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0화 - 제34장. 한중성(漢中城)까지 (2)
표개는 야율균은에게도 시선을 두었다. 이 일행을 바깥에서 보기엔 다소 겉도는 느낌의 인물이었는데 정보 꾼으로서는 두루 관심이 가는 건 일종의 습관 같은 거였다.
“아가씨는 요새 흥미가 뭔가? 보니까 강호의 자유를 누리고 싶어서 내려왔다고 하던데.”
야율균은은 자기에게도 질문이 들어올지 몰랐는지 젓가락으로 요리를 집다 말고 잠깐 멈칫했다. 어색한 표정으로 일행을 돌아보던 그녀는 툭 던지듯 입 밖으로 생각을 꺼낸다.
“신랑감 찾는 거요.”
너무나 시원스러운 대답에 표개가 잠깐 당황했다가 껄껄 웃었다.
“하하하! 솔직한 아가씨로구만.”
“서른도 훨씬 넘었고, 저 둘이서 쿵작거리는 게 자꾸 눈에 거슬려서 말이죠. 자유도 좋지만, 뭔가 자리를 잡고 싶다는 생각이 든달까요?”
“이 몸이 꼴은 이래도 강호에 모르는 인사는 없는데, 중매라도 서줄까? 괜찮은 신랑감 많이 알고 있다네.”
야율균은이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표개를 쳐다보았다.
“그냥 제가 알아서 할게요. 중매 같은 것들은 이미 진절머리 나서요.”
표개는 웃으면서도 아쉬운 표정을 내비쳤다. 하지만, 그렇다고 그냥 그만둘 생각은 없었는지 계속 말을 덧붙였다.
“그렇다면 어쩔 수 없네만, 자네들 사천으로 가지 않은가? 내 두 번 정도 가면서 문파들을 살펴봤었는데 파촉(巴蜀) 땅에 인물과 인품이 괜찮은 친구들이 몇 명 있다네. 과업이 잘 마무리되면 한 번 살펴보시게나.”
야율균은 자신이 한 말을 지키고 싶었는지 무관심한 표정으로 시선을 피했다. 그러나 같은 개방도라 그런지 최현걸의 궁금증을 자극하기엔 충분한 모양이었다.
“얼마나 괜찮기에 강호 최고의 중매쟁이신 표개 어른이 그렇게 얘기하는지 궁금한데요?”
“궁금하지? 좋아, 얘기해 주마. 일단 청성파의 속가제자(俗家弟子)인 여문위(呂門威)가 유명하지. 벽호검객(碧豪劍客)이라는 별호는 그의 뛰어난 실력과 더불어 호방한 매력을 칭찬하여 붙인 것일세. 두 번째는 파룡문(巴龍門)의 소문주 민도진(閔圖珍)일세. 사천삼정에 비해 명성은 낮은 사파지만, 그래도 실력이 상당히 뛰어나고 꽤 꽃미남이야. 다만 여색을 좀 밝힌다는 게 흠인데…… 야율 아가씨가 기가 세고 무공도 더 뛰어나니 마음에 든다면 꽉 휘어잡을 수 있는 건 어렵지 않을 거야. 그리고 세 번째는……. 이 녀석은 얘기 안 하는 게 낫겠다.”
“녀석이라고 하는 거 보니까 면식이 있으신 모양인데, 누군데 그러세요?”
표개는 좀 망설이는 눈치로 최현걸과 야율균은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야율균은도 무관심한 척은 했으나 귀는 자신을 향해 열어둔 모습이 꽤 흥미롭게 듣는 모양이었다.
“뭐 어차피 만날 녀석이니까 얘기 해주지. 바로 당문의 소가주 당한솔(唐扞率)이야. 아마 외모만큼은 사천 제일의 미남자일걸?”
“그런데 왜 얘길 안 하려고 하셨는데요?”
“다리에 근력이 붙지 않은 장애가 있어서 그렇다. 지팡이를 짚어야만 설 수 있는데 그것마저도 반 각도 버티지 못하지. 재활을 위한 요법을 꾸준히 해도 도무지 개선되지 않고, 화경에 이른 데다가 의술도 뛰어난 당혁수가 직접 추궁과혈을 하고 침을 놓아도 소용이 없다고 하더라고. 그래서 보통은 바퀴 달린 의자에 앉아서 수행원들이 밀어줘야만 밖에 돌아다닐 수 있다고 해.”
“아아…….”
최현걸은 그만 입을 다물었다. 얘기만 들으면 그만한 불행도 없는 사내였다. 중간중간 야율균은의 표정을 살펴보았는데 미남자라는 얘기에서 표정에 반응이 있었다가 장애가 있다는 얘기에 심드렁해진 표정을 보였다.
공공연하게 잘생긴 남자를 찾는다고 했으니 그럴 만도 하지만, 정파의 또래 후기지수로서 그런 불운을 가졌다고 들으니 왠지 모르게 씁쓸했다.
“뭐 그래서 당문주도 아들이 장가라도 갔으면 좋겠다는 말을 하곤 한다는데 상황이 이러니 중매도 별로 들어오지 않고, 간혹 주변에 여자가 꼬이기도 하는데 당한솔이 대부분 거부한다고 하네.”
