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칼의 귀신-178화 (178/432)

178화 - 제33장. 구룡문의 계획들 (6)

인적 드문 지점을 빠르게 이동한 후에 사람의 눈길이 제법 있는 곳부터는 천천히 호흡을 고르면서도 빠른 걸음으로 걸어갔다. 얼마간 걸어가자 구룡문 아홉 계파 가운데 북서쪽에 위치한 자신의 추응계파 담벼락이 보였다.

오른쪽으로 돌아가면 자신의 전각으로 돌아갈 수 있었지만, 그의 발걸음은 왼쪽으로 향했다. 긴 담벼락을 따라 걸어가자 멀리서부터 금벽계파의 담벼락이 눈에 들어왔다.

탁민효는 그 사이로 방향을 틀었다. 길게 이어진 담벼락 사이의 공간에는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았지만, 아홉 계파 모두 수장들은 사방을 두른 장벽의 중앙에 세워 놓은 전각들에 기거한다. 그래서 침입을 하려면 필연적으로 계파제자들의 공간을 거칠 수밖에 없었다.

이따금 순찰을 돌거나 흑사계파의 중궁으로 향할 일이 아니라면 사실상 이 길을 지날 일은 없다고 봐도 무방했다. 그렇기에 다시 추응계파와 금벽계파 담벼락 사이의 끄트머리에서 흑사계파 담벼락을 만나 방향을 틀었을 때, 반대편에서 뒷짐 진 유종화와 눈이 마주친 상황은 탁민효로서 당황할 수밖에 없는 일이었다.

저벅저벅.

중궁의 정문은 북문밖에 없었으니 탁민효는 어쩔 수 없이 유종화 쪽으로 갈 수밖에 없었다. 이미 방향을 튼 상황에서 다시 몸을 돌리는 일은 분명 어색하게 보일 수 있으니 그에게 다른 선택권은 없었다.

“중궁에 가시오?”

유종화가 씩 웃으며 물었다.

“그렇습니다. 후진에 적합한 진형을 상의드릴까 해서 가는 길입니다.”

“흐음, 그렇소?”

굳이 되물어오는 억양이 부담스럽게 느껴졌다.

유종화의 양염계파는 추응계파와 반대쪽은 남동쪽에 자리했기 때문에 유종화가 이 자리에 있는 건 자연스러운 일이긴 했다. 그러나 탁민효는 그도 질문을 던지면서 자연스럽게 넘겨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양염파 문내에 있으신 줄 알았는데 계수께선 어딜 다녀오시는 길입니까?”

“나 말이오? 허허! 내 손주 녀석이 성내 한 대장간에서 재밌는 명적(鳴鏑)을 개발했다고 알려 주기에 한 번 보러 나갔소.”

유종화는 뒷짐을 풀면서 왼손을 내밀었다. 그의 손에는 손바닥 길이보다 반 뼘 정도 긴 원통 같은 게 들려 있었는데 한쪽엔 십자 촉 사이로 구멍이 몇 개 뚫린 막대가 붙어 있는 화살촉이 꽂혀 있었다. 반대편에는 정(丁) 형태의 손잡이가 있어서 잡아당기기 좋게 생겼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게 명적입니까?”

“봉명적(鳳鳴鏑)이라고 하더이다.”

“거 이름 한 번 거창하군요. 어떻게 시연하는지 보고 싶은데.”

“딱 하나 만든 거를 사서 온 거라 이 한 발 값이 어마어마해서 말이오. 그냥 쏘기엔 아까워서 미안하오.”

“그렇습니까? 아쉽군요.”

얘기하면서 걷다 보니 어느덧 중궁 정문까지 이르렀다. 탁민효는 시답지 않은 이야기들만 나눈 것 같았지만, 자연스럽게 넘어가 헤어질 수 있게 돼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그럼 전 이만 들어가 보겠습니다.”

“그러시오. 후방 든든하게 지킬 수 있도록 진형과 전술 준비를 잘 해 주시구려. 하하하!”

유종화는 웃으면서 굳이 탁민효가 들어가는 걸 지켜보지 않고 양염계파 쪽으로 걸어갔다. 그리고 탁민효는 그런 그의 뒷모습을 보면서 떨떠름해졌다. 그가 남기고 간 말이 마치 비꼬는 것처럼 들렸기 때문이었다.

‘흥!’

탁민효는 속으로 코웃음 치며 중궁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곧장 금태하가 있는 내원으로 향했다.

금태하는 마침 내원에 가꿔진 봄꽃들을 앞에 의자에 두고 앉아 서책을 읽고 있었다. 그는 기척을 느끼고는 고개를 흘끔 돌려 탁민효의 모습을 보고는 다시 서책으로 시선을 돌렸다.

“무슨 일인가?”

“긴히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탁민효는 밖에서 보고 온 마교와 접촉하는 유종화의 모습을 설명하면서 그를 추궁할 필요가 있다고 설파하였다. 어떤 식으로든 배신할 가능성이 농후하다는 의견이었다. 하지만, 그 얘기를 들은 금태하는 의외의 반응을 보였다.

“크하하하하핫!”

