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9화 - 제34장. 한중성(漢中城)까지 (1)
구룡문이 있는 응성에서 북쪽을 바라보면 평야가 끝없이 펼쳐진 것 같아도 반 시진 가량 말을 달리면 산지가 앞을 가로막는다. 높진 않은 산지들이었지만, 과감하게 가까이 가 보면 듬성듬성 산들이 솟아 있는 사이를 북서로 관통하듯 쭉 뻗은 구릉지를 만날 수 있었다.
이 구릉지에는 마찬가지로 북서로 관통하는 운수(雲水)라고 하는 작은 강이 흐르고 있는데 이는 남하하면서 무하(撫河)로 발전하여 장강에 합류하는 지류가 된다. 이 운수를 끼고 수주(随州)라는 도시가 낮은 성곽을 두른 채 자리를 잡고 있었다.
이곳의 인구는 많진 않지만, 역사적으로 유서가 깊은 곳인데 고대의 전설적인 인물 염제(炎帝) 신농(神農)의 탄생지로도 여겨지고 수(隋)나라를 건국한 문제(文帝) 양견(楊堅)의 출신지이기도 했다.
지리적인 특성상 남서쪽 일대에 대홍산(大洪山)을 비롯한 구릉지가 대단히 많고 북쪽도 산지로 막혀 있어 군사적으로 호북 형주 일대의 관문 역할을 할 수 있는 지점 중 한 곳이었다. 자연스럽게 남북으로 오가는 길목에 위치하면서 중간지 역할을 하기에 하오문과 개방 모두 거점을 두기도 했다. 지대가 평야에 있는 도시, 마을들보다 높다 보니 전서구를 받기에도 용이한 곳이기 때문이었다.
응성에서 출발했던 표개는 첫날 밤은 별 가득한 밤하늘을 이불 삼아 야숙(野宿)을 하고 다음 날 해가 떨어져야 이곳에 도착했다.
따뜻한 날씨긴 했으나 산바람은 아직 서늘했던 터라 바람은 피하고 싶었던 표개는 수주를 가로지르는 운수에서 흘러나온 작은 개천의 다리 밑의 조그마한 움막을 찾아 밤잠을 청했다.
쿵쿵쿵!
표개는 이튿날 늦은 아침이 돼서야 요란한 소리에 잠에서 깨어났다. 단검을 찬 청년이 움막 문을 두들겼기 때문이었다.
“계시오? 표개 어른 오셨소?”
“아이고, 삭신이야.”
그는 신음과 함께 덮고 있던 짚더미를 밀쳐내고는 몸을 일으켰다.
움막의 문이 삐걱대면서 열렸고 스며들어 오는 햇살이 문 앞에 선 청년의 옆모습을 비추었다.
표개는 스민 햇살이 자신까지 때리자 눈부셔 미간을 찌푸렸다.
“넌 처음 보는 얼굴이다?”
“손각(孫慤)이라고 합니다. 하오문 신참입죠. 표개 어른 맞으시죠?”
“그래, 내가 표개다.”
손각은 움막 안을 힐끔 둘러보았다. 마대 자루가 움막 구석에 쌓여 있었는데 대충 보아도 예닐곱 개는 되는 것 같았다.
“점주님께서 전하시라 하여 서신을 가져왔습니다.”
손각은 품에서 서신 하나를 꺼내어 표개에게 건네주었다.
표개는 눈을 비비면서 움막 안으로 들어온 햇살에 대고 서신을 펼쳐보았다. 내용을 가만히 읽어보던 그는 눈살을 찌푸렸다.
“하아, 일이 더 급박하게 돌아가는군. 그럼 창천단은 남양군에 도착했나?”
“아마도 내일 저녁쯤 도착할 것 같습니다.”
예상보다 하루 늦은 시기였다.
