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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의 귀신-181화 (181/432)

181화 - 제34장. 한중성(漢中城)까지 (3)

그것은 진도건과의 비무에서 태극검과 비슷한 무리로서 마지막 반격을 당했을 때, 손에 남은 기운의 소용돌이에서 실마리를 얻어 창안한 무공이었다.

태극권이 태극검으로 확장된 것과 마찬가지로 태화무극권도 태화무극검으로 발전시킬 수 있다고 청명 스스로 여기고 있었다. 다만 아직은 연성 초입이기에 태화무극권으로 만족하고 완성을 위해 노력하고 있었다.

이름 같은 경우는 편의상 무극권이라고 칭하려고 했으나 그 근간이 어쨌든 무당파의 것이므로 무당산의 또 다른 이름인 태화산(太和山)의 명칭을 빌려 무극권 앞에 덧붙이게 된 것이다.

표개도 태화라는 명칭은 어디서 기인했는지 금방 이해할 수 있었다.

표개는 마냥 청명을 꾸짖어 물을 수는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천무경이 꼭 데려가라고 지시한 데는 분명 이유가 있을 터였다. 문득 태화무극권의 위력이 엄청나서 그걸 일찍 알아본 천무경이 전력으로서 데려가라고 한 게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고심해서 창안했다면 분명 위력이 대단하겠지? 한번 시연해 줄 수 있는가?”

“아직은 가늠이 되지 않아 좀 어렵습니다.”

애매한 대답 때문인지 표개의 표정에 답답함이 조금 가미되었다.

“보여 줄 수도 없다면 출발을 지연시킨 결과로 얻은 건 없단 말이군.”

구치상의 표정은 묘했다. 사실 표개의 핀잔을 떠넘기기 위해 청명을 부른 거긴 했지만, 그를 바라보는 구치상의 시선엔 많은 흥미를 담고 있었다.

“얻은 게 있긴 하네. 다만 지연된 날짜만큼의 값어치가 있길 바랄 뿐이지.”

“그게 무엇입니까?”

“내 화산파 도사 녀석을 상대할 땐 꽉 막혀 있어서 좀 답답했는데, 청명 도사는 확실히 소요자의 진전을 이어서 그런가…… 그 태화무극권을 창안할 때, 깨달음을 얻은 모양이야. 화경에 이르렀어.”

구치상의 말은 너무나 뜻밖이어서 표개가 놀란 눈으로 청명을 다시 보았다.

청명의 얼굴에 난감한 표정은 더해져 갔다.

“배움이 부족한 제가 화경이라니요? 분명 잘못 보신 겁니다.”

“맹주가 자네를 꼭 데려가라고 한 이유가 있지 않았겠는가? 물론 자네가 완숙한 지경에 이르진 않았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조금씩 자각할 수 있을 걸세. 달라진 기운의 감응과 인지의 확장, 새로운 길…… 뭐 그런 것들 말이야. 사파인 우리와는 결이 좀 다르겠지만, 그런 비슷한 느낌들을 점점 자각할 수 있겠지.”

“그게 사실이라면…… 장차 맹에 큰 전력이 될 수 있겠습니다. 무당파는 홍복이 겹쳤군요. 소요자라는 걸출한 검선을 배출하였는데, 그 제자까지 화경에 이르러 스승의 뒤를 일찍이 따를 수 있다니.”

현실적인 문제를 해결하는 게 급선무임에도, 표개도 결국 무인이기에 청명의 이런 성취는 놀랄 따름이었다.

그가 알기로 이 세대에서 가장 강한 고수라고 한다면 진도건과 천서은 두 사람이었다. 사파의 위세를 뒷받침해줄 두 천부적 재능들을 보면서 부러운 건 어쩔 수 없는 심정이었다.

청명의 나이 고작 스물여섯.

구치상의 말대로 정말 화경의 경지에 이르렀다면 진도건과 천서은을 뛰어넘는 불세출의 재능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무엇이든 속단할 이유는 없고 개방 제자가 아니라는 아쉬움은 있을지언정 정파에서도 이만한 선도자가 탄생했다는 사실을 기뻐하지 않을 수 없었다.

“축하하네. 정말 축하해. 더 마음껏 축하해주기 힘든 상황이지만 말일세.”

“원시천존……, 제가 화경이라니 당치도…….”

청명은 화경이란 경지를 정말 드높은 지고의 경지로 인지하고 있던 터라 습관적으로 부정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구치상의 귀엔 칭얼대는 수준으로밖에 들리지 않았다. 그는 더 듣기 싫었는지 청명의 겸손을 듣다 말고 등짝을 후려쳤다.

짝!

“억!”

