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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의 귀신-177화 (177/432)

177화 - 제33장. 구룡문의 계획들 (5)

반금파가 저들만의 흉계를 꾸미고 있는 사이, 탁민효는 흑사전에서 나오고 황사열, 장이풍과도 헤어지자마자 바로 구룡문을 나섰다.

‘유연한 생각, 판단의 일임…….’

밖으로 나옴으로써 금태하를 마주 보던 부담감이 사라지자 그의 생각은 더 확고해졌다.

탁민효는 조용히 골목으로 들어갔다. 가옥 뒤편 빨랫줄에 걸린 허름한 장포 자락을 익숙한 손짓으로 걷어냈다. 그리곤 몸에 두르고 장포에 달린 모자까지 쓰고는 골목 깊숙이 들어갔다.

걸음걸이가 조용하니 그를 관심 있게 지켜보는 사람은 없었다.

평민들 사이를 지나쳐 그늘을 통해 골목들을 지나쳐가니 어느새 응성 외곽 지역에 이르렀다. 그렇게 한동안 걸어 어느덧 도달한 곳은 무너진 현판으로써 더는 운영하지 않는다는 걸 보여 주고 있는 응명객잔이었다.

끼익.

문을 열고 들어가니 당연히 안에 아무도 없었지만, 그는 어둠이 드리워진 그늘진 한구석으로 의자를 끌어다 놓고 앉아서 누군가를 기다리기 시작했다.

탁민효는 시야가 넓은 사람이었다.

무림의 정세에 관심이 많았으며 대외적인 일들과의 관계 속에서 구룡문이 어떤 태세를 취해야 할지에 대해 걱정을 품고 있는 사람이었다.

구룡문은 금태하의 힘으로 성장하여 사파삼강의 지위까지 얻어냈다. 금태하가 사패련주가 되면서 그 위치는 더욱 공고해졌다. 하지만, 금태하가 사패련에 머물면서 구룡문에 상주하지 않게 되자 숨죽이고 있던 욕심의 눈빛이 장막을 걷어내고 조금씩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탁민효가 판단하기로 홍천환 사태와 광혈종에 의한 참사가 벌어졌을 때, 금태하는 사패련을 내버려 두고 홀로 돌아왔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혼란과 피해의식, 절망이 가득한 구룡문의 제자들을 독려하고 다시 바닥부터 끌어올린다는 생각으로 회복에 집중해야만 했다.

만약 그러했다면 금태하라는 절대적인 군주의 이름 아래에서 다른 계파 계수들의 욕심들이 억눌러졌을 것이고 모두 일사불란하게 움직였을지도 몰랐다. 광혈종에 의한 참사는 말 그대로 ‘사고’ 또는 ‘천재지변’과 같았기 때문에 누구도 금태하 탓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하지만, 금태하는 사패련의 무력집단들을 구룡문으로 끌고 들어왔다. 각자의 사문에 소속감이 약한 자들은 이참에 금태하에 줄을 대고 구룡문의 무공을 배우고 싶다는 욕심으로 이 행동에 참여한 것이니 이들이 구룡문에서 갖는 소속감도 강하다고 볼 수 없었다.

적성에 맞게 각 계파로 배치되었으나 그곳에서 기존 제자들과 조화를 이루며 갈아가는 무인들은 별로 없었다. 자연스럽게 대부분 계파마다 둘로 파벌이 형성되었으며 현재의 반금파가 특히 심했다. 동시에 졸지에 유망한 제자들을 빼앗긴 문파들은 구룡문을 비난하면서 그 위상이 추락했다.

금태하는 손쉽게 구룡문의 세력을 복구하였지만, 그것은 겉으로 보이는 모습에 불과할 뿐 속은 곪아 있다는 걸 탁민효는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문주님도 모를 리가 없다. 광혈신마를 직접 끝내야 만이 반금파의 불만을 다시 억누를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거겠지.’

탁민효는 금태하와 깊은 대화를 나누진 못했지만, 그의 심리를 조금은 예상하였다. 그의 워낙 거침없는 성정 때문에 물불 가리지 않는 사람이 아닌가 하는 오해를 받기도 하지만, 탁민효의 시각에서 그는 워낙 냉철한 사람이기에 자신이 실수했음을 인지하지 못할 리가 없었다.

그런 차원에서 광혈종과 광혈신마를 직접 공략하려 하는 것은 흑사왕이 아직 건재하기 때문에 구룡문은 다시 그를 믿고 뭉쳐야 한다는 목소리를 내려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이는 탁민효도 일견 동의하는 부분이기에 더더욱 불확실함과 불리할 수 있는 요소를 제거해야 한다고 믿었다.

“이쯤이면 올 때가 된 거 같은데…….”

이런저런 생각을 하다 보니 시간이 꽤 흘렀는데 벌써 와야 할 사람이 오지 않자 탁민효는 조금 불안해졌다. 구룡문 내부 사정이 워낙 불안하기 때문에 가까운 외부에서 이런 상황이 발생하면 꺼림칙할 수밖에 없다.