손각이 전해준 서신에는 창천단의 행적과 어제 발생한 구룡문에서의 일이 같이 담겼다. 구룡문과 관련해서는 추응계파 계수 탁민효가 전한 내용으로 양염계파 계수 유종화가 마교와 결탁하려는 움직임이 있어 심상치 않으니 창천단이 서둘러 움직여주길 바란다는 내용이었다.
창천단의 경우 원래 오늘쯤 남양군에 도착해서 대기하고 있어야 할 터였다. 그러나 남양군 북동쪽의 산지 부근에서 마교 환도종의 습격을 받은 이후로는 이동에 주의를 기울이느라 속도가 늦춰졌다는 얘기였다.
창천맹의 창설 이후로 개방은 정보망을 광범위하게 운영하면서 마교 구주마종의 세력들 위치를 일부는 특정 지을 수 있었고 일부는 대략적이나마 예측할 수도 있었지만, 유독 갈피를 못 잡는 곳이 바로 환도마종이었다.
홍천환 사태 때 천무방의 남하를 환도신마가 직접 막아 세우긴 했으나 그 이후로는 종적이 묘연했다. 환도종에 속한 자들은 종종 중원 곳곳에서 모습을 보이긴 했으나 환도신마의 위치를 추적하기는 어려웠다.
“환도종, 하필 이런 때에 나타나다니…….”
표개는 서둘러 마대를 챙기고 움막 밖으로 나왔다. 그는 개천 근처의 풀을 뜯고 있는 자신이 타고 온 말에 다가갔다. 다시 올라타려고 했는데 가만 보니 말이 좀 비쩍 마르고 지쳐 보여서 남양군까지 가기엔 버거워 보였다.
“이보게 손각, 하오문에서 운영하는 마방이 있었나?”
“제가 마방을 담당하고 있습죠. 한 필 내어드릴까요?”
“부탁함세.”
손각은 말을 끌고 표개와 함께 자신이 일하는 마방으로 돌아갔다.
마방 주인도 하오문 소속이었는데 표개가 여섯 개의 마대 자루를 매고 있는 걸 보고는 극진한 태도로 인사를 올리면서 가장 팔팔한 기운을 가진 말을 내어주었다.
“남양군에도 전서를 보내 창천단이 바로 등현(鄧縣)으로 오라 전해주게. 거기서 만나자고.”
“알겠습니다. 조심히 가십시오.”
표개는 바로 말을 달려 수주를 빠져나갔다.
구릉지의 완만한 내리막을 따라 달리는 길은 무척 쾌적했다. 북서쪽으로 방향을 계속 잡고 달리면서 다시 저녁쯤 되니 중간에 조양현(棗陽縣)에 도착했다. 그곳에서 말을 좀 쉬게 한 후에 이튿날 새벽녘에 일찍 출발하여 정오를 좀 넘기자 신야성(新野城)에 당도하였다.
“하아, 피곤하구만.”
일부러 창천단을 기다리기 위하여 바쁘게 달려온 표개는 눈을 감은 채 하늘을 향해 고개를 들었다. 환한 태양의 광휘가 눈꺼풀 위를 덮으면서 피로에 쌓인 눈두덩이를 두들겨 주었다.
그는 말을 끌고 성내로 진입하여 가까운 객잔을 찾았다. 때마침 밖에 나와 있던 점소이에게 말에게 먹일 여물을 부탁하면서 객잔 안으로 들어갔다.
다행히 점심때가 좀 지나서 탁자는 많이 비어 있었다. 표개는 여섯 개의 마대 자루를 짊어지고 있는 개방 제자로서 강호의 신분은 꽤 높다 볼 수 있었으나 민간에선 그저 거지꼴을 한 사람일 뿐이다.
볕 드는 좋은 자리에 앉을 수도 있었지만, 그는 일부러 그늘진 구석으로 가 마대를 내려놓고 앉았다. 그리고 주머니를 뒤적거려 손에 잡히는 동전을 있는 대로 탁자에 올려놓았다.
“하아……, 바쁘게 다니느라 구걸도 못 하니까 형편이 후달리네.”
몇 닢 되지 않는 동전 개수에 한숨이 절로 나왔다.