“시끄럽고. 내가 자넬 부른 건 그것 때문만은 아니야. 어쨌든 일정이 늦어졌으니 구룡문의 뒤꽁무니만 쫓는다면 하루 이틀 늦을지도 몰라. 그렇다면 창천단의 행진이 헛된 일이 되는 거 아닌가?”

표개는 듣기에 이상해서 고개를 갸웃거렸다.

“하지만, 길은 하나뿐이지 않습니까?”

구치상은 고개를 끄덕이며 긍정했다.

“그렇지. 크게 보면 그렇긴 해. 그래서 내가 맹에서 출발할 때, 청명 도사 자네에게 물었잖나? 봉문했을 시절에 정말 무당산에 처박혀있었냐고. 자네가 뭐라고 대답했지?”

“아, 수련차 일대의 산지를 돌아다녔다고.”

“어디까지 갔다고 했지?”

“……아아!”

“설마?”

구치상의 질문에 잠깐 멈칫하던 청명은 그가 왜 이제 와서 다시 물어보고 있는지 그 의도를 깨달을 수 있었다. 그리고 그런 맥락으로 인지를 한 표개도 기대 섞인 표정으로 청명을 바라보았다.

“목적지가 구당협 쪽이라고 하셨습니까?”

“구당협 백제성이다.”

“몇 년 전이지만, 역사적으로도 의미가 있던 고성이라 가 본 적이 있습니다. 제가…… 안내할 수 있습니다.”

“빠른 길이 있는가?”

“산계(山系)를 따라서 가면 됩니다. 무당산 남쪽의 산지가 대부분 높이가 비슷하면서도 다양한 지맥이 겹쳐 있으므로 길을 잃기에 십상이지만, 기준이 될만한 봉우리들부터 산계를 따라서 하늘길을 달리면 아마……닷새 안에는 도착할 수 있을 겁니다.”

“닷새!”

표개의 표정이 진지해졌다. 속으로 구룡문의 경로를 짚어보면서 시일을 헤아려 보고는 표정이 조금 풀어졌다.

“나쁘진 않지만, 좀 더 단축할 수는 없겠나? 아무리 고수들이 모인 창천단이지만, 며칠간 경공만 펼치다가 어디 진이 빠져서 싸우겠나? 차라리 조금 무리하더라도 가급적이면 멀지 않은 곳에서 일찍 도착하여 운기조식을 통해 기력을 보충하고 가는 것이 좋을 것 같은데.”

청명은 곰곰이 생각했다.

“신농산계(神農山系)가 있습니다. 아마 남하하는 경로에서 가장 험한 산세를 자랑하는 곳인데 초입의 노군산(老君山)을 기점으로 전후령(全猴嶺)을 통해 신농봉까지 오르면 그 너머는 산세가 약해집니다. 8, 9부 능선 부근에는 자연동굴도 찾을 수 있는데 거기서 쉬어 가면 될 겁니다.”

“생각보다 잘 알고 있는 거 같은데?”

구치상의 물음에 청명은 잠시 옛 생각을 했다.

무당파는 봉문을 선언하며 도사들의 무림 출도가 중단되었지만, 그렇다고 문을 완전히 잠근 것은 아니었다. 도가의 성지로써 송 황실의 관심이 꾸준히 이어지고 있었고 도관의 관리를 위해선 민간의 방문까지 완전히 끊을 수도 없었다.

무공을 익히는 도사들은 밖으로의 외출을 하지 않았다. 하지만, 오래 고인 물은 결국 썩을 수밖에 없듯이 제자들을 더 많이 받을 수도 없고 강호에서의 경험도 부족해지다 보니 문파로서도, 개인으로서도 성장이 정체되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이런 가운데 주백자의 등장은 정말 가뭄의 단비와 같았다. 무당파 출신이었던 그가 무당파로 돌아옴으로써 봉문을 선언했던 정파들 가운데 가장 먼저 막혔던 물꼬가 트인 셈이었다.

파문제자였던 주백자의 무당파 제자로서 지위가 복권되자 자연스럽게 최고 항렬이 되었고 무공 수련과 관련된 전반을 관리하였다. 그렇게 다시 재능있는 제자들이 느끼는 갈증을 해소하였고, 그다음 한 일은 가장 자질이 뛰어났던 소요자를 가르치는 일이었다. 그때 이미 소요자의 제자였던 청명도 그 수혜를 함께 입을 수 있었다.