탁민효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밖으로 나가기 위해 막 발을 떼는 순간, 밖에서 인기척이 들려왔다.

그 인기척은 한 사람의 것이었고 잠깐 긴장했으나 익숙한 걸음 소리에 조금 안심했다.

끼익.

문이 열리면서 한 사람이 들어왔다.

그는 바로 성종오였는데 다 들어오지 않고 몸을 반만 걸친 채 알 수 없는 태도로 탁민효를 바라보고 있었다.

“왜 그러는가?”

그 태도는 명백한 경계심이었다.

그를 통해서 창천맹과 줄곧 소통해 온 탁민효였기에 이 상황이 쉽게 이해되지 않았다.

“……혹시 반금파에 붙으셨습니까?”

“그게 무슨 소리인가? 무슨 일 있었는가?”

성종오는 경계심 가득한 눈으로 탁민효를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줄곧 구룡문을 관찰해 왔기 때문에 두 개의 파벌로 갈라져 대립각이 세워진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창천맹으로서는 전력에 큰 보탬이 될 수 있는 금태하가 구룡문을 지휘하길 원하기 때문에 친금파인 탁민효와 접촉을 하는 것이었다.

탁민효는 고개를 저었다.

“그렇게 어정쩡하게 찔러만 봐서는 자네도 알 수 있는 게 없을 걸세. 이리 와서 무슨 일 있었는지 얘기해 보게.”

탁민효는 먼저 자신이 앉았던 의자를 탁자로 끌어다가 그 위에 앉았다. 그 모습에 성종오는 엉거주춤한 자세로 머뭇거리다가 탁민효가 다시 손짓하자 그제야 맞은 편에 앉았다.

“말해보게.”

“…어제 유종화가 여길 알고 찾아왔습니다. 그래서 은거지를 옮기긴 했습니다만, 탁 계수는 어떤 입장인지 확인해 보려고 온 것입니다.”

“유종화가?”

“그렇습니다.”

탁민효는 왜 성종오가 자신을 경계했는지 이해할 것 같았다.

주로 외곽 지역을 돌긴 하지만, 하오문과 개방 그리고 탁민효의 접선지는 추적을 대비하여 주기적으로 바뀌어왔다. 응명객잔으로 바뀐 건 기실 며칠 되지 않았는데 유종화 계수가 어떻게 알았는지 이곳에 나타났으니 같은 구룡문인 탁민효를 의심하게 된 건 어쩔 수 없는 노릇이었다.

“난 금 문주와 황 계수가 여전히 구룡문을 이끌어주길 바라는 사람일세. 내 입장은 그대로이니 걱정하지 말게나.”

“그렇습니까?”

“그래. 근데 자네는 괜찮은가? 유종화도 꽤 잔인한 인간인데.”

“저도 그자의 성정을 알고 있어서 솔직히 두렵긴 했습니다. 하지만, 오늘 아침에 곰곰이 생각해 보니 그들도 창천맹의 신경을 건드리고 싶진 않은 모양인 것 같습니다. 더군다나 저희 하오문이 보잘것없긴 하지만, 천무방의 오랜 우방이고 창천맹주와 천무방주가 같은 사람이니 조심한 것이겠지요.”

“맞는 해석인 듯하네. 반금파가 구룡문주의 권력을 손에 쥐고 싶어 하는 만큼 금 문주가 눈엣가시인 것과 동시에 창천맹과 지나치게 가까우면 간섭받을 수도 있다는 우려도 하겠지. 유종화는 뭘 묻던가?”

“묻기보다는 죽기 싫으면 아는 거 다 토해내라더군요.”

“허허…….”

“사실 저희도 판세를 읽을 만한 맥락을 알고 있는 것이기 때문에 유 계수도 별로 만족스러워하는 눈치는 아니었습니다. ……아, 하나 반응을 보인 게 있긴 합니다.”

“그게 뭔가?”

“저희가 파악하고 있는 이곳 응성 내 마교 측 끄나풀의 은거지입니다.”

“마교 끄나풀? 그것에 왜 반응하지?”

“모르겠습니다.”

성종오는 자신의 눈에 유종화의 반응이 포착되었기에 기억하여 얘기해 주는 것이었다. 하지만, 탁민효는 그 사실이 심상치 않다는 것을 바로 감지했다.

‘……이건!’

탁민효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앉았던 의자는 그 때문에 뒤로 넘어져 버렸다.

갑작스러운 행동에 성종오가 놀란 눈으로 그를 쳐다보았다.

“왜 그러십니까?”

“혹시 그 은거지 어딘지 내게도 알려 줄 수 있는가?”

“어려울 건 없지요. 거기가 어디냐면…….”

“같이 가세. 눈에 띄지 않는 먼 곳에서 살펴볼 수 있는 위치면 좋겠네만.”

성종오는 고개를 끄덕였다.