“주문하시겠습니까?”
“이걸로 가능한 것 좀 내주시게. 배부를 만한 걸로다가.”
“흐음, 좀 애매한 값이긴 한데요. 만두 한 접시에 국수 팔고 남은 거 조금 있으니 그것도 내어드리겠습니다.”
“그렇게 해 주면 정말 고맙지.”
잠시 기다리자 점소이가 음식을 가지고 돌아왔다. 표개는 냉큼 받아 국수부터 한 젓가락 후루룩 먹기 시작했다. 남는 거라고는 했지만, 한 접시 가득 준 걸 보니 신야 백성들의 인심이 좋다는 생각이 들었다. 만두도 한입 물자 뜨끈한 육즙이 입천장을 델 듯 왈칵 쏟아져 나왔다. 만두소도 다진 야채와 고기가 푸짐한 것이 숙수 솜씨가 좋다는 생각이 들었다.
간만에 여유를 즐기면서 차분하게 식사를 한 표개는 잠시 의자 등받이에 등을 기대면서 배를 쓰다듬었다.
끼익.
그때 객잔 문이 열리면서 일단의 남녀가 들어왔다. 처음에는 저마다 죽립이나 방립 등을 눌러쓰고 또 여성들은 면사로 얼굴을 가리고 있어서 알아보지 못했는데 자리를 잡고 앉으면서 머리에 쓴 것들을 벗은 모습을 보고 표개가 깜짝 놀랐다.
“어! 진도건? 천서은?”
그들은 바로 진도건 일행이었다. 표개도 그들을 간접적으로만 봐서 잘 몰랐지만, 다행히 인연이 깊은 딱 한 사람이 있으니 반갑게 인사했다.
“표개 어른!”
“현걸아! 너희를 여기서 볼 줄은 꿈에도 몰랐는데.”
뜻밖의 해후에 표개도 벌떡 일어나 최현걸과 얼싸 끌어안았다.
최현걸의 소개로 표개는 나머지 네 사람과도 인사를 나누었다. 그리고 마침 식사하기 위해 온 그들과 함께 동석하면서 그 면면을 살펴보았다.
가까이서 본 적은 없었지만, 그래도 각자의 인상을 느끼고 있었는데 검림에 갔다 온 전후로 묘한 차이가 느껴졌다. 아마 천무경이 안배한 효과를 본 모양인데 넘치는 재능들이 성장하는 기세가 어렴풋이 느껴질 정도였다.
무엇보다 눈길이 가는 것은 상투를 틀면서 붉은 머리가 많이 가려진 진도건의 모습도 놀랍지만, 어깨 위로 떨어지는 단발머리가 되어버린 천서은의 모습도 놀랍기 그지없었다. 전혀 예상할 수도 없는 모습 때문에 어안이 벙벙해지면서도 전혀 가려지지 않는 아름다운 미모에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허허! 대체 검림에서 무슨 일들이 있었기에 천 소저는 머리카락을 다 자르시고, 이 친구는 상투까지 틀어 머리카락 색을 가렸는가?”
“호호호! 제 머리카락은 요기에 있답니다.”
천서은이 웃으면서 진도건의 상투 튼 머리를 가리키니 표개는 단번에 상황을 이해할 수 있었다.
“하아, 정말 대단한 결단을 하셨군. 하지만, 소저의 아버지가 이 소식을 알면 무슨 표정을 지을지 궁금해지는구려.”
“흐음, 어떤 반응을 하실까요?”
“아마 이 친구를 두들겨 패려고 들지도 모르겠소.”
“까르르!”
표개가 진도건을 보며 대답하자 천서은이 재밌는지 웃음을 터뜨렸다. 진도건도 난감한 표정을 지으면서도 웃음을 잃지 않으니 표개가 보기에도 참 잘 어울리는 연인이다 싶었다.
표개는 영은성을 바라보았다. 그를 직접 살필 기회는 없었지만, 들려오는 정보로는 창천맹에서 구치상에게 수련을 받을 때 여러모로 애를 먹었다는 얘기를 들어 알고 있었다.