소요자가 화경을 목전에 둘 무렵에 주백자는 다른 정파들을 수습하기 위해 떠나기 전 약 반년 정도 소요자와 청명을 데리고 북으로는 진령산맥, 서로는 사천 분지, 남으로는 귀주의 산계와 구릉지를 지나 남악(南岳) 형산(衡山)까지 여러 명산지를 둘러보았다. 자연 속에서 살아가는 의미를 깨닫게 하고 마음을 넓게 갖도록 하기 위함이었으니 소요자는 그 과정에서 진정 화경의 경지에 이를 수 있었다.

“……봉문을 했지만, 사파의 세는 주로 중원의 평야 지대와 인구가 밀집한 곳에 미치고 있어서 산속으로는 아무리 뻗어 나가도 감시에 걸릴 일이 없다고 했습니다. 무당산도 산세가 아름답지만, 장강삼협의 굽이쳐 흐르는 시원한 물살과 그 풍광을 보면 마음이 트이는 바가 있어서 답답하거나 할 때는 홀로 나와 몇 번 오간 적이 있었죠.”

“하하하! 하긴 사파의 위세가 서쪽 산계나 사천까지 뻗지 못한 것은 사실상 차지할 만한 이권이 없었기 때문이지. 그런데 그 남존무당(南尊武當)이 스스로 봉문한다는 규율을 그렇게 스스로 깰 줄은 몰랐는데.”

구치상이 웃으면서 반응하면서도 그렇게 청명이 밖으로 돌아다녔다는 얘기가 규율을 중시하는 정파의 기조와는 엇갈리니 의아해했다.

하지만, 표개는 청명의 그런 태도를 이해할 수 있었다.

봉문 시점부터 불과 십여 년 전까지 모든 정파는 소극적으로 숨어 지내면서 답답함을 억지로 견뎌왔었다. 그러나 주백자가 다녀간 뒤로는 설령 규율에 다소 위배되더라도 편법을 통해 발전을 모색하는 적극적인 기조로 바뀌었다. 무당파에서 파문까지 당한 이력과 엄청난 세월을 살아온 연배, 그런데도 고집스럽지 않고 자유분방한 그의 모습은 많은 이들에게 감명을 줄 수밖에 없었다.

청명은 멋쩍게 웃어넘겼다. 돌이켜보면 주백자가 그렇게 밖으로 끌고 나오면서 다소 소심했던 그의 성격에 개선이 있었다. 소요자도 원래는 상당히 고집스럽고 날카로운 면이 있었다.

주백자는 청명을 혼내고 다그치는 소요자를 보더니 다가와서는 되려 소요자를 지적하며 했던 말이 있었다.

‘평야에서 무당산을 바라보면 수려한 산세에서 여유로움을 느끼고 사위를 아우르는 웅대함에 절로 가슴이 뜨거워지는데, 넌 어째 자소봉(紫霄峰) 정상의 끄트머리만 차지하여 세상 모든 걸 다 얻은 체하느냐?’

그 말은 소요자를 지적하는 말이기도 했지만, 청명도 함께 듣도록 함이었으니 언제나 공명정대(公明正大)한 기풍과 평정심을 유지하려고 노력하게 되었다.

“그럼 청명 도사가 길 안내를 맡으면 될 것 같고…… 기습은 어떻습니까?”

표개의 물음에 구치상은 눈을 감고 턱을 쓰다듬으면서 잠시 생각했다. 곧 정리되었는지 금방 입을 열었다.

“크게 우려하지 않아도 될 것 같군. 여기까지는 조심해서 오긴 했지만, 놈들도 좀 재수 없게 걸린 느낌이랄까?”

“재수 없게 걸렸다니…… 무슨 뜻입니까?”

“심문해 봤는데 아마 이렇게 창천단을 대규모로 해서 선제적으로 움직일 줄은 몰랐던 모양이야. 놈들이 정보 입수가 늦었는지는 몰라도 소규모의 빠른 기동으로 올 거로 예상했다더군. 술진의 준비도 부족했던 모양인데, 그렇다고 우리를 그냥 보낼 수는 없으니 어쩔 수 없이 들이박은 게지. 술진이 깨졌을 때 도망치는 놈들이 있었지만, 어디 내 손에서 쉽게 벗어날 수 있겠는가? 아마 환도신마는 부하들이 증발했다고 생각할 것이다.”

“술진은 어떻습니까?”

구치상은 주위의 창천단 무인들에게 쭉 시선을 던졌다.

“단원들 일부가 환각 증세를 겪긴 했지만, 확실히 정파 무인들이 내공 특성상 내성이 있는지 잘 버티더군. 청명 도사같은 녀석들이 활약을 많이 했어. 놈들의 준비가 부족했는지 과거 천무방과 환도신마가 싸웠던 기록에 비하면 방원진의 색이 옅고 빈약하더군. 나와 청명 도사까지는 문제없이 찢고 밖으로 나설 수 있었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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