“자신감이 없어서 그런가?”
“글쎄다. 그렇게 얘기하기엔 세평이 좋아. 장애가 있음에도 성도(成都)를 비롯해서 주변 마을, 도시, 성 가리지 않고 돌아다니면서 의술을 펼친다고 하니 그리 기죽어 사는 모습은 아닌 모양이다.”
“흐음…….”
최현걸은 알쏭달쏭하다 생각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호협(豪俠)한 사람이군요.”
그때 진도건이 툭 던지듯 얘기했다.
“그렇지. 뛰어난 재능과 의로움을 가졌다는 게 그에 대한 세평일세.”
표개가 흥미로운 표정을 지었다. 그는 고개를 끄덕이면서 동조했다.
‘직관적인 친구구먼.’
표개가 주로 떠드는 동안에 일행들의 식사도 하나둘씩 끝마치는 사람들이 나왔다. 의외로 가장 빨리 식사를 해치운 사람은 야율균은이었고 가장 느린 사람은 천서은이었다. 표개의 눈에는 두 여인에게서 민족적 특성과 신분에 따른 성향이 엿보였다.
가벼운 얘기들을 던지면서 편하게 식사를 마치자 표개는 제대로 묻고 싶은 것을 꺼내기 시작했다.
“경로를 어디로 잡은 것이냐? 이곳에서 이리 마주쳤다면…….”
“운현(鄖顯)을 통해 한수의 뱃길을 따라 중류로 올라가 금주(金州) 안강군(安康郡)까지 가서 거기부터 다시 육로로 이동할 계획입니다.”
“한중성을 거쳐 사천으로 들어가는 계획이로군. 그 방향이라면 나쁜 길은 아니지. 안강군에서부터 육로로 가는 것도 좋은 생각이다. 한수를 따라서만 가면 그 이후부터는 상류에 제대로 진입하여 물살이 거세지고 수로도 굽이쳐서 제대로 나아갈 수 없을 것이다.”
“예, 여기까지 오면서 많이 고민해봤는데 그게 아무래도 좋을 것 같습니다. 또 듣기로는 안강군부터 서쪽 협로(峽路)가 괜찮아서 어느 정도는 쉽게 이동할 수 있다고 합니다.”
“그래. 진령산맥(秦嶺山脈)의 험준함 속에 숨은 유일한 빈틈이다.”
“표개 어른은 어디로 가시는 길이었습니까?”
“여기서 북서쪽으로 조금 가면 등현이라는 작은 마을이 나오는데 거기서 창천단을 기다릴 생각이었다.”
“창천단이 여기까지 무슨 일로…… 혹시 구룡문 때문입니까?”
“그래, 바로 맞췄다.”
“제갈가주께서 구룡문이 제어가 안 되어 예측하기 힘들다고 하셨는데 상황이 불안한가 보군요.”
“무엇 하나 중요하지 않은 게 없다. 적들의 주축 중 둘을 꺾을 수 있는 중요한 시기이고 자네들은 그보다 먼저 사천으로 진입해야 해. 바쁘게 움직여야 할 게야.”
“말 나온 김에 출발하도록 하죠.”
가장 마지막으로 식사를 마친 천서은이 입을 열었다.
잠깐의 해후를 그렇게 마치고 진도건 일행과 표개는 곧장 신야성을 떠나며 헤어졌다. 진도건 일행은 서쪽으로 계속 방향을 잡아 말을 달렸고, 표개는 북서쪽으로 가면서도 진도건 일행이 멀리 사라질 때까지 힐끔거리면서 보았다.
부지런히 말을 달려서 등현에 도착할 때쯤엔 서산의 높은 산봉우리들에 해가 걸리면서 꽤 이른 시간에 어둠이 밀려오기 시작했다.
창천단이 등현에 도착한 것은 대략 술시 경.
표개가 등현의 북쪽 초입에서 구걸하며 기다리기 시작한 지 두 시진 가까이 경과되었을 무렵이었다.
이천여 명의 무인들이 줄지어 이동하는 모습은 어둠 속에서도 꽤 장관이었다. 마치 군사들의 행군을 보는 것 같은 기분이었고, 이런 광경을 볼 일이 없었던 등현 마을 백성 중에 이를 목격한 사람들이 수군대기도 했다.
창천단은 일부러 마을 밖에 머물렀다.
칼을 찬 무인들이 쫙 깔려 있으면 치안이 어지러워질 우려가 있기 때문이었다. 다행히 날씨는 괜찮아서 들풀 위에서 자기엔 무리가 없었으니 마을을 통해 간단한 요깃거리만 구해오면 될 일이었다.
백성들을 편안하게 설득할 수 있는 정파의 무인들이 자진해서 마을로 진입하였다. 그 사이에 사파의 무인들은 자연스럽게 불침번을 지낼 자들을 선별했다. 그리고 그 사이에서 표개는 구치상과 대면하여 경위를 듣고 있었다.
“환도종의 기습이 있었다고요?”