“영 도사는 검림에서의 짧은 시간이나마 보냈는데 어땠나? 강정학도 보았을 텐데.”
“제 재주가 미진하여 총수님의 마음에 들만한 수준이었는지는 모르겠습니다. 그래도 답답한 것은 많이 풀려서 조금 후련한 기분은 듭니다.”
“화산파의 기대를 한몸에 받고 있으니 분명 부담을 피할 수는 없을 텐데. 그래도 그리 얘기하는 걸 보니 조만간 경지에 오를 거 같은 느낌도 드는군.”
“검향이 대단한 거라면서요?”
천서은이 묻자 표개가 적잖이 놀랐다.
“검향? 정말 검향을 이루었나?”
“전…… 잘 모르겠습니다.”
영은성은 머리를 긁적였다. 하지만, 천서은이 고개를 냉큼 끄덕이면서 인정하라는 듯 영은성의 어깨를 툭툭 쳤다.
“영 도사, 겸손도 과하면 미덕이 될 수 없다고. 매화검법을 펼치면 울창한 송림에서도 분명 매화향이 코끝을 맴도는데 이게 검향이 아니고 뭐겠어?”
이미 오는 길에서 만난 소나무 숲에서 천서은의 재촉으로 영은성은 매화검법을 다시 펼쳐봤었다. 상대는 당연히 진도건이었고, 다시금 공력까지 끌어올려 가며 마음껏 검을 펼쳐내니 사방을 감싸던 짙은 솔향 속에서도 매화향은 은근히 구별되어 맡아졌었다.
“드디어 올바른 길을 가게 된 셈이구만. 화산파의 매화검법이 경지에 이르면 검향을 맡을 수 있다고 하면서 이를 마치 깨달음의 영역으로 묘사하곤 하나, 이는 냉정하게 자하신공이 매화검법과 제대로 이어지고 있다는 증거라고 보는 게 맞네. 물론 그 과정에 깨달음이 아예 필요 없다곤 할 수 없겠지만, ……어쨌든 이게 끝이 아니라 앞으로 도약할 발판을 디딘 셈이니 더 정진해야 할 게다.”
“저희 사문의 무공에 대해 잘 알고 계시는군요?”
“정보꾼이니까 그 수준에서 아는 것이지 뭐 있겠느냐? 화산파는 가까스로 맥을 이어온 만큼 제자들을 가르치는 데 있어서 난맥을 볼 수밖에 없지. 묵허진인도 물론 훌륭한 스승이나 난맥에 귀속될 수밖에 없어. 이럴 땐 제대로 진단을 해 주거나 새로운 관점을 제시할 제삼의 자극들이 필요하지. 자네는 옳은 길을 가고 있으니 믿음을 갖게나.”
“선배님의 고견에 감사할 따름입니다.”
영은성이 깊이 고개를 숙이면서 감사를 표하자 최현걸이 주먹으로 탁자를 두들겼다.
“표개 어른, 본방의 소개에게도 이런 조언 좀 해 주시오. 다른 사람들 먼저 신경 쓰지 마시고.”
표개는 피식 웃었다.
때마침 점소이들이 쟁반에 음식들을 가득 담아와서 탁자 위에 펼쳐놓기 시작했다. 표개가 그걸 보며 입을 열었다.
“넌 밥이나 든든하게 처먹어라. 근데 이렇게 다니다 구걸하는 법 새까맣게 잊겠다, 녀석아.”
“뭐……, 이참에 오의파(汚衣派) 때려치우고 정의파(淨衣派)가 되지요. 이제 다시 세를 키우고 있는 상황에서 정의파가 너무 없지 않습니까?”
“검림 가서 말솜씨만 늘었느냐?”
“하하하! 표개 어른도 제 타구봉 앞에서 복날 볼지도 모르십니다.”
“어쭈, 이 녀석 봐라?”
“하하하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