앙천대소를 터뜨리는 금태하를 보고 탁민효는 오히려 당황하였다.

“문주님! 웃을 일이 아닙니다.”

“크흐흐! 탁 계수, 그냥 놔두고 자네 할 일이나 하게.”

“문주님께서 최강의 무공을 보유하고 계셔도 구룡문이 앞둔 건 문주의 단독 대결이 아니라 문파의 명운을 건 전쟁입니다. 이럴 때일수록 불확실함을 제거하는 것이 옳습니다.”

“자네가 제시하는 건 문파의 명운을 건 전쟁 앞에서 자기 살부터 깎자고 하는 것이네. 아니, 살이 아니라 썩은 뼈라고 해야 하나? 수술하면 회복 기간이 필요한 법이나 그럴 시간은 없지. 하지만, 전쟁의 승리와 함께 이를 한꺼번에 도려낸다면 예후도 훌륭하지 않겠느냐?”

탁민효의 목소리는 꽤 절박했지만, 금태하의 태도는 여유로웠다.

이런 반응이 나왔다는 것은 유종화를 포함한 반금파의 이런 움직임을 상정하고 있다는 말과도 같았다. 그러나 탁민효의 생각엔 무대응이 결코 능사는 아니었다.

탁민효가 무거운 표정으로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서 있자 금태하가 다시 껄껄 웃으며 입을 열었다.

“이봐 탁 계수, 자네는 화경의 고수가 갖는 힘이 어느 정도 수준이라고 생각하나?”

“흐음! 글쎄 잘 모르겠습니다. 상대적인 비교라면 강기를 다루는 절정고수 열 명은 능히 감당할 수 있다는 소리도 있지만, 사람에 따라서는 그 몇 배도 가능하다고 하더군요. 물론 문주님께서는 당연히 후자에 속한다고 생각하지만…….”

탁민효의 조심스러운 대답에 금태하가 혀를 끌끌 찼다.

“쯧쯧……! 사람이 어찌 그리 소심해서야 되겠나? 자네 말대로 같은 화경의 고수라도 힘은 천차만별이라지만, 무림 역사 속에서 화경에 오른 자들 가운데 정말 소수는 예측 가능한 화경의 경지로는 설명할 수 없는 힘을 발휘할 수 있다네.”

“……무슨 말씀이신지?”

“수백 년 전 숭산에 오른 달마선승(達磨禪僧)이나 옛 팔선(八仙)들, 특히 여동빈같은 검선도 가진 능력이 신묘하여 혜량하기 어려웠다고 하지. 그 뒤로 무공은 계속 발전하여 초자연적 권능에 접근하게 되었음에도 그것조차 강호의 인식도 높아짐에 따라 평범해졌네. 그러나 그 옛날 달마와 여동빈이 특출났듯 작금의 시대에 화경을 이룬 자들도 특출난 자들이 있기 마련이야. 탁 계수, 맞춰보게. 이 중원과 마교가 있는 서역(西域)까지 화경에 이른 자가 몇이나 될까?”

느닷없는 질문에 탁민효의 미간이 좁혀졌다.

“중원에는 천하오절과 소요자, 당혁수가 화경의 고수라고 알려졌습니다. 마교에도 구주마종의 마두들이 그러할 것이고, 교주도 그렇지 않겠습니까? 그럼…… 총 17명이 아닙니까?”

“아니, 틀렸네.”

“이 말고 또 있습니까? …아! 주백자도 있겠군요. 마교에 태상교주의 존재도 점쳐지고 있으니 총 19명입니다.”

“그것도 틀렸네. 나도 짐작이긴 하지만, 아마 그것보다 배 이상은 더 존재할 걸세.”

“하하… 하……! 그렇게나 많을 수 있습니까?”

“두 배가 뭔가? 세 배도 가능할 수 있네. 화경이라는 것은 본래 깨달음의 수준을 의미하는 것이었지만, 이는 과거의 기준일 뿐이지 작금에 이르러서는 사실상 무력을 보고 얘기하는 경우도 많으니 이 기준의 범위는 아주 넓어졌다고 할 수 있네. 즉, 다시 말하면 강호에 드러나지 않았을 뿐이지 자신의 무력 자체는 조금 낮을 수는 있으나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깨달음을 얻어 화경에 이른 자는 더 있을 수 있다는 얘기네.”

“……화경과 무력은 비례한 것 아닙니까?”

“그렇지 않을 수도 있는 것이 깨달음을 기준으로 한 화경이라네. 깨달음을 얻었다고 해서 어느 순간 내공이 일갑자가 늘어나고, 내공의 순도가 높아지고 하는 게 아니야. 깨달음이라는 것도 사람마다, 문파마다, 종교마다 천양지차라 본래 그리 단순하게 획일화하여 평가할 일이 아닐세.”

이해하기 어려웠는지 탁민효가 인상을 쓰면서 고개를 도리질 쳤다.

기실 금태하가 설명하는 것들은 그와는 상관없는 종류의 것이었다. 그러나 자신이 여기에 온 목적과 결부되어 있다는 느낌은 아직 붙잡고 있었기에 금태하가 하고 싶어 하는 말이 무엇인지 파악하려고 애를 썼다.