“다행인지 환도신마는 없었고 적 수도 많진 않았으나 술진이 기괴하여 깨뜨리는 데 어려움이 있었네. 다시 당하면 더 많이 늦을 것 같아서 조심히 이동할 수밖에 없었지. 그래도 결국 두 번이나 걸려들었지. 이후론 마주치지 못했고.”
“어디쯤이었습니까?”
“구룡산(九龍山) 서쪽 작은 마을이었네. 우리가 남북으로 왕래하면서 종종 지나치던 곳이었지.”
“아아, 어디쯤인지 알 것 같습니다. 그런데 하필 산 이름이 구룡산이군요. 불길한 느낌도 듭니다.”
“생각해 보니 그렇군. 구룡산 기슭에서의 기습이라. 구룡문은 출발했나?”
‘“탁 계수가 전하기로 아마 내일쯤이면 이동을 시작할 것 같습니다.”
“우리의 출발이 늦어서 마냥 뒤꽁무니를 쫓기에는 너무 늦어버릴 것 같군.”
“원래 계획보다 늦게 출발하셨지요? 게다가 환도종의 기습까지 당해 더 늦어졌으니 자칫 일이 어그러질까 걱정스럽습니다. 흑사왕 금태하의 무명을 의심하는 것은 아니지만, 변수가 많으면 별로 좋을 것은 없을 테니까요.”
표개는 우려를 얘기했지만, 그 내용 속엔 창천단주를 향한 책망도 담겨 있었다. 그걸 이해하지 못 하는 바도 아니었기에 구치상은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짧은 거리라면 경공을 최대한 발휘해서 따라 잡아보려고 시도하겠지만, 사실 이러면 진기를 많이 허비하게 되어 위급한 상황에 대처할 수 있을지 우려가 되었기에 최대한 말을 활용하는 것이 최선이었다. 그래서 여기까지 그렇게 이동해왔지만, 설상가상 환도종의 기습으로 말들도 일부 잃어버리면서 지금은 번갈아 타는 실정이었다.
“하아……!”
이건 가진 무력으로 해결될 그런 종류도 아니었기 때문에 구치상도 한숨을 절로 내쉬었다.
그때 문득 그의 시야에 한 사람이 들어왔다. 그는 창천단의 출발이 늦어지게 된 원흉이나 마찬가지였으니 구치상이 바로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지적하지 않을 수 없었다.
“저 녀석 때문이네. 맹주가 꼭 데려가라고 하지만 않았어도 내 늦지 않았을 거야.”
표개는 구치상이 가리킨 손가락 끝을 따라 시선을 돌렸다. 그리고 거기엔 도포 자락을 휘날리면서 허공을 향해 천천히 손을 휘젓고 있는 청년 도사가 서 있었다. 그 손동작이 태극권을 연상시키면서도 묘하게 다른 구석이 있었다.
“청명 도사!”
구치상의 부름에 청명이 하던 걸 멈추고 고개를 돌렸다. 뭔가에 취한 듯 멍한 표정이었다가 서서히 눈에 초점이 돌아오는 게 심상치 않은 건 틀림없어 보였다.
구치상은 손짓을 해 청명을 불렀다.
청명이 다가오자 구치상이 자신의 옆에 앉혔다. 뜬금없는 등장이었기에 표개는 절로 궁금해졌다.
“무당파의 청명 도사가 무슨 연유로 창천단의 출발을 늦추었단 말입니까?”
“자네가 설명하게나.”
구치상은 답변을 청명에게 떠넘겼다.
청명은 표개의 묻는 말에서 왜 자신이 불러왔는지 금방 깨달았다. 그래서 난감한 표정으로 괜스레 볼을 긁었다.
“무공을…… 연성 중이었습니다.”
“허어!”
표개가 황당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소요자로부터 진전을 이었다는 걸 고려한다면 청명쯤 되는 도사는 무당파 무학에 대해 모르는 건 없었을 터였다. 굳이 꼽자면 전설의 무공이라는 태극혜검 정도일 것 같으니 연성한다는 표현이 썩 와닿지 않았다.
“대체 뭘 연성한단 말인가?”
“원시천존! 제 입으로 얘기하기 좀 부끄럽지만, 본래 있는 본산 무학이 아니라 떠오른 생각이 있어서 창안해 보기 시작한 무공입니다.”
표개의 두 눈이 동그랗게 뜨여졌다. 그는 놀란 표정으로 잠깐 청명과 구치상을 번갈아 쳐다보다가 다시 시선을 청명에게 맞추었다.
“청명 도사 자네가 무공을 창안해?”
“원시천존!”
청명은 낯부끄러워진 안색을 합장한 손 뒤로 숨으며 도호를 외쳤다.
표개는 조금 전 청명이 하던 손짓과 멍한 표정이 다시 떠올랐다. 개방도로서 궁금증이 치밀어오른 건 무척 자연스러운 반응이었다.
“무슨 무공인지 알려……. 음, 이름만이라도 알려 줄 수 있겠는가?”
“아, 그게…… 태화무극권(太和無極拳)이라고 지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