두 사람은 바로 객잔을 빠져나가 성벽 가까이 외곽을 타고 북문으로 향했다. 북문 가까이엔 성벽으로 오를 수 있는 계단이 있었다. 관의 기강은 해이해져 있어서 병사들은 대부분은 졸고 있었고 그 수가 많지도 않았다. 두 사람은 조용한 걸음으로 그들 사이를 지나쳐 성문 간 중간에 있는 첨탑의 지붕 위로 올라갔다.

“이리로 오십시오.”

두 사람은 지붕 뒤에 숨어 고개만 빼꼼 내민 채 성내 시가지를 살펴보았다. 이곳은 빈민가라 폐가가 많은 서쪽과는 다르게 돌아다니는 사람들이 제법 있긴 했지만, 대부분 헐벗고 굶주린 자들이었다.

“저쪽의 붉은 기와집이 보이십니까? 모퉁이가 부서져 지붕이 뚫린…….”

“어디…… 아, 보이네.”

“저곳입니다.”

“흐음…….”

탁민효는 신중한 표정으로 성종오가 알려준 허름한 붉은 기와의 가옥을 살펴보았다.

“근데 무엇이 그리 염려스러우십니까?”

“마교와 결탁 가능성이 있을 것 같아서 말일세.”

“예?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광혈마종은 구룡문의 철천지원수 아닙니까? 너무 나간 것 아닙니까?”

“오늘 구룡총회가 있었네. 구룡문은 사흘 뒤에 전력을 이끌고 출발하여 백제성에 있는 광혈종을 치러 갈 것이네. 그리고 금 문주와 반금파 계수들이 크게 의견 충돌이 있었다네. 반금파에서 초기 계획을 세운 것이 수포가 된 모양인데, 만약 그들이 포기하지 않았다면 최악의 수까지 강구할 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어서 말이야.”

“미친! 아무리 권력을 쥐고 싶어도 어떻게 문파의 원수와…….”

“9개 문파의 연합체가 구룡문의 원천이었으니 언젠가 찾아올 분란이었지. 금 문주가 구룡문의 지위를 격상시켜 놓았으니 이권도 자연히 커지지 않았겠나? 탐날 수밖에 없는 게지.”

“그럼 오늘 하실 말씀은 혹시 창천단이 움직이길 바라셔서…….”

“잠깐.”

탁민효는 성종오의 말을 멈추게 하며 더욱 몸을 낮췄다. 덩달아 성종오도 몸을 낮추는데 탁민효가 붉은 기와집 쪽을 보며 놀라 입을 뗐다.

“유종화 이 자가……!”

기와집에서 사람이 나오고 있었는데 모두 두 사람으로 한 사람은 유화종이고 한 사람은 모르는 사람이었다. 그러나 이어진 성종오의 말에 상황이 단번에 이해됐다.

“같이 나온 놈은 마교인이 맞습니다.”

두 사람은 가옥에서 나와 웃으면서 서로의 손을 맞잡았다. 그리고 혹여 모를 시선들을 피하려는지 장포를 머리에 뒤집어썼다. 두 사람이 알 수 없는 미소를 지으며 서로를 마주 보는 모습에 탁민효는 정말 유종화가 마교와의 결탁을 시도했음을 확신할 수 있었다.

그 내용이 무엇인지 알 도리는 없어도 분명 금태하나 친금파에게 불리하게 작용할 것임은 틀림없었다.

‘유종화……! 대체 어디까지 선을 넘을 셈이냐?’

탁민효는 이를 빠득 갈았다.

두 사람은 첨탑 지붕에서 내려와 성벽 아래로 뛰어내렸다. 성종오의 경공 실력이 성벽을 타기에 부족했지만, 탁민효가 붙잡아 주면서 안전하게 착지할 수 있었다.

“전서구를 보내지.”

“뭐라고 보낼까요?”

“구룡문은 사흘 뒤 이릉에서 군선을 타고 장강을 거슬러 올라가 백제성을 칠 것이네. 이릉까지는 속도를 조절하겠지만, 아마 군선을 타고 가면 이튿날에는 백제성에 도착하고도 남을 걸세.”

“여전히 창천단을 기다렸다가 출발할 수는 없는 겁니까?”

“문주께서 관심이 없으니.”

“창천맹도 혹시 몰라서 구 단주를 포함한 창천단 주력을 남양군(南陽郡)으로 내려보내는 중으로 알고 있습니다. 소식이 빨리 닿아서 전력으로 남하한다면 백제성에 때맞춰 도착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군선으로 장강 상류로 거슬러 올라가는 걸세. 상류의 물살이 거세 중간에 육로로 이동할 수도 있겠지만, 중류의 무산협까지는 빠르게 진출할 테니 그리 쉽게 볼 일이 아닐 게야. 아무튼, 부탁하네, 나는 금 문주를 서둘러 뵈야겠네.”

“알겠습니다.”

탁민효와 성종오는 북문으로 돌아가서 외곽 골목에서 서로 갈라졌다.

얼마 안 있어서 발목에 서신을 묶은 전서구 한 마리가 하늘을 날아올랐다. 그 시점에 탁민효는 현 상황의 심각성을 어떻게 풀어야 할지 골머리를 싸매면서 골목을 지나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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