 그랬나?”
“이따금 그럴 때 제가 몰래 가서 이렇게 내공으로 말려서 놓고 온 적도 있었어요.”
진도건은 왠지 낯부끄러워지면서도 재밌어하는 천서은의 얼굴을 보면서 웃음을 흘렸다.
천서은이 마주 웃는데 그녀의 단발머리가 흔들리는 게 눈에 들어왔다. 아직 완전히 적응이 안 됐는지 여전히 씁쓸한 감정 속에서 손은 상투 튼 자신의 머리를 무의식적으로 만졌다.
“……이쁘긴 하다.”
느닷없는 말에 진도건의 눈빛을 살펴본 천서은은 그가 자신의 단발을 살펴봤음을 눈치챘다.
“단발이요? 호호! 아직도 적응 못 한 표정인데요?”
“첫날보다는 그래도 익숙해졌는데. 그래 보이지 않아?”
“네, 그래 보이지 않아요.”
천서은이 후후 웃음을 흘리면서 발끝을 세우면서 강물을 찼다. 물방울이 위로 튀어 올라 흩어지니 그 차가움이 얼굴에 느껴졌다.
영은성은 검을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검림의 첫인상은 별로 좋다고 볼 수 없었지만, 팔공산을 떠나는 그의 발걸음은 무척 가벼웠다. 좀 더 수련하거나 싸울 수 있는 시간적 여유가 없었기에 계속해서 기억을 상기시키며 검을 갈아내듯 마음의 준비를 이어가고 있었다.
‘검. 단순하게 생각하자. 단순하게……. 화산의 정신은 이미 내 몸과 정신에 배어있다. 검에 자꾸 의미를 부여할 게 아니라 그저 옳다고 여기는 길을 걸으면 되는 것이다.’
이제 혼란스러웠던 머릿속이나 조급했던 마음은 차분히 가라앉았다. 영은성도 그렇게 차분하게 다음 단계를 밟기 위한 준비가 되어가고 있었다.
“출발하자!”
잠깐의 휴식을 마치고 다섯 사람은 다시 말에 올랐다.
하늘 높이 떠오른 보름달이 점점 서쪽으로 기울어져 가고 있는 시점이었다.
좌우로 멀리 높은 산들이 병풍처럼 도열한 가운데서 시원한 맞바람을 맞으며 내달린다. 모두가 잠든 깊은 밤 달빛에 반짝이는 수면 위로 비추는 움직이는 것들이란 오직 그들에게서 비롯된 다섯 개의 그림자뿐이다.
그 그림자가 비스듬히 점점 길어지고 굽이치는 물길 따라 이리저리 몇 번 방향을 크게 바꾸었을 때, 달은 어느덧 서산에 기울면서 까맣던 밤하늘은 점점 잿빛처럼 조금씩 밝아져 갔다.
오르락내리락 끝없이 반복되는 구릉지를 넘으면서 지루함에 인내심이 한계에 이르렀을 때쯤이었다.
“마을이 보인다!”
선두를 달리던 최현걸이 크게 외쳤다. 얼굴에 슬슬 짜증 섞인 감정이 올라왔던 야율균은은 말 위에서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산골짜기 속 한수를 낀 작은 하구마을 등현이 멀찌막한 곳에서 나타났다. 얼마간 달리면서 거리가 점점 좁아졌고 마을도 새벽 아침을 맞이하려는지 굴뚝에 연기를 피우며 준비를 하는 모양이었다.
이미 지나온 동쪽 산골짜기로 하늘이 붉게 물들면서 동틀 조짐이 보일 때, 그들은 마침내 마을에 도착할 수 있었다. 말에서 내려 고삐를 잡고 끌고 가는데 정말 새벽 밤을 새워가며 부지런히 달려온 걸 증명하듯이 말 주둥이에서 단내가 느껴졌다.
“고생들 했구나.”
말과는 워낙 친숙한 야율균은이 목과 콧등을 쓰다듬어주면서 위로해주었다. 그녀를 따라 다른 이들도 지금까지 고생한 말을 격려했다.
마을에 도착했다고 일이 끝난 것은 아니었다.
다섯 사람은 각자 역할을 나눈 후 정리되면 나루터에 앞에 모이기로 하고 흩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