“그럼…… 이걸 설명하시는 진의는 무엇입니까?”

“끌끌끌! 요점은 두 가지네. 첫 번째는 이 나를 경계하는 저 유종화를 위시한 다섯 마리 돼지들은 그런 드러나지 않은 화경의 고수들 수준도 되지 않는, 깜냥도 안 되는 것들이라는 걸세. 그리고 내가 황사열을 붙들고 있는 것은 바로 그럴 깜냥이 될만한 녀석이기 때문이라는 것이고.”

“황 계수가 화경에 이르렀다는 말씀입니까?”

탁민효가 깜짝 놀라 물었다. 그의 얼굴엔 기뻐하는 기색이 역력했지만, 금태하는 아직 만족스러운 수준으로 여기지 않고 있어서 함께 기뻐하진 않았다. 그러나 희미한 미소가 입가에 걸린 것을 볼 수는 있었다.

“글쎄다. 본인이 얼마나 자각하고 있는지는 모르겠으나 녀석이 내 앞에서 시연하는 걸 보고 있으면 분명 그 경계에 와있음은 틀림없는 것 같더구나. 내가 제자 선택을 잘한 게지.”

“그게 사실이라면 이거 경축할만한 일이 아닙니까?”

“호들갑 떨지 말게. 녀석은 이미 지난 3년간 잘 집중해서 갈무리해왔어. 이제 그걸 터뜨릴 수 있을 만한 자극이 필요한 때야.”

“설마 그 자극을 광혈종과 싸움으로 치르실 생각입니까?”

금태하는 차분히 고개를 끄덕였다. 이때 그의 표정은 어느 때보다 신중한 기색을 보이는 중이었다.

“자네도 나와 같은 시대를 살았으니 내가 어떻게 이 자리에 올라왔는지 잘 알게야. 난 그동안 한 번도 누구 앞에서 이를 인정한 적이 없었으나 산서의 천무경과 안휘의 강정학 이 두 괴물은 언제나 나보다 앞서간 자들이네. 특히 천무경은 나보다 어린 데도 말이야. 아아, 자존심이 제대로 상할 만한 일이었지. 놈은 나보다 먼저 화경에 이르렀고 훨씬 강해졌네. 절망스러웠지만, 무너질 순 없었지. 절치부심하며 단련하였고 내 재능이 헛된 것이 아님을 증명하면서 2년 뒤에 나도 같은 위치에 오를 수 있었네.”

“어떤 식으로 각고의 노력을 거쳐왔는지 잘 알고 있습니다.”

“그래. 정말 뼈를 깎는 고통을 견디면서 두 괴물을 쫓기 위해 노력했지. 다시 말하면 내 노력도 중요했지만, 천무경이란 존재가 날 강하게 자극하고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기도 했네. 황사열도 비무제를 가져오지 못한 상황에서 자신의 부친이 광혈신마에게 죽었으니 여간 자존심이 상한 게 아니었어. 녀석은 3년을 허투루 보내지 않았고, 언제고 터뜨릴 준비가 되어 있는 화약처럼 불씨를 기다리고 있네. 이게 내가 바로 구룡문의 힘만으로 광혈신마와 그 무리를 척결하려 하는 이유일세. 탁 계수, 이건 내 지나친 욕심인가?”

금태하의 마지막 물음에서 탁민효는 그가 구룡문만으로 이 싸움을 치르려는 것이 어쩌면 무리한 선택일 지도 모른다는 인식을 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만 그런데도 강력하게 추진하는 것은 충분히 극복할 수 있다는 자신감도 내재하고 있을 것이기에 이것이 표출되지 않은 것 같았다.

일순 탁민효의 머릿속에는 백제성에서 닥쳐올 고난을 피할 수 없다는 미래가 예시처럼 스쳐 지나갔다.

불안감이 커지면서도 금태하의 저 패기만만한 표정과 눈빛, 웃음을 보고 있으면 지금까지 견지해온 조언자의 입장보다 무인으로서의 자각이 앞서 다가왔다.

“지나친 욕심이십니다.”

탁민효는 목소리에 힘을 주어 대답했다. 그리고 그의 말은 잠깐의 심호흡 후에 다시 이어졌다.

“…후우! 하지만, 반드시 흑사왕이 구룡의 영광을 돌려 놓을 거라는 걸 믿어 의심치도 않습니다.”

금태하는 후련한 표정으로 호탕하게 웃음을 터뜨렸다. 그리고는 탁민효의 어깨를 치며 독려하였다.

“크하하하하! 좋아! 역시 탁 계수는 내 의견을 언제나 걸고넘어지지만, 그래도 내가 싫어하지 않는 건 바로 이 때문이지. 아아! 아까 말했던 요점 두 가지 중에 남은 하나를 얘기 안 했군.”

“그게 무엇입니까?”

“화경의 고수들은 생각보다 많음에도 천하오절을 특별히 논하는 건, 그리고 그중 삼강(三强)으로써 나를 포함해 얘기하는 건 정말 천하를 발아래 내려다볼 정도로 압도적인 무력을 갖추고 있다는 얘기라네. 크하하하핫!”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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